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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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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에 해당되는 글 2

  1. 2009.02.16 [사라져가는 것들 98] 석유곤로*30
  2. 2008.01.28 [사라져가는 것들 43] 연탄26
2009. 2. 16. 10:42 사라져가는 것들

남녘에서 올라온 봄바람이 빈 들판을 가로지를 무렵, 할머니는 수십 년 동안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손가락에서 빼냈다. 값이 꽤 나가는 쌍가락지였다. 누가 말리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아니, 틈이 있었다고 해도 말릴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표정이 처자식을 베고 전장으로 가는 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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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그것처럼 결의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혼 길에 선 한 여인의 가슴에 슬픔의 강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는 걸 가족 모두 알 수 있었다. 끼니를 건너 뛸 만큼 어려운 때도 빼지 않던 가락지였다. 당신에게 그 가락지는 친정어머니의 분신과 다름없었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물려받았다고 했다. 잘 간직하라는 당부와 함께…. 그 일이 벌어진 건 아이가 중학교 입학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할머니는 손가락에서 뺀 가락지를 하얀 손수건에 갈무리하더니 아이를 앞세우고 길을 나섰다. 그 길로 삼십 리를 걸어 읍내로 갔다. 반지를 돈으로 바꾼 뒤 맨 먼저 한 일이 방을 얻으려 다니는 것이었다. 아이가 자취할 방이었다. 하지만 돈에 맞춰 변두리만 돌다보니 마땅한 방을 찾기 쉽지 않았다. 결국 산꼭대기에 가장 가까운 언덕을 올라가서야 처마에 내어지은 작은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부엌도 있었지만 비나 간신히 가릴 정도로 얼기설기 둘러놓은 수준이었다.

*곤로는 일본말에서 온 것으로 풍로나 화로라고 써야하지만, 그 시절 삶의 모습을 원형에 가깝게 전한다는 의미에서 그대로 표기합니다.

방이 정해지자 할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시장으로 갔다. 거기서 가장 먼저 산 것이 석유곤로였다. “연탄불이 없어도 이것만 있으면 밥을 굶지 않을 게다.” 할머니는 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를 자식에게 넘겨주는 장수처럼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당신도 말만 들어봤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에게 쓰는 방법을 묻고 또 물었다. 상점 주인이 설명을 할 때마다 아이를 돌아봤다. 네가 쓸 것이니 잘 들어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굶어죽을 일이 없게 만들어주는’ 곤로야말로 괴물처럼 낯선 도구였다. 고향집에서 군불도 때보고 연탄도 갈아봤지만 곤로라는 물건은 친해지기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하룻밤을 묵으며 석유를 사다 넣고 불붙이는 시범을 보여줬다. 옆에서 볼 때는 그런대로 쉬워보였는데 막상 혼자 해보려니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 말대로 굶지 않으려면 곤로에 불을 켜고 쌀을 씻어 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쌀과 반찬거리를 사다놓은 뒤 학교에 다니는 데 필요한 돈만 남겨줬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호떡 하나 사먹을 여유도 없었다. 가난한 손자를 남겨두고 떠나는 할머니 역시 그 좋아하는 인절미 하나 입에 넣지 못하고 먼 길을 허위허위 걸어갔을 것이다.

곤로를 쓰는데 가장 힘든 과정은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손잡이를 움직여 심지를 올리고 성냥을 켠 다음, 연소통을 들고 심지를 보면서 불을 붙여야 하는데, 겁이 많은 아이는 늘 성냥을 던지듯 놓고 연소통을 내려놓았다. 불이 확 번져서 손을 델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니 불이 제대로 붙을 턱이 없었다. 그때마다 냄새만 간이부엌을 가득 채웠다. 또 하나 난감한 건 석유를 사러 다니는 일이었다. 8홉들이 병을 들고 석유가게에 갈 때마다 귀찮고도 창피했다. 돈이 있는 집들은 큰 통에다 석유를 사다 썼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병을 채우는 것도 벅찼다. 석유를 곤로에 넣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냥 부으면 흘러내리기 때문에 플라스틱 펌프를 사용했다.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유량계의 눈금을 보면서 펌프질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눈금이 바닥에 닿은 걸 미처 확인하지 못해 밥을 하는 도중에 석유가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아이는 고향집이 그리웠다. 아이를 곤란하게는 했지만, 사실 석유곤로야말로 취사를 훨씬 편하게 해준 도구였다. 그 전까지는 나무나 연탄불로 밥을 하고 국을 끓여야했다. 하지만 나무는 민둥산을 푸른 산으로 만들겠다는 국가시책 때문에 더 이상 연료로 쓸 수 없었고, 연탄 역시 취사용으로는 그리 적절하다고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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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곤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편리했다.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더라도 밥을 굶고 나갈 염려가 없었다. 무엇보다 라면 끓일 때 편리했다. 물을 올려놓으면 금세 펄펄 끓으니 자취생들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곤로가 나오기 전에는 밥을 짓기 위해 한 여름에 연탄불을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 곤로의 구조는 맨 아래에 석유탱크가 있고 그 위에 면으로 된 심지를 장착한 원통이 있다. 가운데 튀어나와 있는 손잡이를 좌우로 움직이면 심지가 올라가고 내려갔다. 심지의 조절을 잘 해야 했다. 화력을 강하게 한다고 너무 올리면 그을음이 많이 나고, 석유를 아끼겠다고 너무 내리면 화력이 형편없었다. 심지 위에는 연소통이라는 장치가 달려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원통형의 철판으로 불길이 퍼지지 않고 위로 올라가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 위에 덮개와 솥을 얹을 수 있는 삼발이가 있었다. 석유곤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석유가 타면서 나는 냄새와 그을음이었다. 조금 쓰다 보면 심지가 짧아지고 타다 남은 석유 찌꺼기가 눌어붙게 되는데, 찌꺼기가 많아지면 화력도 떨어지고 냄새도 심해졌다. 자동차의 엔진오일을 주기적으로 갈아야하는 것처럼 심지 역시 적절한 시기에 바꿔줘야 했다.

