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에 해당되는 글 2

  1. 2011.01.10 [사라져가는 것들 155] 신당(神堂)4
  2. 2009.09.21 [사라져가는 것들 122] 학교종10
2011. 1. 10. 08:40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도시에서,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제대로 된 신당을 찾는 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욱, 내가 그 신당을 만난 게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와 묶인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이 있어서  그곳으로 당겼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내가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부터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서울의 추억’, 즉 근현대 생활유산을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서, 그와 관련한 짧은 기획물을 만들기로 했다. 제작회의를 하는 중에 데스크의 눈이 내게 멈췄다. ‘사라져가는 서울의 추억’ 이라는 콘셉트가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리게 한 모양이었다. 군말 없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비록 케이블TV라고 해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직접 현장에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취재원 접촉. 전화 통화를 통해 알게 된 분이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오문선 학예사였다. 여자 분이었는데 역사박물관에서 근현대생활유산 수집을 전담하는 분이었다. 오 학예사가 처음 제안한 것은 세운상가 취재였다. 세운상가에 오래된 시계수리점이 있는데, 일제 때부터 쓰던 수리용 공구를 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그에 맞춰 대본을 쓰고 촬영동선을 짰다. 맨 먼저 시계수리점에 들러 물품 수집 과정을 담고 기증한 분의 인터뷰를 따고, 다음에 재개발 중인 모래내시장을 들러서 촬영하고…. 맨 마지막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그동안 수집한 것들을 찍고 관장 인터뷰를 따고….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동선이라 하루에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촬영 당일 생겼다. 대본을 완성하고 PD, VJ와 시간을 조율하는 등 준비를 마쳐놓고 출발하려는데 오 학예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계수리점의 주인이 갑자기 병환이 나서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하는 오 학예사도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다행이 다른 아이템으로 부랴부랴 때웠지만, 언제 퇴원할지 모르니 다음 일정을 잡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2주일 쯤 지난 뒤 다시 전화를 했더니, 그 분이 퇴원은 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때 오문선 학예사가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곳이 보광동 신당이었다. 보광동 일대에서 활동하던 장남옥이란 큰 무당이 몇 달 전에 타계했는데, 유품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수거작업을 할 때 촬영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당이라…. 낚시미늘을 물어버린 물고기처럼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확 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일이 내게 오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을까? 방송도 방송이지만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굿하는 과정을 밤새워 취재하고 글로 쓴 적이 있지만 도심에 있는 신당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촬영 약속을 잡은 날은 12월17일. 눈이 제법 내렸다. 아침 일찍 도착해보니 골목마다 떡가루 같은 눈이 흩뿌려져 있었다. 신당이 있다는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바깥풍경을 스케치하는 중에 오 학예사가 도착했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따라 들어가다 보니 약간은 냉랭하고 음습한 기운이 돌았다. 신당은 전실과 신당으로 구분돼 있었고 살림을 하는 공간은 별도로 있었다. 신당의 문 앞에 서면서부터 평범하지 않은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꼭 불편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렇다고 안온하거나 평안한 것과는 조금 다른…그물에 갇혔는데 그리 심하게 옥죄이지는 않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으니 기침 참듯 안으로 꼭꼭 갈무리 하는 수밖에. 오 학예사에 따르면, 이 신당은 서울 무당의 전통신당을 제대로 갖춘 곳이라고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침 수거팀이 도착하기 전이라 오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신당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징, 기물(器物), 종, 북, 명두 등 각종 무구(巫具)가 금방 사용하기라도 한 듯 제 자리에 놓여있었고 산신도, 최영장군상 등 무신도(巫神圖)들도 눈을 부릅뜬 채 낯선 방문객을 내려다봤다. 살림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이나 요도 펴진 채 그대로였다. 