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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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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18. 10:54 백두산을 가다

 

 

공주릉? 임자 없는 무덤들
집안에서 급한 숨 돌린 버스는 또 힘차게 길을 나섭니다. 오후 일정은 고구려 공주릉과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그리고 장군총이라고 불리는 장수왕릉을 돌아보도록 잡혀 있습니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조금 달리는가 싶더니 어느 한적한 골짜기에 일행을 내려놓습니다. 야트막한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묘 몇 기, 바로 고구려 공주들의 능이라고 합니다. 말이 공주릉이지 어느 시기의 어느 공주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남은 기록도 없고 증명할 만한 부장품도 없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공주릉이라는 이름도 그저 갖다 붙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재 집안 곳곳에는 고구려시대의 묘가 12000기나 남아 있다는데 제대로 조사가 이뤄졌는지 궁금합니다. 아무튼 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은데다,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오랜 세월 버림받았던 묘들에게 동북공정이란 우산을 씌우기 위해 급하게 꾸며놓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어느 묘는 잔디가 잘 입혀져 있지만 어느 묘는 거의 벌거벗고 있습니다. 둘레에 철망을 쳐놨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득한 시절에 귀한 신분으로 살다 갔을 그들과 묘지 앞에 서 있는 후세의 이름없는 한 사내 사이에는 아무런 교감도 흐르지 않습니다.

가이드도 설명할 만한 게 없는지 아니면 별 흥이 나지 않는지 바로 차를 출발시킵니다. 버스가 가는 곳은 광개토대왕 능과 비가 있는 통구(通溝, 퉁거우)입니다. 좁고도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달리다 도착한 곳은 평원 한가운데 있는 주차장. 버스를 내리자마자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능이 아니라 중국 지도와 장뇌삼을 파는 이들의 어눌한 한국말과 끈적거리는 눈빛입니다. 여행을 다녀와서 백두산 장뇌삼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곳에서 사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헌데, 가격이 들쑥날쑥합니다. 차에서 내릴 땐 몇 만원(이곳에서는 모든 돈의 단위가 한국의 입니다)까지 했다가 차로 돌아올 땐 만원, 차를 타기 직전엔 몇 천원. 가이드 말로는 천원까지 내려간답니다. 그 정도면 실팍한 도라지 한 뿌리 값이나 될런지. 대체 어디에 어떻게 심어 뽑아오기에.

유리창 안의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 묘역은 깔끔하게 잘 가꿔놓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을 위한 게 아니라, 소위 동북공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반가움보다는 착잡한 심정이 앞섭니다. 잘 아시다시피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2002년부터 시작된 국가차원의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조선, 발해, 고구려가 모두 중국 역사라는 논리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억장이 무너질만 한 역사왜곡이지만 그들은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광개토대왕 묘역이 조성된 것이니 반가워 할 일 만은 아닌 것이지요.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급하게 공사를 해놓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왕의 비와 능으로 가는 길에는, 토끼풀이라 부르는 클로버가 지천입니다. 이곳의 클로버는 잎이 얼마나 큰지 과장 좀 보태서 거의 손바닥만합니다. 몇몇 여자 분들은 네잎클로버의 행운을 누려보겠다고 풀 섶을 뒤지기도 합니다. 마치 여고시절 쯤으로 돌아간 듯 얼굴마저 발그레해졌습니다. 조금 걷자 광개토대왕비를 모셔둔 커다란 보호각(비각)이 보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집니다. 두만강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괜스레 호흡이 빨라집니다. 유리로 사방을 둘러싼 보호각 안에 거대한 돌이 서있습니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광개토대왕비입니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의 능비입니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 젊은 나이로 세상 떠날 때까지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대제국으로 건설한 왕 중의 왕.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이 세상을 뜬지 2년 뒤(414)에 건립했습니다. 비석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씌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라고 부릅니다. 높이는 6.34m, 각 변의 길이는 1.5~2m인 자연석으로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의 표면이 불규칙하여 글자 수 통계에 이론이 있습니다.) 비가 세워질 당시에는 삼국이나 중국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처럼 거대한 비가 없었다고 합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끝없이 길어질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 두겠습니다. 일 삼국이 모두 관련된, 가장 논란이 많은 역사유물이 바로 이 광개토대왕비니까요.