그 덕분에 ‘심지갈이’라는 새 직업이 생기기도 했다. 그 시절 골목에는 “곤로 고쳐요~ 심지 갈아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은솥이나 냄비 때워요~" "우산이나 양산 고쳐요~” “칼 갈아요~” 와 함께 ‘시대’를 반영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도 유리심지라는 개량심지가 등장하면서 골목에서 잦아들었다. 뿐만 아니라 ‘부엌의 혁명’이라는 칭송까지 들으며 영원히 존재할 것 같았던 석유곤로 자체도 속절없이 떠나야 했다. 금가락지를 팔아 어린 손자 뒷바라지를 했던 할머니가 기어이 새 반지를 끼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을 하던 시기에, 부엌을 시커멓게 만들던 그을음도 코를 찌르던 석유냄새도 사라져갔다. 그 대신 깔끔하기 그지없는 가스레인지나 그보다 더 좋은 열기구들이 주방의 주인이 되었다. 세상은 그만큼 편리하고 깔끔해졌다. 그런데도 걱정을 운명처럼 안고 태어난 사람들은 가끔 불안해한다. 너무 편해진 환경이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고 퇴화시키는 건 아닌지. 아이들에게 무엇이 고마운 건지조차 가르치지 못하는 건 아닌지. 먼지로 희미해진 눈금을 들여다보면서 펌프질을 하던, 손이 델까봐 무서워하며 심지에 불을 붙이던, “곤로 고쳐요” 소리가 골목길을 휘젓던 시절은 이미 옛날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아날로그적 삶조차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 한 구석에 여전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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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8. 17:2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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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택이가 죽었다. 아침부터 뭔가 낌새가 이상했었다. 누가 정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항상 가장 먼저 등교하는 형택이가 조회시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형택이가 지각을 한다는 건 아침에 해가 뜨지 않았거나 선생님이 숙제검사를 잊어버린 것만큼이나 낯선 일이었다. 형택이는 아이의 짝이었다. 동네는 서로 반대방향이었지만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형택이와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에게 물어봤지만 모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조회시간 종이 울려도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반장이 교무실에 가봤지만 "가서 기다려라."는 말만 듣고 그냥 돌아왔다. 한참 뒤에야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납으로 만든 가면이라도 뒤집어 쓴 듯 침통한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택이는 이제 학교에 나오지 못한다." 아이는 선생님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형택이는 죽었다. 1교시 수업이 끝났을 때에는 소문이 화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택이네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다. 원흉은 역시 연탄가스였다. 작년 종구네 식구들이 죽은 뒤로 두 번째 참변이었다. 아이는 학교 뒤 으슥한 빈 공간, 형택이와 둘이서 자주 놀던 곳을 찾아가 펑펑 울었다. 2교시 종소리가 아이의 가슴에서 땡땡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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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슬프고도 무서웠다. 자신도 언젠가는 형택이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꼬박꼬박 동치미국물을 머리맡에 떠다놓았다. "자다가 속이 메슥거리거나 어지러우면 문부터 열고 이걸 마셔라" 동치미국물을 떠다놓을 때마다 손자들에게 당부하고는 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일가족을 하룻밤 사이에 죽일 만큼 무서운 연탄가스가 그깟 동치미국물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지 않았다. 나무를 때던 시절,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새어 올라오고는 하던 방이었다. 그러니 연탄을 때는 지금 형태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연탄가스는 얼마나 많이 새어들어 올까. 그리 생각해서인지 아침에 일어날 때면 머리가 무거웠다. 나무 때던 시절이 그리웠다. 지게 지고 나무를 하러갈 때마다 그렇게 지겨웠는데…. 1960년대를 정점으로 연탄의 급격한 보급확대는 일종의 생활혁명이었다. 베어내고 긁어내어 늙은 짐승의 등처럼 헐벗은 산들은 갈수록 땔감을 공급하는데 인색해졌다. 나라에서는 홍수방지 같은 명분을 내세워 나무 채취를 엄격하게 금했다. 그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이 연탄이었다. 연탄은 하루 종일 방을 따뜻하게 해줬고 언제나 밥과 국을 끓일 수 있는 매력적인 연료였다. 도시는 물론, 농어촌에서도 앞다퉈 연탄화덕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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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탄은 화력도 좋고 값도 비교적 싼 편이었다. 