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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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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 PC방.

마을의 공동묘지.

흙집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니 현대식에 가까운 집들이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이곳의 건물들은 흙이 아니라 시멘트로 치장하고 있다. 고대의 어느 공간에서 느닷없이 현대로 이동한 한 기분이다. 흙과 시멘트 사이가 천년쯤 되는 것 같은데 고작 5분 거리밖에 안되다니. 아까 흙집에서 만났던,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도 이 동네에서 사는 게 아닌가 싶다. 2층 슬래브 집 마당에는 오토바이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서 있고 1층 처마에는 ‘INTERNET CAFE’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쉽게 말해 PC방이란 뜻이겠지. 3,000년 전의 흙집과 PC방의 차이는 이렇게 지척이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공동묘지가 있다. 묘지,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단어다. 게다가 평소에는 돌보지 않는 듯 풀들이 제각기 하늘까지 올라가보겠다고 아우성이다. 이곳도 추석 때만 벌초를 하러가나? 길가에서 당나귀 수레를 타고 가는 아이를 만난다.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수레에서 내려 당나귀를 세우고 포즈를 취해 준다. 어라? 이 녀석 제법 프로 냄새가 나네? 헌데 포즈만 프로가 아니다. 사진을 다 찍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돌아서려고 했더니 옷깃을 잡으며 손을 내민다. 그리고 외친 한마디!

“Give me money!!

그렇구나. 목적은 모델료였구나. 돈이 상투 끝에 올라앉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따지고 보면 마차를 세우고 포즈를 세워주는 것이야말로 대가를 받을만한 노역이지. 여행을 다니다 보면 늘 두 갈래 길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아이들을 거지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돈을 주지 말라는 머리를 따라야 하나, 측은지심을 강조하는 가슴을 따라야 하나.

 

 

당나귀 마차를 모는 소년.

마을 끝머리쯤에 야곱의 샘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별러서 온 곳이다. 일정에는 없었는데 내가 고집해서 끼워넣었다. 언제 다시 하란에 올 거라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간단 말인가. 하지만 샘 앞에 서자마자 한숨부터 나온다. 사방을 철제 담으로 둘러쳐놓고 문은 꽁꽁 잠가놓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전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 쓴 글에 관리는 안 하고 있는지 벌판 한 가운데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관리를 한다는 핑계로 아예 사람의 접근을 막아버렸다. 관리인이라도 있으면 문을 좀 열어달라고 졸라보겠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비루먹은 강아지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이걸 어쩌나. 저만치 안쪽으로 샘 같은 게 보이는데 너무 멀어서 사진조차 찍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서기에는 너무 섭섭하다. 하릴없이 담을 따라 걷다보니 제법 낮은 곳이 보인다. 게다가 이건 뭐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발판 같은 게 놓여있다. 이런 땐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담으로 기어오른다. 하나, , ! 뛰어내리는데 뭔가 느낌이 안 좋다. 발이 삐끗한 모양이다. 난 아직도 내가 나이는 30대쯤, 몸무게는 60kg쯤 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 순간적으로 대퇴부까지 자극하는 통증에 멈칫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카메라를 바투 쥐고 샘을 향해서 달린다. 백마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총탄 속을 누비는 병사의 각오가 이러했을까. 샘에는 4각의 쇠로 된 상자를 덮어놓았다. 이 동네는 쇠로 시작해서 쇠로 끝나는구나. 전에 우리 시골에 있던 샘과 비슷한 것 같은데, 상자를 덮어놓는 바람에 물이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힘들다.

 마을엔 포장을 친 간이시장도 있다.

 

 

그래도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샘을 들여다보다 말고 셔터를 누르려는 참에 어디선가 새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말로 치면 어이, 어이~” 정도 되는 것 같다. 내게 소리치는 게 틀림없다. ‘거기 들어간 놈 잡히면 죽는다는 뜻이겠지? 후다닥 셔터를 몇 번 누르고 왔던 길을 향해서 다시 내달린다. 삐끗했던 발목은 여전히 아프지만 살아야겠다는 일념은 통증마저 유예시킨다. 여기서 붙잡힐 수는 없지. 순간적으로 다시 담을 넘는다. 이게 몇 년 만의 담치기냐. 마지막 담치기를 할 무렵이 열일곱이던가? 열여덟이던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말 10대로 돌아간 듯 내 동작은 번개처럼 빠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절룩절룩 걸어가는 내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 한 가닥이 걸린다.

