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영광굴비'에 해당되는 글 1

  1. 2012.12.03 [Healing Travel 나를 치유하는 여행 4] 곰소 가는 길10
2012. 12. 3. 08:30 나를 치유하는 여행

10월 중순에 다녀온 여행입니다.

 

조기가 우는 까닭

 

왕포마을 전경. 바다가 저만치 멀다.

지금은 썰물때,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 멀고 파도소리 오랜 추억처럼 아득합니다. 작은 배 몇 척이 갯벌에 누워 쪽잠을 청합니다. 지난 밤 제법 먼 길을 다녀왔는지 온몸에 고단함이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바닷가 마을엔 가을이 일찍 와 있습니다. 은행에서 저금 찾듯, 나무에서 갖가지 색깔을 인출해 치장한 잎들이 훨훨 날아오릅니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허공에 가득합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이별의 아픔은 없습니다.

 

 

왕포(旺浦)마을. 한때는 왕포(王浦)라고 불렸다니, 왕에 어울리는 무언가 있을 법해서 한 바퀴 돌아보지만 그저 조용한 어촌일 뿐입니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전북 부안군 진서면 문호리.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속한 조그만 마을입니다. 제가 이 마을을 찾은 건 마실길을 걷기 위해서입니다. 마실길은 서해의 진주라 부르는 변산반도를 따라 걷는 해안 둘레길입니다. 개복숭아 꽃 곱던 지난봄, 3구간 1코스인 아홉구비 돌아가는 길을 걸은 뒤 그 풍경에 반해 오늘은 3구간 2코스의 출발점에 섰습니다. 왕포에서 곰소염전까지 이어진 길의 이름은 제방 따라 청자골 가는 길이랍니다. 이름들도 참 예쁘게 짓습니다. 12km 거리에 3시간 걸린다고 써놨는데 걸어봐야 알 일입니다. 걷는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고통이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 그림자와 대화하며 걷는 시간은 세상에 오로지 나 하나가 존귀한 충만의 시간입니다. 출발 직전, 느닷없이 정적을 깨는 소리에 풍경은 저만치 물러나고 각박한 삶이 코앞에 섭니다. 골목 안쪽에서 주민들끼리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가는데 걸리적거렸던 모양이지요? 그런 것도 싸움이 될까 싶은데도 목소리는 갈수록 날이 섭니다. 퍼붓는 쪽은 원주민인 듯 하고, 수세에 몰린 쪽, 염치없이 나뭇가지를 담 밖으로 내보낸주민은 타지에서 들어온 모양입니다. 시골살이를 꿈꾸고 있는 제게는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싸움 구경이 발목을 잡아도 갈 길은 가야지요. 낮은 담 사이 골목길을 따라 마을을 벗어납니다. 길은 언덕을 향해 굼실굼실 앞서 갑니다. 사람 대신 늙은 감나무가 나그네를 전송합니다. 누군가 감춰뒀던 보석을 달아 놓은 듯, 작은 감들이 가지마다 반짝거립니다. 언덕에 오르자 저만치 바다가 보입니다. 바닷물은 아직도 멀리 있습니다. 저 바다를 칠산바다라고 부릅니다. 연평어장과 함께 우리나라 2대 조기어장으로 이름을 날렸지요. 그리 오래지 않은 날인데도 지금은 전설처럼 멀기만 합니다. 전설, 이라고 소리 내어 말했더니 갑자기 조기울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칠산바다 때문이겠지요. 당신은 조기가 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저는 설마 했는데, 관해기(주강현 지음, 웅진지식하우스)라는 책을 보니 정말로 조기 우는 이야기를 써놓았습니다. 산란 때면 시끄러워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지요. 그 울음의 정체는, 참조기가 부레 근육을 움직여서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신호라는데, 그걸 운다고하는 것이지요. 어부들은 그 조기울음을 고기 잡는데 이용했다고 합니다. 구멍 뚫린 대나무 통을 바닷물에 넣은 뒤 울음소리로 위치를 파악해서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제겐, ‘부레음이라는 과학적 설명이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그저 울음으로 기억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지요. 조기들은 왜 우는 것일까요? 무슨 사연이 그리 많아 바다를 짜디짠 눈물로 적셨을까요.

