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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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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에 해당되는 글 1

  1. 2009.07.27 [사라져가는 것들 118] 전당포7
2009. 7. 27. 09:08 사라져가는 것들

우당탕! 와지끈!! 빼애액!!!
또 전쟁이 시작된 모양이다. 우당탕! 하는 소리는 여자가 도망치면서 낸 소리일 테고 와지끈!! 하는 소리는 낡은 밥상이라도 부서지는 소리일 것이다. 빼애액!!! 하는 소리야 잠들었던 아기가 놀라서 우는 소리일 테고…. ‘그렇게 때려 부수는데 아직도 부술 게 남아 있나?’ 책상에 앉아있던 아이가 혼자 중얼거리며 책을 덮더니,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누운 할머니를 돌아본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벌써 일어나 앉아있다. 오늘은 소음의 강도가 평상시를 훨씬 웃돈다. 초저녁잠이 아무리 깊다 해도 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노인의 얼굴에는 손자에 대한 미안함과 옆집 부부를 향한 짜증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언덕 위에 낮게 지어진 집들이 게딱지처럼 엎드려 있는 동네. 벌집처럼 똑같은 창문을 낸,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 방들 중 하나에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할머니와 세 들어 살고 있다. 옆방에는 젊은 부부와 간난아이가 산다. 그들은 날마다 싸우는 게 일이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 폭력이 일일행사처럼 치러진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남자는 초저녁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여자를 두드려 팬다. 그래도 때리는 기술은 좋은지 어딜 부러뜨리는 법은 없다. 대신 여자의 얼굴에는 시퍼런 멍 자국이 가실 날이 없다. 그러고서도 왜 붙어사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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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년아. 대체 뭘 덮고 자라고 그것까지 내다 맡겨!! 차라리 빤스나 벗어서 맡길 것이지.”
남자의 고함과 퍽퍽 매질하는 소리,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고단을 몸을 뉘였던 골목을 마구 헤집는다. 다행히 사내가 곯아떨어졌는지 폭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 땐 산삼이라도 삶아먹은 것처럼 아침까지 기운차게 싸우기도 한다. 공부고 뭐고 날 샜다는 듯, 아이가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와 숙제를 하고 있는데 할머니와 주인집 여자가 바깥에서 나누는 얘기가 창틈이로 들어온다.
“그래서, 덮던 이불을 맡기고 애 분유 값을 빌려왔다는 거여?”
“그렇다니까요. 오죽했으면 그랬을라구. 주변머리라고는 손톱만치도 없는 여편네가 어린 것 굶는 걸 보다 못해 눈이 뒤집힌 거지요.”
“그래도 내갈 게 따로 있지. 그러도록 사내놈은 뭐하고…. 거둬 멕이지도 못할 거 뭣 하러 낳긴 낳아.”
“어이구, 개굴창서 용 나기를 바라는 게 낫지. 그 놈이 지 새끼 굶든 말든 쳐다나 볼 놈인가요? 지 마누라나 새끼보다는 화투판 똥피 한 장이 더 귀한 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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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들어보지 않아도 사연을 알 것 같았다. 옆방 부부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한 쌍이었다. 남의 트럭을 운전하는 남자는 쉬는 날이면 노름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노름 솜씨도 변변찮은 모양이어서 돈을 땄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집에 돈을 갖다 줄 리가 없었다. 쥐꼬리만큼 버는 걸 몽땅 날리고 개평술이나 얻어먹고 들어와서 여자를 두드려 패는 것이었다. 돈을 구해오라는 것이었지만, 그러잖아도 용해빠진 여자가 무슨 능력으로 노름 돈을 댄단 말인가. 여자는 착하기는 한데 말 그대로 주변머리가 없었다. 그래도 서방이라고 처음에는 친정에서 이 핑계 저 핑계로 돈을 뜯어온 모양이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게 나을 일이었다. 결국 친정에도 발걸음을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다 애를 낳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젖이 안 나왔다. 서방이란 자는 그런 것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아이의 분유 값이 급했던 여자가 이것저것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려다 쓴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들고 나갈게 없으니 급기야 혼수로 해온 이불을 맡기는 데까지 간 모양이었다. 아이는 이불까지 맡아주고 돈을 준다는 전당포라는 곳도 영 이해할 수 없었다.

