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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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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한 ‘Simit Saray’.

카페 Simit Saray에 진열된 아침식사.

아침 식사를 위해 찾아간 곳은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한적한 골목. ‘Simit Saray’라는 간판이 붙은 카페의 문을 밀고 들어선다. 너무 일러서일까, 주인의 눈이 화등잔 만해지더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동양에서 진출한 떼도둑이라도 든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런 판이니 음식준비가 제대로 돼 있을 턱이 있나. 사실 나는 아침식사가 그리 당기는 편도 아니다. 어디 가서 밤새 고아놓은 해장국 한 그릇 먹는다면 몰라도. 비행기에서 새벽에 먹은 기내식이 아직도 위장에서 저항군처럼 버티고 있다.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는 실내를 벗어나 옥상으로 올라간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순간, 이건 또 무슨 징조? 난데없이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늘이 내내 무겁더라니. 이스탄불은 비가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라 당황스럽기보다는 차라리 신기하다. 우리 땅이 가뭄으로 쩍쩍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온 터라 하늘에 대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하긴 내가 뭐라 한들 눈 하나 꿈쩍 안 하겠지만. 반갑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차려진 아침 식사는 딱딱한 빵이다. 이름을 물어보니 시미트란다. 한국말로 하면 깨빵이라고 훌리아가 보충설명을 해준다. , 그래서 가게 이름이 Simit Saray였구나. 몇 조각 떼먹다가 그냥 내려놓는다. 있을 때 먹어두라는 내 여행수칙이 깨지는 순간이다.

 

 

Simit Saray에서 빵을 파는 아가씨.

하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다 보니 실내에도 손님이 여럿 앉아있다. , 이곳도 아침식사를 밖에서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홍콩이나 중국의 대도시에서 보았던 아침식사 대열이 생각난다. 문을 나서려는데 빵을 파는 아가씨가 자꾸 흘끔거리며 나를 훔쳐본다. 역시 내가 한 인물 하지? 헌데 자세히 보니 시선이 꽂힌 곳은 내가 아니라 카메라다. 그럼 그렇지. 수줍어하는 모습이 예쁘다. 터키 아가씨들 예쁜 거 한 두 번 보는 건 아니지만 그냥 지나가기엔 아쉽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찍어도 돼요?” 물으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떡거린다. 영어는 못 알아듣지만 너 하는 짓 보니 무슨 소린지 알만하다는 표정이다. 아무려나 땡큐다. 사진을 찍고 나니 얼른 보여 달란다. 수줍은 척 하면서도 할 건 다한다. 자기 얼굴을 확인하더니 “Good”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래, 내겐 그대가 Good이야. 식사를 마친 뒤 히포드롬(Hipodrome) 광장 쪽으로 걷는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린다. 하지만 우산은 캐리어에 들어있어 꺼낼 수 없다. 뭐 어때. 가끔 이렇게 비를 맞는 것도 괜찮지. 어릴 적엔 매번 맞고 다녔는걸. 비를 무서워하지 않기는 길 위에서 뒹구는 고양이나 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 지나가는 트램도 마찬가지다. 이번 이스탄불 탐색은 히포드롬에서 시작해서 블루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 그리고 성소피아 성당으로 불리는 아야소피아 박물관 순으로 잡았다. 년에 혼자 돌아봤을 때와 똑같다.

  새벽 거리를 오가는 트램.

 

히포드롬에서 '깨빵' 시미트를 파는 청년.