누군가 잠을 자고 아침에 급히 나간 듯 모든 게 생생했다. 큰무당 장남옥 씨는 지난해(2010년) 10월에 타계했다. 1928년생으로 17세에 무당이 된 뒤 40년 동안 용산구 보광동에 거주하며, 둔지미 부군당의 당주무당으로 활동했다. 장남옥씨나 신당을 이해하자면 몇 가지를 먼저 알고 넘어가야한다. 당주무당이란 과거에 마을마다 있었던 신당의 의례를 주관하는 무당을 말한다. 또 부군당(府君堂)은 민간신앙의 대상물인 신을 모셔 놓은 신당을 말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에서만 그렇게 불렀으며 서울에만 15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몇 곳의 당에서는 정초에 당제를 지낸다. 이를 주관하는 것이 바로 당주무당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남옥씨가 당주무당으로 있던 둔지미부군당은 원래 지금의 용산로 6가(현 국립중앙박물관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둔지미 마을이 1930년대 일제의 군사용지로 수용되면서 보광동으로 이주할 때 함께 옮겨 앉게 되었다. 어찌 보면 기구한 사연을 지닌 부군당인 셈이다. 장남옥 씨는 둔지미부군당뿐 아니라 서빙고부군당, 동빙고부군당, 압구정동, 잠원동, 신사동 일대의 마을굿을 주관하던 큰 무당이었다. 굿거리와 재담에 능했다고 한다. 장남옥 씨의 유품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된 데에도 사연이 있다. 장 씨에게는 신내림을 해준 김점례라는 신어미가 있었다. 장남옥씨가 거주하던 신당의 원래 주인이었다. 이 분이 타계하기 전에 집을 보광동3경로당에 기증했는데, 조건은 신딸인 장남옥 씨가 살아있는 동안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리 정리가 되는 바람에, 장 씨가 타계한 뒤 집에 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무구 등 유품이 문제였다. 장 씨에게는 자식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없는 계륵인 셈이었다. 그래서 경로당에서는 유품의 처리와 관련해서 회의를 열었고, 결국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문선 학예사가 신당에 얽힌 사연을 거의 얘기했을 무렵 유품 수거팀이 도착했다. 훗날 신당을 그대로 복원할 계획이기 때문에 꽤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다고 한다. 수거 며칠 전에는 실측 및 촬영 작업을 했다. 유물을 포장하는 사람들의 손놀림은 정교했다. 얼핏 보면 그냥 버려도 될 것 같은데도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 경로당에서 감사를 맡고 있는 김영달 할아버지(69세)을 만날 수 있었다. 보광동 토박이라는 김 할아버지는 동네뿐 아니라 신당의 역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김 할아버지의 안내로 둔지미부군당을 찾았다. 부군당에는 마을신으로 제갈무후(제갈공명)를 모시고 있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 여러 해 전국을 헤매고 다녔지만 부군당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여러 가지 생각이 명멸했다. 신당이나 무당, 무구들. 그리고 부군당.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일지도 모른다. 갈수록 잊혀져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건, 무속 자체를 미신이니 혹세무민이니 하여 경원시 하는 시각이야 말로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속은 수천 년을 이어온 이 땅 고유의 신앙이다.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고 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이들을 무당이라 불렀다. 그렇게 긴 세월 백성 곁을 지켜왔으니 전통문화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지금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훗날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중요한 유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sagang
2009. 9. 21. 09:18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녀, 종순이가 땡순이라는 새 이름을 얻기까지에는 남다른 곡절이 있었다. 종순 아버지 뻐꾹씨 -유백국(劉白國)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있었지만 모두 그렇게 불렀다-는 어느 날 다짜고짜 아내에게 씨암탉 한 마리를 잡아놓으라고 일렀다. 그러더니 땅거미가 마당을 기어 다닐 무렵 강토국민학교의 교장 공두말(孔頭末) 선생을 앞세우고 사립문을 들어섰다. 강토국민학교는 지난해까지 종순이가 다니던 학교였다. 퇴근길에 바로 끌려온 듯, 양복차림의 교장은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학교 운동장만큼 넓은 이마만 자꾸 쓰다듬었다. 부처님이라도 모시듯 안방에 교장을 모신 뻐꾹씨는, 실팍하게 삶아낸 닭과 함께 제사 때 쓰려고 담가둔 밀주(密酒)를 독채로 내오라고 일렀다. 공두말 선생이 누구던가. 술 한통을 짊어지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갈 수 있다는, 둘 째 가라면 통곡이라도 할 주당(酒黨)아니던가. 그런 그 앞에 잘 익은 술이라니. 처음에는 무슨 꿍꿍이인가 경계도 하고 사양하는 체라도 하더니, 술이 목젖을 타고 한번 내려가자 술독으로 슬슬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뻐꾹씨 또한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리란 건 코흘리개도 아는 터. 아무런 목적도 없이 교장 모셔다가 씨암탉 잡고 찍어먹는 것조차 아까워하던 밀주를 독 채로 내줄 그가 아니었다. 교장선생의 코끝이 늦가을 홍시만큼이나 익어갈 무렵 드디어 본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 그나저나. 교장선생님. 아참, 두말 성님. 우리 종순이년, 공무원 한번 맹글어주쇼.”
“아니, 이 사람아! 공무원 맹글라믄 중고등핵교를 졸업시켜서 셤을 보게 허야지. 워째 나더러…?”
