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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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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장군'에 해당되는 글 1

  1. 2009.05.04 [사라져가는 것들 108] 똥장군15
2009. 5. 4. 09:0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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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배아버지 석두씨의 별명은 ‘장군’이었다. 이마에 별이 번쩍번쩍 빛나는 장군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불행하게도 앞에 ‘똥’자가 붙은 별 볼일 없는 장군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돌배는 늘 놀림거리가 되었다. “돌배아버지는 장군이래요~ 똥장군이래요~” 아이들은 그 노래를 입에 달고 다녔다. 놀림이 지나쳐 울음을 터뜨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돌배가 제 아버지에게 아이들의 횡포를 일러바쳤음직도 하건만 달라진 건 없었다. “그깟 녀석들이 뭐라고 하든 못 들은 척 해라.” 그 정도의 대답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워낙 희로애락을 내색하는데 인색하기도 했거니와 타인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 그였다. 석두씨의 직업은 농부이자 ‘똥퍼’였다. 도시에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면서 "똥 퍼~!" 소리치던 사람들이 있었듯이 시골에도 똥장군이나 똥지게를 지고 남의 집 똥을 퍼주는 이가 있었다. 농촌이라고 해서 모두가 똥장군을 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동네에서는 석두씨가 그 일을 도맡아서 했다. 그래서 별명이 장군이 된 것이었다. “여보게, 석두. 우리 집 뒷간이 차버렸네.” 한마디만 하면 석두씨가 나타나 깔끔하게 비워주었다. 퍼달라고 시킨 사람 집 밭에 거름을 내게 되면 약간의 노임을 주면 되고, 그냥 가져가라고 하면 그걸로 계산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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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봄날 이른 아침, 지게에 똥장군을 얹고 밭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분명 석두씨였다. 마을에는 석두씨가 이 밭 저 밭에 뿌린 인분냄새가 가장 먼저 봄을 알렸다. 농사철이 시작되면 그는 아침마다 똥장군을 지고 밭으로 갔다. 그가 놀아도 되지 않을 만큼 인분은 늘 생산되었다. 석두씨는 자신의 땅이 없었다. 농사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였지만, 농부에게 땅이 없다는 건 군인에게 총이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림으로 받은 가난이 지긋지긋해 소싯적에 도시로 나갔지만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떠날 때와 달라진 건 아내와 젖먹이 하나가 뒤를 따라왔다는 것이었다. 한 끼의 밥이 급급한 사람에게 가족은 희망이 아니라 삶의 무게였다. 모처럼 찾아온 고향에서 그와 그의 식솔을 기다린 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처절한 현실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넋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도조(賭租)를 주기로 하고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시작했다. 석두씨는 하늘이 낸 농부였다. 척박한 땅에 씨를 뿌려도 기름진 땅보다 소출이 훨씬 많았다. 해가 갈수록 그에게 땅을 맡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워낙 부지런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 배경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똥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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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분이야말로 농작물에게 가장 좋은 비료다. 사람이 땅이 낸 채소나 곡물을 먹으면 배설물로 나오고 그 배설물은 다시 흙을 살찌워 식물들의 영양소가 된다. 인분이 천연퇴비가 되고 이 퇴비로 키운 곡식이 밥상에 오름으로써 인간과 자연 사이에 끊임없는 순환이 이뤄지게 된다. 그게 원활하게 유지될 때 세상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농부들은 똥을 귀하게 여겼다. 지금이야 볼일을 보고 레버 한번 당기면 배설의 흔적까지 지워지지만, 전통적 뒷간은 똥을 모으고 발효시켜 거름으로 만드는 기능에 초점을 뒀다. 완전한 발효를 위해서 밭 근처에 구덩이를 파서 인분을 보관하기도 했다. 가끔 그 구덩이가 아이들에게는 함정이 되기도 했다. 똥을 퍼다 놓고 시간이 지나면 그럴듯한 거죽이 만들어지는데, 그게 단단해 보이기도 하거니와 색깔이 땅과 구분이 잘 안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찬찬치 못한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놀다가 얼떨결에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아무튼 석두씨가 뛰어난 농부가 될 수 있었던 건 이 인분관리를 잘 한 덕분이었다. 그는 온 동네를 뒤져 인분을 모으고, 그걸 적절하게 발효시켜서 가장 알맞은 때에 밭에 내었다. 그러니 작물들이 잘 자라지 않을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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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진 인분을 퍼 나르는 도구가 바로 장군이었다. 똥지게라 부르는, 물지게처럼 생긴 도구를 많이 썼지만 냄새를 차단하고 좀 멀리 이동하기 위해서는 장군이 제격이었다. 장군에 오줌을 담으면 오줌장군, 똥을 담으면 똥장군이 됐다. 원래 장군은 분뇨를 운반하기 위해서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술이나 물, 간장 등을 담거나 나를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옹기처럼 주로 질그릇으로 구워서 만들었다. 한쪽 끝은 둥글게 처리하고 다른 끝은 평평하게 만들어 필요에 따라 세워둘 수 있도록 했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지름 30Cm, 길이 60Cm 정도가 보통이었다. 물론 그보다 큰 것도 많았다. 볼록하게 나온 배 쪽에 좁은 아가리가 있어서 그곳으로 내용물을 담았다. 다 담은 뒤에는 짚 등으로 아가리를 틀어막아 내용물이나 냄새의 유출을 막았다. 장군을 나무판자로 짜서 만들기도 했다. 나무장군은 배를 약간 부르게 만들어서 가운데에 아가리를 붙인다. 몸통에 얇게 쪼갠 대를 둘러서 고정시키고 아가리에는 단단한 나무를 깎아 박는다. 나무장군은 질그릇과 달리 쉽게 깨지지 않기 때문에 공사장 같은 곳에서 물을 나르는 데 많이 썼다. 그러나 쓰지 않을 때 나무쪽이 오그라들고 조각이 나기 때문에 불편한 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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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농가에는 어지간하면 똥장군이 하나씩 있었다. 부지런한 농부는 비료를 사지 않아도 인분이나 퇴비로 밭농사 정도는 훌륭하게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 땅 어디에 가도 똥장군을 등에 진 농부를 찾을 수 없다. 아니,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그랬다. 그리되기까지는 화학비료의 대량공급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냄새도 없고 언제든지 사서 간편하게 뿌릴 수 있는 비료가 쏟아져 나온 뒤로 애써 똥을 모으고 발효시키거나 퇴비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더구나 급격한 산업화의 진행에 따른 탈농업화로 흙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배설물을 멀리하는 데만 골몰해왔다. 그러니 생명을 살찌우게 하는 원천인 똥이 귀해 보일 리 없었다. 잘 삭은 인분을 골고루 뿌리고 그 구수한 냄새와 함께 자라나는 작물을 바라보는 걸 낙으로 알았던 늙은 농부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들 눈에는 똥이 들어가지 않은 땅에서 나는 모든 작물이 도깨비가 만들어 낸 허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생태계 순환에서 벗어난 땅은 갈수록 척박해져 갔다. 그것은 일종의 재앙과도 같았다. 화학비료만으로 키운 채소와 곡물을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갈수록 강퍅해져갔기 때문이다.

평생을 똥장군과 함께 살았던 석두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 아버지가 싫어 일찌감치 도회지로 나갔던 석두씨의 외아들 돌배는, 새로 쓴 묘에 풀이 마르기도 전에 아버지가 평생 모아둔 땅을 남김없이 처분했다. 돌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뒤 그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은 없었다. 주인 잃은 똥장군 하나가 외롭게 빈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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