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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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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07 [사라져가는 것들 66] 소달구지13
2008. 7. 7. 11:14 사라져가는 것들
아비는 달구지꾼이었습니다.

어릴 적엔, 그 많은 직업 중에 하필 달구지를 몰고 남의 짐이나 나르는 일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아비를 원망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물려받은 것이라곤 바늘 꽂을 땅 한 평 없는 이가,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오갈 데 없던 아비가 남의 집 꼴머슴으로 들어간 것도 주어진 운명 만큼일 겁니다.

꼬박꼬박 모은 새경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키웠던 것도 사주에 그리 적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아비는 한 곳에 주저앉아 일할 팔자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그런 천성을 역마살이라고 불러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슴 살던 주인집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송아지가 부룩소(작은 수소)꼴을 벗자마자 달구지 하나 얹어 세상을 마냥 걸었겠지요.

달구지를 구루마라고 부를 때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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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엄을 낼 때, 추수를 할 때, 방아를 찧으러 갈 때… 어지간한 일에 달구지가 없으면 안 되었습니다.

지게 역시 유용한 도구였지만 일을 해내는 양으로는 달구지의 발밑에도 따라갈 수 없었지요.

장을 보러갈 때도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달구지를 내어 곡식이나 채소, 나무 등을 싣고 갔습니다.

따라서 마을마다 달구지 한두 대는 반드시 있었습니다.

아비의 달구지는 그런 일도 했지만, 짐을 싣고 멀리 떠나는 게 주업이었습니다.

트럭 같은 차들이 이 땅의 신작로를 누비기 전, 달구지는 거의 유일한 장거리 운송수단이었습니다.

먼 곳으로 가는 이삿짐도 소달구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짐이 있을 때마다 아비는 달구지를 몰고 길을 떠났습니다.

어느 땐 아주 멀리 가서 여러 날을 돌아오지 않기도 했지요.

짐을 가득 싣고 터벅터벅 떠나는 모습이 가족에게는 안타까움이었겠지만, 정작 당신은 그런 삶을 기쁜 마음으로 싸안고 살았던 것 같았습니다.

여러 날 만에 빈 달구지로 돌아온 아비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장작도 패고 울바자(대·갈대·수수깡·싸리 따위로 발처럼 엮어서 울타리를 만드는 것)도 손보고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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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짐을 실어다주고 밤길을 걸어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돈을 아끼려 주막거리를 그냥 지난 탓에 배가 등가죽에 붙었어도 아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걸었습니다.

휘영청 떠오른 달과 지나는 바람, 길가의 나무들을 관중 삼아 ‘황성옛터에~’ 노래 한곡을 불러 제치기도 했습니다.

낙천적 성격을 가졌던 아비는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좋았습니다.

하굣길에 그의 달구지를 만나면 아이들에게는 ‘운수 좋은 날’이었습니다.

허리에 두르거나 어깨에 비껴 맺던 책보를 달구지에 던져놓고 뒤에 대롱대롱 매달리거나 온갖 장난을 치며 따라갔습니다.

보통은 그럴 때, “이놈들 저리가라!!”하고 소리치기 마련이지만 아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하는 짓에 껄껄 웃다가, “이놈들, 구루마 타고 싶어 그러지?” 하고는 달구지에 오르도록 허락했습니다.

작은 아이들은 손수 안아서 올려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도 보답을 할 줄 알았습니다.

달구지에 짐을 가득 실은 소가 허연 거품을 물고 고갯길을 오를 땐, 아이들이 영차! 영차! 구령을 맞춰 밀어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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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지는 보통 나무로 짜는데 소가 끌면 소달구지나 우차(牛車), 말이 끌면 마차(馬車)라고 불렀습니다.

바퀴 역시 나무로 만들었는데, 마모를 막기 위해 겉에는 얇은 쇠를 둘렀습니다.

70년대 이후에는 나무바퀴 대신 자동차 타이어를 달기도 했지요.

아비 역시 자동차 타이어를 달아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구하기도 쉽지 않고 가격도 비싸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긴, 이미 그 무렵부터는 달구지 시대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신작로에 트럭들이 달리고, 산골까지 버스가 다니게 되면서 달구지를 쓸 일이 점차 줄어들었던 것이지요.

아비만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니 왜 모르기야 했을까요.

할 수 있는 거라곤 달구지를 몰고 길을 오가는 일뿐이었으니, 알면서도 고개를 젓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운명은 아비 앞에 똬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짐 하나를 맡아 길을 떠났다 돌아오던 날, 아비는 의식을 잃은 채 달구지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달구지를 타고 오다 어디쯤에서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진 것을, 길을 잘 아는 소가 알아서 집까지 온 것이지요.

간신히 의식을 차렸을 땐, 몸의 반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비의 소달구지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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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달구지를 구경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농촌에 경운기 같은 기계가 대량 보급되면서, 사라져가던 달구지의 운명에 못을 박게 된 것이지요.

요즘도 지역축제 같은 곳에 가면 이것저것 주렁주렁 매단 달구지가 아이들을 태우고 오가지만, 그걸 달구지라고 하긴 낯이 좀 뜨겁습니다.

물론 달구지가 사라진 이 땅엔 더 이상 ‘아비’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 모를 일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소고삐를 질금 잡고 어둠이 질펀하게 깔린 고샅길을 들어서던, 작고도 여윈 아비의 모습이 왜 자꾸 커지는지.

소달구지의 그 삐걱거리던 소리와 구수한 쇠똥 냄새가 왜 몹시도 그리워지는 건지.

올 여름에도 아비의 무덤가에는 무성하게 자란 쐐기풀들이 키를 재고 있을 테지요.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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