 

영광굴비 혹은 법성포굴비라는 불세출의 이름을 남긴 칠산바다는, 법성 근역의 칠뫼(七山)부터 변산반도 앞 위도까지 아우르는 넓은 바다입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그 북쪽 끝에 가까운 곳이지요. 칠산바다는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부 특유의 과장법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조기가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 증거로 일찍이 신안 지도군수를 지낸 오횡묵(吳宖默)이라는 이는 1897년에 제작한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刷錄)>칠산바다에는 배를 댈 곳이 없고고기를 사고팔며 오가는 거래액이 가히 수십만 냥에 이른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연평어장이 그렇듯 칠산어장도 지금은 쓸쓸한 바다일 뿐입니다. 영광굴비, 법성포굴비도 칠산바다 출신들은 아니지요. 잠을 앗아갔다는 조기의 울음소리도 어깨를 들썩이게 했을 <풍장소리>도 그저 바람결에 몸을 싣고 빈 바다나 오갈 뿐입니다.

 

얼시구 좋다. 절시구 좋와, 얼시구나 좋네.

헤헤 허야허아 허어 허어허어 좋와요.

칠산바다에 들어온 조구

우리배 망자(網子)로 다 들어왔다.

에헤 좋네. (중략)

들물에 천냥, 썰물에 천냥

안안팟 네물에 사오천냥 실었다.

에헤 좋와요.

에헤 허아허아 허아 허아허아 좋와요. (하략)

 

조금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면 여러 길들이 각기 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게 선명합니다. 어느 길은 술 취한 50대 가장의 넥타이처럼 풀어져 있고 또 어느 길은 사관생도의 바지 주름처럼 절도 있게 뻗어나갑니다. 세상은 낮잠에라도 든 듯 조용합니다. 낯선 발자국소리에, 노란 햇살이 놀란 꺼병이처럼 갈대숲으로 숨습니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을 나눈 강아지

길은 긴 제방과 만납니다. 제방 옆 작은 집 마당에서 꼬박꼬박 졸던 개 한 마리가 나그네를 보더니, 사위 맞는 장모 걸음으로 달려옵니다. 아까 동네에서 만났던 개들의 앙칼진 경계는 애당초 배운 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봄 이곳에서 보았던 강아지들 중 한 마리인 것 같습니다. 조막만 하더니 제법 커서 걸음마저 으쓱거립니다. 어미와 형제는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모양입니다. 달려들어 비비고 뛰고 온갖 재롱을 다 떱니다. 만남만으로도 감격스럽다는 몸짓입니다. 개와 저 사이의 벽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경계를 지우고 마음을 내려놓은 만남만큼 편안한 게 있을까요. 소통이니 화합이니 하는 수사의 번거로움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아무리 행복해도 나그네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지요. 아쉬운 걸음을 떼는데 녀석이 졸졸 따라옵니다. “애야, 그러다가 길 잃을라.” “걱정 마세요. 동네에서 길 잃는 개 봤어요?” 그도 그렇군요. 제방 중간쯤에서 쓸쓸하게 돌아가는 녀석을 인사 차 불렀더니 금세 돌아서서 달려옵니다. 저도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안 부르고 그냥 갔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그런 반복이 여러 번 계속되다 제방 끝쯤 닿아서야 진짜 이별을 합니다. 사람이나 개나 외로움이 주는 고통은 뼈에 각인되는 것 같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라고, 숙명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해도, 행복으로 치환하는 경지는 여전히 멀기만 합니다.

