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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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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보드롬의 바다. 배들이 평화롭게 떠다닌다.

보드롬성으로 들어가는 길. 엄마와 아들이 정겹게 사진을 찍길래 나도 찰칵!

헤로도토스를 불러내다

점심을 마치고 보드롬성으로 간다. 비행기에서 잠을 설친데다 이른 아침부터 이리 저리 걷고, 식사까지 늦어지다 보니 발이 납덩어리를 매달아놓은 듯 무겁다. 게다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몸은 리듬을 잃고 허청거린다. 아니면, 나이를 못 속이는 겐가. 아니야, 10kg이 넘는 카메라 장비를 메고 산을 들처럼 쏘아 다니는 체력인데. 스스로를 달래면서 성큼성큼 앞서 걷는다. 이제 보드롬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보드롬이 에게해의 끝이고 지중해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설명은 앞에서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좀 웃긴다. 누구 맘대로 어디부터가 무슨 해이고 어디까지가 무슨 바다라는 건지. 바닷물은 아무 경계도 없이 그저 오갈 뿐인데, 인간이 선을 긋고 금을 들이대며 너는 에게해고 너는 지중해란다. 그리고 그걸 두고 싸우기까지 한다. , 내가 책임 질 일은 아닌 것 같고. 보드롬에는, 보드롬이란 이름을 얻기 훨씬 전에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역사를 쓰고 키케로에 의해 역사의 아버지라 불린 헤로도토스(BC 484~420). 그래서 이 곳의 역사는 그를 통해 들을 수밖에 없다.

보드롬 전경. 오른쪽으로 아주 작게 보드롬성이 보인다.

보드롬성 아래의 모스크와 바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그리스의 도리아인들이 먼저 등장한다.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인들의 식민지 건설이 시작됐을 때, 그중 도리아인들이 만든 6개 도시 연맹 가운데 하나가 할리카르나소스(Halikarnassos), 바로 오늘날의 보드롬이다. 이 지역은 훗날 마우솔레움의 주인이 된 마우솔로스(BC 376~353)가 통치하던 시절에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역사 이야기는 길게 하면 재미없다. 특히 남의 역사는 더 그렇다. 아무튼 이 곳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기도 하다가, 리디아 왕국이 페르시아에게 패망하면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BC 129년에는 로마의 영토가 됐다가 그 후 AD 654년부터 이슬람의 공격을 받는다. 꽤 오랫동안 이슬람의 영토였던 이곳은 1402년 십자군인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함락된다. 그 들이 그때 보드롬성을 짓고 베드로성이라 불렀다. 또 이 지역을 베드로의 성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페테리움(Peterium)이라 이름 지었다. 이것이 터키말로 보드롬이다. 1522년 오스만에 의해 다시 점령된 뒤에는 계속 터키 땅으로 남았다. 한 마디로, 팔자가 드세서 이놈저놈 드나들며 제 땅을 삼은 곳이 보드롬이란 얘기다.

출항대기 중인 배들.

보드롬성 입구.

보드롬성과 마우솔레움

조용한 어촌이던 보드롬이 주목을 받게 된 건 1923년부터였다. 그해 체결된 로잔 조약에 의해 다음 해 터키와 그리스가 인구를 교환할 때, 그리스영토 크레타에 살던 터키인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제법 활기찬 도시로 발돋움했다. 보드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의 역사적 유물이다. 그 중 하나가 앞서 그 유래를 설명했던 보드롬성이고, 나머지가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는 마우솔레움(Mausoleum)이다. 이제부터 그곳을 찾아가야 한다. 이 둘은 아무런 관련도 없고 또 깊은 관련이 있기도 하다. 말장난? 그렇진 않다. 마우솔레움이 BC350년대에 건설되기 시작했고 보드롬성이 1400년대에 세워졌으니 1800년 가까운 시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역사 공부에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일단 궁금증을 심어놓고, 대답은 뒤로 미뤄 두는 것도 글 쓰는 자의 권리일 터. 사실은 둘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를 하려면 마우솔레움부터 들러야 술술 풀리는데 방문 일정이 보드롬성부터 잡혀 있으니 거꾸로 가는 수밖에 없다.

