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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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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1 [사라져가는 것들 44] 이발사8
2008. 2. 11. 16:44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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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꺽다리이발소’가 문을 닫았다. 어차피 오늘이냐 내일이냐의 문제였기 때문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건 아니다. 전화로 소식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긴 일이 엿처럼 쩍쩍 들러붙었다고 해도, 손님이 들락거린 것이 아니었으니 결과는 마찬가지다. 꺽다리이발소의 주인 김장생씨는, 내가 속해 있는 이발사 모임의 오랜 계원이다. 김씨의 이발소에는 현대이발관이라는 간판이 버젓이 붙어있다. 하지만 김씨의 키가 이발사로는 안 어울릴 정도로 껑충하게 큰데다,“변두리 이발소 주제에 무슨 '현대'냐”고 계원들이 장난삼아 꺽다리이발소라고 불렀다. 세월에 치여 지쳐버린 내 또래 이발사들이라면 너나없이 그런 편이지만, 김씨 역시 몇 해 전부터 문을 닫는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있을 때가 많으니 혈압만 자꾸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이발소 덕에 잘 먹고 잘 자라서 한자리씩 하는 자식들도 이젠 이발사 아비를 그리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계원들이 말려서 주저앉혔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누가 문을 닫으면 다음은 내 차례지 싶어 내심 두려워하는 속마음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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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황혼녘의 노인들이 주고객이지만 나도 한 때는 잘 나가던 이발사였다. 이발소가 시내에 있던 젊은 시절, 머리 잘 깎는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밀려드는 손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조수를 두엇 둬야할 만큼 바빴다. 애초에 이발사가 된 건 내 뜻은 아니었다. 평생 밑이 찢어져라 가난하게 살았던 아버지가 이발사 되기를 권했다. 어느 날 “네가 평생 먹고살기에는 이만한 게 없을 게다.”라면서 동네 이발소의 머리감개로 넣어주었다. 머리감개 몇 년 만에 ‘바리캉’을 잡을 수 있었다. 학생들이 검은 교복에 머리를 박박 밀던 시절이니 멋을 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기계충(두부백선)으로 머리에 동전만한 ‘땜빵’이 생긴 아이들도 많았다.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돈이 없어 아이들 머리를 못 깎이다가 명절 때나 돼야 줄줄이 끌고 오는 집들도 있었다. 설이나 추석을 앞두고는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시골에서는 머리 깎은 삯으로 곡식자루를 들고 오기도 하던 때였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이발이나 면도가 손에 익을만할 무렵엔 이발소에 갇혀 지내는 게 너무 답답했다. 몇 번 뛰쳐나갈 생각도 해봤지만 결국은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천직이다 싶기도 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아서 별 탈 없이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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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전에 이발소는 황금기만 있을 줄 알았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남자치고 이발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1970년대 말이었던가, 젊은이들 사이에 장발바람이 불어 이발소를 소 닭 보듯 할 때도 밥 굶는다는 이발소는 없었다. 어차피 상투를 틀거나 땋아 내리지 않을 바에야 언젠가는 이발소에 와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이 솟았던 해라도 석양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딱히 언제부터라고 꼽기는 쉽지 않다. 이발소에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이발소 안에 있으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제법 주워듣는데도, 직접 경험한 게 별로 없으니 세상을 미리 읽고 판단하는 능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손님이 줄기 시작하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가까운 곳에 서비스 좋은 이발소라도 개업했으려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손님은 해가 갈수록 줄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 이발소가 워낙 구식이라 그런가 생각했다. 초현대식 설비에 예쁜 면도사를 두고 안마니 뭐니 극진한 서비스를 하는 이발소들이 자꾸 생겨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발소는 누가 뭐래도 머리를 깎는 곳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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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이발소를 둘러볼 때마다 문제가 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랜 세월 함께 하는 바람에 번들거리는 가죽의자는 그렇다 쳐도, 타일이 떨어져나간 구식 세발대(洗髮臺)와 파란 플라스틱 조루는 내가 봐도 좀 심하다 싶었다. 가죽띠에 썩썩 갈아서 날을 세우는 일자면도기와 십 수 년 써온 바리캉도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시절이 다 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평소에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위생함 같은 것까지 눈에 거슬렸다. 힘닿는 대로 하나씩 바꿔 봤지만 떠난 손님이 돌아오는 기미는 없었다. 가끔씩 초로의 사내들이나 들를 뿐, 학생들까지 내 이발소를 비켜 지나갔다. 이발소에 발길을 끊은 이들이 가는 곳이 미용실이라는 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사내녀석들이 어디 갈 곳이 없어서…. 그렇게 혼자 한탄해보지만, 사실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미용실이 어디 남자들 머리를 깎는 곳이던가. 남자 머리는 싹둑싹둑 잘라내면 안 된다. 사각사각 깎아야한다. 이발한 머리를 보면 그 차이를 금세 알 수 있다.. 하지만 싹둑싹둑이든 사각사각이든 깎는 방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용실에서 자른 머리는 세련되고, 이발소에서 깎은 머리는 고리타분해 보인다는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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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가에 있던 이발소를 처분하고 시 외곽으로 물러앉은 게 몇 해 전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예 시골로 내려가는 이발사도 있었다. 계원 중 한 사람인 조명수씨가 최근 협회에서 들었다는 얘기는 냉혹한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한때 9만 곳을 헤아리던 이발소가 채 2만 곳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미용실은 12만 곳으로 늘었다고 한다. 아프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꺽다리이발소의 김씨도 이런 현실이 힘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발소는 이발소고 미용실은 미용실이다. 지금도 내 솜씨를 잊지 못해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있다. 그들은 내게 머리를 맡기지 않으면 깎다 만 것 같아 찜찜하다고 고백한다. 듣기 좋은 소리로 그러겠지만, 몇몇 사람은 나를 '이발명장(

匠)'이라고 불러준다. 풀빵을 팔아도 사장님 소리를 듣는 세상에, 이발관 주인이라 하여 관장이라든가, 이발소니 소장이라든가, 이용원이니 원장이라 불려본 적 한번 없었다. 그런 이름에 욕심을 내본 적도 없었다. '머리 잘 깎는 이발사'면 족했다. 그래서 명장이라는 이름은, 비록 농담일지라도 날 행복하게 한다. 새삼 화려했던 날의 부활을 꿈꾸는 건 아니지만 아직 가위를 놓을 수 없다. 단 한 명이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곳에서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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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인물은 글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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