9개월 만에 다시 찾은 이 위대한 유산들 앞에서 난 또 무엇을 배워야할까. 조금 고민스럽다. 그때 느닷없이 떠오르는 경구.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라. 모든 사물은 다른 각도로 볼 때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그래. 다른 시각으로 보면 되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스쳐간 곳들 중에는 미처 못 보고 지나간 것이 얼마나 많으랴. 놓치고 지나간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으랴. 비에 젖은 바닥에 엎드리는 한이 있어도 본질을 보려 애쓰리라.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 독일 황제 빌헬름2세가, 전쟁 전인 1901년 오스만의 34대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게 기증했다는 육각정앞에 서 있는데 저만치 재미있는 모습의 청년 하나가 눈에 띈다. 키가 훌쭉하게 큰 청년이 꽤 높이 쌓은 무언가를 머리에 인 채 걸어오고 있다. 재주도 좋지. 멀리서 봤을 때 꽤 높이 쌓은 무엇이던 그것은 눈앞에 오면서 도넛으로 쌓은 탑이 된다. 재미있어서 사진을 몇 장 찍는데 그가 내 앞에 와서 선다. ! 탑은 도넛이 아니라 조금 전 카페에서 아침으로 먹은 깨빵, 시미트. 그러니까 이 청년은 탑처럼 쌓은 시미트를 이고 아침 굶은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1개에 1리라, 1달러를 내면 3개를 준단다. 이거 미안해서 어쩐담. 사진을 찍었으니 몇 개 사주는 게 예의일 텐데 조금 전에 먹고 왔으니. 청년은 살 기색이 없는 걸 보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다른 손님에게로 간다. 비가 내리는 히포드롬은 맑은 날과 또 다른 운치가 있다. 빗줄기는 여전히 굵지 않아서 사람들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광장을 오간다.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황제 빌헬름2세가 기증했다는 정자.

이쯤에서 히포드롬을 소개하고 가야 예의겠지? 히포드롬은 블루모스크, 성소피아 성당과 나란히 배치돼 있는 로마시대의 유산이다. 훗날 지어진 정식명칭은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지만 히포드롬이라는 호칭을 더 많이 쓴다. 뜻은 말 운동장이란다. 말 운동장? 그럼 경마장? 말이 끄는 전차경주장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길이 130m, 너비 450m의 말굽모양으로 40열의 객석에 10만 명까지 수용했다는 굉장한 규모의 광장이다. 비잔티움 시대에는 제국의 중심이었다. 주요 국가 행사는 여기서 치러졌다. 또 검투사 경기나 서커스도 열렸다. 광장에는 갖가지 유물이 남아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그리고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 뱀의 기둥이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고 있는 기구한 운명들이다. 오벨리스크는 원래 지금 높이의 세 배인 60m였고 무게도 800t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세 도막으로 나눠 윗부분만 가져왔다. 이산가족이 아니라 이산 몸통이 돼버린 셈이다. 뱀 기둥도 머리를 잃고 몸통만 남았다. 내 눈에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남긴 흉물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광장 자체가 무사했던 것도 아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제4차 십자군은 히포드롬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가톨릭)의 군사가 또 다른 기독교(정교회)의 나라를 철저하게 유린한 것이었다. 그 뒤로 광장에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역사는 신의 논리가 아니라 힘의 논리로 쓰는 걸일까.

 

 

히포드롬 주변의 카페.

