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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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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11. 10:23 백두산을 가다

 

5시간 30분을 달려가다
밤새 늘어지게 쉰, 우리의 노란버스는 심양 시가지를 씽씽 달려갑니다. 0715. 아직 출근시간 전이라서 도로는 한산한 편입니다. 조금 달렸는가 싶었는데 마술이라도 부린 듯 풍경이 싹 바뀝니다. 빌딩은 사라지고 논과 밭이 이어집니다. 심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동북평원, ‘만주벌판으로 불렸던 이름에 걸맞게 끝이 없습니다. 논마다 모내기가 한창입니다. 우리보다는 꽤 늦은 편입니다. 기계이양은 찾아보기 어렵고, 과거에 우리가 그랬듯이 손으로 모를 심습니다. 차는 열심히 달리지만 달라지지 않는 풍경에 슬슬 질리기 시작합니다. 설친 잠을 벌충한다고 눈을 감아보지만 온갖 상념이 장마철 개구리처럼 울어댑니다.

심양에서 집안까지는 5시간 30분 거리. 요녕성에서 길림성으로 넘어가야 하니 그리 만만한 여정은 아닙니다. 중국 땅이 한반도의 100배쯤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도를 보면 바로 옆 동네인 것 같은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것보다 더 걸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가이드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우스갯소리를 보탭니다. 중국 사람들은 기차나 버스를 타고 열 시간 스무 시간 가는 것을 이웃에 마실 가는 것 정도로 여긴다고 합니다. 여행을 하다 목적지가 두 시간쯤 남으면 거의 다 왔다고 짐을 챙긴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남으면 짐을 들고 문 앞에 서있는답니다. 킬킬 웃으면서도 괜히 드는 주눅을 감추지 못합니다.

중국에는 묘지가 없다
?
여행길의 지루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갸륵한 조선족 청년, 가이드의 설명은 이어집니다. 요즘은 중국에서도 개인 땅이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아직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의 소유는 아니고, 30~50년간 장기임대 형식으로 땅에 대한 권리를 부여한다고 합니다. 그 임대권이 자식에게 넘어간다면 거의 완전한 소유나 마찬가지겠지요. 가이드 자신이 조선족이기 때문인지, 소수민족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54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대부분은 언어와 문화를 상실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한족(漢族)에 동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다행히 조선족은 잘 지켜내고 있다니 고맙고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다 깨다 이야기를 듣다 잠시 화장실을 들렀다가. 여정은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요녕성과 길림성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먼저 자동차들의 번호판이 요녕성의 (간자체로 씀)’자에서 길림성(吉林省, 지린성)吉'자로 바뀐 것이 눈에 띕니다. 드문드문 산들이 차창 밖으로 달음질치는 게 산악지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일행 중 한 분이 묻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왜 무덤이 없지요?”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무덤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가이드의 목소리에 신명이 오릅니다. 역시 질문은 시어머니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맞나봅니다. 애당초 묘지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이 국가 정책으로 묘지를 못 쓰게 했다고 합니다. 등소평 자신부터 화장을 선택했다고 하지요.

그가 걸출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집계된 인구만 해도 13억이라는 중국이, 사람이 죽을 때마다 매장을 한다면 아마 모든 땅이 묘지로 변할 게 뻔합니다. 산 자들이 살아야 할 땅을 사자(死者)들이 차지하는 셈이지요. 우리나라도 묘지문제는 이미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거꾸로 달리는 이는 어디든 있는 법. 지금도 몰래 매장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전봇대는 주변을 도톰하게 쌓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는 그 안에 부모의 시신을 묻는 사람도 있답니다. 차가 산골 쪽으로 들어가면서 이제 우리 곁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간간히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냇가에 앉아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가슴 저릴 만큼 아름답습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저로서는 그냥 지나치는 것도 고역입니다.

고구려의 땅에 도착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산은 험하고 계곡도 깊어집니다. 창밖으로 철도 하나가 길게 누워 있는 게 보입니다. 바로 북한과 연결된 철도라고 합니다. 남북 간에는 끊어진 철도가 이 오지와는 연결돼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헐떡거리며 달리던 버스가 작은 도시로 들어섭니다. 드디어 고구려의 땅집안(集安, 지안)입니다.