그래도 난 찍었어.’

그깟 샘 하나가 무엇이길래 목숨까지 거느냐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내겐 그만큼 중요하다. 어디 다녀왔다고 자랑이나 하려는 게 아니라, 옛사람들의 흔적을 확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먼 길을 온 것이다. 하란은 성서의 무대가 되는 땅이다. 그 무대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니 야곱의 샘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이다. 노총각 이삭이 리브가를 색시로 맞아 알콩달콩 산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이 집안 손이 귀한 건 내림인 모양이다. 아브라함도 100세나 돼서 이삭을 낳았으니. 결혼 후 30년이 지날 무렵 드디어 리브가에게 태기가 있었다.

 

 

야곱의 샘 안내판.

태어난 아이들은 쌍둥이였다. 이란성 쌍둥이였던 듯 형제는 완전 딴판이었다. 형은 온몸이 붉은 털로 뒤덮여 있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지었고 동생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야곱이라고 지었다.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에서는 씩씩하고 거칠어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신 깊은 생각이나 자제력은 부족한 편이었다. 동생 야곱은 그와 반대여서 성격이 차분하고 주로 천막에서 지내는 것을 즐겼다. 그렇다고 야심까지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것부터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야곱은 장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형제의 순서가 바꾸고 싶다고 바꿔지는 건 아닐 터. 여느 사람 같으면 그러려니 했으련만 야곱은 안 되면 되게 하라무대뽀 정신을 버리지 못했다. 어느 날, 에서는 사냥을 하다가 뱃가죽이 등에 붙을 무렵 돌아왔다. 마침 그때 야곱은 팥죽을 쑤고 있었다. 에서에게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만큼이나 반가울 수밖에. 죽 솥에 머리라도 박을 듯 달라 들면서 동생에게 사정을 했다.

사랑하는 동생 야곱아, 죽 한 그릇만 줘라

, 나 먹으려고 쑤는 건데. 이 죽 주면 내가 부탁하는 거 하나 들어줄래?”

부탁? 뭔데?”

장자권(長子權)을 내게 줘.”

장자권? 그거 복권 이름이냐? 뭔지는 모르지만 가져. 얼른 죽 한 그릇 주고

비록 장난 비슷한 일이었지만 야곱은 죽 한 그릇에 형에게서 장자권을 양도 받았다. 에서야 가볍게 생각하고 말았겠지.

 

 

담도 높고 문도 잠겨 있다.

결정적인 사건은 형제가 더욱 성장한 뒤에 일어났다. 야곱의 샘에 대해 알려면 이 정도 공부는 해야 하니 조금 지루해도 어쩔 수 없다. 하란까지 와서 야곱 이야기 한 자락 안 듣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법. 이삭도 어느 덧 늙어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어두워질 때가 되었다. 내가 얼마나 더 살랴 싶어서 큰 아들 에서에게 장자상속을 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그 절차가 바로 축복을 내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에서를 부른다.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세기 272~4)

 

이삭의 말대로 진행됐으면 나도 예까지 올 일이 없었으련만, 아비와 아들의 대화를 리브가가 듣고 말았다. 아참, 그 얘기를 안 하고 지나갔구나.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부부 간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각기 달라 이삭은 큰 아들 에서라면 죽고 못 살았고 리브가는 작은 아들 야곱만 끼고 돌았다. 이복형제도 아닌데, 사건을 만들어야 이야기가 나오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자간의 대화를 엿들은 리브가는 야곱으로 장자를 삼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음모’, 이 단어 참 쓸 만하다. 에서가 사냥을 떠난 뒤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새끼 염소 두 마리를 잡아오게 한다. 다음에 그 고기로 이삭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고 에서의 옷을 입힌 다음, 털이 많은 에서처럼 염소새끼 가죽으로 손과 목을 둘러준다.

 

안쪽 돌 기둥 사이에 있는 게 야곱의 샘이다.