“아 참 성님두. 누가 그걸 물러서 물유? 핵교를 졸업시킬 능력이 되믄 장관이나 국회의원 시키지 뭐한다구 성님헌티 이러겄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소사라도 시켜달라는 거쥬. 종도 치고 청소도 하는 거 있잖유.”
“소사라믄 이미 있자녀. 김씨 말여. 그 사람 하나면 충분헌디 뭔 또 소사여. 그럴만한 예산이 있간디? 그러구 소사가 무신 공무원이여. 그냥 잡부지.”
“아, 나라가 운영하는 핵교에 댕기믄 공무원이지, 공무원은 뭐 이마빡에 레떼루 붙이고 태어났답디여? 저년이 넘덜 클 때 뭘허느라구 저렇게 거시기 똥자루만 혀서… 아직 초조(初潮)도 못 치렀으니 공장도 못 보내구, 갈칠 능력은 더욱 안 되고… 워쩐대유 성님이 좀 챙겨줘야지.”
결론부터 말하면, 그날 교장은 뻐꾹씨에게 졌다. 술 한 독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이다. 문제는 다음날 술이 깬 다음이었다. 다른 기억은 무 베듯 싹뚝 잘려나갔는데 종순이를 학교에 취직시켜주겠다고 한 약속은 찰거머리처럼 뇌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어떻게 취직을 시켜준단 말인가. 교장선생님은 머리를 싸매고 말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두말 교장의 고민을 시원하게 풀어준 것은, 역시 꾀돌이라는 별명을 가진 조갈량(趙葛亮) 교감이었다. 교장이 이도 저도 어렵게 된 사연을 털어놓자마자 단칼에 해결책을 내놨다.
“쓰지요 뭐. 청소하고 종치는 아이 하나 있으면 좋지요.”
“누가 그걸 물러서 그려? 돈을 뭘루다 주느냐 말이지.”
“간단합니다. 일 손 덜어준다고 하고 선생님들에게 매달 조금씩 걷는 겁니다. 돌려가며 종치는 것도 귀찮을 테니…. 총대는 제가 멜 테니 교장선생님은 보고만 계십시오.
그렇게 해서 종순이는 신 김치와 장아찌를 싼 ‘벤또’를 들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종순 아버지 뻐꾹씨는 딸이 공무원이 됐다고 자랑하느라 이 동네 저 동네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교사도 학생도 아닌 종순이의 주 업무는 종을 치는 일이었다. 물론 교무실을 청소하고 교장이나 교감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다. 종순이는 종치는 일이 좋았다. 자신이 종을 쳐야 수업이 시작되고 끝나니 우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종을 안치면 밤새 수업을 헐지도 물러….’ 혼자 씨익 웃는 날도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종을 안 쳐서 수업이 제대로 끝나지 못한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교사들이 모두 수업에 들어간 뒤 교무실에 혼자 앉아있던 종순이가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교장이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방에서 나와 보니 그 모양이었다. 그날 종순이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다.

종소리는 교사나 학생들에게만 소용되는 게 아니었다. 농부들은 들판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새참을 먹고 시간을 가늠했다. “우리 애기도 벤또 먹을 시간이구먼.” 종소리는 학교 상황을 그림 그리듯 전해주기도 했다. 애나 어른이나 종순이를 보면 땡순이라고 불렀다. 종을 땡땡 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지만 ‘종순’이나 ‘땡순’이나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것도 한몫을 했다. 종순이는 세월이 흘러도 키가 자라지 않았다. 마치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 등장하는 점순이를 보는 것 같았다. 국민학교를 남들보다 두어 살 늦게 들어갔으니 열다섯 살이 꽉 찼건만 기껏해야 3~4학년 정도로 보였다. “저걸 원제 켜서 시집보낸댜.” 종순이 어머니는 걱정을 혹처럼 매달고 다녔다. 열세 살이 되던 해 혹시나 하고, ‘개짐’(여자가 월경을 할 때 헝겊 따위로 기저귀처럼 만들어 차는 것)을 마련해줬건만 몇 년째 장롱 속에서 나올 기색이 없었다. 그런 종순이의 삶을 송두리 째 틀어놓는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에는 교감선생님 이하 모든 교사들이 교무실 난로 가에 둘러앉아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유일하게 혼자 떨어져서 먹는 게 종순이었다. 그녀는 종이 매달린 근처의 자기 책상에서 먹었다. 그날도 4교시 끝나는 종이 울리고 늘 똑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물화처럼 고요한 그 풍경을 살짝 찢어놓은 사람이 바로 나민암(羅珉巖) 선생이었다. 나 선생은 그 학교의 유일한 총각선생이었다. 교대를 졸업하고 바로 부임해왔으니(1981년 이전까지 교육대학은 2년제였다) 미처 여드름자국도 다 지우지 못한 풋내기였다. 대개는 도시로 부임하기를 원하는데, 무슨 생각인지 나 선생은 산골학교로 자원했다. 선생님을 하늘과 동급으로 아는 종순이에게는, 총각이든 유부남이든 어려운 존재일 뿐이었다. 모두들 아무 말 없이 도시락 파먹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나 선생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종순씨! 추운데서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와요.”
