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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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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28 [사라져가는 것들 141] 전축13
2010. 6. 28. 08:5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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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그랑~!!! 무언가 걷어차이는 소리가 창호지를 뚫고 방안으로 난입한다. 바닥에 낮게 깔려 유영하던 음악이 흠칫, 소스라친다. 펌프 옆 양은세숫대야가 또 발길질을 당한 모양이다.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다 말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여전히 정물처럼 굳어있다. 지긋하게 감은 눈을 한번 떠보기라도 하련만, 하늘이 무너져도 꼼짝하지 않겠다는 의지만 갑옷처럼 두르고 있을 뿐이다. 느닷없는 소음에 주춤했던 음악이 다시 조심스럽게 흐른다. 하지만 아이는 번개 다음에 올 천둥을 예감하며 지레 몸을 움츠린다. 아니나 다를까,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가 다시 창호지를 뚫는다.
“한겨울에 엠벵(염병)을 하다가 고꾸라져 뒈질 것들. 방구석에 쳐 박혀서 그놈의 축음긴지 귀신단진지 끼고 있으면 밥이 나오냐? 술이 나오냐?”
엄마다. 레퍼토리도 평소와 다름없다. 조금 있으면 “귀신은 저것들 안 잡아가고….” 가 이어질 것이다. 아이가 미닫이방문을 열고 나선다. 생선을 담았던 커다란 다라를 펌프 옆에 던져놓다시피 한 엄마가, 오늘은 뭔가 보여주겠다는 듯 팔을 둥둥 걷어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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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바라보던 아이의 얼굴에 금세 울음이 질척하게 고인다. 또 넘어진 모양이다. 옷이 젖고 여기 저기 오물도 묻어있다. 큰 아들을 잃은 뒤부터 생긴 증상이다. 걸핏하면 자빠지고 다쳐서 들어온다. 하긴 곳곳이 빙판인 겨울에, 생선다라를 이고 얇은 고무신 하나에 의지해서 이 골목 저 골목 헤집고 다닌다는 게 보통 위험한 일인가. 아이가 터질 듯한 울음을 베물고 주삣주삣 다가서보지만, 엄마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더니 작심이라도 한 듯 쪽마루에 엉덩이를 철퍼덕 내려놓는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악다구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넋두리로 바뀐다.
“부모 복 없는 년이 서방 복은 있을라구. 새끼까지 잡아먹고 살아보겄다고 이러고 댕기는디 서방이란 화상은 쳐백혀서 벤또벤인지 모짜린지나 끼고 사니…. 나 같으면 마누라 고생헌다구 이미자라도 한번 틀어주것다….”
사설조로 늘어지는 게 오늘은 이쯤에서 끝날 거 같다. 엄마가 치마말기로 코를 휑 풀면서 부엌으로 들어갈 때까지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다. 음악은 언제부터인가 꺼져있다. 아버지는 전축 앞에서 바다처럼 깊어진 눈을 껌벅거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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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원래 그렇게 악다구니 전문가는 아니었다. 아니,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고 따뜻했다. 아버지에게도 그랬다. 가난한 살림에도 늘 뭔가 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거지가 입은 비단옷처럼, 단칸집에 과분하기 짝이 없는 전축이 들어선 것도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맹목적 사랑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도 지금하고는 달랐다. 가끔 외출도 하고 번역 일을 맡아오기도 했다. 엄마는 늘 아버지에게 곰살맞았다. 어쩌다 일보다는 전축을 더 사랑하는 남편을 흉보는 사람이 있으면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런 소리 다신 허지 말어. 저이가 이북에서 천석꾼의 아들이었다구. 일본 가서 대학까장 나온 인떼루… 뭐, 거시기구. 그러니 전축 아니라 뭔들 아쉬웠겄어. 워낙 음악을 좋아하니께. 내 고생? 아, 갠찮다잖여. 저이가 나 같은 무식쟁이 만나서 고생인 거지. 뭐? 배운 사람이 막일 같은 거 하먼 쓰겄어? 어떻게 만나긴 뭐… 영천시장 국밥집서 일할 때 자주 오는 바람에… 그냥 지극정성으로 대하다보니…. 저이가 능력이 웂어서 저러고 있는 게 아니라니께. 난 갠차너. 목이 부러져두. 음악 아니라 날라리를 불어두 나 좋으면 그만인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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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끔찍한 일은 아이가 여덟 살 되던 해 일어났다. 저녁 늦게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마중 나갔던 형이 어두운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주검이 되어 돌아온 형은 겨우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형은 집안의 별이고 꿈이었다. 공부는 늘 1등이었고, 길을 가다가던 사람들마다 돌아볼 정도로 잘생겼었다. 우물처럼 깊게 고였던 슬픔이 조금 걷힌 뒤 둘러본 집안에는, 예전의 그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방안에 틀어박혀 음악만 들었다. 어머니는 실성한 것처럼 떠돌았다. 집에서는 늘 소리를 지르고 악다구니를 썼다. 가족들 간의 대화는 끊겼다. 아버지의 눈은 날이 갈수록 소를 닮아갔다. 진짜 소가 된 것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전축과 함께 방 한쪽에서 정물이 되어갔다. 