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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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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에 해당되는 글 2

  1. 2011.09.05 [사라져가는 것들 164] 옛날 팥빙수4
  2. 2011.03.30 [사라져가는 것들 157] 오일장6
2011. 9. 5. 09:18 사라져가는 것들

먼저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팥빙수를 사라져가는 것들 항목에 넣으면 그게 왜 사라져? 어제도 먹었는데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빙수는 여전히 잘 팔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구차하지만 옛날 팥빙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기계를 손으로 돌려서 대팻밥처럼 깎은 얼음에 팥을 넣었던 그 팥빙수 이야기입니다.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그날은 설악장날이었습니다.
홍천강으로 가는 길에 물건 몇 가지를 사려고 들른 참이었습니다.
꽤 여러 번 간 곳인데도 오일장과 마주친 건 처음이었습니다.
발길은 천관녀의 집을 찾아가는 김유신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장터로 향했습니다.
이곳저곳 쏘아 다니기를 일삼아 하다 보니, 장이 열린 걸 보면 그냥 못 지나가는 지병이 생기고 만 탓입니다.
살 물건이 있건 없건, 동네강아지처럼 껄렁껄렁 돌아다니다 보면 어머니 품에 안긴 듯 마음이 한없이 풀어지는 곳이 장터입니다.
세상이 투전판처럼 각박해진지 오래지만 장터에는 아직도 따뜻한 정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한 여름에 열린 오일장, 그러잖아도 손바닥만 한 장인데 뙤약볕까지 내리쪼이다보니 파리만 이곳저곳 구경 다니느라 분주할 뿐이었습니다.
배추 몇 포기와 양파 몇 단 들고 나온 촌부도, 눈에 백태 낀 생선 몇 마리 늘어놓은 어물전 사내도 흥이 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팔아도 그만 못 팔아도 그만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앉아, 돈 대신 장대처럼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이나 세고 있었습니다.
장 구경에 나선 저도 금세 무료해졌습니다.
그렇게 초점 없이 흐르던 제 눈길이, 어느 순간 한 지점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아니, 저게 뭐야?
장꾼들을 상대로 군것질거리를 파는 간이 점포 안의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란 기계 하나.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빙수기였습니다.
스위치 한번 누르면 순식간에 얼음을 갈아놓는 요즘 빙수기가 아니라, 재봉틀 같기도 하고 머리에 바퀴를 달아놓은 에펠탑 같기도 한 그 파란 기계 말입니다.
고물상에나 있어야 할 물건이 장터 한 귀퉁이를 당당하게 지키고 있다니.

빙수기를 본 순간, 느닷없는 갈증으로 목이 컬컬해지더니 입안이 푸석푸석 말랐습니다.
발걸음은 벌써 간이점포 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팥빙수 하나 만들어 주세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입에서는 주문(呪文) 같은 주문(注文)이 쏟아졌습니다.
팥빙수!
어렵던 시절을 산 사람들에게달콤한 추억의 정점에 있는 그 이름.
에어컨, 냉장고, 선풍기 같은 단어를 책으로 배우던 시절, 더위를 식힐 것이라고는 냉수, 냉차, 미숫가루, 아이스케키가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팥빙수는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귀한 것이었지요.
세상에는 팥빙수를 먹을 수 있는 아이들과 먹을 수 없는 아이들, 두 부류의 아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아이들에게 그 달고 시원한 팥빙수가, 먹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고통을 동반하는 남의 떡이었습니다.
팥빙수의 그 황홀한 맛은, 만들어지는 동안의 기다림과 비례했습니다.
기계에 큼직한 얼음을 올려놓고 손잡이를 돌리면 대팻밥처럼 스윽스윽 밀려나온 결 고운 얼음.
그렇게 갈린 얼음은 꽃잎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하얀 꽃들이 그릇에 소복이 쌓이는 순간, 아이들은 얼음구덩이에 오줌이라도 내갈기고 난 듯 진저리를 치고는 했습니다.