 

관선마을 전경

길은 길을 밟으며 자꾸 앞으로 갑니다. 관선(觀仙)마을이라는 작은 동네를 지나면서 자꾸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풍경이 낯설지 않은 걸 지나서, 언젠가 이 길을 걸어간 것 같다는 기시감마저 듭니다. 무엇 때문일까? ! 순간 떠오른 기억 한 자락에 무릎을 치고 맙니다. 정말 그렇군요. 어릴 적 할머니와 걷었던 그 길을 꼭 닮아 있습니다. 할머니와 걷던 길수룽구지로 가던 길. 그 길이 수십 년 만에 제 앞에 돌아와 있습니다. 할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제게 애써 가벼움을 두른 한마디를 던집니다. “수룽구지 안 갈라냐?” 저는 달다 쓰다 따라 나섭니다. 가부 간을 대답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만한 아이였으니까요. 그런 때 할머니 곁에 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수룽구지는 조그만 포구였습니다. 조금 전 지나온 왕포나 관선마을과 비슷했지요. 어촌보다는 산촌에 가까웠던 제 고향에서는, 손이 잠시 남으면 그곳으로 새우젓이나 비린 것을 사러갔습니다. 돈은 밭에서 거둔 푸성귀나 시금털털한 과일이면 충분했습니다. 농촌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과 어촌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쉽게 교환이 됐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빈손이었습니다. 속바지에 달아놓은 호주머니에는 아끼고 별렀던 동전 몇 닢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소주 두어 잔 값, 어린 손자이자 동행인 제 입에 물릴 사탕 두어 개 값. 그것만 가지고 허위허위 걸었습니다. 저도 그 뒤를 허위허위 걸었습니다. 워낙에 말이 많은 분은 아니었지만 그런 날에는 침묵이 길었습니다. 그렇게 걸은 길이 십리였는지 이십 리였는지는 지금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에게는 조금 벅찬 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들을 지나고 산을 넘어 걷다보면 갯내음이 먼저 달려와 코를 찌르고, 곧 이어 저만치 작은 포구가 나타납니다. 그곳이 바로 수룽구지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해도 할머니는 갯것을 사고파는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두어 평쯤의 허름한 가게, 그 시절엔 그런 곳을 송방이라고 불렀습니다. 할머니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소주를 시켰습니다. 제 입엔 ‘10리사탕이라고 부르던, 단단하고 하얀 사탕을 물렸습니다. 가게 주인이 병마개를 빼고 작은 유리 잔 가득 소주를 부어주면, 할머니는 조금 전 다급했던 시간을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며 마셨습니다. 대포나 다모토리(선술집에서 큰 잔으로 파는 소주를 가리키는 우리 말)에는 어림도 없는 눈깔만한 잔. 가슴에 일렁이는 불길을 잡기에는 턱도 없었겠지만 그 순간 할머니에게는 소중한 약이었을 겁니다. 저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쪽마루 끝에 앉아 작은 사탕 하나를 아끼면서 빨았습니다. 안주는 가게에서 내놓는 새우젓이 전부였습니다. 소주와 새우젓, 지금 생각하면 어색한 조합이지만 갯가에서는 별로 낯설 것도 없었습니다. 10리는커녕 앉은 자리에서 녹아버린 사탕 때문에 허무함에 시달리던 저는 새우젓을 곧잘 집어먹었습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우리 손자 새우젓 도가에 장가보내야겠네.”라며 웃었습니다. 농담이라도 빌려 손자의 허기를 달래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송방에서 나와 할머니가 가는 곳은 작은 배 몇 척이 노고를 내려놓는 포구였습니다. 그곳이라고 당신을 기다려주는 게 있을 리는 없습니다. 바다 쪽에 시선을 두고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가끔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확인하려고 애써봤지만 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무심하게 오가는 갈매기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멀리 떠가는 배나 구름을 보고 있는 것도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울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조바심으로 저는 애먼 신발코를 바닥에 툭툭 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울지 않았고, 대신 갈매기가 머리 위를 맴돌며 끼룩끼룩 울었습니다. 당신도 어린 손자의 초조를 알고 있었겠지요. “이젠 그만 가자.” 어느 순간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생솔가지를 태운 듯 매캐한 내음이 묻어있었습니다. 비린 것 한 손 들지 않은 가난한 귀가는 쓸쓸했습니다. 소주 두어 잔 외에 하루 종일 빈 속이었을 할머니의 걸음은 자주 허청거렸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게 흔들리는 걸음과 달리 당신의 표정은 조금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단순한 소풍이 할머니에게는 설움 받힌 가출이었고 최소한의 일탈이었고 오욕을 덜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방탕과 방랑 사이를 오가다 빚더미만 남겨놓고 떠난 남편, 현실에 무너진 큰 아들, 집을 떠나 소식조차 없는 작은 아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잊지 않는 빚쟁이들. 무엇보다 남들이 씨를 뿌리고 거두는 수많은 논과 밭이, 한때 자신의 소유였다는 기억이 가장 큰 절망이었겠지요. 하지만 할머니는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습니다. 소라껍질 같은 단단함이 그나마 집을 지탱하는 힘이었으니까요. 저를 불러 수룽구지에 가는 날은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었겠지요. 소리 없는 통곡을 위해 나선 길이었겠지요. 산길 하나 넘으며 화를 삭이고 들길 하나 건너며 원을 내려놓고나머지 찌꺼기는 바다에 떨치는. ! 늦은 깨달음은 더욱 큰 아픔입니다.