야곱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어머니가 워낙 강하게 밀어붙이니 못 이기는 체 하고 아비 이삭에게 들어간다. 눈이 먼 이삭은 결국 리브가의 꾀에 속아 음식을 맛있게 먹은 다음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내린다. 잠시 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지만 모든 건 끝난 뒤. 아비에게 울고 불고 난리를 쳐본다고 축복이라는 게 어디 스티커처럼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것인가. 일을 꾸민 어미가 미웠지만 그 또한 어쩌겠는가. 죽여 버리겠다고 야곱을 찾았지만 이미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은 뒤였다.

야곱, 이 웬수 같은 놈. 아버지만 죽고 나면 그날부로 묻어버릴껴.”

야곱을 향한 에서의 화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잘못하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리브가는 야곱을 친정으로 보내기로 한다. 여기서부터 야곱의 샘이야기가 시작된다. 리브가의 친정이 어디던가. 아브라함이 늙은 종을 시켜 리브가를 데려온 곳이 어디던가. 그러고 보니 내내 괴롭히던 궁금증이 쉽게 풀려버리고 만다. 아브라함이 내 고향에 가서 며느릿감을 데려오라던 곳은 하란이었음이 확인된다. 왜냐고? 리브가가 아들을 보낸 친정이 바로 하란이었으니까. 그리고 야곱이 라헬과 인연을 맺은 야곱의 샘이 지금 내 눈앞 하란에 있으니까. 결과가 맞았으니 나머지 궁금증은 그냥 묻어버리자. 외삼촌을 찾아가기 위해 집을 떠난 야곱이나 따라가 보자. 야곱은 걷고 걸어 어느 샘가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목동들이 양떼를 몰고 와서 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는 아무 때나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게 아니라 저녁 무렵이 돼서 목동들이 모두 모여야 샘을 덮은 큰 돌을 열고 물을 먹일 수 있었다고 한다.

 

담을 넘어 들어가보니 이렇게 덮어놓았다.

여기서 야곱과 그의 사촌 누이 라헬의 극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역시 우물가는 만남의 장이다. 샘에서 쉬고 있는 야곱 앞에 아리따운 처녀 하나가 양떼를 몰고 나타난다. 바로 라헬이다. 무엇에 끌렸는지 야곱은 샘을 덮은 돌을 열고 양떼에게 물을 먹인다. 그러면서 족보 확인이 시작된다.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창세기 2911~12)

 

처음부터 입을 맞췄다는 게 좀 수상하긴 하다. 그리고 울긴 또 왜 울어. 그날부터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기거한다. 이쯤에서 야곱 이야기를 마칠 수도 있겠지만 그리되면 장가를 간 재미있는 사연을 전할 수 없으니 조금만 더하자. 야곱의 외삼촌이자 리브가의 오빠인 라반은 실속주의자였다. 약간의 사기성도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라반은 야곱을 불러 말한다.

네가 비록 내 생질이지만 공짜로 일을 시킬 수야 있겠냐? 무엇으로 보수를 주면 좋을까?” 딱 보니 약점을 잡고 머슴으로 부려먹으려는 것이다. 야곱은 그때 이미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제가 어찌 외삼촌께 보수를 바라겠습니까? 약소하지만 라헬을 제게 주면 7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겠습니다.”

이런 이런, 너 그러다 크게 당한다. 야곱은 라헬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7년 동안 뼈 빠지게 일했다. 드디어 결혼하던 날, 야곱은 얼마나 좋았던지 완전 술독에 빠져 버리고 만다. 아니면 외삼촌 라반이 동네 건달들 시켜서 일부러 먹였는지도 모르지. 첫날밤을 치루고 새벽에 일어난 야곱은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곁, 색시의 자리에는 사랑하는 라헬이 아닌 그녀의 언니 레아가 수줍게 누워 있었다. 뭐야, 이거. 이미 일은 치렀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얼랄라? 이것이 무슨 시추에이션이여? 왜 네가 내 옆에 누워 있어? 라헬은 어디 가고?”

나도 몰라요. 아버지가 들어가래서 들어왔단 말이에요.”

배신감에 미칠 것 같았던 야곱이 외삼촌인 라반에게로 달려가 따졌다. 라반의 대답이 걸작이다.

어이, 생질. 열 받지 말어. 이 동네가 말이여. 얼마나 고루한지 작은 딸을 큰 딸보다 먼저 시집보내면 난리도 아니여.”