나는 이 히포드롬에 서면 각종 사연을 지닌 유적들보다는 사람 이야기가 먼저 난다. 특히 심약한 범부에서 위대한 황제가 된 한 남자, 그리고 매춘부에서 황후가 되어 위대한 황제를 만든 여자. 이왕 왔으니 그들을 잠깐 만나고 가자. 1000년 이상 로마의 수도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정도는 기본 예의다. 그렇다고 절대 딱딱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니 긴장할 건 없다. 유스티니아누스 1.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고 잃어버렸던 로마의 영토를 회복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긴 황제의 이름이다. 그가 황제가 되는 자체에 우여곡절 있었다. 전임 황제 유스티누스는 그의 외삼촌이다. 트라키아의 가난한 농민출신이었던 유스티누스는 말 그대로 ()’으로 군에 입대했다. 밥이라도 실컷 먹으려고 병졸이 된, 내 땅의 옛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에서 멈출 사람은 아니었다. 운이 좋았던지, 아니면 피눈물 나게 노력했던지 황실 경비사령관이 되었고 결국 518년에 황제가 되었다. 공부할 틈이 없어 까막눈이었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던 황제는 누이의 아들인 사바티우스를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와 나라 일을 맡긴다. 또 제법 일을 꼼꼼하게 한다 싶으니 양자로 삼았다. 그 조카가 바로 외삼촌이자 양아버지의 이름을 따 이름까지 바꾼 유스티니아누스다. 유스티누스 황제는 자신이 죽기 몇 달 전에는 조카를 공동황제로 임명해 황제의 길을 열어준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그런 과정을 거쳐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의 인생은 배우자 테오도라를 만나면서 또 한 번 바뀐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남자에 달렸다고? 테오도라는 그걸 뒤집어서 남자 팔자가 여자에 달렸다는 걸 증명한다. 그녀는 원래 전차경기장인 히포드롬에서 곰을 관리하던(말을 관리했다는 설도 있다) 사내의 딸이었다. 신분으로 보면 바닥 중의 바닥이었을 것이다. 경기장에서는 전차 경기 뿐 아니라 검투사나 맹수들의 싸움, 연극, 서커스가 열렸다. 서커스에 출연하는 동물들의 사육사가 필요했던 건 당연한 일. 가설이긴 하지만 서커스에서 공연을 하는 여인들은 화류계에도 몸을 담았을 것이다. 테오도라도 그 중 하나였지 않을까. 소속이 어디였든 그녀는 유명한 매춘부 혹은 무희였다고 전해진다. 매춘부니 집창촌이니 자꾸 얘기하면 이상한 사람 되는데. 이러다가 점잖은 독자 다 떨어지겠네. 그래도 전할 건 전해야지.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지. 히포드롬 광장을 누비던 그녀는 어느 날 느닷없이 그쪽 생활을 청산하고 양모를 짜서 생계를 꾸리는 요조숙녀로 변신하더라는 것이다. 신의 계시를 받은 걸까? 크게 될 사람은 그렇게 뭔가 다른 점이 있는 법. 유스티니아누스가 조신한 여자테오도라를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남자, 즉 유스티니아누스는 여자의 미모와 정숙함에 반해서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의 하단에 새겨진 부조들.

그렇다고 모든 게 일사천리는 아니었다. 당시 로마법으로는 귀족과 평민은 결혼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콩 껍질로 이중 도배했는데 그냥 물러날 총각이 있나.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인 삼촌을 졸라 귀족도 하급계층과 결혼할 수 있는 법안을 제출하도록 한다. 일은 술술 풀려 그들은 마침내 결혼에 이른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시작도 안했을 것. 또 한 번 히포드롬이 등장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외삼촌과 테오도라를 만난 것에 이어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찾아온 세 번째 전환점은 532년에 일어난 니카반란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전차경주팀이 2개 있었다. 지금의 인기 프로축구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듯.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둘로 나뉘어져 청색당과 녹색당으로 부르게 됐다. 전차 경기의 팀들이 입는 옷 색깔에서 시작됐지만 시민들까지 두 당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청색당은 주로 대지주와 귀족들이 지지했고, 녹색당은 상인이나 기술자들이 지지 세력이었다.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청색당을 지지했다. 532110일 드디어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히포드롬의 전차경기에서 두 당파의 충돌이 있었는데 결국 싸움으로 번지게 됐다. 황제는 강경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주동자 7명을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됐는데,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그 가운데 각 당의 한 명씩이 칼을 맞고도 살아남는 일이 생겼다. 이때 민중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살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인들은 냉정하게 다시 사형을 집행해서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양당이 합세해 폭동을 일으켰다.

 

세 마리의 뱀 기둥.

3일 뒤인 113. 황제가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히포드롬에 들어서자, 폭도들은 황제를 향해 전차경주 선수들을 격려하는 응원 구호 니카!(이겨라!)’를 외쳤다. 번역하면 황제 타도? 이쯤 되면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이겠지. 사실 이 폭동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배경이 있었다. 그 시대 비잔티움의 황제들은 벼슬을 팔아 축재를 하는 매관매직을 밥 먹듯 했다. 그렇게 쌓인 돈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각종 축제와 운동경기를 열어주면서 황제 자리를 굳건히 지킨 것이다.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런 관행을 폐지했다. 빵과 전차경주에 중독된 시민들로는 그런 황제가 '빵을 빼앗은 놈' 정도로 보일 수밖에. 밥 한 술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게 민초들 아니던가. 공짜로 먹고 즐기던 걸 빼앗았으니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었겠지. 그래도 좀 그렇다. 황제가 상대방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들여온 쇠고기를 먹고 백성 몇 사람 두개골에 구멍이 났다든가, 황제의 친인척이 물불 안 가리고 해먹다 보니 나라가 거덜나게 생겼다든가, 강이란 강은 전부 파헤쳐 비만 오면 '노아의 방주'를 사겠다는 주문이 빗발친다면 몰라도 빵 좀 안 줬다고 폭동까지 일으킬 거야. 폭동은 급기야 반란으로 확대돼 폭도들이 황궁에까지 몰려들었다. 그게 바로 니카반란이다. 잠깐. 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배경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고 왔다 갔냐 하냐고?

