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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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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에 해당되는 글 2

  1. 2008.12.29 [사라져가는 것들 91] 주막15
  2. 2008.10.27 [사라져가는 것들 82] 마장터12
2008. 12. 29. 15:4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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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 주막은 ‘적(敵)’과 동일한 의미였던 것 같다. 스스로의 입에 주막이란 말을 올린 적은 없지만, 그 단어를 들을 때의 본능적 거부감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훗날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들을 조합해보면 고개가 끄떡거려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남편, 즉 내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인생의 황금기가 됐어야 할 시기를 홀어미와 다름없이 보냈다. 비록 일꾼의 손을 빌리긴 했지만 혼자 농사채를 관리하고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할아버지는, 그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진사‧참봉벼슬 정도를 자랑하는 시골의 토호였겠지만)의 아들이었다. 그러니 집에 있어도 손에 흙을 묻힐 턱은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집안을 이끌어갈 어른의 역할까지 필요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처자식을 떠나 반도의 북쪽이나 저 멀리 만주 땅을 유랑했다.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을 유린하던 시기였다. 할아버지가 집을 떠난 게 일제의 압제가 싫어서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니 비밀리에 독립운동이라도 했는지 여부는 더욱 확실치 않다. 집안 그 누구도 그 얘기를 자랑으로 삼지 않는 걸 보면, 그리고 뒷날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런 목적과는 좀 동떨어진 게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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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한 촌부가 길을 떠나게 된 동기나 목적이 중요한 건 아니다. 이야기의 본질은 ‘할머니가 왜 주막에 포원을 졌나’에 있을 뿐이니까. 문제는 할아버지가 길을 떠날 때 혼자가 아니었다는데 있다. ‘길을 떠날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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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말하는 건 돌아올 때는 혼자였다는
주장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길에서 부릴 아랫사람을 대동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곁엔 있었던 건 여자였다. 그리고 그 여자가 할아버지의 길동무가 되기 전 신분은 건넛마을 주막집의 주모였다. 할머니와 주막은 그렇게 간접적인 관계밖에 형성하지 못했다. 명색이 반가의 아낙이 주막집 여자를 만날 일도 없었거니와, 성품으로 볼 때 할아버지와 관련된 소문을 들었다 해도 찾아가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주막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못처럼 박고 살았다. 아픔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가슴에 묻고 사는 건 악다구니 치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나라가 해방되고 남북으로 쪼개진 뒤, 빈털터리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객지에서 얻어온 병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세상을 달리했다. 비슷한 시기에 마을에서 주막은 사라졌다. 그 마을뿐 아니라 대부분의 동리에서 주기(酒旗)가 내려졌다. 막걸리를 파는 집이나 구멍가게들이 지나는 길손들에게 잔술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미 전통적 주막의 모습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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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는 고통의 근원이 되었지만, 주막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사막을 건너는 나그네에게 오아시스가 그러하듯, 주막 역시 길손들의 허기와 갈증을 해결해줬다. 그래서 주막이라는 단어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가 지닌 낭만(실상이야 어떻든 간에)이나 고독 같은 요소를 슬그머니 공유하기도 했다. 나그네들은 탁주 한 사발로 마른 목을 축이고 국밥으로 고픈 배를 달랬다. 강나루나 큰 고개 아래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었다. 뗏목을 타고 수 백리를 가야하는 물길 곳곳에도 주막은 있었다.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든 두 다리를 밑천 삼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든 주막에서 먹고 묵었다. 주막은 임진왜란 이후에 관(官)에서 설치한 원(院)이 쇠퇴하고 민간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이들을 위한 주점‧주막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도시에서는 객주나·여각(旅閣)이, 시골에서는 주막이 여인숙의 구실을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10∼20리 사이에 한 곳 이상의 주막이 있었고 특히 장이 열리는 곳이나 역(驛)이 있는 곳, 나루터, 광산촌 등에 발달했다.