이런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있나. 그러면서 라반은 한마디 덧붙인다.

그러니 참고 한 일주일 버텨봐. 내가 작은 딸도 생질에게 줌세. 대신 7년 머슴살이 추가는 옵션이여. 오케이?”

어쩌겠는가. 야곱은 또 7년간의 머슴살이를 한다. 그런 인고의 세월 덕분이었는지 야곱은 두 아내를 얻은 데다 그녀들의 몸종까지 첩으로 거느리게 된다. 몸종이 무슨 별책 부록이냐? 마누라로 삼게. 뭐 그 당시의 풍습이 그랬다는 것이겠지. 자식복도 많아서 아들 12, 딸 하나를 얻는다. 그의 아들 12명은 이스라엘 민족 12지파의 시조가 된다. 그건 훗날 얘기고. 아무튼 잔머리야곱이 더 잔머리외삼촌에게 속아 14년이나 머슴을 살면서 사랑을 완성한 얘기는 가볍게 넘길 일만은 아니다. 사랑을 얻기 위한 희생과 노력,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시대에 한번쯤 되새겨볼 만 하지 않은가.

 

나오는 길에 잠시 둘러본 하란성의 하나 남은 성문.

성서의 땅 하란, 그곳에 있는 야곱의 샘에서 청량한 물을 한 잔 마시며 여행의 행복을 누려보겠다는 꿈은 쇠창살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꿈꾸던 하란에 왔고 성서의 인물들을 하나씩 만났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라헬. 지금 그들이 저만치서 손을 흔들고 있다. 나는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가슴에 담았고 앞으로 늘 나 안에서 함께 할 것이다. 어느 땐 용기를 주고 어느 땐 질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젠 정말 하란을 떠나야 할 시간.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만 흙먼지 날리는 이 불모의 땅에 사랑담은 인사를 보낸다. 굿바이! 하란.

posted by sagang

폐허로 변한 하란 평원.

하란의 흙집들.

울루자미에서 돌아서 나오는 길.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아득한 옛날사람들의 흔적이 있을 리 없지만 괜스레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 길을 아브라함도 걸었을까. 당연히 걸었을 것이다. 이곳 하란에서 꽤 오래 머물렀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행적을 잠깐 추적해보고 가자. 아브라함은 노아의 아들인 셈의 10대 후손이다. 본명은 ‘높임을 받는다’는 뜻의 아브람이었고, ‘아브라함’은 야훼와 계약을 맺은 뒤 ‘열국(列國)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얻은 새 이름이다.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최초로 살았던 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긴 유랑에 나선 이야기를 하려면 구약성서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데라가 아들 아브함(아브라함이 되기 전 이름)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사라가 되기 전 이름)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창세기 11장 31~32절)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다. 아브라함 일가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까지 가는 여정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적이 있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일가를 이끌고 이곳 하란 땅에 도착한 데라는 대체 꿈쩍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성서를 해석하는 이들은 ‘이미 조상들의 죄악 속에서 태어나, 죄악 속에서 먹고 마시면서 자라고, 죄짓는 일이 온 몸에 배어 있었으므로 중간 정착지인 하란에서 그 죄악된 행실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체류하였다’고 악담을 퍼붓지만, 종교에 까막눈인 내가 대체 그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나.

 

흙집 대문.

흙집 외부에 놓여있는 앙증맞은 의자들.아무튼 뭉그적거리는 늙은 아비를 두고 내처 떠날 수도 없고 아브라함도 나름 고민이 컸을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 곁에 머물던 아브라함은 75세 되던 해 두 번째 야훼의 부름을 받는다. 역시 정착해서 살 팔자는 아니었나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장 1~2절)

 

아브라함의 하란에서의 삶은 그렇게 끝난다. 그렇다고 모든 인연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 뒤로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하란과의 다양한 인연의 끈을 이어간다. 계속 아브라함 이야기만 하면, 은근히 성서에 기대여 여행기 공짜로 쓰려고 한단 말이 나올 테니, 이쯤에서 이야기를 돌릴 일이다.

 

흙집 안뜰.

흙집 천장. 끝에 구멍이 뚫려있다.

흙집 주인.