팥빙수가 돼가는 진짜 과정은 이제부터입니다.
소복이 쌓인 얼음꽃 위에 뭉글뭉글한 미숫가루와 팥을 올리고 연유를 뿌리고.
그 위에 얹어지는 쫄깃한 떡은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마지막으로 뿌리던 파란 물과 빨간 물, 그 달콤해 보이던 물들이 색소에 불과했다는 것은 훗날 알았습니다.
하지만 입 뿐 아니라 눈으로도 먹어야하는 팥빙수에서 빠져서는 안 될 결정적 요소였습니다.
우연히 들른 장터에서, 그 옛날 가슴 설레게 하던 광경과 마주친 감동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몇 십 년 전의 사진 속으로 걸어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발걸음을 그냥 돌릴 수 있겠습니까.
주문을 한 뒤 간이의자에 앉아 얼음 덩어리가 팥빙수로 변신해 가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봤습니다.
부부가 함께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기계를 돌려 얼음을 깎아 내는 건 바깥 분 담당이었습니다.
기억 속의 풍경과 다른 것은 4각 얼음이 아니라 둥근 얼음이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나머지는 한번 본 영화를 다시 보는 듯, 모든 게 똑같았습니다.
기계에서 얼음꽃이 피어나는 순간 제 가슴도 봉우리를 열기 직전의 꽃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적으로 돌아간 듯 침까지 삼키고 말았습니다.
다 갈린 얼음을 이어받은 아주머니의 손에서 본격적인 팥빙수가 탄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팥과 미숫가루, 연유가 부어지고 쫄깃한 젤리가 얹히고.
그걸 바라보면서 저는 정말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 팥빙수가 등장한 건 일제 강점기였다고 합니다.
얼음에 단팥을 얹어 먹는 수준이었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과 함께 상륙한 연유가 섞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1980년대 중후반 경기가 상승기로 접어들면서 제과점의 인기품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 세월과 소득수준에 따라 내용물이나 모양도 점점 화려하지기 시작했습니다.
고급카페나 대학가를 중심으로 다양한 빙수가 등장하면서 생과일이나 달콤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필수조건이 되었습니다.
어느 새 팥은 첨가물 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팥빙수라는 이름도 조금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녹차빙수, 와인빙수, 커피빙수, 아이스크림빙수, 과일빙수별별 이름의 빙수가 등장했지요.
저 같은 옛날 사람들에게는 그저 화려한 음식의 하나일 뿐, 아릿한 기억의 그 팥빙수와는 애당초 한 공간에 나란히 세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최근 몇 년 간은 팥빙수를 먹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다 시골장터에서 만난, 과일이나 아이스크림은 구경조차 못 해본, 그 멋없는 팥빙수가 저를 끌어당긴 것입니다.
앞에 놓인 팥빙수를 급하게 섞어서 입에 떠 넣는 순간, !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이 입속에서 와르르 아우성을 쳤습니다.
회색의 땅에서 회색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입맛은 인스턴트 과자처럼 근본을 상실했지만, 추억까지 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몇 수저 떠 넣지도 않아서 등에 흐르던 땀이 식더니, 금세 뼛골까지 얼얼해졌습니다.
가슴은 고향동네 어귀의 느티나무 아래 누운 듯 환희로 가득 찼습니다.
정적만 떠도는 여름장터에 중년 사내 하나가 허허허! 실없이 웃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sagang
2011. 3. 30. 19:20 사라져가는 것들