보호각 유리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있지만 사진 촬영은 금지돼 있습니다. 안내가 아닌, 경비가 주업인 것으로 보이는 중국인 여성 관리원이 의자에 앉아서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밖에서 사진을 찍자니 유리창에 어리는 그림자 때문에 맘에 드는 컷을 건지는 게 불가능합니다. 안타깝지만, 보호를 위해서 그런다니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역사가 남긴 비석을 남의 땅에서 봐야하는 것도 서글픈 일이지만, 이곳이 여전히 내 나라 땅이었다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보존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관람객들은 한국인 일색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 머나먼 곳까지 불러왔을까.
 
! 대왕이시어
광개토대왕릉은 비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의 주인을 설명하기 위한 비()이니 멀리 떨어져 있을 리는 없겠지요. 비에서 조금 걸어올라가다 보니 작은 동산 크기의 능이 보입니다. 우리가 흔히 봐온 조선왕조의 능과는 크기나 형태 자체가 다릅니다. 한 변이 66m라니 원래의 규모가 어렵잖게 짐작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초라한 모습의 돌무지일 뿐입니다. 장수왕릉의 5배 크기였다지만 상당 부분은 이미 허물어져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지금도 돌들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기계충을 앓아 군데군데 헐어버린 아이의 머리처럼 흉한 모습입니다. 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철제계단을 놓았습니다.

계단 끝에는 벌겋게 녹슨 철문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석실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차례를 기다려야 합니다. 16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무덤, 대체 무엇을 간직하고 있을까. 드디어 내 차례, 버릇이 되다시피 한 가슴 울렁증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예 고질병이 되지 않았나 의심스럽습니다. 묘 안에 다 들어간 순간! 그곳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모꼴의 천장, 때우듯 곳곳을 발라놓은 세 방향의 벽, 그리고 바닥에는 2개의 널방(관을 안치한 네모형의 방). 그것이 전부입니다. 허무한 세월의 그림자만 벽마다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왼쪽이 광개토대왕의 널방이고 오른쪽이 왕비의 널방이라고 하는데 원래의 모습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바닥에는 지폐들이 너저분하게 깔려 있습니다. 대왕의 영험으로 인생길에 고속도로 좀 깔아달라는 염원이 담긴 돈인지도 모릅니다. 중국 돈과 우리 돈이 섞여 있는데 우리 돈은 1000원짜리뿐입니다. 이왕 뭘 좀 바랄 거라면 팍팍 좀 쓸 것이지 1000원짜리가 뭐람. 농담을 해보지만 지저분한 모습에 마음이 좋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누군가 정성껏 엮어서 널방 앞에 놓은 클로버 꽃입니다. 서둘러 밖으로 나오니 넓은 평원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저만치 북한 땅도 보이고 집안시도 가까이 있습니다. 전에는 광개토대왕비와 능 사이의 초원에 400여 가구가 살았다는데, 고구려 문화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면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후예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갑니다.

장수왕릉에서 비를 맞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서 장수왕릉으로 향합니다. 광개토대왕릉과는 1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고구려 묘 12000기 중 외형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은 장수왕릉 뿐이라고 합니다. 7층 높이의 능은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입니다. 이 능을 중국에서는 장수의 무덤 중 하나일 거라고 추정, 장군총이라고 불러왔습니다. 화강암을 쌓아올린 높이 12.4m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입니다. 1,100여 개의 잘 다듬어진 돌을 쌓고 그 안을 조약돌로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맨 아래의 4개면에는 돌이 밀려 나지 않도록 거대한 호분석(護墳石)을 3개씩 세워두었는데, 지금은 하나가 없어져 모두 11개가 남아 있습니다. 이 능은 일찌감치 도굴당해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전에는 철제계단을 통해 능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막아놔서 겉모습을 보는데 만족해야 합니다.