이젠 흙집을 구경해보기로 하자. 이 고깔형 집들이야말로 하란을 하란답게 하는 결정적 요소다. BC 3000년쯤부터 짓기 시작했다고 짐작할 뿐 정확한 기원을 알 수는 없지만, 고대인들이 동굴살이를 마치면서 처음으로 지은 주택의 형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목재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이 지역에서는 흙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니 굳이 다른 집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흙집은 흙과 밀짚을 섞어서 만든 벽돌을 햇볕에 말려서 쌓는 방식으로 짓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 땅에서 짓던 흙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도 수십 년 전까지는 황토에 볏짚을 섞어서 만든 벽돌로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벽돌을 30~40단까지 쌓아올리는데 고깔 부분은 높이가 5m나 된다. 맨 위는 뚫려 있어서 빛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 집안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환풍구 역할을 한다. 지붕을 그렇게 높이 세우는 것은 이 지역의 뜨거운 날씨 때문일 것이다. 굴뚝처럼 솟아오른 높은 지붕이 실내의 열기를 빨아들여 배출하기 때문에 50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에도 버틸 수 있는 것이겠지. 지붕 끝에는 납작한 돌을 서로 기대어 놓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얹어놓았다.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역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집 표면이 자꾸 깎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수리해야 한다고 한다. 직접 들어가 본 집은 주거용이라기보다는 관광객들에게 장사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정원의 작은 나무의자들이 눈길을 끈다. 이 지역에서 자주 보는 의자인데 들고 오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다.

 

 

흙집 아들. 옷도 빌려주고 모델이 돼준다.

 

집안은 작은 민속촌이라고 해도 될 만큼 다양하게 꾸며 놨다. 어느 방을 들어가 보니 아랍인들의 전통의상이 걸려 있다. 하란의 주민은 대부분 투르크족이 아니라 아랍인들이다. 18세기부터 이곳에 정착했는데, 아직도 사막 부족인 베두인 족의 복장을 하고 그 풍습을 지키며 산다고 한다. 젊고 잘 생긴 주인집 아들이 관광객들에게 아랍풍의 옷을 빌려 주고 함께 사진을 찍어준다. 물론 옷은 돈을 받고 빌려준다. 뭐, 솔직하게 말하면 미끼인 셈이다. 어쩌면 아들이 아니라 일당을 주고 모델을 고용한 건지도 모른다.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거봐. 장삿속 확실하잖아. 나 질투하는 거 맞지? 응접실로 짐작되는 방에는 금방 손님을 맞기라도 할 듯 카펫과 방석 등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관광객들도 그곳에서 음료나 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집 처마에 신발을 매달아놓은 모습이 이채롭다. 왜 거기 걸어놓았느냐고 물었더니 악마를 퇴치하기 위한 거란다. 액운을 막아준다는 나자르본주의 대용품인 셈이다. 이곳에도 일하는 아이들이 있다. 형제로 보이는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길래 물어봤더니 큰 아이는 예비 중학생이고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한다. 지도나 목걸이 등의 장신구를 판다. 이 동네에 사는데 방학이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란다. 얼굴에 구차함 같은 기색은 전혀 없다. 한 끼 밥 때문에 내몰린 아이들이 아니어서 마음이 편하다. 아이들과 한참 어울려 논다. 큰 아이는 카메라를 들이대면 활짝 웃어주는데 작은 녀석은 영 수줍어해서 얼굴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다. 흙집에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자신들은 시멘트 집에서 산다고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내가 보기엔 흙집이 훨씬 좋아 보이는데.

흙집 내부. 온갖 장신구들이 걸려있다.

응접실.

 