엄마는 그걸 더 못 견뎌 했다. 지아비의 행복을 위해 무리해서 샀던 전축이, 불행을 가져온 원흉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 땐 전축을 몽땅 부숴버리겠다고 달려들기도 했다. 아버지의 전축은 진공관식으로 그때만 해도 이미 꽤 낡은 것이었는데, 훗날 나온 보급형 오디오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그러잖아도 좁은 방안을 차지하고 앉은 전축은, 아버지 이외의 가족에게는 하루 이틀 묵고 떠날 손님처럼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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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음악을 듣는 절차는 종교행사를 보는 듯 자못 경건했다. 전축에 전원을 넣기 전에, 밤새 별 일 없이 잘 있었느냐는 표정으로 찬찬히 살피는 게 맨 먼저 하는 일이었다. 마치 이북에 두고 내려왔다는 자식들과 상봉이라도 한 듯 안타까움과 온기가 가득 담긴 눈길이었다. 다음에는 꽤 긴 시간을 들여 그날 들을 LP를 골랐다. 당신이 보유하고 있는 LP라야 기껏 수십 장에 불과한 판에, 거기서 고른들 뭐 대단한 게 있으랴. 하지만 아버지는 처음 그들을 손에 넣었을 때처럼, 늘 기대에 찬 눈초리로 이리저리 돌려가며 한참씩 들여다보았다. 표정도 다양하게 바뀌었다. 어느 땐 혀를 끌끌 차거나 한숨을 쉬었지만, 어느 땐 어? 내게 이런 음악도 있었나? 하는 듯이 신이 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사람 대신 전축이나 LP와 날마다 대화를 나눈 것인지도 모른다. 판을 다 고르고 나면 먼지라도 묻지 않았을까 찬찬히 들여다본 뒤, 전축의 전원을 넣었다. 무엇 하나 후딱 진행되는 건 없었다. 행복한 시간을 조금씩 쪼개먹기라도 하듯 아주 천천히 스위치를 올렸다. 자신이 전원을 넣어주는 순간, 전축에 피가 돌고 기지개를 켠다고 믿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손길에 의해 서서히 깨어난 전축이 딸꾹질을 하거나, 몸을 부르르 떨면 아버지의 얼굴의 화색이 짙어졌다. 그제야 골라놓은 판을 조심스럽게 턴테이블에 걸고 바늘손잡이를 들었다.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바늘을 놓는 적이 없었다. 듣고 싶은 음악이 있는 곳을 한눈에 포착하여 단번에 올려놓았다. 마치 짐승의 숨통을 순식간에 끊어놓는 최고 경지의 도살자처럼 경쾌하고 정확했다. 아이는 훗날 아버지를 흉내내보려고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대개는 실패하고 말았다. 앞 순서 음악의 끝머리가 뜬금없이 나오거나 들으려는 노래가 제법 흘러간 뒤였다. 아버지의 섬세한 손길에 의해 바늘과 LP가 조우하고, 트랙을 찾아가는 지지직~ 소리가 잠시 흐르면 검은 플라스틱 상자 안에서 잠자던 음악이 부스스 눈을 떴다. 아버지의 얼굴에, 아주 엷은 웃음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전축이 오래 돼서, 아니면 세월이 LP에 낸 생채기 때문에 잡음이 섞이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새 LP를 기대할 수 없는 탓도 있지만, 당신은 잡음 속에서도 진짜 음을 골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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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우화(羽化)를 기다리는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있던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건 봄이 익어터질 무렵이었다. 그해에도 마당 한켠에 빨간 사루비아꽃이 각혈처럼 피어났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어보니 아버지가 당황한 얼굴로 뭔가 감추고 있었다. 뭐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며칠 뒤 아버지의 비밀을 알아내고 말았다. 아버지가 변소에 간 사이에 찾아낸 수건에는 붉은 피가 꽃처럼 배어있었다. 아버지의 몸에서 나온 피였다. 아이는, 당신이 언제부턴가 나비가 될 준비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족과 이별하고 훨훨 날아갈 준비를. 아이는 엄마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버지의 간절한 눈빛 때문에 끝내 입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미농지처럼 바래갔다. 전축이 들려주는 소리는 갈수록 무겁고 슬픈 음색을 띠었다. 봄이 되면서 엄마의 집을 나서는 시간은 더 빨라졌고 돌아오는 시간은 계속 늦어졌다. 결국 아버지는 봄과 여름 사이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마른가지처럼 엷어진 몸피 하나가 전축 앞에 엎드려 있었다. 손에는 LP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엄마는 끝내 울지 않았다. 대신 동네 아저씨 몇몇이 아버지를 묻고 온 날 실신하듯 앓아누웠다. 그리고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열이 펄펄 끓고 다리가 퉁퉁 부어도 장사를 쉬지 않던 그녀였다. 아버지가 떠나던 날 내팽개쳐진 생선다라는, 마루 밑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부엌에라도 들여놓으려고 꺼내던 아이가 다라 안에서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한눈에 LP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벗기던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막상 모습을 보인 건 이미자도 문주란도 아니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이라는 글씨를 한자 한자 들여다보던 아이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졌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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