 

십자군이 발가벗긴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네토스 황제의 오벨리스크’.

생각보다 오래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교를 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니카반란이 일어난 532년 전후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신라가 금관가야를 복속했고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가 공인됐다. 백제는 사비성으로 천도했다. 그런 사실을 적은 기록들이라 봐야 몇 줄에 불과하다. 그러니 동이든 서든 자세한 건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히포드롬에서 시작된 폭동은 결국 새 황제를 뽑는 데까지 이어지고 만다. 성소피아 성당도 불길에 휩싸인다. 그 소용돌이 속에 서 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원래 담이 그리 크지 못한 사내였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함성이 담을 넘어오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황제는 어마, 뜨거라! 도망칠 생각밖에 없었다. 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기는데 담 큰 마누라님, 아니 황후인 테오도라의 호통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어딜 가신다는 겝니까? 황제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 황궁입니다. 어의(御衣=황제의 옷)보다 더 좋은 수의(壽衣=죽은 이에게 입히는 옷)는 없습니다. 지금 도망치면 다시는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을 겝니다.” (대부분은 내가 재구성한 문장이다. 대충 그랬을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죽어도 여기서 싸우다 죽으라는 것이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혹은 마누라가 무서웠던 황제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벨리사리오스라는 장군을 불러 폭도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진압은 성공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폭동에 참여했던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6분의 1이라는 엄청난 숫자였다.

 

히포드롬 주변에 활짝 핀 자귀나무 꽃.

폭동과 진압. 지금 내가 서 있는 히포드롬에는 핏물이 냇물처럼 흘렀을 것이다. 황제의 기록으로 보면 위대한 승리일지 모르지만 민초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극적인 역사다. 더구나 빵 때문에 죽었다는 건 가장 슬픈 일이다. 아무튼 니카반란 진압을 계기로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결국 위대한 황제로 훗날까지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가 이룬 업적들을 새삼 나열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지금 나는 정의와 불의, 혹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자는 게 아니라 히포드롬 이 품은 이야기를 하나 전하고 싶은 것이다. 광장을 밑천으로 미천한 삶을 살던 한 여자가 황후가 되고 황제의 지위를 잃을 뻔한 남편을 호통 쳐서 위대한 황제가 되게 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너무 길었나? 그래도 딱 히포드롬 이야기 하나만 더. 광장의 남쪽 끝에는 흉물스런 외관을 갖고 있는 탑이 하나 서 있다. 이름도 길기도 하지.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네토스 황제의 오벨리스크라는 이름의 탑이다. 원래 32m 높이로 쌓은 대리석에 금박 청동 장식물을 입힌 아름다운 기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제 4차 십자군의 폭거로 인해 흉물스런 모습으로 변했다. 성전이라기보다는 난전이 되어버린 전쟁,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처음의 뜻은 오간데 없이 같은 기독교의 나라로 쳐들어온 그들은 이 탑조차 발가벗기고 말았다. 무기를 만든다는 영분으로 탑에 있는 청동을 몽땅 떼어낸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리석만 남은 흉물이 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지만 십자군 전쟁은 비잔티움의 황제, 즉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옛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히포드롬의 관광객들. .

다른 사람들이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세 마리 뱀의 기둥에 흠뻑 빠져 있는 사이 나는 흉물스러운 형태의 오벨리스크 앞을 홀로 서성거린다. 역사는 미명(美名)만 기록하는 게 아니라 악명(惡名)도 기록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쥐고 잠시 고뇌한다. 탑 옆에는 비 맞은 자귀나무 꽃이 탐스럽다. 여기서는 이 꽃을 무어라고 부를까. 잠시 나무에 기대어 말 없는 역사를 곱씹어본다.

