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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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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19 [사라져가는 것들 59] 지게12
2008. 5. 19. 14:29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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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구’가 언제쯤 아이가 사는 마을에 나타났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른들에게 물어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어느 날인가 물처럼 슬그머니 흘러들어와 자연스럽게 마을사람이 되었다는 게 고작 들을 수 있는 대답이었다. 전에는 마을마다 조금 모자라거나 넘쳐버린 사람들이 한 둘씩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배척당하지 않고 마을의 일원으로서 어울려 살았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마을구성원들 간의 조화가 이뤄졌다. 좀 부족한 사람도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되는 대상이 하나쯤은 있어야 마누라 앞에 기를 펴고 사는 법이니까. 징구도 그렇게 ‘모자란’ 사람 중의 하나였다. 원래 이름은 진구쯤 되겠지만 누구나 징구라고 불렀다. 어른들은 예우를 해준다고 “여게, 징구~”하고 불렀지만 철없는 아이들은 “징구, 징구” 놀리며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래도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나이도 알 수 없었다. 본인에게 물으면 손가락 다섯 개를 하나씩 꼽고는 했는데 그게 다섯 살이라는 건지, 쉰 살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다섯 살?”하고 물어도 고개를 끄떡였고 “쉰 살?”하고 물어도 바로 그거라는 듯이 고개를 끄떡거렸다. 어른들은 이미 쉰 고개를 넘어 예순은 됐을 것이라고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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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구는 언제나 지게를 지고 다녔다. 마치 지게와 한 몸인 것 같았다. 어느 땐 사람은 안 보이고 높다란 나뭇짐만 보여서 지게와 짐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징구는 잘 때도 지게를 지고 잘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늘 지게가 등에 붙어 있었다. 그는 동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꾼이었다. 나이를 먹었어도 힘이 장사인지라 다른 사람 두 배 이상의 짐을 졌다. 어느 집에 소속된 머슴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일손이 필요하면 그를 불렀다. 그는 마을 초입의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살았는데, 날이 훤하게 밝으면 빈 지게를 지고 마을 앞을 어슬렁어슬렁 지나갔다. 먼저 본 사람이 불러 세워 밥 한 그릇 내놓으면 그날의 고용계약이 성사되는 것이었다. 반찬이 있든 없든, 밥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뚝딱 해치운 다음에 일을 시작했다. 두엄을 내는 일이면 다 낼 때까지, 땅을 파는 일이면 다 팔 때까지 쉬는 법이 없었다. 나무를 해오라면 집채인지 나뭇짐인지 구별이 안 갈만큼 큰 짐을 지고 산에서 내려왔다. 장에 쌀을 낸다거나 먼 곳에서 물건을 사올 때도 그를 불러 동행하고는 했다. 배만 채워주면 꾀를 부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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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끝난 뒤에도 푸짐하게 푼 고봉밥 한 그릇이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이 빠진 사발에 막걸리라도 한잔 곁들여주면 세상이라도 얻은 듯 입이 찢어졌다. 그렇게 얻어먹은 다음 지게를 지고 뚜벅뚜벅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좀 모자란다고는 하지만, 어느 한집에 머슴으로 들어가면 새경도 꽤 받고 사랑방 하나 차고앉는 건 어렵지 않으련만 그는 그 걸 거부했다. 매인다는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모두 그를 공동머슴으로 여길 뿐, 독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농촌에서 가장 바쁜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야 그는 연례행사처럼 며칠씩 동네를 비웠다. 추수가 끝나면 징구에게 일을 시킨 집들은 곡식 낸 돈 몇 푼씩을 추렴해서 그에게 전했다. 그리고 새 옷을 한 벌 사 입혔다. 옷을 얻어 입은 다음날이면, 그는 온다간다 소리 없이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 뒤에 텅 빈 얼굴로 마을에 들어섰다. 