전당포(典當舖)는 남의 물건을 맡아두고 돈을 빌려 주는 곳이다. 맡긴 물건에 대해 증서를 써주고 기한 내 찾아가지 않으면 처분해서 이익을 얻는다. 물론 대출금에 대한 이자도 수익원 중 하나다. 전당포를 기쁜 일이나 아름다운 일과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비정해 보이는 쇠창살, 그리고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과 비슷한 이미지로 전당포 주인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왜 전당포 주인의 이미지는 하나 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렇게 그린 탓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인정사정없이 물건 값을 후려치는 게 일이니 따뜻한 인상을 남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당포 쇠창살에는 애달픈 사연이 묵은 때처럼 눌어붙어있다. 죽자 사자 공부에 매달렸지만 계속 실패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법전을 들고 찾아간 고시생,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물인 만년필을 품고 가서 문 앞을 뱅뱅 돌던 청년, 아내의 급한 병원비 때문에 단벌 양복을 맡겨야 했던 어느 가장. 아무리 애를 써 봐도 하루를 살아내기조차 절박했던 서민들이 실낱같은 빛을 찾아 더듬더듬 찾아가는 곳이 전당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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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절박했던 건 아니었다. 푼돈에 목마른 이들이 찾던 곳이 전당포였던 건 분명하지만, 그리 가난하지 않은 대학생들도 주요 고객이었다. 그들은 술값이 떨어지면 시계나 미니카세트, 전자계산기, 심지어 교과서까지 들고 전당포를 찾았다. 그리고는 몇 장의 지폐와 전당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술집 문을 들어섰다. 시골 출신의 유학생들은 그렇게 물건을 맡겼다가 집에서 ‘향토장학금’(학자금)이 올라오면 찾으러 가고는 했다. 물론 제때 찾으러가지 못해서 새 주인의 품으로 넘어간 물건들도 많았다. 전당포의 철문과 쇠창살은 물론 방범용이었다. 손님으로 왔다가 강도로 돌변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전당포의 전성기는 1970~80년대였다. 70년대는 양복·구두 같은 것이, 80년대에는 냉장고·컬러TV 같은 가전제품이 전당포를 찾는 단골 품목이었다. 잘 나가던 전당포의 목을 조이기 시작 것이 바로 신용카드였다. 1990년대 들어 신용카드가 보급되면서 전당포를 찾는 발길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비교적 쉽게 대출 받을 수 있는 금융상품들이 쏟아지면서 90년대 후반 이후에는 뒷골목이나 카지노촌에서나 연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라져가던 전당포가 요즘에는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전당포라고 치면 수없이 많은 이름이 뜬다. 인터넷이 아니라도 청담동‧압구정동 등에는 전당포가 성업 중이다. 그만큼 살기 어려워진 세상이 다시 온 것일까? 그래서 만은 아닐 것이다. 요즘 전당포는 쇠창살 안으로 시계나 반지를 디밀던 곳이 아니다. 물론 그런 옛날식 전당포도 드문드문 남아있지만 대세를 잃은 지 오래다. 각광을 받는 건 소위 명품전당포라고 부르는 곳들이다. 그런 곳에서는 주로 고가의 물건들이 오간다. 노트북컴퓨터나 가전제품‧디지털카메라 등은 그나마 고전적이다. 주요품목은 루이비통이니 샤넬이니 하는 상표를 단 가방, 브리오니 같은 고가의 양복, 롤렉스나 카르티에 등의 시계들이다. 고급 골프세트도 나온다고 한다. 당연히 쇠창살 같은 건 없다. 입학 기념으로 받은 오리엔트 시계와 술값을 바꾸던 대학생은 물론, 아이를 업은 채 눈물바람으로 결혼반지를 내놓던 새댁도 없다. 세상은 어느새 그렇게 바뀌었다. 새삼 설움을 맡기고 찾아가던 그 옛날의 전당포를 그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아픔이 화인(火印)처럼 찍혀 세월가도 가슴앓이를 재우지 못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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