보드롬성 망루.

보드롬성.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 거의 훼손이 없다.

보드롬성으로 들어가는 길. 유럽 관광객들이 많았다.

보드롬을 상징하는 보드롬성은 양쪽에 항구를 거느린 곶의 끝부분에 제법 웅장한 자태로 서 있다. 지금까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 성은 당시에도 에게해에서 가장 견고한 성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성 입구에는 관광객이 제법 많다. 주로 유럽인들이다. 유럽의 연합군, 즉 십자군으로 한 때 이 도시를 점령했던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온 걸까. 일본인들이 서대문형무소를 찾아오듯. 성 내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각국을 상징하는 망루, 즉 성탑들이 남아있다. 성은 현재 인근 바다 밑에서 건져 올린 유물들을 전시하는 수중 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서 다시 바쁜 걸음들 속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걷는다. 우선 지친 몸도 달랠 겸 분위기 파악을 위해 벤치에 앉는다. 긴 세월을 머금은 우람한 나무들이 내리 쪼이는 햇빛을 잘 걸러준다. 땀이 좀 걷히면서 주변 풍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아래가 뾰족하고 토끼 귀처럼 손잡이가 달린 암포라들.

기사들이 예배드리던 교회. 지금은 배가 전시돼 있다.

교회 안에 전시된 배 모형. 항아리들이 가득하다.

좌측 뒤편으로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전시돼 있다. 바로 암포라(amphora)라고 부르는 항아리다 암포라는 '2개의 손잡이'라는 뜻인데 그릇마다 앙증맞게 달린 손잡이가 토끼 귀처럼 예쁘다. 포도주나 올리브유 또는 곡식의 운반저장용으로 썼다고 한다.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은 흙으로 만든, 밑이 뾰족하고 기다란 암포라다. 왜 굳이 아래를 뾰족하게 만들었을까. 고정을 위해 별도의 받침대가 필요했을 것 같다. 항아리들은 침몰된 배에서 통째로 건져 올린 듯 보존상태가 완벽하다. 앞에는 십자군 기사들이 예배를 보던 교회건물이 서 있다. 물론 십자군들이 물러간 뒤에는 이슬람사원으로 쓰였을 것이다. 정복한 자들에 의해 교회도 되고 사원도 되고. 사람으로 친다면 참 기구한 팔자다. 신들도 인간의 부름에 따라 왔다 갔다 하기에 바빴을 것 같다. 지금은 교회 안에, 해저에서 건져 올린 침몰선을 10분의 1 크기로 복원해 전시해놓았다. ()의 배()에는 항아리가 가득 실려 있다.

보드롬성 입구에 놓인 대포.

십자군 전쟁이 남긴 이야기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왕 주저앉은 김에 십자군 얘기를 잠깐 하고 지나가자. 십자군전쟁은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이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슬람세계에 있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총 8회에 걸친 원정을 말한다. 셀주크 튀루크에게 압박을 받던 비잔티움제국(동로마)의 황제가 교황인 우르바누스2세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그러잖아도 성지순례를 이교도들에게 방해받는 게 기분 나빴던 교황은 도랑치고 가재도 잡아보겠다는 심정으로 성전을 선포한 것이다. 교황은 십자군을 모으기 위해 갖가지 당근을 내밀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면 모든 교회법상의 처벌이 면제되고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으면 영혼은 곧 천국에 간다고 설파했다. 결국 상인들은 돈을 좀 만져볼까 하는 마음에, 농민들은 뼈 빠지게 일 해봐야 먹고 살기도 힘겨운데 봉건영주의 등쌀에서 좀 벗어나볼까 하고 원정에 가담했다. 이러다 보니 성전은 약탈에 가까운 전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여덟 차례의 원정 중 1차 때인 1099년 단 한번 뿐이었다. 그마저도 1144년에는 전열을 정비한 이슬람 세력에게 다시 빼앗긴다.