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사먹으면 보통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았다. 한 두 칸의 온돌방에서 10여 명이 같이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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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아직도 주막이 남아있을까? 그 흔적을 찾아 경북 예천에 도착한 건, 함박눈 대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겨울 아침이었다. 예천에는 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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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의 ‘마지막 주막’이라 불리
는 삼강주막이 있다. 삼강(三江)은 회룡포를 돌아 나온 내성천과 문경에서 발원한 금천이 예천군 풍양면 삼강나루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00년 전후에 세워졌다는 삼강주막은 삼강나루를 거쳐 가는 길손과 낙동강을 타고 오르내리는 소금 배, 보부상들이 먹고 자는 곳이었다. 삼강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새재를 넘기 위해선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만 했다. 그러니 주막은 늘 문전성시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려했던 날은 가고 지금은 전설만 남아있다.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인이자 이 땅의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연 할머니는 2005년 89세로 타계했다. 유 할머니는 열여섯 살에 시집와 반세기 넘게 주막을 지켰다고 한다. 삼강주막은 유 할머니가 떠난 뒤 오랫동안 방치돼 폐가처럼 퇴락했었는데, 경상북도가 ‘관광 상품’으로 복원했다. 새마을운동 때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던 걸 다시 초가로 바꾸고 깔끔하게 수리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최근에는 바깥에 주막 형태의 집을 더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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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안까지 들어가 옛사람의 자취를 흘끔거려본다. 100년의 세월이 남긴 주름살은 아직 곳곳에 남아있지만 비교적 말끔하게 단장돼 있다. 역사를 걷어내고 시대를 입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주막의 규모는 ‘손바닥만 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작다. 조금 큰 방 하나에 작은 방 하나, 부엌과 네댓이 앉기에도 좁아 보이는 마루가 전부다. 그리고 역시 손바닥만 한 장독대에 항아리와 독 서너 개가 겨울비 아래 옹송그리고 있다. 뒤편에 싸리를 엮어 두른 뒷간까지 돌아보고 나면 집 구경은 끝이다. 벽에 붙어있는 메뉴를 보니 주막으로서 본연의 역할도 복원한 것 같다. 주인으로 보이는 바깥노인에게 물으니 밥은 없고 막걸리와 전‧도토리묵‧두부 같은 간단한 안주를 판단다. 뜨내기가 주막에 와서 막걸리 한 잔 얻어먹으면 됐지 무얼 더 바라랴. 막걸리와 두부를 주문하니 춥다고 방으로 들어가란다. 방은 서넛이 앉으면 꽉 찰만큼 좁다. 조금 뒤 노인이 쟁반에 놓인 음식을 들이민다. 막걸리 반 되, 생두부, 김치, 간장이 전부인 조촐한 상이다. 주모가 떠난 자리를 주부(酒父 혹은 酒夫)가 메운 것인가. 음식은 보기보다 맛이 괜찮다. 술맛도 그럴 듯하지만 혼자 비우는 술이 그리 입에 붙을 리 없다. 게다가 운전까지 해야 하는 판이니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나오는 수밖에. 노인을 찾아 몇 가지 묻지만 의외로 말을 아낀다. "예서 사십니까?“ ”예“ ”혼자 사세요?“ ”예“ ”주모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글쎄… 한 오년 됐나….“ 마침 손님 몇이 들이차는 바람에 대화는 거기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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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차피 한번 오면 떠나는 게 사람살이거늘, 더 이상 물을 것도 없다. 다시 둑에 올라 삼강이 만난다는 곳에 시선을 둔다. 사람은 바람 따라 갔어도 강물은 여전히 유장하게 흐른다. 이 물길로 소금배가 지나고 이 길로는 숱한 사람들이 지났겠지. 그들이 남긴 사연은 또 얼마나 많을까. 눈앞에 강을 가로지르는 삼강교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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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도구들은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대신 반드시 무언가 하나씩 가져간다. 지난 2004년 이 다리가 완공되면서 강을 건너 주던 뱃사공이 떠나갔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유옥연 할머니도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세월은 지우개처럼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지워놨지만 머릿속에는 옛 풍경들이 뭉게뭉게 형상화된다. 둑에서 내려오다 집 뒤에서 주막을 설명하는 입간판을 만난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134호’라는 문구 아래 역사가 적혀 있다. ‘
