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장전계곡'에 해당되는 글 1

  1. 2011.08.22 [이야기가 있는 사진 12] 이끼계곡을 가다 말고12
2011. 8. 22. 08:30 이야기가 있는 사진

 

가리왕산의 장전계곡을 찾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영월에서 열리는 2011 동강국제사진제에 갔던 차에 이끼계곡을 들러볼 참이었지요.
이끼는 사진 찍는 사람들에게 꽤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사진을 처음 배우게 되면 산으로 강으로 들로 쏘아 다니거나, 꽃 또는 주변 사람들을 마구 찍다가 조금씩 특정한 곳들을 찾게 되지요.
일출, 일몰, 물안개 그리고 새벽 운해, 황금들판 등이 단골 목표가 됩니다.
파란 이끼가 융단처럼 펼쳐진 산 속 계곡 역시 이 대열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전, 상동, 무건리 등의 이끼계곡과 지리산 실비단폭포 등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해로 이끼가 망가지기도 하고 출입금지 구역도 있기 때문에 마음먹는다고 무조건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저처럼 사라져가는 것같은 특정소재를 찍는 사람들은 그런 곳을 찾아다닐 기회가 흔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있어도,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이지요.
사실 그런 사진을 잘 찍을만한 방법을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그날 장전계곡에 도착하기 전에 차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진 찍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발길에 망가진 이끼를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제 발자국 하나를 더 찍는 게 죄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이끼계곡을 검색하다보면 아름다운 사진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후기 중에 꼭 빠지지 않는 게 이끼를 망가트리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깊은 산속
, 시린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이끼를 찍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우선 시간이 중요합니다.
가능하면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지고 난 뒤, 광량(光量)이 적을 때 찍어야 저속 셔터스피드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셔터스피드가 느려야 물의 흐름이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햇빛이 드는 낮에는 촬영을 피하는 게 좋지만, 굳이 찍을 수밖에 없다면 ND 혹은 CPL 필터로 광량을 줄여야 합니다.
흔들림을 막기 위한 삼각대와 릴리즈(선으로 연결된 외장 셔터)는 필수장비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조건들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끼를 제대로 찍기 위해서는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한 여름에도 아침저녁으로는 물이 차고, 또 미끄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장화를 신는 게 좋지만 대개는 번거롭다는 이유로 등산화 차림으로 갑니다.
문제는 여기서 생깁니다.
등산화를 신은 채 혹은 맨발로 물속에 들어가는 게 꺼려지니까, 이끼가 깔린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끼는 밟히고 뭉개지고 다음 사람이 또 그 위에 서고.
이끼는 한번 망가지면 복원되는데 꽤 많은 시간이 흐릅니다.
그 정도는 그래도 양반입니다.
자신이 찍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이 찍지 못하도록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뭉개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끼계곡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 이유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걸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카메라를 들고 떠돌기 시작한 뒤로는 그 믿음이 가끔 흔들리곤 합니다.
노래방이 전 국민을 가수로 만들고 인터넷이 글쟁이를 양산했다면, 디지털카메라는 사진작가’들을 쏟아내놨습니다.
문제는 사진 찍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사진 찍는 예의는 배우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남기는 게 아니라 욕심의 흔적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가을꽃 중에 꽃무릇이라는 게 있습니다.
석산이라고도 하는데, 9~10월쯤 절 근처의 산기슭이나 평지에 무리지어 자라는 붉디붉은 꽃입니다.
그 계절에 고창 선운사에 가면 도솔천 주변으로 마치 붉은 융단처럼 깔린 꽃무릇의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전국에서 사진가들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에겐 들어가지 말라고 쳐 둔 선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꽃이 꺾이든 밟히든 비명을 지르든 아랑곳 안합니다.
심지어 몇 해 전에는 꽃을 꺾어 고목나무에 꽂아놓고, 마치 그곳에서 꽃이 피어난 듯 찍어서 사진 사이트에 올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진이 아니라 사기부터 배운 사람이지요.

이런 일들은 이끼계곡이나 도솔천 주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사진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가 청송 주왕산의 주산지입니다.
조선 숙종 때 쌓기 시작해 경종 때 완성한 꽤 오래된 저수지이지요.
영화 ,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로, 또 물속에서 자생하고 있는 왕버들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새벽이면, 붉은 단풍과 물안개가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합니다.
여기에도 제멋대로 사진가들은 꼭 있게 마련입니다.
보호 목책을 쳐놓고, 사진 찍는 장소도 별도로 만들어놨지만 몇몇 사람들은 기어이 목책을 넘어가고야 맙니다.
남들이 찍을 수 없는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 때문이겠지요.
저수지가 메워지든 왕버들이 죽어가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느 유학자의 장례식에 취재 차 갔을 때는, 운구하다 잠시 멈춘 상여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여성 사진가도 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암묵적으로 형성된 포토라인 따위는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찍든 말든, 시야를 가리고 서서 욕심 채우기에 바쁩니다.
제가 사진가들이 몰려다니지 않을 곳만 찾아다니는 이유입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까요?
한강변에서 열리는 서울불꽃축제를 딱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가자마자 질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작 몇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도 사진을 찍을 만한 곳은 이미 삼각대로 꽉 차 있었습니다.
사람은 몇 명 없는데 웬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한 두 사람이 수십 개의 삼각대를 세워놓고 다른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지키고 있더군요.
소위 자리를 맡아놓은 것인데, 사진서클이나 동호회마다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다보니 혼자 가거나 구경삼아 간 사람들은 아예 뒷전으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억울하면 하루 전에 오면 되지라고 말하겠지만, 제 눈에는 자신들만 아는 파렴치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조금 고리타분한 얘기지만, 사람의 가장 큰 미덕이야말로 염치를 알고 예의를 지킨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바로인간이요하고 내세울 수 있는 이름표가 그것입니다.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끼를 일부러 밟아 뭉그러트리고, 꽃무릇을 꺾어 고목에 꽂고, 남의 장례식에 상여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행위야말로 짐승과 구별하기 어려운 짓입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거실에 떡 하니 걸어놓으면 자식들 앞에 두고두고 자랑스러울까요.
어찌 사진가들뿐이겠습니까만.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심약한 제가 지레 겁먹고 장전계곡행을 포기하는 순간 든 생각들입니다.

 

 

사진들은 이끼계곡이 아닌, 깊은 산속의 평범한 계곡입니다.
이끼계곡만큼은 아니겠지만, 제게는 훼손되지 않은 이 곳이 지상 최고로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