석문 위로 십자군에 참가했던 나라들의 문장이 보인다.

나머지 원정은 대부분 실패였다. 가다가 전멸당하기도 하고 엉뚱한 곳으로 새기도 하고 같은 편을 약탈하기도 하고. 시쳇말로 당나라 군대짓을 하기 바빴다. 십자군 얘기를 하면서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저질렀던 잔인한 폭거. 지금 들어도 치가 떨린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그곳에 거주하던 무슬림, 유대인,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들까지도 무차별 살해하기 시작했다. 만행은 무려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이 때 14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택은 물론 이슬람사원까지 쳐 들어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였다. 종교인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이리떼였다. 이 같은 대학살은 그동안 기독교인들과 공존하며 살아온 무슬림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물론 보드롬성을 세운 십자군과 그때의 이리떼들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보드롬에 들어온 그들은 패잔병에 가까운 십자군 끝물이었다. 로도스에 근거를 두고 마지막 항전을 하던 성 요한 기사단이, 오스만제국과 티무르 제국이 전쟁을 하는 틈을 타고 보드롬을 차지했다.

보드롬성.

성은 바다와 이어져 있다.

보드롬을 점령한 십자군은 성을 건축하고 이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주변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때 앞에 기술했던 마우솔레움과 관계가 맺어진다. 성을 짓기 위한 석재를 찾던 그들은, 지진으로 무너진 옛 무덤 마우솔레움을 찾아내고 심봤다!!”를 외쳤다. 돌들은 즉시 건축현장으로 실려 가고 무덤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조각들은 늙은 거지의 유품처럼 버려지고 파괴됐다. 덕분에 고대 7대 불가사의는 그 흔적을 깔끔하게 지우고 말았다. 또 하나의 폭거가 그렇게 저질러 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저것도 모두 유적일 뿐이다. BC350년대에 건설된 마우솔레움의 돌들이 15세기에 건설된 보드롬성의 뼈대가 되어 지금까지 버티고 있으니, 그것 또한 인연이라면 인연 아닐까. 성 요한 기사단에 관한 스토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뒷얘기가 재미있다. 느닷없는 역사 강의에 좀 지루하겠지만, 보드롬을 갔으니 이 정도는 알고 지나가야 한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표현을 앞세워 잔인한 전쟁광으로 묘사돼온 이슬람교도들. 누가 정말 잔인한지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여기에서 나온다.

세월을 말해주듯 성벽 돌틈에서 풀들이 자란다.

성내의 석문들. 석문들마다 문장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잔혹과 이슬람교의 관용

보드롬성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가던 성 요한 기사단은 오스만의 슐레이만 1세의 등장에 의해 일장춘몽이 깨지고 만다. ‘위대한 술탄슐레이만에 대항하기에는 보잘 것 없는 힘이었다. 보드롬에서 성 요한 기사단을 몰아낸 슐레이만은 그들의 본거지 로도스에 항복 할 것을 권유한다. 이 권고가 거부되자 슐레이만은 공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성 요한 기사단은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도 6개월을 버틴다. 그저 내버려 두기만 해도 굶어죽을 형편이었지만, 슐레이만은 공격을 멈추고 항복을 권유한다. 그때 내세운 조건이 재미있다. “그동안 너희들이 쓰던 배는 물론, 그 배에 보물이든 무기든 원하는 것을 다 싣고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배가 더 필요하면 빌려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바보짓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관용이었다. 물론 그걸 거절하면 더 바보다. 152311일 성 요한 기사단은 오스만이 내준 배에 무기와 보물, 가족을 싣고 섬을 떠난다. 예루살렘에서 피바람을 일으켰던 기독교인들과, 그 후예에게 배를 빌려주며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만든 무슬림. 이런 기가 막힌 역사는 늘 작은 모습으로 숨어 있게 마련이다.

박물관의 유리제품들.


문자를 새긴 석판.

박물관의 전시물들.