삼강나루의 나들이객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론 시인 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된…’ 이제 와서 설명이 화려하면 무엇 하랴. 집도 옛날의 그 집이 아니고 주막을 지키던 이도 강을 건넌지 오랜 것을. 500년 가까운 세월 한 자리에 서서 세상 돌아가는 걸 지켜보았을 회화나무에 기대어 세월의 무상함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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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0. 27. 10:5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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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은 큰 산이다. 속초시와 양양군·인제군·고성군에 걸쳐 치마폭을 펼치고 있다. 그 너른 치마폭에는 온갖 것들을 품고 있다. 사람과 짐승과 나무, 바위, 바람…. 그리고 그 바람이 나르는 갖가지 이야기까지. 이야기는 누군가의 손으로 기록이 되어 후세에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 곳 저 곳 떠돌다 어느 골짜기에 묻히기도 한다. 특히, 풀처럼 흔들리다 떠나간 민초들의 이야기는 늘 불임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기록이라는 자식을 잉태하지 못한다. 결국 기억하고 구전(口傳)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뜨면 억새처럼 홀로 서걱거리다 스러져간다. 이 나라 최고의 오지 중 하나인 마장(馬場)터가 그렇다. 역사에 기록 한 줄 못 남기고 입을 통해서만 전해지다가 흔적을 조금씩 지워나가고 있다. 그 빈자리엔 바람과 새소리가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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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터.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로 넘어가는 길, 샛령(641m)에 있었던 산중 마을의 이름이다. 샛령이 시작되는 용대3리는 미시령과 진부령의 갈림길에서 미시령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만나는 동네다. 박달나무쉼터라는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부터 길이 시작된다. 보통 대간령(大間嶺),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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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으로 표기되지만 이곳 사람들은 샛령으로 부른다. 이 고개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진부령과 미시령보다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인제에서 고성으로 넘어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70년대 진부령과 미시령이 포장되면서 잊혀져가는 길이 되었다. 박달나무쉼터를 끼고 조금 가면 수정 같은 물이 흐르는 내가 나오고 자유분방하게 배열된 돌무더기를 의지해서 내를 건너면 군훈련장이 있다. 그 옆길을 끼고 돌면 샛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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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된다. 비록 흐릿하지만, 길을 한번 잡으면 잃을 염려가 없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람은 소풍을 가는 셈 치고 올라가면 된다. 옛길은, 이제 들을 사람이 없는 옛이야기를 베개 삼아 숲 사이로 게으르게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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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산이 금지된 지역이라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부드럽고 원만한 길이 오래된 넥타이처럼 구불구불 이어진다. 잠시 한눈을 팔다, 길을 잃었나 싶어 허둥거릴 무렵이면 금세 눈앞에서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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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내를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교대로 끼고 이어진다. 숲은 아름답다. 나뭇잎들이 손을 흔들고, 그 사이를 다람쥐가 곡예 하듯 오간다. 길가에 야생화들이 도열해 있다. 도시는 아직 여름의 화장을 지우지 못했는데 숲은 벌써 가을을 품고 있다. 나무들은 옷 갈아입을 준비에 분주하다. 어차피 오라는 이 가라는 이 없는 산행, 천천히 걷는다. 개울의 유혹에 못 이겨 결국 주저앉는다. 계곡은 푸른 이끼의 세상이다. 이끼도 군집을 이루면 저렇게 장엄한 것을. 거울처럼 맑은 냇물 안에 나무와 새와 바람이 들어있다. 개구리 한 마리가 움찔도 않고 틈입자를 노려본다. 나는 이 숲에서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가. 이 숲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이들이다. 자주 잊어버릴 뿐…. 걷다가 쉬다가 하늘 한번 바라보다, 40분쯤 걸었을까. 지금까지와는 달리 경사가 급해진다. 숨이 턱에 닿을만하니 고갯마루가 나타난다. 작은샛령(소간령)이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마장터가 시작된다. 갑자기 숲의 풍경이 달라진다. 하늘을 찌를 듯한 낙엽송(落葉松=일본잎갈나무)이 빽빽하게 키를 자랑한다. 난데없이 나타난 낙엽송 은 1970년대 초반 화전민 정리 사업을 한다고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나무가 살던 곳에 사람이 살더니, 사람이 살던 곳에 나무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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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연은 아랑곳 없이 