누가 어디에 다녀오느냐고 물어도 그냥 씨익~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궁금한 것도 한두 해지, 나중에는 돈이 생겼으니 어디 가서 술이라도 마시다 왔겠지 짐작할 뿐이었다. 그는 다른 건 욕심내는 법이 없었지만 술은 밤을 새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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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와 한 몸처럼 살아서인지, 징구는 지게를 만드는데도 남다른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의 지게를 도맡다시피 만들어줬다. 징구가 지게 만드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보면, ‘모자라다’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정교한 솜씨에 혀를 내두르기 마련이었다. 지게의 몸체는 주로 소나무로 만든다. 그 몸체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가로의 이음목(세장)은 밤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를 깎아 사용한다. 지게의 몸체는 가지가 y자로 뻗은 나무 두개를 구해서 만든다. 가지는 튼튼하면서도 크기나 방향이 같아야한다.* 나무가 있다고 해서 지게가 금방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깎고 말리고 틀을 잡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가 사는 초가집에는 지게를 만들려고 깎아놓은 나무가 항상 두세 짝씩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가 다 마르면 몸체 두개를 A자형으로 세운 뒤 양쪽 옆에 3~4개의 홈을 파고 이음목을 박아 고정시킨다. 그런 다음 짚으로 멜빵을 꼬아서 맨 위의 이음목과 지게 발목에 걸어준다. 등이 닿는 부분에는 짚으로 엮은 등받이(등태)를 단다. 이 때 지게 전체의 균형과 멜빵의 길이 등 모든 요소가 맞아떨어져야 지게를 진 사람의 몸에 척 붙을 뿐 아니라 지게질 자체가 덜 힘들게 된다. 여기에 작대기와 바지게가 갖춰지면 지게 한 세트가 완성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긴 나무에 구멍을 뚫어 가지를 맞춰 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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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구는 지게를 지고 가다가 기분이 좋아지면 작대기로 지게다리를 두드리며 노랫가락을 뽑기도 했다. 대개는 바람 찬 흥남부두니 하는 노래였는데 그 가락이 흥겹고도 구슬펐다. 아이는 징구를 할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도 아이를 무척 좋아했다. 아이에게 찔레도 꺾어주고 풀피리도 만들어주고 개구리도 잡아 구워줬다. 그럴 때 그의 얼굴은 한없이 행복해보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마을에서 사라졌다. 시름시름 앓던 장부자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그날은 몹시 추웠고 저녁때부터는 눈이 쏟아졌다. 징구는 그날따라 금세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얼굴로 마당에 앉아, 막걸리를 통째로 끼고 마셨다. 사람들이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그날 밤 동네에서 사라졌다. 어떤 이는 그가 마을을 떴을 거라고 했고, 누구는 술에 취해 얼어 죽었을 거라고 했다. 그의 소식을 들은 건, 이듬해 나무마다 새싹을 내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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렵이었다. 그는 죽어있었다. 대처로 나가는 방향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골짜기의 도랑에 엎드려 있는 걸 나무하러갔던 동네 청년이 발견했다. 지게를 진 채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죽어서도 눕지 못하고 지게의 무게를 고스란히 진 채 겨울을 난 셈이었다.

그로부터 두어 해 뒤 어느 여름밤, 아이는 마당에 깔린 밀방석 위에 누워 징구 얘기를 들었다. 어른들의 두런두런 하는 소리가 개구리소리와 섞여있던 밤이었으니, 어쩌면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징구 그 사람이 그런 체 해서 그렇지, 아주 터무니없이 모자란 사람은 아니었어. 이북에 있을 때 어찌어찌 해서 늦게 본 딸이 하나 있었다네. 전쟁 통에 그것 하나 지게 위에 얹어서 내려왔다는구먼. 그 아이가 남의집살이를 하다 시집이라고 갔는데, 징구 이 사람이 1년에 한번씩 딸을 보러 다녔던 모양이여. 동네에서 안 뵐 때가 그 때였던 게지. 가긴 가도 딸한테 누가 될까봐 나타나지 못하고 먼빛으로 바라만 보다 돌아오고는 했던 모양인데. 아, 그런데 글쎄, 그 해 겨울 그 딸내미가 애를 낳다가 그만….”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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