상념에서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성을 탐색하기로 한다. 계단을 오르면서 석문을 지나면서 곳곳에서 당시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던 나라들의 문장(紋章)을 발견한다. 마치 15세기로 돌아간 듯 생생하다. 기사들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은 환청에 두리번거리기까지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유물들은 화려하다. 성이 감옥으로 쓰일 때 만들어진 목욕탕도 있고 곳곳에서 정교한 유리제품도 만난다. 석재 관()과 금관, 각종 장신구들, 금전들. 세월 따위는 아랑곳 안 한다는 듯 조명 아래 여전히 자태를 빛내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리 큰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그저 갇혀버린 시대의 잔재들일 뿐. 사실 난 박물관이라는 것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심지어는 문화의 감옥이라고 폄훼하기까지 한다.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인 줄 잘 알면서도, 박물관에 갈 때마다 그들에게서 생명을 빼앗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짠하다. 모든 건 있을 곳, 아니 있던 곳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경주의 다보탑이 경복궁 마당으로 오는 순간 그저 돌덩이일 뿐이다. 하지만 바다 밑에 들어가 유물을 보고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니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성의 천장도 예술작품이다.

망루로 올라가는 길.

박물관에서 나와 성루로 올라가는 순간, ! 하는 탄성이 나온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짙푸른 바다와 그 위에 점점점 떠 있는 배들. 그리고 쏟아지는 햇빛 아래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집들. 햇살을 머금은 물비늘은 자반뒤집기를 즐기고 성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나는 지금 이렇게 평화 속에서 풍경을 즐기지만 이 곳은 전쟁을 위해 지어진 성. 그들의 목적이야 어쨌든, 그리고 어느 편이었든 전쟁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냈을 이들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돌 위에 철퍼덕 앉아 성을 올라오면서 본 풍경들을 하나씩 되새겨 본다. 얼굴이 사라지고 몸통만 남은 대리석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영국인들이 머리만 가져가고 남은 몸통이라고 한다. 하긴 영국박물관에 있는 유물의 대부분이 약탈물들이라나. 사람의 욕심은 돌조차도 제 땅에서 살지 못하게 한다. 옛 사람들의 욕심이야 어떻든 내겐 지금 앉은 자리가 천국이다. 몸은 무너질 듯 지쳤지만 난 지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지 않은가.

목이 없는 대리석상. 훔쳐갔을지도 모르는 이들의 후손(?)들이 장난스럽게 사진을 찍고 있다.


 

망루에서 바라본 보드롬.

나비가 장자더냐 장자가 나비더냐그들이 하나더냐 그들이 둘이더냐꿈인 듯 생시인 듯 나 자신을 풍경 속에 비벼 넣고 있는데 귓전을 파고드는 소음이 있다. 누가 누굴 부르는 소리다. 설마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늘어져 있는 나를 부르는 건 아니겠지, 돌아볼 생각도 안 하는데 그놈의 “Excuse me, Excuse me”가 멈출 줄 모른다. 에라, 어떤 부자 될 놈이. 돌아보니 터키사람은 아니고 허여멀건 한 유럽인(이 틀림없는)이 금발의 여자와 함께 날 바라보며 “Excuse me”. 야 임마. 내가 널 언제 봤다고 용서(excuse)’ 해달란 거야. 그러잖아도 너희 유럽인종들만 보면 내 나라를 침탈했던 왜족들이 생각나서 속이 뒤집어지는데. 귀찮은데 그냥 서로 갈 길 가자. 이 친구가 내 구시렁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턱이 있나. 당치도 않은 미소를 앞세워 한 발 더 다가선다. 보나마나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것이다. 이 친구들은 큰 카메라를 가진 사람이 사진을 찍으면 정종철(본인에겐 미안합니다)을 장동건으로 만들어 주는 줄 아는가보다. 가는 데마다 귀찮게 군다. 그래도 어쩌나. ! 하고 힘을 주며 일어서고 만다.

망루에서 바라본 바다.

망루에서 본 보드롬 시내.