안내하는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근처에는 광개토대왕비나 능, 그리고 장수왕릉에 쓰인 거대한 돌들이 분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돌들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광개토대왕비만 하더라도 30이고 장수왕릉에는 50t 짜리 돌도 있다는데. 멀지 않은 곳에 채석장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백두산 인근에서 옮겨왔다는 설명이 더 무게감 있게 와 닿습니다. 문제는 350km나 떨어져 있다는 백두산에서, 별 장비도 없이 그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겨왔느냐에 있습니다. 배에 싣고 압록강을 타고? 어림도 없습니다. 50t짜리 돌을 실을 만한 배를 만들기도 쉽지 않지만 강의 깊이 때문에 배가 바닥에 닿겠지요. 그런 문제를 풀어준 게 겨울의 강추위였다고 합니다. , 강이 꽁꽁 얼었을 때 그 위로 돌들을 옮겼다는 것이지요.

능의 사면을 돌면서 사진을 찍는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광개토대왕릉에서 내려올 때쯤부터 하늘에 먹장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탈이 난 것입니다. 남의 땅이 되어버린 곳에서 곁방살이를 하고 있는 조상들의 설움이 비가 되어 내리는 건 아닐까 하는, 아니면 '에라이 무심한 놈들아. 줄 건 없고 비나 한번 맞아봐라' 하는 노여움이 아닌가 하는, 평소의 저 답지 않은 생각에 걸음이 무겁습니다. 비는 금세 폭우로 변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가는데도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카메라만 갈무리한 뒤, 천천히 내려옵니다. 그깟 비를 피하려 허둥지둥 뛰기에는 오랜 날들 버려진 채 눈비를 맞고 서 있었을 돌무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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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11. 10:23 백두산을 가다

 

5시간 30분을 달려가다
밤새 늘어지게 쉰, 우리의 노란버스는 심양 시가지를 씽씽 달려갑니다. 0715. 아직 출근시간 전이라서 도로는 한산한 편입니다. 조금 달렸는가 싶었는데 마술이라도 부린 듯 풍경이 싹 바뀝니다. 빌딩은 사라지고 논과 밭이 이어집니다. 심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동북평원, ‘만주벌판으로 불렸던 이름에 걸맞게 끝이 없습니다. 논마다 모내기가 한창입니다. 우리보다는 꽤 늦은 편입니다. 기계이양은 찾아보기 어렵고, 과거에 우리가 그랬듯이 손으로 모를 심습니다. 차는 열심히 달리지만 달라지지 않는 풍경에 슬슬 질리기 시작합니다. 설친 잠을 벌충한다고 눈을 감아보지만 온갖 상념이 장마철 개구리처럼 울어댑니다.

심양에서 집안까지는 5시간 30분 거리. 요녕성에서 길림성으로 넘어가야 하니 그리 만만한 여정은 아닙니다. 중국 땅이 한반도의 100배쯤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도를 보면 바로 옆 동네인 것 같은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것보다 더 걸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가이드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우스갯소리를 보탭니다. 중국 사람들은 기차나 버스를 타고 열 시간 스무 시간 가는 것을 이웃에 마실 가는 것 정도로 여긴다고 합니다. 여행을 하다 목적지가 두 시간쯤 남으면 거의 다 왔다고 짐을 챙긴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남으면 짐을 들고 문 앞에 서있는답니다. 킬킬 웃으면서도 괜히 드는 주눅을 감추지 못합니다.