 

 

 

 

 

 

 

 

 

 

 

 

posted by sagang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옥수수와 군밤을 파는 성소피아 성당 앞의 노점상

지하궁전이라 불리는 예레바탄

예레바탄 입구

지하저수지 예레바탄에서

성소피아 성당에서 나오니 길에는 노점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리어카에서 파는 군것질거리가 예사롭지 않다. 군밤과 구운 옥수수. 이건 코리아 콘셉트인데? 이 나라 사람들도 저런 걸 좋아하나 보다.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건너 예레바탄 지하저수지로 향한다. 소위 지하궁전이라고 일컫는, 이스탄불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다. Yerebatan에서 Yere땅에라는 뜻이고 Batan빠지다라는 뜻이란다. 결국 땅 속에 빠진 궁전이란 말인데 지하저수지 치고는 제법 호사스런 이름을 얻은 셈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가 물을 저장하기 위해 532년에 건설했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을 지어 놓고 ! 솔로몬이여~” 어쩌고 하며 감격을 금치 못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지하 저수지는 궁전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길이가 140m, 70m, 높이 9m8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적에게 포위될 경우를 대비하여 물 비축용으로 지었다는데, 당시 도시 규모와 인구를 짐작할 수 있다. 물은 도시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왔다고 한다. 이 저수지에는 336개의 대리석 기둥이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병사들이 열병하듯 서 있는데, 기둥마다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재미있는 건 기둥의 모양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예레바탄의 기둥들.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천형처럼 거꾸로 선 메두사의 머리

맨 오른쪽 '수공'이란 글씨가 보이는지.

성소피아 성당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이 동네는 무엇을 지을 때마다 석재를 고대 신전에서 뽑아다 쓴 모양이다. 그러니 출신지에 따라 생김새가 모두 다를 수밖에. 이것도 창조를 위한 파괴라고 해야 하나? 바깥세상은 땀을 흘릴 만큼 더운데 안으로 들어서니 으스스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시원하다. 조명을 받은 바닥에는 물고기들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다.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지하세계에서 일평생을 마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조금만 나가면 태양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이 곳의 진짜 명물은 메두사의 머리다. 맨 안쪽으로 가면 돌로 조각한 2개의 메두사 머리를 만날 수 있는데 하나는 뺨을 바닥에 댄 채로, 또 하나는 아예 머리를 땅 쪽에 박은 채 서 있다. 저들은 왜 저런 모습으로 저 곳에 있는 걸까. 1984년 보수공사를 할 때 발견됐다는데, 지금도 왜 그곳에 그 모습으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듯, 마법에 걸린 메두사의 형상을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하는 저주가 내려진다는 이야기만 그럴 듯하게 뒷받침해줄 뿐이다. 되짚어 나오다보니 입구에 기념품 가게와 카페가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재미있는 걸 발견한다. CD와 엽서 등을 판매하고 있는데 판매대에 간단한 설명이 붙어있다. 대여섯 개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뜻밖에 한글도 있다. ‘수공손으로 직접 그렸다는 것이겠지. 우와! 심봤다. 그렇다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중 한국인들이 5~6위 안에 들어간다는 것인데. 이거 좋은 일인가?

