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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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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도'에 해당되는 글 1

  1. 2011.10.04 [이야기가 있는 사진 14] 시간마저 임자가 없는 섬4
2011. 10. 4. 09:28 이야기가 있는 사진

 

혹시 그대, 임자도를 가려거든 특별한 기대 같은 건 버리고 떠나십시오.
늙고 젊은 남녀 주인공이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며 돌담 사이를 걸어오는 장면이 보고 싶거든 아예 청산도로 가십시오.
그곳 임자도에는, 사람이나 풍경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고 임자 없는 시간만 널려 있으니까요.

임자도를 찾은 건 한반도에도 새로 생긴 우기
(雨期)의 끝 무렵이었습니다.
비는 그쳤는데도 하늘은 여전히 낮게 내려와 으르렁거리고 있었지요.
인생의 쓴맛이나 실연의 상처를 달래려 그 섬까지 찾아간 건 아니었지만, 가슴 근저(根柢)에 쓸쓸함마저 없었다고는 못하겠습니다.
임자도.
면적 39.18, 인구 4,076(1999), 해안선길이 56.5km이다. 사질토 토양에서 자연산 깨가 많이 생산되어 임자도라고 하였다. 목포시와의 거리는 66.6로 신안군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인터넷에서 백과사전을 살짝 베낀 내용입니다.
어딜 봐도 특별하다고 할 게 없는 섬입니다.
, 두어 가지 눈에 띄는 게 있긴 하네요.
하나는 인구조사연도가 1999년이라는 것.
10년도 훨씬 더 지났는데, 왜 수정하지 않았을까요?
모르면 몰라도 지금은 그 당시보다 인구가 많이 줄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건 깨가 많이 생산되어 임자도라고 했다는 설명입니다.
임자라는 단어가 글자가 되어 눈앞에 놓였을 때, 쓰임새가 제법 많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물건을 소유한 사람’, 즉 주인이라는 말로 쓰이지요.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호칭으로도 쓰였고, 나이가 비슷한 사람끼리 자네대신으로도 쓰였습니다.
이밖에도 임자(壬子)는 육십갑자의 마흔아홉째를 말하고, 또 다른 임자(妊子)는 임신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임자도의 임자는 들깨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임자(荏子)입니다.
옛날에는 유배를 온 사람들이, 사질토에서 절로 자라는 깻잎을 뜯어먹으며 연명할 정도로 척박한 섬이기도 했다지요.

지도(智島) 점암선착장에서 배(철부선)를 타고 20분쯤 걸려, 임자도 진리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배안에서 본 첫 인상은 조용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착장 주변에 음식점이나 가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우기라지만, 휴가철이 끝나지 않았고 피서지마다 청춘의 열기로 뜨거운 판인데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목적지를 해수욕장으로 잡게 했습니다.
사람구경을 좀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임자도의 대광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입니다.
백사장의 길이가 12km, 30리로 걸어서 가면 1시간20분 걸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쓸쓸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넓은 해수욕장에 점, , 점 박힌 몇 사람.
백사장이 워낙 넓다보니 썰렁함은 더해보였습니다.
상가도 철시분위기였습니다.
비가 워낙 많았던지라, 해수욕장이 하나같이 낭패를 겪은 여름이었지만 대광해수욕장이야말로 개점휴업이었습니다.
텅 빈 해수욕장을 얼른 빠져나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새우젓 집산지를 찾아가볼 심산이었습니다.
임자도는 병어나 민어 같은 어류가 많이 잡히기도 하지만 새우젓으로도 유명합니다.
해마다 1천여t의 새우를 건져내 전국 새우젓 어획고의 60%를 담당한다고 합니다.
새우젓배가 오간다는 전장포로 가면 사람 구경을 좀 하겠지.
사람을 떠나고 싶어 섬까지 찾아간 자가 왜 그리 사람을 그리워하는지 당사자인 저도 잘 모를 일입니다.

전장포로 향하는 중에도 상황은 달라질 기미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가도 사람 그림자 하나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인구감소를 피할 방법이 없는 다른 섬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임자도는 좀 특별한 것 같았습니다.
시야의 끝에서 선이 하나가 되는 길 위에도, 논에도 밭에도 심지어는 바다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넓게 펼쳐진 마늘밭, 밭가의 소나무 서너 그루, 그리고 이어지는 바다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다가 밭 가운데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한 것입니다.
대광해수욕장을 떠난 뒤 처음으로 만나는 주민이었습니다.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구나.
그 뒤로 천천히, 자전거 속도만큼이나 천천히 차를 몰았지만 사람 없는 풍경은 계속됐습니다.
드디어 새우젓의 고향이라 불리는 전장포.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새우 부리는 배와 새우젓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것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강아지 한 마리 없다는 건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새우젓마트라는 간판을 단 가게 앞에서 얼씬거려 봐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습니다.

빨랫줄에 빨래들이 그득하게 널린 집이 있길래 가까이 가 봐도 지붕 위의 둥근 박 두어 덩어리가 길손은 맞이할 뿐이었습니다.
동네를 빠져나오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7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 아직도 수천 명이 땅을 파거나 바다에 기대에 살아가고 있는 섬.
그곳에서 만난 주민이라고는 마늘밭에서 일하는 할머니 한 분.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어디 몰래 모여서 운동회라도 하는 걸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모습이 임자도의 매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보이지 않는 섬, 그래서 조금 고독하고 쓸쓸한 섬.
하루 종일 앉아서 사색에 빠져도 방해할 이 없는 섬.
따지고 보면 섬이라는 게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아무 것도 본 것 없는 제 안에 무언가 가득 담겨있다는 사실이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시간은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녀도 누군가 호주머니에 자꾸 시간을 넣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마저 임자가 없는 섬에서 맞은, 제 생애 가장 길고 평화로운 날은 그렇게 느릿느릿 흘러갔습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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