혼자 터벅터벅 동네 구경에 나선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고깔처럼 생긴 흙집들이다. 공터에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쓰레기장에는 염소들이 종이 두어 장을 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 담 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는데 누가 자꾸 부르는 느낌이 든다. 두리번거리다 저만치 담장에 기대어 “알로” “알로” 외치는 처녀와 눈이 마주친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으니 분명 나를 부르는 것이다. 이게 몇 십 년만이냐. 마음은 달려가는데 몸은 제자리다. 처녀가 부르니 은근히 겁이 난다. 혹시 처녀귀신? 설마 대낮에 귀신이 나올리는 없고…. 난 고기가 좀 질겨. 좀 젊은 총각 꼬셔봐. 주민이라고는 그녀와 염소 떼에 묻어서 우우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전부다. 어른들은 전부 어디로 간 걸까. 이왕 지붕에 앉았으니 아까 중동무이한 성서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 하란이 다시 성서에 등장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얻을 무렵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그의 처 사라가 90세 때 낳은 늦둥이었다. 가임기간이 어떠니 배란이 어떠니 하며 요즘의 상식으로 따지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아브라함은 이 늦둥이 아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했을까.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 사이에 태어난 이스마엘이 그 어미와 함께 황야로 내쫓긴 것도 결국은 이삭이란 존재의 등장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파고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테니 궁금한 분은 구약성서 탐독을 권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이삭을 장가보내기로 한다. 이삭도 어언 나이 40이 넘은 ‘노총각’이 됐을 무렵이다. 아브라함은 가장 믿는 늙은 종을 부른다.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세기 24장 3~4절)

 

고깔 모양의 지붕 끝에는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납작한 돌을 올려놓았다.

이때는 아브라함도 길고 길었던 유랑을 마치고 가나안에 정책한지 오래였다. 고생하던 아내 사라는 먼저 세상을 떴고. 어지간하면 가까운데서 며느릿감을 고를 만도 하련만 그는 굳이 옛 고향에 가서 데려오라고 했다. 야훼의 명령으로 가나안 땅에 갔지만 그도 고향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미리 찍어둔 참한 색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달랑 종 하나를 느닷없이 보내서 며느릿감을 데려오라니 배짱 한번 두둑하다고 할 수 있겠다. 까라면 까야지, 종 처지에 미주알고주알 따질 수 있나.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낙타 열 마리에 신붓감에게 줄 선물을 싣고 터덕터덕 길을 떠난다. 여기서 케케묵은 문제를 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늙은 종이 향한 ‘아브라함의 옛 고향’은 어디란 말인가? 당연히 아브라함이 태어난 갈대아 우르가 1차 후보지가 된다. 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현재 이라크의 남쪽에 있는 우르다. 헌데 늙은 종이 주인집 색싯감을 구하겠다고 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다. 아브라함의 이동로를 따라 되짚어 간다면 종은 늙어 죽어버리고 며느릿감으로 출발한 여자는 시어머니감이 돼서 도착하기 딱 알맞은 거리다. 그럼 어쩌라는 것이냐고? 그래서 나는 ‘하란 고향 설’, 더 나아가 ‘샨르우르파 출생 설’을 다시 들고 나오고 싶은 것이다. 가나안과 하란은 상식적인 거리 안에 있으니까. 아브라함은 아버지를 두고 온 하란을 고향으로 생각한 건 아닐까? 학자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아주 생떼는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지금 성서를 배경으로 추리물을 쓰고 있는 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궁금한 여행자일 뿐이다.

처마에 걸려 있는 신발.

딴소리 늘어놓다 늙은 종 놓칠라.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가는 늙은 종은 긴 여행 끝에 ‘나홀의 성’에 도착했다. 성서에는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라고만 돼 있다. 이왕 쓰는 거 좀 성의껏 쓸 것이지. 메소보다미아야 메소포타미아를 이른다는 걸 알겠지만, 느닷없이 튀어나온 나홀의 성은 대체 또 어디란 말이냐. 괜히 지명 가지고 시비를 거는 바람에 끝까지 골치 아프게 돼버렸다. 나홀, 나홀이라… 특정한 지명이 아니라면 사람의 이름인데…. 성서를 뒤져보자. 아! 창세기 초반에 나오네. 바로 아브라함의 동생이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들을 셋을 두었는데 장자가 바로 아브라함, 둘째가 나홀, 셋째가 하란이다. 하란은 아들 롯을 낳고 일찍 죽는다. 이제 이야기가 조금 풀린다. 이 나홀이 어디에서 살았느냐만 밝히면 되니까. 궁금한 건 갈대아 우르에서 데라가 일가족을 이끌고 나올 때 나홀도 동행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걸 확인하려면 저 앞에 언급한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창세기 31절) 눈을 씻고 스무 번을 읽어봐도 어린 롯의 이름은 나오는데 삼촌씩이나 되는 나홀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럼 여기서 지명 찾기를 그만 둬야할까?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적당한 짐작도 필요하다. 나는 나홀 역시 하란으로 갔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살다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땅으로 떠날 때 남아서 아비 데라를 모셨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그나마 늙은 아비를 두고 떠나는 아브라함의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나홀의 성’, 즉 나홀이 사는 곳으로 찾아간 것이다. 신경 안 쓰고 성경에 쓰인 대로 지나가면 되련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 문제다. 몇몇 책들은 늙은 종이 찾아간 곳을 아무런 고민의 흔적도 없이 하란으로 적고 있다.

