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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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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 숲'에 해당되는 글 1

  1. 2012.12.17 [Healing Travel 나를 치유하는 여행 6] 내소사 가는 길6
2012. 12. 17.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꽃살문에 담긴 뜻은

 

내소사 일주문

내소사 가는 길, 걷는 자의 행복으로 온 세상이 빛납니다. 굴강(屈强)한 기세로 높다랗게 솟은 전나무들이 달려 나올 듯 반깁니다. 전나무는 주변 숲이 가을색으로 치장하든 말든 신경도 안 씁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암청(暗淸)의 무게를 더해갑니다. 그 타협 모르는 색()에 대한 고집은, 눈 내리는 한 겨울에 청청하게 빛날 것입니다. 걸음걸음에도 푸른빛이 뚝뚝 묻어날 것 같아 자꾸 돌아봅니다. 내소사 전나무 길은 광릉수목원, 오대산 월정사 길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으로 불립니다. 500m 정도 이어지는 이 길에는 수령 150년 이상, 높이 30~40m의 전나무들이 소풍 길의 아이들처럼 늘어서 있습니다. 일주문에서 내소사까지 10분 넘게 걸어야 하지만 전나무들의 열병식 덕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눈이 가는 곳마다 황홀한 풍경이 그림처럼 이어지는 변산반도지만, 내소사 전나무 숲이 없었다면 이 빠진 듯 허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전나무 숲이 생겼을까요? 이 정도 숲이라면 일부러 심은 게 틀림없을 텐데. 이유가 없을 수 없지요. 원래 대가람이었던 내소사는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됐다고 합니다. 바다를 눈앞에 두었으니 왜적의 침탈을 피할 수 없었겠지요. 왜가 물러간 뒤 다시 절집을 짓기는 했지만 옛날의 위용을 되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전한 빈 자리에 전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나가면 되련만, 또 그놈의 궁금증이 발동하는 바람에 기어이 손을 꼽아보고 맙니다. 임진란에 이은 정유재란이 1598년에 끝났으니 지금으로부터 414년 전. 그런데 왜 나무의 수령은 150년밖에 안되지? 둘러봐도 어긋난 세월을 물어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땐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 절집을 짓고 나무를 심은 걸까? 아니면, 저들은 원래 심었던 나무들의 두어 대() 후손일까?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절에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알밤을 혼자 주운 아이처럼, 모처럼 길을 독식한 행복을 만끽합니다. 큰 숨을 들이쉴 때 감긴 눈을 뜨지 않은 채 천천히 걸음을 뗍니다. 전나무 특유의 향기가 온몸을 감쌉니다. 가슴을 활짝 열고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십니다. 향기가 모공마다 파고들어 가슴까지 푸르게 적십니다. 이곳은 여름밤이 되면 별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그 사이로 반딧불이 유영한다고 합니다. 그 풍경을 그려보는데 왜 자꾸 천국이 떠오를까요?

 

조금 걷다가 밑동만 남은 나무를 발견합니다. 천재지변을 당했는지 한 살이를 마치고 세상과 이별했는지 모르겠지만 싸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가로지릅니다. 세상에는 전설 한 자락 남기지 못하고 떠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도 그렇지요.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한 존재가 떠난 자리엔 슬픔이 고이기 마련입니다. 몸을 낮춰 그루터기를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하나 둘 셋. 어찌 그 긴 세월을, 가물거리는 눈으로 헤아리려 한 것인지. 조금 세다가 포기합니다. 나이테 속에는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방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간격과 모양. 조금 더 걷다가 또 걸음을 멈춥니다. 이번엔 더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베고 지납니다. 전나무 몇 그루가 뿌리를 온전히 드러낸 채 쓰러져 있습니다. 땅 속을 벗어나, 줄기와 잎을 키우지 못하는 뿌리는 더 이상 뿌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니 뎅겅뎅겅 머리를 잘린 나무들도 많습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지난여름 이 땅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이 저지른 짓이겠지요. 볼라벤이니 산바니, 이름도 낯선 큰 바람들은 이 작은 반도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습니다. 마침 이곳이 바람이 지나가고 싶은 길이었나 봅니다. 안온하던 숲은 속절없이 흔들리고, 나무들은 하나 둘 부러지고 쓰러졌겠지요.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