카메라를 내게 넘긴 이 친구가 여자친구 손을 끌고 쫄래쫄래 가더니, 하필 햇볕이 등으로 쏟아지는 자리에 선다. 하긴 그쪽이 경치가 좋긴 하다. , 임마. 거기 서면 역광 땜에 사진 안 나와. 이쪽으로 서. 그나저나 역광이 영어로 뭐더라. 암튼, 너 거기서 찍으면 얼굴 시커멓게 나온다고. 짧은 말로 설명하는 성의 따위는 아랑곳없이 이 친구 “OK“를 연발한다. 네가 찍으면 잘 나올 테니 무조건 ”Try”해보란다. 트라이 좋아한다. , 무릎 아래만 찍어버릴라. 나도 늙어가나 보다. 심술이 느는 것이. 아무튼 오케이라니 찍을 수밖에. 제대로 안 나오는 건 제 팔자지. 셔터를 눌러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다. 안 듣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나 간 다음에 뭐라 건 알 바 아니다. 그렇게 성에서 내려오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피곤이 전신을 휘감는다. 이제 누가 떠밀어도 그 자리에서 자빠질 뿐, 움직일 힘이 없다. 오뉴월에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 늙은 개처럼 혓바닥을 빼어 문 채 벤치에 등을 의지한다. 일행들이 올 때까지 이러고 있는 수밖에. 에구구! 오늘은 팔자에 없는 세계사 공부만 실컷 하다 끝났다.

 

추천과 댓글 오늘도 그냥 지나치진 않으실 거지요?^^

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보드롬 바닷가. 배들이 빽빽하게 정박해 있다.

보드롬 해변과 거리의 카페.

아잔, 그리고 무슬림의 예배

아주 오래된 빵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이다.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와 좁은 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다 보니, 언덕 위에서 보았던 보드롬성 근처의 해변에 닿는다. 이곳은 아직 휴가의 여진으로 들끓고 있다. 벌거벗은 인파가 물고기 떼처럼 거리를 유영한다. 하긴 9월말이라고는 해도 30도를 웃도는 날씨니 바다를 떠나기는 아쉬울 것이다. 부두에는 호화롭게 치장한 요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몸을 부비고 있다. 부자들의 개인요트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세용이다. 요트를 세 내어 인근 바다에 나가 수영도 하고 배에서 만들어주는 즉석 해물 요리로 점심식사를 하는 재미가 근사하단다. 말 그대로 저 바다에 누워평화로운 한낮을 보낼 수 있다는 얘기다. 돈만 있다면. 대부분 유럽인들이 이용한다고 한다. 유럽에 비해서 비교도 안될 만큼 싼 가격에 호화로운 피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보드롬이다. 해안가를 따라 각종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부터 카페, 음식점, 바들이 나란히 서 있다.

1720년에 지은 모스크(이슬람교의 예배당)

해변 탐색은 뒤로 미루고, 일단 빵집이 있다는 바자르(이슬람 특유의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 보통 시장을 이르며 상점이나 공방이 늘어선 골목도 그렇게 부른다)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보드롬성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쇼핑타운이다. 바자르로 들어가기 직전, 광장에서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소리와 마주친다.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어쩌면 불경을 외는 소리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한. 그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거리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 무슬림들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이구나. 그러면 저곳이 이슬람사원인 모스크. 그나마 공부 좀 했다고 바로 눈치를 챈다. 이슬람교도들은 아침에 해 뜨기 전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 정오를 넘긴 낮, 오후, 해가 질 무렵,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도(聖都)인 메카 쪽을 향하여 모두 다섯 번의 기도를 한다. 그 기도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리는 소리가 아잔이다. 물론 새벽에도 아잔은 울린다. 전에는 모스크 한쪽에 높은 미나레트(첨탑)를 세워 담당 무슬림, 즉 무아진이 육성으로 기도시간을 알렸다는데 지금은 모두 확성기를 이용한다.

기도를 하기 전에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다.

