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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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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에 해당되는 글 1

  1. 2010.05.03 [사라져가는 것들 137] 흑백TV7
2010. 5. 3. 09:34 사라져가는 것들
밤깐산 마루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동네를 내려다보던 해가,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동시에, 툇마루에 앉아있던 아이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린다. 멈춰주기를 그리도 소망했던 시간은 성큼성큼 걸어와 운명의 순간을 코앞에 데려다 놓았다. 지금쯤 동네사람들은 모두 철구네 집 큰방에 앉아 있을 것이다. 재채기라도 하면 눈총을 받을까봐 숨을 죽인 채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을 것이다. 아이가 몇 번 몸을 들썩거려보지만 엉덩이는 마루에 그대로 붙어있다. 제갈공명과 장자방이 한꺼번에 온대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발톱 빠진 늙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담을 넘고 뒤란을 지나온 땅거미가 마당에 수묵화 한 점을 깔아놓는다. 아이 얼굴에 후회의 그림자가 밀물처럼 밀려온다. 아! 그 순간만 잘 넘겼더라면…. 문제는 학교에서 시작됐다. 점심시간이었다. 꽤 빨리 도시락을 까먹고 나갔는데도 몇몇 아이들은 벌써 나와 운동장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자 애들은 축구를, 몇몇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거기엔 애경이도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가슴을 방앗간집 발동기처럼 쿵쾅거리게 만드는 애경이. 앞에만 서면 숨이 차올라와 말 한번 제대로 못 붙여본 애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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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하는데 끼어볼까, 플라타너스 아래서 말뚝박기를 할까, 아니면 딱지를 칠까, 망설이고 있던 아이의 눈에, 철구의 수상쩍은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뭔가 감추고 고무줄놀이를 하는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표범처럼 조심스럽고도 탐욕스런 모습이었다. 아이가,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일이 저질러진 다음이었다. 철구가 날쌔게 달려들어, 숨겼던 칼로 고무줄을 끊어놓은 것이었다. 여자애들의 비명이 새떼처럼 푸드득 푸드득 날아올랐다. 아이에게는 오로지 애경이의 비명만 들리는 것 같았다. 가슴이 후벼 파는 듯 아팠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자애들 편을 든다는 건, 거시기를 떼고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오늘은 테레비에서 레슬링을 하는 날이었다. 아! 김일 선수의 그 시원스런 박치기. 그걸 못 보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철구에게 잘못 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눈을 꾹 감고 돌아섰지만,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악운과 이미 악수를 나눈 뒤였다. 전쟁에서 이긴 로마 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다가온 철구가 아이의 어깨를 툭 쳤다. 아이가 주먹을 한번 부르르 떨었지만 금세 웃음을 얼굴에 깔았다. 테레비라는 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던 일이었다. 아이가 왕이라면 철구는 마부에도 못 미치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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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딱지 치자.” 철구가 명령이라도 하듯 내뱉더니, 대답 따위는 아랑곳없이 한 동네에 사는 아이 몇 명을 불렀다. 모두 ‘황공무지로소이다’ 하는 표정을 앞세워 모여들었다. 하필 그 순간 축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뇌리를 때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시작된 딱지치기가 비극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이상한 날이었다. 아이가 치기만 하면 철구의 딱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너부죽 너부죽 넘어갔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일부러라니…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살살 쳤다. 얼마 안 있어 철구의 딱지가 바닥을 드러냈다. 철구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과 비례하여, 아이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갔다. 씩씩거리던 철구의 입에서 저주의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넌 우리 집에 오지마!!!” 그리고는 약이라도 올리듯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 집에 올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뉘라서 그 암흑 속의 등불과 같은 손가락에 경배하지 않으랴. 철구가 아이를 바라보며 비리게 웃더니 침을 탁 뱉었다. 거기까지도 잘 참아 넘긴 것 같았다. 아이의 눈이 뒤집어진 건, 철구에게 달라붙은 아이들 가운데서 애경이의 단발머리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때 무릎이라도 꿇고 사정을 했어야한다. 이 딱지 모두 갖고 마음을 돌려달라고. 