점심을 먹은 카페거리. 오른쪽 조금 흔들린 여인들이 바로 헤매던 동포

이스탄불의 거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지하 저수지에서 나오니 더 이상 걷기 어려울 만큼 허기가 진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이런 때 쓰라고 나온 게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가 이스탄불에 가면 꼭 들러보라고 추천해 준 음식점이 생각난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만나는 골목을 한참 들어가면.” 그렇다면 이 근처인데. 문제는 한참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음식점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골목에는 카페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는데 그 집이 그 집 같다. 에라, 모르겠다. 입구 쪽에 있는 카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아무리 좋은 집이 있다고 해도 찾아갈 힘이 없을 만큼 배가 고프다. 케밥과 맥주를 한 잔을 주문해 허겁지겁 점심을 때운다. 케밥보다는 시원한 맥주가 입에 더 반갑다. 서울 가면 이놈의 맥주 마르고 닳도록 마셔야지. 맥주회사들 잘 들어. 나 귀국하기 전에 여유분 좀 만들어놔야 할 거야. 입에 케밥을 구겨넣고 맥주를 들이키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 왔다 갔다 한다. 점심식사를 하려는데 어느 집이 마땅한지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해서 느닷없이 이 집 음식 먹을 만 해요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온다. 친구들끼리 터키 중부를 돌고 와서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을 탐색하는 중이란다. “혹시 두 분은 안 싸웠어요?” 함께 온 사람과 헤어지고 혼자 유령마을 카야쾨이를 찾아왔던 아가씨가 생각나서 물었더니 싸울 일이 있어야지요.” 하며 까르르 웃는다. 그래, 싸울 일이 뭐 있을까. 좋은 경험 하자고 떠난 여행, 힘들고 피곤할수록 양보하고 배려하면 될 것을.

톱카프 궁전의 문들

그녀들과 헤어져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엔 톱카프 궁전. 내가 가고 싶은 모든 곳이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어서 다행이다. 트램이나 택시를 타고 다녀야 한다면 또 얼마나 번거로울까. 트램이 천천히 오가는 길을 따라 톱카프 궁전으로 간다. 이곳은 한 때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영토로 거느리며 대제국을 형성했던 오스만의 황제들이 살던 궁전이다. 1453년 우여곡절(배를 끌고 언덕을 넘는 일이 벌어졌다) 끝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술탄 메흐메트 2. 남이 지어놓은 궁전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새 궁전을 짓기로 한다. 그 장소가 바로 세 대륙을 지배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 마르마라해, 보스포러스 해협, 골든혼으로 둘러싸여 최고의 풍경을 자랑하는 이 자리였다. 1472년 착공해서 1478년에 준공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그저 궁전이라고 불렀는데 후대로 오면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향해 대포를 설치했기 때문에 이름이 톱카프로 굳어졌다. 70의 넓은 부지에 자리한 이 궁전은 투르크 족 전통의 흔적이 배어 있다. 마치 유목민들이 생활공간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게르를 치는 것처럼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건물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지었다. 많을 땐 이곳에 5000명 넘게 거주했다고 한다.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문인 황제의 문을 지나서 만나는 곳이 제1정원. 이곳은 개방 공간이다.

톱카프 궁전 내부

톱카프 궁전을 거닐다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 불리는 근위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부른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정원에는 잘 손질된 녹색 잔디가 깔려 있다. 잔디 위에 큰 그늘을 내리고 있는 플라타너스에서 잎이 하나 둘 떨어진다. , 이젠 이곳에도 어쩔 수 없이 가을이 오려나보다. 그래, 명색이 10월인데. 그러보니 나뭇잎들도 조금씩 누런 색깔을 띠고 있다. 내 나라에는 지금쯤 가을이 깊겠다. 길지도 않은 여행에 벌써 향수병이 들었나? 잡념을 털어버리려 얼른 두 번째 문인 평안의 문을 지난다. 이곳에서 제2 정원을 만나는데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궁전의 시작이다. 이 정원에서는 출정식, 공주의 결혼식 등 각종 국가행사가 치러졌다고 한다. 또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한 디반 건물과 왕실 주방건물도 있었다. 왼쪽으로는 하렘 입구가 있다. 술탄의 어머니, 부인 등 여자들만 생활하는 하렘은 아랍어 하림이 어원으로 금지된 곳이라는 뜻이다. , 황제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이 하렘에는 약 250개의 방이 있다. 한번 하렘에 들어간 여자는 죽어서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하니 황제의 눈에 띄어 하룻밤 함께 하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으리라. 희망치고는 참 비참한 희망이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슐레이만 시절에는 하렘에 머무는 여인이 1000여 명에 이르렀고 황제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가는 비밀 통로도 있었다고 한다.

궁전내부의 이곳 저곳. 맨 아래 사진 수도꼭지는 황제가 밀담을 할 때 보안을 위해 틀어놓았다지.

