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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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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에 해당되는 글 1

  1. 2008.05.12 [사라져가는 것들 58] 조리10
2008. 5. 12. 15:49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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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어느 산골 처녀가 시집을 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날을 잡아놓고는 처녀 어머니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답니다.

나무하고 밭 매고 지게질까지, 일이라면 못하는 게 없는 딸이었건만 딱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리더란 거지요.

바로 조리질이었습니다.

논이라고는 손바닥만한 거 하나 없는 산골에서만 살았으니 쌀인들 구경해봤겠습니까?

딸이 시집 갈 곳은 논농사를 제법 짓는 동네라, 밥을 하려면 조리질이 필수일 테니 걱정이 아닐 수 없던 겁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옥수수를 쌀알만 하게 빻아 조리질 하는 법을 가르쳤답니다.

딸은 그렇게 배운 게 조리질의 전부인 줄 알고 시집을 갔더랍니다.

며느리를 맞아 부엌을 벗어나게 된 시어머니는 신이 나서 쌀을 퍼주고 밥을 하라 시켰지요.

그런데 이 며느리, 배운 대로 조리질을 하는데 계속 헛손질만 하더랍니다.

쌀과 옥수수는 크기나 무게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니 조리질이 똑같을 리 없지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뭉텅뭉텅 조리질을 해서 밥을 지어 올렸다지요.

새 며느리가 지은 밥인지라 가족 모두 기대에 차서 상머리에 앉았는데, 아아! 이를 어쩝니까.

여기서 지끈! 저기서 지끈!!, 시동생도 우지끈!!! 시어머니는 와지끈!!!!

그래도 거기까지는 참아줄만 했습니다.

잠시 뒤, 시아버지의 입에서 와자작!!!!! 소리가 나더니 두어 개 남았던 이 중 하나가 외출을 해버리더란 거지요.

좀 싱겁긴 하지만,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래서 그 며느리 쫓겨났느냐고요?

글쎄, 쫓겨나기야 했겠습니까만, 평생 얼굴 들고 살기는 힘들었지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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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촌에 걸려있는 사진을 촬영한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겠지만, 조리는 쌀을 이는 주방기구입니다.
쌀을 물에 씻어 일렁일렁 일어내는 걸 조리질한다고 합니다.
가벼운 것은 살짝 띄워서 담아내고, 무거운 것은 가라앉게 하여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쌀을 일어내면 바닥엔 돌만 남게 되지요.

요즘은 돌을 모두 고르고 쌀을 팔기 때문에 조리질 자체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슬그머니 주방의 필수품목에서 빠지게 된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닙니다.
조리가 합성수지나 철망으로 대체되는가 싶더니, 그나마도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고 된장찌꺼기 거를 때나 찾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게 된 게 엊그제 일이지요.
조리질 하는 것도 그리 쉬운 건 아닙니다.
건성건성 하면 돌멩이까지 따라들어 가거나 헛손질하기 일쑤입니다.
손목을 잘 돌려서 해야 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숙달되는 게 아니란 것이지요.
조리는 산죽(山竹)을 엮어서 만듭니다.
대를 삶아 말려 껍질을 벗긴 뒤 네 갈래로 잘게 쪼개서 물에 담갔다가 부드러워지면 엮게 되지요.
쌀을 담는 ‘바구니’부분은 움푹하게 엮고 쥐기 좋도록 자루를 만듭니다.
말로 하면 간단한데, 사실은 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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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복조리가 그나마 ‘조리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복조리는 쌀을 일 듯 복을 일고 오복(五福) 중 하나인 치아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답니다.
전에는 섣달그믐(한해의 마지막 날)밤부터 초하루 새벽까지 “조리 사려~ 조리 사려~” 외치며 복조리 장수가 골목을 누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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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집집마다 몇 개 씩 사서 방 귀퉁이나 대청·부엌 등에 걸어뒀습니다.
안에 ‘복돈’을 넣고 홍실로 엮어두기도 했지요.
그러다 한 해가 지나면 새 걸로 바꿔 걸고 묵은 것은 부엌에 들어가 조리 본래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복조리를 살 땐 복을 깎는 거라 해서 값을 깎지도 않았고, 무를 수도 없었습니다.
쌀을 일기 위한 조리는 거의 사라졌지만, 복조리를 만들어 파는 동네는 아직도 꽤 있습니다.
경기 안성의 신대마을이나 전남 화순의 송단마을이 그런 곳이지요.
섣달그믐 무렵이 되면 여기저기서 단체구입을 하기도 해서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는데, 요즘은 중국산이 들어와 전만 못하다는 말도 들립니다.
여하튼 조리를 만드는 것도 꽤 전문기술인지라, 그 분들마저 돌아가시면 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야 그런 걸 배우려고 하나요.
그래도 뭘 어쩌겠습니까?
세월에 치여서 사라져가는 게 어디 한 둘이어야지요.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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