혼자 나왔는가?”
, 혼자 왔네. 자네는?”
마누라랑 같이 왔네. 병원에 데려다 주고난 그냥 구경이나 허다 갈라구.”
술 한 잔 할 텐가?”
이 시간에 벌써?”
아따, 원제 시간 봐감서 술 먹었남. 가세!!”
가세, 소리가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의 호령처럼 힘차다. 장터에 들어서자마자 만난 두 노인은, 안부 인사조차 중동무이하고 어깨동무 하듯 서로를 당겨 선술집골목으로 사라진다. 장을 보러 온 건지 술을 마시러 온 건지 헷갈리지만, 새삼 따져 무엇 하랴. 술보다는 정이 더 고팠던 거겠지. 어차피 공치기로 한 하루, 얼큰하게 한 잔 마시고 장 구경 실컷 한 다음 고등어 한 손 들고 가면 그만일 터. 5일장은 시골노인들의 사교장이다. 농사에 휘어진 뼈골을 잠시라도 펴보는 날이다. 장에나 가야 이웃 마을 친구도 만나고 재 너머 사돈도 만난다. 그래서 특별히 사고 팔 게 없어도 장날이면 엉덩이가 들썩거리게 마련이다. 그렇게라도 숨을 돌리고 사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너른 장터는 노인 일색이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노인이다. 가끔 젊은 사람이 지나가면 이방인이라도 보는 듯 낯설다. 논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젊은이가 장터라고 흔전만전 넘쳐나랴.

 
바깥노인들만 장에 오는 건 아니다. 한쪽엔 안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보따리 대신 얘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 글쎄. 40평짜리 아파트를 샀어. 이번에
잘혔네. 잘혔어. 종숙이 걘 잘 살 줄 알었어. 보통 바지런해야지. 딸 잘 두면 뱅기 탄단 말두 있잖여
에이, 뭐 뱅기까지야. 암튼, 새 아파트도 가볼 겸 혀서
말은 땅바닥만치 낮지만 얼굴은 자랑의 기색으로 하늘에 떠 있다. 정담만 오가는 건 아니다. 한쪽에서는 좀 젊은 아낙이 서툰 흥정을 붙여본다.
아니, 그새 이만큼이나 올랐어요?”
어딜 댕겨왔길래 소식이 이렇게 캄캄허댜? 채소값이 금값 됐단 말 못 들어봤어? 지난 장끔 생각하면 안되어
그래도조금만 깎아주세요
아이구, 남는 게 있어야 깎아 먹든지 벗겨 먹든지 허지. . 내 이만큼 더 줄게
젊은 아낙이 40년 장꾼을 어찌 당하랴. 봄이 더디게 오는 길목, 시골장은 일찌감치 무르익어간다. 여기저기서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 지각한 장꾼들의 전 펴는 소리. 배추장수 할머니는 여전히 연탄화덕을 끼고 있지만 봄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충남 홍성의 홍성장은 큰 장이다
. 농산물장이자 어물장으로 충남 서부지역 오일장의 어른 노릇을 해왔다. 바다와 기름진 들을 동시에 끼고 있어서 물산이 풍부한 덕이다. 하지만 장터 풍경은 여느 오일장과 다르지 않다. 터줏대감들이야 운동장만한 점포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펼쳐놓고 손님을 끌어 모으지만, 갯벌에 나가 캔 바지락이나 푸성귀 조금 들고 나온 장꾼들은 신문지만한 공간에 앉아 시간이나 접을 뿐이다. 어물전 한 귀퉁이는 어촌에서 온 사람들이 차지하고 앉았다. 고무함지에 생선 너 댓 마리 담아온 노인도 있고, 껍질 째 가져온 굴을 까는 노인도 있다. 손길은 분주하지만 표정은 동구 밖 장승이라도 닮은 듯 무심하다. 농촌에서 온 이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시금치, 양파, 감자, 시루 째 들고 나온 콩나물. 메주를 몇 덩이 들고 온 노인도 있고 집에서 먹던 된장을 퍼 와 해바라기 하는 노인도 있다. 손자가 군것질거리를 사달라고 졸랐는지도 모른다. 늘 그 모습인 것 같아도 장은 계절마다 조금씩 표정을 바꾼다. 봄이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는 이 계절은 장터에도 봄기운이 완연해진다. 조막만한 함지박마다 담겨 나온 달래와 냉이가 전령 역할을 한다. 어쩌면 봄은 시골장에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쇠전 열리나요?”
무슨 전요?”
쇠전, 쇠전!! 우시장요
, 우시장! 그거 안 열린지 꽤 됐어요. 구제역 때문에.”
말린 생선 두어 마리를 사면서 주인에게 쇠전이 열리냐고 물었지만,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다. 비교적 젊은 댁이라 그런지 쇠전이란 단어를 낯설어한다. 기실 홍성장이 이름을 떨치게 된 데는 쇠전의 역할이 컸다. 국내 최대 축산단지가 바로 홍성이다. 축산단지가 아니더라도 예로부터 너른 내포평야에서 키운 소들이 모여드는 게 홍성장이었다. 하지만 전국에서도 손꼽힌다는 홍성 쇠전도 역병만큼이나 무서웠던 구제역에는 두 손 다 들 고 만 것이다. 물론 머지않아 다시 열리기야 하겠지만 농민들이 겪었을 아픔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쇠전이야 그렇다고 하고, 모처럼 나선 장 구경이나 계속 하기로 한다. 커다란 무쇠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밥집 앞에서 저절로 걸음이 멈춰진다. 어릴 적에는 저 국밥 한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나 어머니는 늘 그 소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먹지 못한 국밥은 내 상상 속에서 이 세상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찐빵집 앞도 그냥 지나지 못한다. 소담지게 쌓여있는 하얀 찐빵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배고프던 시절엔 그 앞에 서 있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그리고 그 고통을 얼마나 자주 찾아다녔던지. 광밥이라 부르던 튀밥 집 앞을 지나고 옹기점도 지나고 여전히 메질 소리 땅, , ! 울려 퍼지는 대장간도 흘깃거린다. 슬쩍 들여다본 대장간은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문에는 기능보유자 21-2라는 자랑스러운 인증패가 붙어있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는 데 유난히 눈길을 잡아당기는 곳이 있다. 국밥집보다도 더 푸짐하게 김을 피워 올리는대체 뭐가 저리. 가까이 가보니 팥죽이다. 아 팥죽집이 아직도 있구나. 새알심이 듬뿍 든 팥죽도 허기를 부추기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보니 장구경은 어느덧 먹고 싶었던 것을 찾아 떠난 여행이 돼버렸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가끔 장터거리를 배회하고는 했다. 학교와 장터는 지척이었다. 점심시간에 학급비품을 사러간다고 교문을 나서서 장터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땐 떠돌이약장수나 땜장이에 온갖 신기한 물건을 갖고 다니는 장돌뱅이들이 많았다. 어느 땐 그들을 구경하느라 점심시간이 끝나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장돌뱅이가 귀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이 떠나간 시골장은 어딘가 비어 있는 듯 허전하다. 왕년의 유행어 마냥 앙꼬 없는 찐빵이 되었다.