그래도 서민들에게 연탄 값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나누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부잣집들은 온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 창고에 쌓아놓고 땔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생기는 대로 한 두 장씩 사다 쓸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저녁 무렵 새끼줄에 연탄 한 두 장을 꿰어들고 골목길을 올라가는 가장의 등 굽은 뒷모습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당시 서민들의 꿈은, 독에 쌀을 가득 채우고 광에 연탄을 높다랗게 쌓아보는 것이었다. 연탄은 생활을 편리하게 해줬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다. 제대로만 갈아주면 몇 년이라도 꺼질 리 없는 게 연탄이었지만, 새벽에 깜박 시간을 놓치면 그대로 꺼져버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집에서는 갈아줄 연탄이 없어서 가장이 사들고 올 때까지 눈물을 머금고 꺼트리기도 했다. 한번 달궈지면 밤새 따뜻하던 구들장과 달리 얇디얇은 시멘트 방바닥은 금세 식어버렸다. 새벽녘 연탄불이 꺼진 뒤, 아이들은 바들바들 떨고 가게문은 안 열리고, 주부들의 가슴은 연탄처럼 새까맣게 타 들어갔다. 그러다 날이 밝으면 부리나케 달려가서 번개탄(착화탄)을 사다가 불을 붙였다. 번개탄이 나오기 전에는 숯불을 피워 살리거나 옆집으로 밑불을 얻으러 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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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울 때는 무턱대고 불문(공기구멍)을 열어놓았다가 비닐장판을 새까맣게 태우고, 연탄은 후르르 타버려 불이 꺼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연탄을 갈 때 가장 곤혹스러운 건 불붙은 연탄이 서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였다. 타버린 맨 아래 연탄을 떼어내야 위의 연탄을 아래에 넣고 새 연탄을 올리게 되는데 이게 서로 붙어버리면 난감했다. 성급하게 두드리다가 위 연탄까지 깨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때는 녹슨 식칼로 떼어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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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삽 같은 도구를 동원하기도 했다. 연탄구멍을 맞추는 일도 나름 노하우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아래와 위 연탄의 구멍을 잘 맞춰야 쉽게 불이 옮겨 붙는 것은 물론 연탄이 골고루 타고 가스도 적게 발생한다. 하지만 이 작업이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라서 초보자들은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낑낑거려야 했다. 그렇게 한참 들여다보다 보면 가스를 들이마시게 되어 울렁울렁 어지럼증에 시달리고는 했다.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당기던 연탄화덕이 보일러로 진화한 뒤에는 많이 편해졌지만 물통을 연결하는 고무호스가 녹아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건 말건 아이들은 즐거웠다. 연탄불에 별별 걸 다해먹었다. 라면을 끓이고 가래떡이나 쥐포를 구워먹는 건 기본이었다. 국자에 '달고나'를 해먹을 때도 연탄불이 요긴하게 쓰였다. 까맣게 탄 국자를 뒤늦게 감춰보지만 저녁에 들어온 어머니에게 들켜 경을 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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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연탄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대한제국 시절 일본인에 의해서라고 한다. 1960년대는 연탄산업의 전성기였다. 63년 말 국내의 연탄공장은 40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영원히 서민들의 곁을 지킬 것 같았던 연탄도 세월의 창날을 비껴 가지는 못했다. 기름보일러가 보급되고 도시가스 같은 청정연료를 쓰게되면서 석탄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90년대 초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석탄산업은 본격적인 정리단계에 접어들었다. 탄광은 대부분 폐쇄되고 한 때 시커먼 모습으로 도시에 자리잡고 있던 연탄공장들도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문을 닫았다. 달동네에 공급되거나 비닐온실 난방용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긴 했지만 연탄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이상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연탄소비가 다시 늘고 있다는 것이다. 기름보일러를 연탄보일러로 다시 바꾸는 집도 늘고 있다. 연탄 값도 꽤 올랐다고 한다. 때마침 불어온 복고바람 덕인지 거리에서 연탄구이집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고 보면 연탄의 시대는 막을 내렸을지 몰라도 연탄으로 상징되던 고난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찬바람이 기웃거리는 어느 골목길에는 내 가난한 어머니와 내 아픈 형제들이 터져나오는 기침을 깨물며 하얗게 바랜 서러움을 연탄재처럼 쌓아가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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