종순이는 설마 그 목소리에 들어있는 ‘종순씨’가 자신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들끼리 얘기려니 하고 크기가 만만찮은 총각김치 하나와 씨름하고 있었다. 모든 선생님의 눈이 나 선생과 종순이 사이를 왕복했다.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 차 있었다. ‘종순이’가 아닌 ‘종순씨’라는 호칭도 그러하거니와 종치는 아이보고 같이 밥을 먹자니…. 어색한 침묵이 교무실을 팽팽하게 채웠다. 그제야 종순이도 사태를 파악했다.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는 사실 외에, 그날의 이야기를 더 길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뒤로도 달라진 건 없었다. 종순이는 다음날도 여전히 자신의 곰보책상에서 밥을 먹었다. 물론 열다섯 소녀의 가슴에 한 남자가 들어앉았다는 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종순이의 세상은 어느 날 아침 온통 다른 색으로 색칠 돼 있었다. 학교 가는 게 너무 기다려졌다. 전에는 등을 떠미니 다니는 정도였다. 종을 치는 건 좋았지만, 혼자만이 이질적인 존재인 학교 자체에는 그리 정이 가지 않았었다. 가슴은 송장메뚜기 뛰듯 벌떡벌떡 뛰었다. 뺨은 봉숭아 빛이었다. 모든 꽃들은 황금빛 너울을 쓰고 있었고 내에는 오색찬란한 보석이 돌돌돌 흘렀다. 길을 가다 발에 채는 개똥까지 소중했다. 난감한 일도 있었다. 나 선생님을 볼 때가 그랬다.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뱀 만난 개구리처럼 얼어붙고는 했다. 도망치고 싶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일들이 생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즈음에는 종순이가 치는 종소리가 유난히 멀리 울려 퍼졌다. 하지만 행복이란 건 늘 그 꼬리를 생각보다 일찍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그날 변소에서 너무 오래 앉아있었던 게, 불행을 앞당겼는지도 모른다. 변소 뒤 나무그늘에서 남자선생님 둘이 나누는 말이 창을 타고 넘어왔다.
“그렇다고 학기 중에 떠나는 법이 어디 있답니까? 나 선생 그렇게 안 봤는데 영….”
“나 선생 뜻이 아니고 와병 중인 아버지 때문이라잖아.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빨리 올라오라고 그렇게 성화였다니. 어디 성화뿐인가. 그 ‘빽’ 좋다는 양반이 각계에 손을 써서 나 선생을 불러 올렸다고 하지 않던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말은 길어도 내용은 간단했다. 나 선생이 전근을 간다는 것이었다. 순간 변소의 벽이, 아니 눈앞의 모든 것이 우르르 무너졌다. 세상은 더 이상 황금빛 꽃밭이 아니라 시커먼 개흙으로 뒤덮인 수렁이었다. 그날부터 종순이의 넋은 허공을 떠돌았다. 밤이면 먼 길을 걸어 나 선생님이 밥을 붙여먹고 있는 집 주변을 맴돌았다. 한지 창에 그림자라도 어릿거리면 부둥켜안을 듯 달려가 보지만, 결국 저만치 가 있는 건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닭이 홰를 칠 무렵이 되어서야 이슬에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나민암 선생님이 떠나는 날, 종순이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프다는 핑계였지만 꼭 핑계만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아랫배가 쌀쌀 아프고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처음 겪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몇 마디 지청구를 날리던 어른들이 들판으로 나간 뒤 종순이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맨 먼저 자신의 궤짝을 뒤져 오래 전에 보관해두었던 개짐을 꺼냈다. 드디어 쓸 날이 온 것이었다.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처리를 마친 뒤, 궤짝에서 헌옷가지 몇 가지를 꺼내 보자기에 쌌다. 집을 나온 그녀가 조심스레 두리번거린 것도 잠시, 걸음을 재게 놀려 들판을 가로질렀다. 아침저녁으로 두 번 다니는 버스가 올 시간이었다. 멀리서 땡땡땡! 종소리가 울렸다. 다른 날보다 5분쯤 늦게 치는 수업시작 종소리였다. 순간, 맨발에 검은 고무신을 신은 작은 소녀가, 선생님의 새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꼭 쥐고 신작로를 달음질 치기 시작했다.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