 

방학 중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나홀의 성에 거의 도착할 무렵 샘터에서 다리쉼을 한다. 그러면서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쯧쯧, 본인 장가는 가셨는지 모르겠네. 그는 나름대로 아브라함의 며느릿감이 될 여자의 기준을 정했다. 종 치고는 조금 오버한 셈이다. 그 기준은 ‘자신에게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아가씨가 바로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그냥 떠먹어도 되련만. 기도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각본에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듯 리브가라는 처녀가 샘 곁으로 나온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그 물 항아리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종이 마주 달려가서 가로되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창세기 24장 16~17절)

 

이쯤 되면 ‘목마른 놈이 샘 판다’는 말은 말짱 헛소리다. ‘목마른 늙은 종 처녀 오기 기다린다’ 쯤으로 바꾸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아무튼 성서에도 ‘아리따운’ 여자를 언급했으니 아름다음을 추구하는 여자들을 속물 취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연이 맞으려고 그랬던지 리브가는 목마르다는 늙은 종에게 정성들여 물을 준다. 그것뿐이겠는가.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부어 낙타를 마실 수 있게 하더니, 물을 더 길어와 낙타들의 갈증도 풀어준다. 착하다. 참 착하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 치고 못된 사람 본 적 없다.

 

밖에서 본 흙집 대문.그러고 보면 우물이라는 게 남녀를 맺어주는 특별한 기능이 있는 게 틀림없다. 고려 태조 왕건도 장화왕비 오씨를 우물가에서 만났다지. 물 한 모금 달랬더니 바가지에 버들가지를 띄워주더란다. 이유를 물었더니 물 먹고 체하면 약도 없다고 했다나. 아가씨들이여. 좋은 신랑감 구하려거든 우물가로 갈지니. 그나저나 어느 시골에 우물이 있으며 그럴 만한 아가씨는 또 있을까. 물을 얻어 마시고 타고 온 낙타들이 갈증을 푸는 것을 본 늙은 종은 감격할 수밖에. 그래서 묻는다. “네가 누구의 딸이뇨?”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부두엘의 딸”이라고 리브가가 대답함으로써 족보가 밝혀진다. 등장인물도 많고 말도 복잡하지만,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라는 뜻이다. 누가 미리 짜놓은 각본 같지 않은가. 아무튼 늙은 종은 리브가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가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 이야기를 모두 서술해서 무얼 하랴. 그래도 결정적인 것 하나는 전하고 가야지.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창세기 24장 57~58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니 리브가에게 “거시기 땅에 40 넘은 총각이 하나 있는데 시집갈래?” 하고 물었더니 군말 없이 간다 하더라는 얘기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늙은 종을 따라간 리브가는 이삭과 오래 오래 잘 살았다.

 

쓰레기장을 뒤지는 염소들.

하란의 흙집 지붕에 홀로 앉아 시선을 아주 멀리 던져본다. 이삭은 저물녘에 들판에 나가 묵상을 하다가 낙타들이 오는 것을 봤다지. 말이 묵상이지 색시 될 처녀가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기다렸겠지. 낙타들 중 한 마리의 등에 아내가 될 리브가가 탔더란다. 늙은 총각 이삭은 한 눈에 자기 사람임을 알아봤겠지. 색시를 구하러 갔던 늙은 종이 따라오고 있었을 테니까. 그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을까? 내 눈 앞에 그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다. 아득한 시절에 살았던 그들과 내가 한 공간에서 만난 것 같다. 이곳 하란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만날 수 있는 땅.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담장에 기대 앉아 “알로, 알로”를 외치던 처녀는 아니다. 번뜩,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래, 이제 지붕에서 내려갈 때가 됐구나. 아직 이삭과 리브가의 만남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했는데….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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