중국에는 묘지가 없다
?
여행길의 지루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갸륵한 조선족 청년, 가이드의 설명은 이어집니다. 요즘은 중국에서도 개인 땅이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아직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의 소유는 아니고, 30~50년간 장기임대 형식으로 땅에 대한 권리를 부여한다고 합니다. 그 임대권이 자식에게 넘어간다면 거의 완전한 소유나 마찬가지겠지요. 가이드 자신이 조선족이기 때문인지, 소수민족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54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대부분은 언어와 문화를 상실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한족(漢族)에 동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다행히 조선족은 잘 지켜내고 있다니 고맙고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다 깨다 이야기를 듣다 잠시 화장실을 들렀다가. 여정은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요녕성과 길림성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먼저 자동차들의 번호판이 요녕성의 (간자체로 씀)’자에서 길림성(吉林省, 지린성)吉'자로 바뀐 것이 눈에 띕니다. 드문드문 산들이 차창 밖으로 달음질치는 게 산악지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일행 중 한 분이 묻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왜 무덤이 없지요?”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무덤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가이드의 목소리에 신명이 오릅니다. 역시 질문은 시어머니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맞나봅니다. 애당초 묘지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이 국가 정책으로 묘지를 못 쓰게 했다고 합니다. 등소평 자신부터 화장을 선택했다고 하지요.

그가 걸출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집계된 인구만 해도 13억이라는 중국이, 사람이 죽을 때마다 매장을 한다면 아마 모든 땅이 묘지로 변할 게 뻔합니다. 산 자들이 살아야 할 땅을 사자(死者)들이 차지하는 셈이지요. 우리나라도 묘지문제는 이미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거꾸로 달리는 이는 어디든 있는 법. 지금도 몰래 매장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전봇대는 주변을 도톰하게 쌓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는 그 안에 부모의 시신을 묻는 사람도 있답니다. 차가 산골 쪽으로 들어가면서 이제 우리 곁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간간히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냇가에 앉아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가슴 저릴 만큼 아름답습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저로서는 그냥 지나치는 것도 고역입니다.

고구려의 땅에 도착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산은 험하고 계곡도 깊어집니다. 창밖으로 철도 하나가 길게 누워 있는 게 보입니다. 바로 북한과 연결된 철도라고 합니다. 남북 간에는 끊어진 철도가 이 오지와는 연결돼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헐떡거리며 달리던 버스가 작은 도시로 들어섭니다. 드디어 고구려의 땅집안(集安, 지안)입니다.

 주몽이 부여를 빠져나와 고구려를 세웠을 때 첫 수도는 이곳 집안이 아니라 졸본성(卒本城)이었습니다. 졸본성은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桓仁縣) 오녀산에 있는 산성이라고 합니다. 지도를 보면 집안에서 심양 방향으로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유역입니다.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3년까지 34년간 동안 그곳에 있다가 유리왕 22년에 국내성, 즉 지금의 집안으로 옮겼습니다.(그보다 한참 뒤에 천도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 후 장수왕 15(427) 남진정책을 위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게 됩니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라 요녕성 태자하유역의 요양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집안은 중국의 3대 국경도시로, 북한의 만포진과 손끝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습니다. 도시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편으로 인구가 30만 정도입니다. 집안은 우리에게는 많은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북한과 인접해 있다는 것 말고도 고구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성터나 환도산성, 그리고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군총(장수왕릉) 등 고구려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불고기가 그 불고기?
집안 시가지를 가로지른 버스가 어느 음식점 앞에서 섭니다. 압록강이 코앞인데 웬 음식점?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아침을 먹은 뒤 내내 차를 탄 기억밖에 없는데. 안내서에 오늘 점심은 불고기라고 쓰여 있던 게 기억납니다. 예까지 와서 무슨 불고기람? 썩 마음에 드는 메뉴는 아닙니다. 저는 다른 나라에 가면 아무리 거친 음식이라도 현지식을 먹어야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문화는 음식에 집약돼 있다는 믿음 때문이지요. 하지만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서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저게 불고기야? 야외에 있는 둥근 테이블에 상을 차렸는데, 가운데에 숯불화덕이 놓여있고 그 위에 철망 석쇠가 놓여있습니다. ‘불고기? , 제가 생각하던 그 불고기가 아닙니다. 쟁반에 생고기와 양념고기가 푸짐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기를 불에 구워먹는다고 해서 불고기?!!