 주몽이 부여를 빠져나와 고구려를 세웠을 때 첫 수도는 이곳 집안이 아니라 졸본성(卒本城)이었습니다. 졸본성은 지금의 요녕성 환인현(桓仁縣) 오녀산에 있는 산성이라고 합니다. 지도를 보면 집안에서 심양 방향으로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유역입니다.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3년까지 34년간 동안 그곳에 있다가 유리왕 22년에 국내성, 즉 지금의 집안으로 옮겼습니다.(그보다 한참 뒤에 천도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 후 장수왕 15(427) 남진정책을 위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게 됩니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라 요녕성 태자하유역의 요양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집안은 중국의 3대 국경도시로, 북한의 만포진과 손끝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습니다. 도시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편으로 인구가 30만 정도입니다. 집안은 우리에게는 많은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북한과 인접해 있다는 것 말고도 고구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성터나 환도산성, 그리고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군총(장수왕릉) 등 고구려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불고기가 그 불고기?
집안 시가지를 가로지른 버스가 어느 음식점 앞에서 섭니다. 압록강이 코앞인데 웬 음식점?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아침을 먹은 뒤 내내 차를 탄 기억밖에 없는데. 안내서에 오늘 점심은 불고기라고 쓰여 있던 게 기억납니다. 예까지 와서 무슨 불고기람? 썩 마음에 드는 메뉴는 아닙니다. 저는 다른 나라에 가면 아무리 거친 음식이라도 현지식을 먹어야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문화는 음식에 집약돼 있다는 믿음 때문이지요. 하지만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서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저게 불고기야? 야외에 있는 둥근 테이블에 상을 차렸는데, 가운데에 숯불화덕이 놓여있고 그 위에 철망 석쇠가 놓여있습니다. ‘불고기? , 제가 생각하던 그 불고기가 아닙니다. 쟁반에 생고기와 양념고기가 푸짐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기를 불에 구워먹는다고 해서 불고기?!!

모든 게 푸짐합니다. 고기도 밥도 상추도. 일행은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둘러앉아 고기를 굽습니다. 젓가락이 빛의 속도로 오갑니다. 옆 테이블에서 소주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래, 뭔가 허전하다 했지. 저도 질세라 소주를 시킵니다. 평생 기자질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점심시간에도 적정량의 알코올을 섭취할 수 있는 능력뿐입니다. 소주는 한국에서 건너온 것들입니다. 주인도 종업원도 우리말을 합니다. 돈도 한국 화폐가 기본. 소주 한 잔에 알딸딸해진 머릿속은, 예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고기는 먹고 남을 만큼 충분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하물며 압록강이야. 구워라, 부어라, 마셔라. 배가 부르고 나서야 고국에 두고 온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모두들 배가 남산 만해져서야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 압록강 푸른 물이여
드디어 압록강을 만날 시간입니다. 음식점 문을 나서자마자 술기운은 슬며시 가시고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합니다. 음식점에서 압록강까지는 지척입니다. 조금 걸어가니 저만치 강물이 보입니다. 달리 듯 걸음을 재촉합니다. ‘鴨綠江이라고 새긴 표지석 앞에 서니 가슴은 더욱 뜁니다. 강은 그저 강일뿐인데 어인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강폭은 예상했던 것보다 넓지 않습니다. 상류 쪽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물은 푸르고 푸릅니다. 강물을 훑던 눈길은 천천히 강을 건너 맞은편 기슭에 가 닿습니다. 저곳이 바로 북한 땅. 그리 넓지 않은 강인데, 눈길은 건너도 몸은 건널 수 없습니다. 타인의 땅에 서서 우리의 강토를 바라만 봐야하는 심정은 그저 안타까움입니다.

그런데, 강의 이쪽과 저쪽 땅이 너무 다릅니다. 중국 쪽의 산들은 나무들로 푸르게 우거져 있는데 북한 쪽은 벌겋게 발가벗고 있습니다. 산어귀뿐 아니라 등성이까지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이드가 설명을 해줍니다. 북한의 모든 농토는 국가 소유지만,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개인이 산에 작물을 심어 수확하는 건 허용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저 비탈을 벗겨서 무슨 농사가 된다고. 비라도 내리면 모두 씻겨 내려갈 텐데. 그래도 자신의 수확물이 생긴다는 희망 하나로 열심히 농사를 짓는다고 합니다. 집단농장의 공동경작이 끝나는 여섯시가 넘으면, 너도 나도 산으로 올라가 물도 주고 김도 맨다는 것이지요. 내 손으로 심어 내가 거두는 것만큼 소중한 게 있을까요. 하지만 낱알 몇 줌을 얻기 위해 산비탈에 흘려야할 땀과 노고, 상상만으로도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찌릅니다.

 
벌거벗은 산들과 목탄차
가이드는 산을 벗겨먹는 것도 순서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로 치면 이장이나 통장 쯤 되는, 힘 있는 사람은 아래쪽을 차지하고 그나마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은 꼭대기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또 아무 산이나 벗기도록 허용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법 푸른 산도 간혹 보입니다. 망원렌즈로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산 밑 도로를 따라 일렬로 서 있는 단층집들을 발견합니다. 기계로 찍어놓은 듯 똑같이 생긴 집들.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한참 뒤 트럭 한 대가 짙은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지나갑니다. 연기가 심상치 않아 물어보니 나무를 때서 움직이는 목탄차라고 합니다.