이 아잔은 노래에 가까울 정도로, 특유의 리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러 번 들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뜻은 알라는 지극히 크시도다. 우리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맹세하노라. 예배하러 오너라. 구제하러 오너라. 알라는 지극히 크도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느니라라고 한다. 과연 조금 있으니까 무슬림들이 모스크를 향해서 꾸역꾸역 모여든다. 바자르나 인근에서 생업을 하는 사람들이리라. 모스크 입구에는 1720년에 지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긴 세월에 감탄하고 있는데, 누군가 저 정도면 그리 오래된 모스크는 아니라고 일러준다. 무슬림들을 따라 슬그머니 모스크로 들어가 본다. 일찍 온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가 기도 준비를 하고, 미처 못 들어간 사람들은 마당에 자리를 잡는다. 묵묵히 기도를 준비할 뿐, 누구도 이방인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오른쪽 마당으로 가보니 수도꼭지들이 있고 그 앞에 나란히 의자들이 놓여 있다.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거기서 손발을 씻는다. 젊은이들이 제법 많은데, 그 중엔 곱상하게 생긴 친구도 우락부락한 친구도 있다.

모스크 실내가 차면 자리를 깔고 바깥에서 기도한다.

튀르크족, 즉 지금의 몽골 땅에서 살던 돌궐족이 언제부터 이슬람교를 접했는지는 딱 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다. 아나톨리아로 땅으로 들어오기 훨씬 전인 8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돌궐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아바스왕조(7501258년에 동방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칼리프조)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슬람교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터키 인구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국교는 아니다. 터키공화국을 수립한 아타튀르크가 1928년 헌법을 수정하면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히잡을 쓰는 등 종교적 특성을 나타내는 행위는 금지된다. 이를 세속주의라고 하는데 종종 저항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세속화와 서구화에 대한 반대하고 이슬람으로 복귀하자고 주창하는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도 했다. 세속화의 영향으로 터키에서 교리의 적용은 다른 이슬람국가에 비해 그리 엄격하지 않다. 음주도 비교적 자유롭다. 일부 터키사람은 농담 삼아 스스로를 사이비 이슬람교도라고 칭하기도 한다.

바자르로 들어가는 길.


바자르에서 만난 사람들

기도를 더 이상 방해하면 안 되지. 모스크에서 나와 바자르로 들어간다. 햇볕을 막기 위해 친 하얀 차양이나 나무 넝쿨이 멋진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관광객들은 느긋하게 거리를 오가고 갖가지 상품들이 손짓을 한다. 나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길을 걷는다. 동양인이 신기해서일까? 장사를 하는 사람마다 “Where are you from”을 아끼지 않는다. 하긴 보드롬을 돌아다니는 내내 동양인들을 본 적이 없다. 대답을 안 하면 물건 파는 건 뒷전이고 따라오면서까지 국적을 캐묻는다. 재팬? 차이나? 그러다 코리아라는 대답이 나오면 곧바로 “My brother!!!“가 튀어나온다. 17년 전에 헤어진 형이라도 상봉한 듯 호들갑스럽다. 물론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다. ”네가 코리언이고 내 형제니까 특별히 ‘Good price’로 줄 테니 물건 하나 보고 가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는다. 그쯤이면 궁금해진다. 정말 한국인이 반가운 거야, 아니면 누구에게나 하는 장삿속이야. 설령 장삿속이라고 해도 불쾌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귀찮게 물고 늘어지지도 않거니와, 물건을 사든 안 사든 낄낄거리며 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점을 치는 아저씨도 있고 달랑 저울 하나 밑천 삼아 몸무게를 재주고 돈을 받는 아이도 있다. 자유와 활기가 넘치는 거리다.

바자르를 오가는 관광객들.