하지만 그런 쓸모 있는 생각은 꼭 나중에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그저 주먹 한번 휘둘렀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널브러진 철구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모든 건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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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이 철구가, 마을 아이들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 건 테레비가 나타난 뒤부터였다. 월남(베트남)에서 돌아온 철구 막내삼촌, 영팔씨를 따라온 것이었다. 꽤 오래 전이었다. 그 귀한 것도 처음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동네에 테레비가 웬말이냐고, 되레 웃음거리가 되었다. 철구 아버지가 그걸 팔아보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전기 없이 텔레비전을 켜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동네에 느닷없이 전기가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읍내와 마을 사이에 큰 공장이 들어서면서,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듯 마을까지 전봇대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애물단지로 전락해 통한의 세월을 보내던 텔레비전이 드디어 세상을 호령하기 시작했다. 땅이나 파먹고 살던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은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상자 안에 사람이 들어가 노래도 하고 춤도 추니 눈이 돌아갈 만도 했다. 라디오 안에도 사람이 들어있을 거라고 믿는 이들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말도 많고 해석도 구구했다. “저기 나오는 사람들이 ‘라지오’ 안에 있던 그 사람들이여? 그런디 저 사람들은 뭘 먹구 산디야?” 하는 걱정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근처 3개 면(面)에서 최고의 바보로 공인된 삼룡이가 울고 갈만한 말도 오갔다. “즌기가 나가면 워떻게 본댜?” “아, 걱정도 팔자여. 테레비 뒤에다 촛불을 스무 개쯤 켜놓으면 지가 안 나오고 배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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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과 여닫이문까지 달려 제법 위엄을 갖춘 텔레비전은 금세 동네 명물 자리를 꿰찼다. 철구 아버지는 누가 몰래 훔쳐볼세라 여닫이문에 수박만한 자물쇠를 달아두었다. 텔레비전이 제 구실을 하면서 그는 일약 동네 유지로 부상했고, 날마다 쥐어 박히고 얻어터지는 게 일이던 철구는 꼬마대장으로 등극했다. 철구 삼촌 영팔씨를 떡 훔쳐 먹은 옆집 개 보듯 하던 사람들도, 아부를 콩고물처럼 묻혀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말이여. 영팔이가 큰 인물이 될 중 알었어. 개천에서 용 난다고 허잖여. 어릴 적버텀 싹수가 퍼러스롬한 게 남달렀다니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싸가지가 바가지만도 못헌 놈”이라고 욕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멋쩍은 웃음을 선물 삼아 저녁마다 철구네 마당을 들어섰다. 어른들은 그렇게라도 때우면 됐지만,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왕자’ 철구는 아이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평소에 눈이라도 한번 잘못 흘긴 애들은 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 황홀함으로 가득 찬 텔레비전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야 하는 아이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읍내 만화방에 가면 10원씩 내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게까지 갈 엄두도 돈도 없었다. 결국 뇌물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딱지, 구슬, 새총 같은 귀한 것들이 철구에게는 늘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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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구를 발톱의 때만치도 안 여기던 아이 역시 아부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여로, 타잔, 전우, 수사반장, 웃으면 복이 와요…. 텔레비전에서는 눈깔사탕 따위는 비교도 안될 만큼 달콤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걸 맘 놓고 볼 수 있다면 철구의 까마귀 발에 키스한들 어떠랴. 그동안 그렇게 잘 견뎌왔었다. 오늘 그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학교에 다녀온 뒤 해결 노력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집안에 있던 모든 딱지와 구슬을 모아 철구네 집으로 갔었다. 하지만 마당에 들어서기도 전에 작대기를 들고 나온 철구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넋을 놓고 마루에 앉았던 아이가, 결연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있으면 김일의 박치기가 작렬할 시간이다. 어느덧 떠오른 달이, 강아지처럼 아이 뒤를 따랐다. 철구네 집 앞에서 잠시 기웃거리던 아이가 살금살금 뒤란 쪽으로 향했다. 굴뚝 옆으로 가더니 사다리를 끌어다 지붕에 걸쳤다. 처마 끝에는 텔레비전 안테나가 매어져 있었다. 아이가 성큼성큼 사다리를 올라가 안테나를 묶은 철사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이마에 금세 땀이 흘렀다. 한참 지나자 안테나가 끼기긱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잽싸게 사다리를 내려온 아이가 땅에 떨어진 안테나를 콱콱 밟기 시작했다. 잠시 뒤, 집안에서 급하게 뛰어나오는 소리와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달이 키득키득 웃으며 아이 뒤를 따랐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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