 

수룽구지가 수룡동이라는, 의외로 멋진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먼 훗날 알았습니다. 차를 타고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을 지나는데, 길가의 수룡동이라는 입간판이 시선을 당겼습니다. 저는 그 수룡동이 과거 할머니와 가던 수룽구지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음운변천을 거쳐 수룡동이 수룽구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느낌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확신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수룽구지의 실체에 대해 약간의 의심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어릴 적 꿈속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까. 가족 중에도 수룽구지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수룡동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송방이라 부르던 가게와 갈매기 날던 선창과 설움 가득하던 하늘을 확인하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렸지만, 그냥 미뤄두기로 했습니다. 첫 사랑은 만나지 않는 게 좋다고 하듯이, 환상 같은 기억 하나쯤은 남겨둘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길이 없을 것 같은 절망이 온몸을 조일 때, 비린내 나는 선창에서 보았던 할머니의 처연한 눈을 생각합니다. “우리 손자 새우젓 도가에 장가보내야겠네.” 이명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마음을 기댑니다.

 

어쩌다 보니 길 이야기가 옛날이야기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하필 오늘 같이 기분 좋은 걸음에 왜 그 칙칙하던 날이 떠올랐을까요. 살다 보면 이를 악물고 갈무리해서 삭혀야 하는 아픔이 있고 털어놓아서 덜어지는 아픔도 있습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또 절실하게 그리운 역설의 먼 시간. 오늘은 수십 년 지고 다니던 짐 하나 내려놓고 갑니다. 짐 내려놓기는 여행길 내내 계속 될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를 떠나는 진정한 목적 중 하나가 내려놓고 가벼워지기이고, 가벼워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치유니까요.

 

논길을 지나고 억새들이 바람결에 수런거리는 모롱이를 도니 다시 바다가 나옵니다. 이제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만치 보이는 작은 항구가 곰소항이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젓갈단지, 그리고 곰소염전이 나옵니다. 작은 항구, 손이 아닌 눈으로 만져보기 위해 이만치 떨어져 앉습니다. 혼자 걷다보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기 전에 준비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도 바다는 멀리 있습니다. 긴 이별에 지친 갯벌은 침묵으로 엎드려 있습니다. 침묵으로아니군요. 침묵만 본 건 제가 부주의한 탓이었습니다. 갯벌은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폐타이어, 플라스틱 조각, 슬레이트, 가스통까지 온갖 쓰레기가 진을 치고 있는 이 죽은 듯한 갯벌에도 작은 생명들의 화려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손톱만한 게, 짱뚱어,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이 전해주는 충만과 열락(悅樂). 힘을 내어 다시 휘적휘적 걷습니다.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