오래된 빵집은 골목 중간쯤에 있다. 하지만 그 앞에 서는 순간 실망감이 앞선다. 화려한 겉모습이 여느 현대식 빵집과 다르지 않다. 종업원들도 세련된 모습이다. 허름한 가게에서 늙어 꼬부라진 영감님이 빵을 굽고 있을 거라는 상상이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들어가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마침 내가 서 있던 집이 음식점 앞이었나 보다. 돌아보니 음식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입에 환한 웃음을 베어 물고, 얼음을 가득 채운 오픈형 냉장고를 가르친다. 얼음 속에는 문어나 각종 생선이 터키 맥주 에페스와 함께 묻혀 있다. 그걸 먹고 가라는 것이다. 얼음 속에서 문어를 꺼내 싱싱하다고 흔들어 보이기까지 한다. 한 냉장고에 생선과 맥주를 동거시키다니 참 특이하다. 먹을 생각이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 아저씨도 그냥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카메라를 보더니, 식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굉장한 풍경이 있다면서 “Take photo”를 외친다. 떠밀리다시피 들어가 보니 식당과 바다가 맞닿아 있고 차양 아래 관광객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며 한낮을 즐기고 있다. 유유히 떠다니는 배들, 저만치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보드롬성. 자랑할 만도 하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음식점. 맥주와 생선이 한공간에...

맥주와 음료를 즐기는 관광객들. 저만치 보드롬성이 보인다.

135년을 이어온 빵집을 가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눈치 없는 종업원이 다가와 ‘One beer’를 외친다. 콜라 한 잔이라도 팔겠다는 결의가 얼굴에 가득하다. 사진 찍으러 들어온 거라고, 사양하면서 나오는데 굳이 따라 나오면서 말을 건다. 당연히 “Where are you from”이다. 코리아라는 대답에 반색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혹시 터키 초등학교 교과서에 동양인을 보면 그렇게 물어야 한다고 나와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진다. 이 친구 끝내 따라 나오면서, 자기네 사장이 태국의 방콕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고 자랑한다. 코리아와 방콕이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의 이웃인 줄 아나보다. 결국 나를 사장에게 데려가더니, 이 사람이 한국에서 왔다고 입에 거품을 문다. 사장 역시 반색을 하면서 자신이 애인과 함께 방콕을 세 번이나 다녀온 사람이라는 걸 거듭 강조한다. 그래, 좋겠다. 네 번 다녀오면 확성기 들고 돌아다니겠다. 별로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수다를 떨다 작별하고 나오는데, 그제야 빵집 간판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SINCE 1876’. 가만 계산해보니 135년이다. 참 오래도 됐다. 10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빵장사 하나로 버텼다니, 뭔가 들을 만한 얘기가 있을 것 같다.

135년 된 빵집 내부. 너무 현대식이라 세월을 실감할 수 없다.

빵집 간판

빵집 주인은 친절이 뼛속까지 배어있다. 장사에 방해가 될 법도 한데 다큐팀이 영상장비를 들고 들쑤시고 다녀도 마냥 웃는 얼굴이다. 어쩌면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터키인의 주식은 빵이다. 쌀농사도 조금 짓기도 하지만 소비가 많지는 않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빵을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에는 대부분 기계가 만든 빵을 사다 먹는다. 이 빵집도 전에는 식사용 빵만 만들다가 요즘은 케이크나 다이어트용 등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판다고 한다. 그 말을 뒷받침 하듯 수백 가지의 빵들이 진열돼 있다. 그런데 운영방침이 좀 독특하다. 관광객이 몰려오는 여름을 중심으로 6개월 동안은 24

빵집 주인. 전형적 낙천주의자다.

시간 장사를 하고 겨울시즌에는 문을 닫고 논단다
. 그거 참 괜찮다. 아예 눌러앉아 취직을 해버려? 주인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빵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일종의 가족기업이다. 지금 함께 일하는 종업원들도 모두 친척이란다. 빵은 공장에서 새벽 3시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손으로 빵을 만들던 시절은 이제 아득한 옛날이 되었다는 걸 그의 말에서 읽는다. 그래도 한 장소에서 135년 동안 대대로 빵을 파는 사람들, 그 또한 장인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랴.

케밥을 만들기 위해 돌려가면서 구운 고기를 자르고 있다.