다시 걸음을 옮겨 지복의 문을 지나니 제3 정원이 나온다. 이곳에는 황제 알현실이 있다. 오스만의 황제들은 신비감을 유지하기 위해 공식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고 외교사절도 이 방에서 만났다고 한다. 오른쪽 건물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다. 호박만한 금덩이라도 전시돼 있나? 얼른 쫓아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가 바로 보물 전시실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 이후 약탈을 당할 일이 없었던 터키는 각종 유물들이 잘 보존돼 있다. 세계 최대의 에머랄드로 장식된 단검, 황금 의자, 보석이 촘촘히 박힌 주전자, 86캐럴짜리 다이아몬드 등 입이 쩍 벌어질 만한 온갖 보물들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노래를 부르고 있다. 모조품이 아니고 전부 진품이라니 그 가치가 얼마며 이만한 보물을 모을 수 있었던 황제의 권세는 대체 얼마만큼 컸던 것인지. 문제는 워낙 보석이 많으니 어지간한 건 그저 돌처럼 보인다. 카메라를 든 내가 들어서면서부터 제복을 입은 경비원의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발광을 시작하더니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셔터를 누르려는데, 병아리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내 팔을 잡는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셔터 소리에 보석이 경기라도 일으킨다더냐? 워낙 보석 같은 것에 흥미가 없는데다가 박절한 경비원의 눈초리가 싫어 건성으로 돌고 그냥 나온다. 3 정원을 벗어나니 제4 정원이 이어진다. 이곳은 황제와 가족들의 휴식공간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바다가 보이는데 왜 이곳에 궁전을 지었을지 바로 알아차릴 만큼 전망이 좋다. 마르마라해, 보스포루스 해협이 코앞에 있다.

저렇게 바다가 코앞에 있다.

세 갈래로 나눠진 바다

난 지금 유럽에서 아시아를 건너다보고 있다. 대륙과 대륙이 이리 지척이구나. 저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얼마나 많은 질곡이 있었을지. 궁전의 해안 쪽 끝에는 규율을 어긴 하렘의 여인들을 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참 끔찍한 일이다. 자유와 희망 따위는 약에 쓰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일생을 마쳤을 여인들. 아름다운 바다가 지척인데도 죽기 위해서나 갈 수 있었다니. 이젠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누가 발목에 납덩이라도 매달아놓은 듯,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2정원으로 다시 나와서 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고 다리쉼을 한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나 혼자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쓸쓸해진다. 홀로 하는 여행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우울한 기분이 들 때. 그땐 얼른 훌훌 털고 일어서야 한다. 톱카프 궁전에서 나와 그랜드바자르로 가고 싶었는데 마침 일요일은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아쉬울 데가 있나. 이스탄불까지 와서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었다는 그곳을 그냥 지나치다니. 유럽의 물산이 아시아로 전해지고 아시아에서 온 물품들이 유럽으로 넘어간 곳이 바로 그랜드바자르다. 30의 거대한 면적에 출입구만 20개가 넘고 입점한 점포가 5000개를 헤아린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이스탄불로 가기 전에 그랜드바자르를 들른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거기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길 잃고 못나올 수도 있어요겁을 주길래 코웃음을 쳤는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미뇌뉘 선착장에서 본 풍경들. 저 갈라타 다리 1층에 한 많은 고등어 케밥집이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에미뇌뉘 선착장에 이르자 해협을 오가는 유람선과 광장을 오가는 인파, 그리고 해변에서 낚시에 열중하는 사람들도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늦여름(?)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철없는 강아지처럼 길 위를 뒹굴뒹굴 구른다. ! 옷 버린다. 그 모습이 지친 몸에 힘을 불어넣어준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을 조금 설명하고 가야할 것 같다. 이곳은 두 개의 해협과 하나의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다. 조금 전 다녀온 톱카프 궁전이 있는 쪽, 즉 오른 쪽은 마르마라해이고 앞으로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있다. 이 해협은 흑해로 연결된다. 그리고 저만치 갈라타 다리가 보이는 왼쪽으로는 골든혼이라는 바다의 지류가 뻗어있다. 굳이 말로 된 지도를 그리는 이유는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에 대한 이해를 조금 넓히기 위해서다. 이스탄불은 이렇게 바다에 의해 크게 세 쪽으로 나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 속한 구시가지, 그리고 역시 유럽의 신시가지, 다음이 아시아다. 지금까지 봐온 블루모스크, 성소피아 성당, 지하궁전, 톱카프 궁전 등 대부분의 이름 있는 유적은 구시가지에 있고, 구시가지에서 골든혼 위의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 신시가지가 시작된다. 신시가지에서 차를 타고 보스포러스 다리를 건너야 아시아에 닿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구시가지에서 직접 배를 타고 아시아로 건너가는 방법도 있다. 무슨 도시가 이렇게 복잡한지 원. 갈라타 다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간다. 2층으로 되어 있는 다리는 아래 위 모두 인파로 북적거린다.