모든 게 푸짐합니다. 고기도 밥도 상추도. 일행은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둘러앉아 고기를 굽습니다. 젓가락이 빛의 속도로 오갑니다. 옆 테이블에서 소주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래, 뭔가 허전하다 했지. 저도 질세라 소주를 시킵니다. 평생 기자질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점심시간에도 적정량의 알코올을 섭취할 수 있는 능력뿐입니다. 소주는 한국에서 건너온 것들입니다. 주인도 종업원도 우리말을 합니다. 돈도 한국 화폐가 기본. 소주 한 잔에 알딸딸해진 머릿속은, 예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고기는 먹고 남을 만큼 충분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하물며 압록강이야. 구워라, 부어라, 마셔라. 배가 부르고 나서야 고국에 두고 온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모두들 배가 남산 만해져서야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 압록강 푸른 물이여
드디어 압록강을 만날 시간입니다. 음식점 문을 나서자마자 술기운은 슬며시 가시고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합니다. 음식점에서 압록강까지는 지척입니다. 조금 걸어가니 저만치 강물이 보입니다. 달리 듯 걸음을 재촉합니다. ‘鴨綠江이라고 새긴 표지석 앞에 서니 가슴은 더욱 뜁니다. 강은 그저 강일뿐인데 어인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강폭은 예상했던 것보다 넓지 않습니다. 상류 쪽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물은 푸르고 푸릅니다. 강물을 훑던 눈길은 천천히 강을 건너 맞은편 기슭에 가 닿습니다. 저곳이 바로 북한 땅. 그리 넓지 않은 강인데, 눈길은 건너도 몸은 건널 수 없습니다. 타인의 땅에 서서 우리의 강토를 바라만 봐야하는 심정은 그저 안타까움입니다.

그런데, 강의 이쪽과 저쪽 땅이 너무 다릅니다. 중국 쪽의 산들은 나무들로 푸르게 우거져 있는데 북한 쪽은 벌겋게 발가벗고 있습니다. 산어귀뿐 아니라 등성이까지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이드가 설명을 해줍니다. 북한의 모든 농토는 국가 소유지만,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개인이 산에 작물을 심어 수확하는 건 허용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저 비탈을 벗겨서 무슨 농사가 된다고. 비라도 내리면 모두 씻겨 내려갈 텐데. 그래도 자신의 수확물이 생긴다는 희망 하나로 열심히 농사를 짓는다고 합니다. 집단농장의 공동경작이 끝나는 여섯시가 넘으면, 너도 나도 산으로 올라가 물도 주고 김도 맨다는 것이지요. 내 손으로 심어 내가 거두는 것만큼 소중한 게 있을까요. 하지만 낱알 몇 줌을 얻기 위해 산비탈에 흘려야할 땀과 노고, 상상만으로도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찌릅니다.

 
벌거벗은 산들과 목탄차
가이드는 산을 벗겨먹는 것도 순서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로 치면 이장이나 통장 쯤 되는, 힘 있는 사람은 아래쪽을 차지하고 그나마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은 꼭대기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또 아무 산이나 벗기도록 허용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법 푸른 산도 간혹 보입니다. 망원렌즈로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산 밑 도로를 따라 일렬로 서 있는 단층집들을 발견합니다. 기계로 찍어놓은 듯 똑같이 생긴 집들.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한참 뒤 트럭 한 대가 짙은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지나갑니다. 연기가 심상치 않아 물어보니 나무를 때서 움직이는 목탄차라고 합니다.

 

강 위에는 모터보트가 굉음을 쏟아내며 물살을 가릅니다.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관광 상품입니다. 너도 나도 한 번씩 타보겠다고 줄을 섭니다. 하지만 저와 제 친구들은 망연한 눈길을 북한 땅에서 떼지 못합니다. ‘뱃놀이만은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서로 통했는지도 모릅니다. 괜한 감정낭비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가슴 속의 납덩어리는 쉽사리 내려앉을 기미가 아닙니다. ‘보다는 건너 쪽에 있는 사람들때문일 겁니다. 이제는 그만 돌아서고 싶습니다. 가이드를 재촉해서 버스에 오릅니다.

 

다음엔 공주릉,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릉, 장수왕릉고구려의 유적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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