케밥과 맥주 한 잔의 기쁨

빵집에서 나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다. 뱃가죽이 등으로 달라붙은 지 오래다. 차를 통한 이동이나 식사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니 별 수 없다. 기내식을 제외하면 터키에서 먹는 첫 번째 식사다. 기대가 크니 더욱 배가 고프다. 프랑스와 중국에 이어 터키음식을 세계 3대 음식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터키 대신 인도를 앞세워 4대 음식에 넣기도 한다. 3대면 어떻고 4대면 어떠랴. 맛있다는 얘기겠지. 특히 다양한 종류와,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케밥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야외 음식점에 자리를 잡은 뒤 케밥을 시킨다. 터키에서는 글과 말을 몰라도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찾기 어렵지 않다. 식당 앞 큰 메뉴판에 음식 사진과 가격을 함께 적어놓은 곳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들어가서도 메뉴판을 달라고 해서 맛있어 보이는 걸 가리키면 된다. 음료는 터키의 전통요구르트 아이란(Ayran) 외에도 콜라나 스프라이트, 과일주스 등이 있다. 보통 생맥주도 파는데 당연히 가격은 음료수보다 비싸다. 음식점을 찾는 또 하나의 팁은, 가능하면 화덕이 있는 집으로 가라는 것이다. 다양한 음식을 맛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맛도 어느 정도 보장된다. 화덕은 보통 입구 근처에 있기 마련이다.

터키에서 첫 식사로 먹은 케밥.

불에 구운 요리를 뜻하는 케밥은 그 종류가 셀 수 없이 많아서 일일이 구분하고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 고기를 매달아놓고 돌려가면서 구운 뒤 얇게 잘라서 야채와 함께 빵 사이에 끼워 먹는 되네르(Döner)케밥이다. 국민요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케밥은 길거리 노점에서부터 카페, 식당 등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양도 제법 많아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잘 알려진 대로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송아지고기나 양고기를 재료로 쓴다. 닭고기를 재료로 하는 음식도 제법 많다. 케밥은 음료수와 함께 먹기도 하지만, 앞에 말했듯이 보통 아이란을 곁들인다. 터키의 요구르트는 걸쭉하기 때문에 보통은 떠서 먹는데, 아이란은 여기에 시원한 물을 타서 묽게 만든 것이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해물 요리도 먹을 수 있다. 나는 단 한 번 먹어봤는데 가격은 그리 싼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회는 없었다. 또 유명한 터키음식 중의 하나가 이스탄불 갈라타다리 부근에서 파는 고등어샌드위치. 일정 마지막에 이스탄불에 갔지만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이것 역시 먹어보지 못했다. 다음엔 꼭 먹어보리라 다짐하며 돌아섰던 아픈 기억이 있다.

터키식 피자인 피데를 만드는 청년.

다 만든 피데를 화덕에 넣고 있다.

조금 뒤 나온, 되네르케밥은 역시 맛있다. 허겁지겁 먹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남기는 사람도 있다. 막입인 나만 맛있는 걸까? 남들이 콜라나 생수를 시킬 때 눈총을 무릅쓰고 맥주를 시킨다. 흘린 땀이 얼만데. 몇 시간 전부터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했다. 가이드와 몇몇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점심 먹으며 술 마시는 사람도 있네? 혹은, 기자라는 족속들은 역시그런 눈초리. 아무렴 어떠랴. 이 황홀한 순간을 포기할 수 없는 걸. 잠시 뒤 화덕 쪽에서 수런수런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청년이 나와서 터키식 피자인 피데 만드는 시범을 보인다. 식사를 해 준 이방인들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피데쇼를 보여주는 것 같다. 밀가루를 두드리는 장단이 아주 경쾌하다. 미안하게도 밀가루 반죽을 허공에 던져서 넓히는 장면은 한국에서도 여러 번 봤다. 하지만 신기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쳐다봐준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청년의 동작에 신명이 붙고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른 아침 샘물처럼 맑은 얼굴이다. 하루 동안 만난 터키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욕심이나 원망보다는 긍정과 희망이 가득 찬 얼굴들. 거기서 힘을 얻는다. ! 일어나자. 또 걸어야지. 어쩌자고 하늘은 저렇게 푸르단 말이냐.

 

추천과 댓글란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님은 참 아름다운 분입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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