갈라타 다리 위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들. 저 아이 큰 낚시꾼 될게다.

갈라타 탑에서 본 이스탄불

다리 1층에는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과 바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저곳에서 그 유명한 고등어 케밥을 판다는데. 잠시 서서 입맛을 한 번 다셔보지만 결국 그냥 지나친다. 조금 전에 밥을 먹은 것도 문제지만, 그곳을 들를 만한 시간이 없다.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고등어케밥에 맥주 한 잔 하면서 석양을 즐길 수도 있을 텐데. 다음에 올 땐 오늘의 아픔을 반드시 보상 받고 말리라. 다리 한 가운데로는 트램 철로가 있고, 양쪽 난간에는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남녀노소, 아니 여자는 없다. 암튼, 온갖 사람이 없이 쏟아져 나와 다리 아래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정말 물고기가 잡히는 것일까? 다가가 보니 숭어처럼 생긴 물고기들이 그릇마다 잔뜩 들어 있다. 어떤 꼬마 아이는 피라미를 닮은 작은 물고기를 장난감 삼아 갖고 놀고 있다. 너 크면 큰 낚시꾼 되겠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서 찾아갈 곳은 갈라타 탑.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다. 골목길을 따라 15분쯤 걸어올라가니 갈라타 지역의 가장 높은 곳이라 짐작되는 곳에 탑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굳이 이 갈라타 탑을 찾은 것은 탑 자체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이스탄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528년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항구를 지키기 위한 감시탑으로 세웠는데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됐다고 한다. 그걸 갈라타 지구를 차지한 제노바 자치구가 1348년에  타워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이름으로 재건축했다. 한 때는 포로 수용수나 기상관측소로도 쓰였다니, 팔자가 드난살이로 평생을 마친 여인만큼이나 험했던 모양이다. 

갈라타 탑에서 바라본 이스탄불의 풍경

탑 아래에는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들 역시 이스탄불 전경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겠지. 꽁무니에 서서 한 참 지난 다음에야 입구의 계단으로 오를 수 있다. 11층 높이의 이 탑은 10층까지만 엘리베이터가 가고 맨 위층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10층은 전망대와 레스토랑, 나이트클럽이 들어서 있다. 발코니 난간에 서면 누구나 아! 하는 감탄사를 아끼지 못한다. 말 그대로 이스탄불 시내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기 조금 넓은 바다가 마르마라해, 그리고 보스포러스 해협, 저곳은 골든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보스포러스 해협 저기 어디에서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 골든혼으로 들어갔다지. 하지만 지금은 산도 언덕도 흔적조차 없다. 대신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성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 등 조금 전에 다녀왔던 건물들도 저만치서 손을 흔든다. 우리의 남산타워처럼 최고의 전망대다. 문제는 난간이 너무 좁고 관람객은 너무 많다는 것. 줄을 서서 천천히 도는 게 아니라 먼저 온 사람 나중에 온 사람이 마구 섞여서 엉덩이를 비비고 새치기를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지친 몸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 얼른 다시 내려온다. 갈라타 탑을 빠져나와 광장의 벤치에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한다. 이스탄불에서, 아니 터키에서 내 공식 일정은 끝났다. 이젠 공항으로 가야한다. 이율배반적인 감정, 허전함과 안도감이 전신을 엄습한다. 게 바로 시원섭섭하다는 건가? 그나저나 정말 여기서 끝일까?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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