 

강 위에는 모터보트가 굉음을 쏟아내며 물살을 가릅니다.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관광 상품입니다. 너도 나도 한 번씩 타보겠다고 줄을 섭니다. 하지만 저와 제 친구들은 망연한 눈길을 북한 땅에서 떼지 못합니다. ‘뱃놀이만은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서로 통했는지도 모릅니다. 괜한 감정낭비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가슴 속의 납덩어리는 쉽사리 내려앉을 기미가 아닙니다. ‘보다는 건너 쪽에 있는 사람들때문일 겁니다. 이제는 그만 돌아서고 싶습니다. 가이드를 재촉해서 버스에 오릅니다.

 

다음엔 공주릉,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릉, 장수왕릉고구려의 유적을 돌아봅니다. 

posted by sagang
2011. 7. 4. 08:38 백두산을 가다

조상의 발자취 아득한데
공항을 나선 버스는 심양시내를 달립니다. 목적지는 심양의 한인촌(코리아타운)인 서탑가(西塔街). 심양(瀋陽), 중국 발음으로는 센양(Shenyang)쯤 되는 도시. 요녕성(遼寧省, 랴오닝성, Liaoning)의 성도(省都)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곳은 아닙니다.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고 발해의 영향권에 있었던 곳이지요. 그 뿐 아닙니다. 일제의 핍박에 못 이겨, 혹은 나라의 독립을 이루겠다는 큰 뜻을 품고, 그도 저도 아니면 먹고 사는 게 좀 나아질까 해서 국경을 넘은 우리 선조들 중에 심양까지 간 분들도 있었습니다. 자주 듣던 만주 봉천이 바로 이곳입니다. 농담 삼아 하는 말로 만주에서 개 타고 말 장사할 때.” 어쩌고 하는 소리 들어본 분들도 많을 겁니다.

여진족이라 불렸던 만주인이 세운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이 이곳 심양에서 깃발을 올렸습니다. 청 태조(누루하치), 태종 때에는 수도로 삼아 성경(盛京)이라 불렀지요. 그 후 북경(北京,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게 됩니다. 그 심양이 2차대전이 끝난 뒤 길림성(지린성, 吉林省요녕성(랴오닝성, 遼寧省흑룡강성(헤이룽장성, 黑龍江省)을 아우르는 중국 동북3성의 최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중국에서도 10번째 이내에 드는 도시라고 합니다. 개발붐은 중국의 변두리라고 할 수 있는 이곳까지 예외가 아니어서 곳곳에 빌딩이 키를 재고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요란합니다.

코리아타운, 서탑거리
퇴근길의 복잡한 도로를 한참 달리던 버스가 비교적 한적한 거리에 일행을 내려놓습니다. ‘西塔街라고 쓰인 커다란 입간판을 지나자 느닷없이 눈이 휘둥그레 해집니다. 여기 중국 맞아? 곳곳에 낯익은 한글 간판들. 한국의 어느 거리로 순간 이동한 것 같습니다. 말은 안 붙여봤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한국 사람일 것 같다는 착각이 듭니다. 횟집도 있고 백화점 같은 큰 상점도 있고. 가장 눈에 띄는 건 룸살롱입니다. 중국 사람들의 KTV(원래는 가라오케TV에서 나온 말로 노래방에 가까웠지만 요즘은 룸살롱처럼 여자들이 나오는 술집이 됐다고 한다)와 구분하기 위

해서인지 한글로 ‘**룸싸롱이라고 분명하게 써놓아 더욱 눈에 띕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역시 물장사가 최고인 모양입니다.

 코리아타운이라고는 하지만 관광객이 특별히 볼만한 것은 없습니다. 특히 애당초 쇼핑은 안 하기로 했기 때문에 물건을 살 일도 없고, 가이드를 따라 설렁설렁 돌아보는 게 전부입니다. 구경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들이 우리 민족이 지고온 고난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얹힙니다.  이 낯선 땅에 집단 거주지가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과 눈물이 있었으랴. 중심가를 벗어날 무렵 가이드가 한 식당으로 일행을 안내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녁 먹을 시간입니다. 기내식으로 먹은 밥은 아직도 뱃속에 원기왕성하게 남아 있는데.