낙엽송 샛길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향기롭다. 한참을 내려가니 개활지(開豁地)가 펼쳐진다. 깊은 산 속에 이렇게 넓은 곳을 마련해둔 건 누굴까. 청송 주왕산의 내원마을에서 토해냈던 것과 똑같은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여름을 나느라 지친 잡초 사이로 ‘마장터’라고 쓴 안내판이 숨어있다. 순간적으로 길을 잃어버린다. 아니, 스스로 길을 버리고 억새숲을 헤매는 선택을 한다. 이리 저리 걷다보니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기대했던 귀틀집은 아니다. 별장(?)으로 지어놓은 듯 제법 번듯하다. 아무도 없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억새숲을 헤맨다. 억새가 뜸해질 무렵 드디어 귀틀집 두어 채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 마장터가 있었다’고 웅변하는 존재들이다. 그래도 이곳에 장이 섰다는 건 실감이 안 된다. 마장터라는 이름은 샛령을 넘던 말이 쉬어가는 마방과 주막이 있었다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고성이나 속초에서 소금이나 미역을 지게에 지거나 마차에 실어 샛령을 넘어오고 인제쪽 사람들은 감자나 옥수수, 잡곡 등을 지고 와 맞바꾸다보니 이 곳에 자연스럽게 장이 서고 동네가 생긴 것이다. 샛령은 그만큼 큰 길이었다. 아직 마꾼들이 쉬어갔다는 주막터가 남아있다. 마을에 많을 땐 50가구 이상이 살았으며 양조장과 담배포까지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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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과 귀틀집들을 바라보다보니 그 옛날에 오가던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장터에서 물건을 흥정하고 한두 잔 먹은 막걸리에 흥타령이 절로 나오고…. 먼저, 위에 있는 귀틀집으로 가본다. 집은 비어있다. 서너 칸은 돼 보일 정도로 규모가 있다. 굵은 통나무를 엇갈려 쌓고 흙으로 마무리한 전형적인 귀틀집이다. 지붕은 굴피를 덮고 그 위에 다시 억새로 이엉을 엮어 얹었다. 굴피와 억새의 공존, 그리 어색하지 않다. 뒤뜰로 가보니 뒷간과 헛간 이 옹기종기 서 있다. 텃밭에는 고춧대와 채소들이 서거나 눕거나 제멋대로 한 계절을 나고 있다. 집 주위를 돌아보지만 역시 사람의 온기는 없다. 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혹시나 해서 아랫집으로 들어선다. 아! 사람이 있다. 손바닥만한 마당에 앉아있던 중년남자가 눈인사로 객을 맞는다. 모자 아래의 머리는 백발인데 얼굴은 대춧빛으로 빛난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맞다. 초입에서 길을 물을 때 잠깐 만났던 박달나무쉼터의 주인 염봉성씨(56세)다. 그는 자신을 약초꾼으로 소개한다. 동충하초를 세상에 최초로 알린 게 본인이라고 자랑한다. 길 잃은 등산객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는 ‘고마운 아저씨’로도 알려져 있다. 등산객이 올라가는 걸 봤는데 시간이 돼도 내려오지 않으면 결국 찾으러 나선단다. 조난 직전에 구조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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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서 마장터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다. 윗집에는 50대의 백모씨가 산다. 명문대 출신인 그는 한 때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는데 외국을 떠돌다 돌아온 뒤 마장터로 들어왔다. 지금도 어느 날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는 습관은 여전하다고 한다. 가장 먼저 보았던 현대식 집은 그의 동생이 친구들과 함께 지은 ‘별장’이란다. 그리고 아랫집에는 60대의 정모씨가 산다. 사실 마장터의 이 두 주민은 그동안 여러 차례 세상에 소개된 유명인사다. 정씨의 집 역시 귀틀집인데 지붕은 파란 함석으로 ‘개량’하고 통나무와 돌을 얹었다. 정씨는 젊어서 산에 들어왔는데 철따라 약초꾼, 나물꾼으로 살다가 겨울이 되면 가족이 사는 속초로 간다. 겨울이 아니더라도 매달 말에서 초 사이에는 ‘결산’을 하러 속초로 나간단다. 염봉성씨는 정씨가 집에 없는 게 영 아쉬운 눈치다. “방을 보여드리면 좋을 텐데 지금 열쇠가 없어서… 재미있는 게 참 많거든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마을 아닌 마을, 그 속에 삶터를 꾸민 사람들은 문명을 버린 대신 평화와 정(情)을 선택한 것 같다. 염봉성씨가 주섬주섬 막걸리 병을 꺼내더니 한 잔 그득하게 따라준다. 정이 철철 넘쳐흐른다. 그가 품은 평화로운 기운에 내게 그대로 전해진다. “산에 오래 사시더니 도인 다 되셨네요?” 절대 빈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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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가 많으니 조심해서 내려가라는 염봉성씨의 배웅을 받으며 하산 길에 든다. 올라올 때 길옆을 잔뜩 파헤친 것을 보며 궁금했는데 그 주인공이 멧돼지? 괜히 등골이 오싹해진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진리는 통하지 않는 데가 없다. 하지만 멧돼지는 금방 잊어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잠시 주저앉아 땀을 들이는 김에, 지고 온 캔맥주를 꺼내 배낭을 비우고 주변의 풍경을 대신 담는다. 이 순간만은 그 무엇도 부럽지 않다. 이곳을 삶터로 삼고 또 이곳에서 물건을 교환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들은 욕심 따위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늘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에 이상적인 나라 하나가 세워졌다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왕이나 대통령 같은 권력자가 필요 없는… 그래서 세금도 병역도 전쟁도 없는…. 잠시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 행복한 미소를 지어본다. 누군가의 소망으로 태어난 길은, 문명의 척후병이 되어 속도와 번잡을 껴안든가, 어느 순간 망각 속으로 들어가 세상에서 지워지기도 한다. 샛령은 후자가 되었다. 그나마 안부를 묻듯 찾아오는 사람들마저 사라지면 마장터라는 이름은 끝내 잊혀져갈 것이다. 내려오는 길,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자꾸 두리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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