그 많은 길을 두고, 바람은 하필 이 길로 지나갔을까요? 그걸 따져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바람이라 했거늘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바람이야 자신이 가는 곳이 곧 길이지요. 하필 그 길에 나무들이 서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기억이 지워져서 그렇지 이 숲이라고 시련이 왜 없었겠습니까? 어느 때인가는 더 무서운 바람이 지났을 수도 있고 우듬지의 눈을 이기지 못해 뚝뚝 가지를 잃은 날도 부지기수였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들이 씨줄 날줄로 직조되고, 그 직조물을 인생이라 부릅니다. 느닷없이 바람이 들이쳐서 뺨을 때리거나 넘어트리거나 아예 부러트리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 불행을 원망하며 울부짖어봐야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바람도 그냥 지나가는 그물에, 불행인들 걸리겠습니까? 원망이나 한탄보다는 추스르고 일어나는 게 먼저여야겠지요. 눈 속에 피어난 꽃을 칭송하는 건 시련을 이기고 선자에 대한 경의이기도 합니다.

 

태풍에 머리가 뚝뚝 꺾인 나무들

제겐, 유별날 정도로 젊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이제 젊다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습니다. 그렇게 인연 속을 걷다 보니, 40대에 결혼식 주례를 10건 가까이 해치운어처구니없는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건 들을 이야기도 많다는 의미입니다. 행복한 이야기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불행하고 아픈 이야기가 더 많기 마련입니다. 어떤 친구들은 제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합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의 불화를 천형처럼 안고 살아온 친구도 있습니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생사의 문턱을 오락가락 하는 이도 있고, 이혼 뒤의 아픔을 안고 찾아오기도 합니다. 직장 문제는 가장 빈번한 소재입니다. 상사와의 불화, 막연한 장래, 이직의 유혹과 불확실성.

 

어떤 친구들은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을 안고 찾아옵니다. 애써 울음을 구겨 넣지만 통곡보다 더 아프다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타나 편작 같은 명의(名醫)가 아닌 저로서는 그 고통 앞에서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런 땐 그저 들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아픔에 시정(市丼)의 잣대를 들이댈 일이 아니라는 것, 당의(糖衣) 같은 위로가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심력을 다해 그의 가슴에 제 가슴을 동조(同調)시키는 것입니다. 동조나 공감은 동정이나 연민과는 다르지요. 자신이 안고 있는 고통을 누군가가 이해하고 있다는, 혹은 공유하고 있다는 안도는 때로 큰 위로가 됩니다. 가끔은, 앓고 난 아이에게 미음 먹이듯 아주 조금씩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합니다.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사랑 받을 가치가 있는지. 처음에는 고개를 젓던 이도 어느 순간 조금씩 수긍하기 시작합니다. 새로 발견한 스스로를 낯설어하기도 합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하다고 절규하는 친구들에게는 한마디밖에 해줄 말이 없습니다.

고통이 거의 끝났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까.”

 

내소사 부도들

가장 힘든 건 고치 속에 갇힌 친구를 만났을 때입니다. 당신은 囚人(수인)이라는 한자를 기억하는지요. ()라는 글자의 모양을 보면 사람()이 사방을 둘러친 공간()에 갇혀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건 그 감옥을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감옥 속에 들어가 꼼짝도 안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곳은 스스로 걸어 나오지 않으면 소멸의 시간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자신을 세상 밖으로 데려갈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뿐이거든요. 어떤 이들은 스스로 사랑받지 못했음을 한탄합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일이지요? 이야기를 듣다보면 남들보다 넘치는 사랑을 받고 살아온 이도 많습니다. 망각의 강이라도 건넌 듯 잊어버렸을 뿐입니다. 그럴 때마다 진정 가난한 이들은 어깨에 내려앉은 햇살 한 가닥에도 눈물겨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시 한 줄뿐입니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 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이해인 <어떤 결심>

 

내소사 벚나무길

쓰러진 나무 앞에서 서늘한 가슴을 추스른다는 게, 너무 멀리 나가고 말았습니다. 나무든 사람이든 쓰러지지 않는 세상이길 소망하지만 자주 어긋나고 맙니다. 설령 그게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질서라고 하더라도 눈앞에 두고 보는 일은 고통입니다. 예까지 왔으니 내소사를 보고 가야겠지요. 전나무 숲을 벗어나면 늙은 벚나무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고운 가을빛 속에서 나무들은 이별의 예감으로 수런거립니다. 이들은 이별을 거스르려 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봄부터 여름까지 애써 피워낸 융성을 지워 내년을 기약합니다. 이들의 이별은 존재의 존속을 위한, 새로운 탄생을 위한 합의입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한번 쥔 것을 절대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지고 가는 숙명이겠지요.