북한식당에서 벌어진 일
들어가면서 보니 간판이나 분위기로 볼 때 말로만 듣던 북한식당입니다. 규모가 굉장히 큽니다. 전에 중국을 몇 번 왔지만 북한식당에서 식사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저로서는 거부감이 들 이유 같은 건 없고, 되레 좀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일행들 사이에서 약간의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한두 분은 조금 당황한 표정까지 짓습니다. 평화보다는 냉전의 시대를 더 오래 살아온 분들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한복을 날아갈듯 차려 입은 아가씨들이 밝은 인사로 맞이합니다. 역시, 곱긴 곱구나. 새삼 남남북녀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2층에 있는 방 중 하나로 안내돼 들어갔는데 14명 전부가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원탁형 식탁이 놓여 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도 어른들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습니다. 그런 마당에,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에 바늘을 찌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가씨가 들어와 물병과 김치를 갖다 놓더니 그 다음은 감감무소식입니다.

표정이 내내 굳어있던 어른 한 분이 아가씨를 부르더니 음식은 언제 주려고 김치만 갖다놓고 마느냐고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나무랍니다. 아가씨의 표정이 거북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그녀가 나가자 이번엔 가이드가 불려 들어와 경을 칩니다. 친구로 보이는 다른 한 분도 옆에서 거듭니다. “누가 북한식당으로 오랬어.” 가이드가 이곳은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 아니고 중국인이 주인인데 북한 아가씨들을 고용했을 뿐이라고 설명하지만, 고성과 짜증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북한 사람이라면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고 다시 자는 체질인 것 같습니다. 집권자가 밉다고 해서 타국까지 돈 벌러 나온 사람들까지 그리 취급할 건 뭐람? 저 역시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좀 황당해하는 표정입니다.

대부분 처음 보는 사이고 인사를 나눌 틈도 없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니 분위기는 썰렁하다 못해 싸늘하게 변합니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북한 아가씨는 아예 들어올 생각도 안 하고 가이드만 불난 집 며느리처럼 들락거린 뒤에야 음식이 나옵니다. 준비가 안 돼 있었거나 다른 손님들이 많아서 늦어진 것 같습니다. 모두들 묵묵히 밥을 떠 넣습니다. 식사시간이 아니라 벌 받는 것 같은 시간. 중국에서의 첫 식사가 이 모양이라니. 슬그머니 화가 치솟지만 그저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화를 낸 어른은 6.25때 피난을 내려온 분이라고 합니다. 먼발치에서나마 고향 땅을 바라보기 위해 압록강, 금강산을 찾아온 것이지요.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났지만 북쪽의 위정자들에 대한 증오는 조금도 식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니 갈수록 더해 가는지도. 남의 나라에서 민족의 비극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박카스가 기가 막혀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었습니다. 호텔은 비교적 양호합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쉐라톤호텔. 내일부터는 호텔의 급수가 여기보다 떨어진다니 오늘 밤이라도 만끽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방을 혼자 배정 받은 제게는 쓸쓸한 밤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술을 마시거나 이국의 밤을 쏘아 다니는 걸 즐기지 않는 체질들이거든요. 마눌님들을 호위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뒤 감감무소식입니다. 의리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혼자 밖으로 나가기는 그렇고,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해간 술을 혼자 마신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간신히 잠들었는가 싶었는데 전화벨이 마구 떠들어댑니다. 예고됐던 모닝콜.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입니다. 이건 뭐 군대보다도 더 고된 여행입니다. 호텔식으로 아침으로 먹고 차에 오르니 어른들은 벌써 앉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젊은 것들이 게을러 터져서하는 소리가 쏟아질 것 같아 슬슬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습니다. 어젯밤의 그 험악했던 분위기가 파노라마처럼 스칩니다.

그런 분위기를 한방에 깨버리는 작은 해프닝은 출발 바로 전에 일어났습니다. 일행 중에 혼자 오신 어른이 계셨는데, 누가 와서 호텔로 다시 모셔갑니다. 한참 뒤에 나온 어른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러더니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느냐는 듯 큰 소리로 외칩니다. “무슨 박카스가 6천원이나 혀! 우리 동네 같으면 그 돈으로 열 병도 더 마셔박카스가 6천원? 이게 무슨 소리? ! 그걸 드셨구나. 대충 상황이 그려졌습니다. 침대 머리맡에는 우리나라 박카스와 흡사하게 생긴 음료수가 하나씩 놓여있었습니다. 세상을 똘똘하게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바가지라는 걸 알고 소 닭 보듯 했지만, 그 어른은 이까짓 거 돈을 받겠느냐 생각하고 덜컥 마셔버린 겁니다. 그런데 6천원 씩이나 내라니. 불만 가득 찬 목소리는 좀체 그칠 줄 몰랐습니다. 덕분에 냉랭했던 차 안은 키득거리는 웃음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를 한방에 바꿔주신 어른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드립니다.

오늘 일정은 고구려 땅 집안(集安, Jian))의 압록강과 광개토대왕비, 그리고 장수왕릉.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실은 버스가 심양을 힘차게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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