 

장터를 빠져나올 무렵 모녀의 실랑이를 본다.
됐다니께 그런다
그러지 말고 가져가시라니께유
딸로 보이는 중년의 아낙은 이것저것을 자꾸 싸 주고, 어머니로 보이는 허리 굽은 노인은 사양하기에 바쁘다. 혼자 사는 어머니가 모처럼 시집간 딸이 장사하는 곳에 들른 모양이다. 애틋한 마음에 딸은 이것저것 싸 보내려 하고, 딸이 한 푼 어치라도 더 팔기를 바라는 어머니는 자꾸 뿌리치는 것이다. 주책없이 시선을 뺏긴 나그네 마음까지 짠해진다. 장터머리를 나서기 전에 가장 연세가 많아 보이는 노인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달래 조금, 냉이 조금, 미나리, 시금치, 무 몇 개. 노인 앞에 놓인 상품 목록이다. 바람은 여전히 쌀쌀맞게 달려드는데 무릎 덮을 담요 한 장 없다.
할머니, 이 냉이 온상에서 나온 거지요?”
무슨 소리대유. 내가 어제 들에 나가서 하루 죙일 캔 거구먼
노인은 도시물이나 먹었음직한 자식뻘 사내의 대책 없는 막말이 영 섭섭한 모양이다. 얼마 받으실 건데요?”
이천 원만 줘요
고개를 끄떡거리기도 전에 까만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봄의 전령들을 담는다. 2천원이라그렇다면 오늘 가져온 걸 전부 합쳐도 대체. 5일장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 정이 먼저 흐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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