 

내소사 경내의 당산나무절 마당에 들어서면 맨 먼저 시선을 당기는 게 커다란 느티나무입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요? 그냥 느티나무가 아니라 분명 당산나무입니다. 금줄을 칭칭 동여맨 것도 그렇지만, 당산나무는 나름의 특별한 기운을 갖고 있거든요. 절에 당산나무가? 그러고 보니 일주문 앞에서도 당산나무를 본 기억이 납니다. 둘이 참 많이 닮았네요. 모를 땐 물어볼 수밖에. 그렇답니다. 당산나무가 맞는다는군요.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는 할아버지 당산나무고 일주문 밖의 나무는 할머니라는데, 할아버지는 1000년을 살았고 할머니는 700년을 살았답니다. 절 안의 당산나무, 좀 낯설지 않은가요? 믿음의 대상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제 눈에는 왜 이리 보기 좋지요? 네 신(), 내 신 따지며 싸우는 것보다 이렇게 함께하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제가 쓴 터키 여행기에서 여러 번 한 소리지만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 안에는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교 문화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제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풍경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공존이 있었군요. 미신이라고, 그 구박을 받던 당산나무가 절 마당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모습. 이거야말로 포용이고 어울림이고 사랑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이렇게 조화롭게 흐른다면 싸우고 미워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곳에서는 해마다 스님과 주민이 어울려 당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날짜를 알아봐서 꼭 참가해야겠습니다.

 

내소사 대웅전

내소사 경내

능가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곳에 자리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633) 창건됐다고 전해집니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내소사를 한국의 5대 사찰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산과 어울리는 조화로움이 매력이라고 했던가요? 내소사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옵니다. 절을 중창할 때 단청을 하기 위해 화공이 법당으로 들어가면서 내가 나올 때까지 절대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했답니다. 하지만 한 달이 되도록 화공이 나오지 않자 궁금증을 못 견딘 사미승 하나가 살짝 법당 문을 열었다지요,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은 이렇게 곳곳에 전설을 낳습니다. 사미승이 보니 화공은 없고 영롱한 새(觀音鳥 관음조)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더랍니다. 사미승을 본 새가 날아간 건 예견된 결과. 그래서 지금도 단청 한 부분이 미완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 전설은 두 가지 교훈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인간의 천박한 호기심에 대한 경계겠지요. 다른 하나는 비움의 미학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대개는 미완성을 아쉬워하지만, 제게는 그 비움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마지막 붓질처럼 보입니다.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되레 아름답다는말도 안 되는 역설인가요?

 

내소사 대웅전 꽃살문

비어있음은 대웅보전 외양에서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보물 291호인 내소사 대웅전은 단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단청을 안 한 건지, 세월이 벗겨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다른 절들이 화려함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일 때, 나무 고유의 색깔로 비바람을 견뎌왔다는 게 또 하나의 비움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소사를 상징하는 두 가지를 꼽는다면 전나무 숲과 꽃무늬 문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양 중의 으뜸은 꽃 공양이라고 했던가요? 여덟 짝의 꽃무늬 문살은 막 피어나는 꽃잎의 요철을 반영한 정교한 조각으로 마음을 당깁니다. 나무의 질감은 세월에 씻겨 무뎌졌지만, 꽃들은 아침이슬에 피어난 듯 생생합니다. 모란과 연꽃 수천 송이를 연년세세 피워내어 사바세계의 어리석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꽃 하나하나엔 깨달음을 희구하는 서원이 담겨 있을 테지요. 저도 꽃살문 앞에 서서 서원 하나 세워봅니다.

 

말로 말하지 않고, 바람으로 듣지 말고, 밥으로 마음 부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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