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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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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숙'에 해당되는 글 1

  1. 2008.06.30 [사라져가는 것들 65] 숙박계-임검2
2008. 6. 30. 14:11 사라져가는 것들
여인숙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 입구에 서면 나는 빈 의자들하고 흥정을 하고 싶어진다

나를 다시 낳아줄래요?


맨 처음 나를 낳은 것은 어머니였지만 아랫도리를 내리고 나를 두 번 째 낳은 것은 여인숙이다,

그날 밤의 나를 어머니, 다시 깨끗하게 낳아줘요, 매달리고 싶게 만든 것도 여인숙이다


가끔 나는 숙박계에 이 세상에 없는 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쓰고 벽에 구름의 바지를 걸어놓고 잠든 적도 있다

그런 어느 날 번갯불이 유리창에 금을 그으며 지나가고 백열전구는 밤새 깜박거리며 어둠의 알을 낳았다


골목은 훌쩍 커버렸다 골목이 밖에 나가 놀다 오면 지금도 젖을 꺼내 물린다는 늙은 여인숙,

그녀가 골목의 어머니였다


세상의 모든 여인숙 간판의 불을 끄지 말자 비어 있는 방이 있다는 거다

몇겹 페인트칠이 벗겨진 것은 누군가 허벅지 비비는 밤을 보내고 있다는 거다

나이 든 어머니에게 애인을 붙여주자


안도현 <세상의 모든 여인숙>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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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추운 날씨다. 온 세상이 얼어붙은 것 같다. 어둠은 진즉에 주렴을 내렸지만,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다. 거리에는 강아지 한 마리 보기 힘들다. 취객 하나가 자꾸 꼬이는 두 다리를 추스르며 지나간 뒤로 인적이 끊겨버렸다. 큰길에서 이어진 골목은 먹지라도 깔아놓은 듯 캄캄하다. 그 어둠속에서 한 쌍의 눈이 빛난다. 잠시 뒤 한 사람이 민첩한 움직임으로 골목을 지나간다. 조금 들어가자 외롭게 서 있는 가로등 하나가 나타난다. 불빛 아래로 골목을 지나온 사람의 윤곽이 드러낸다. 스물 한 둘이나 되었을까. 오래 갈아입지 못한 듯한 입성에 몹시 지친 얼굴이다. 하지만 언뜻 보이는 눈빛은 날카롭다. 그 눈빛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다. 가로등과 조금 떨어진 곳에 2층짜리 여관이 하나 서 있다. 타일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벽에는 퇴락의 흔적들이 훈장처럼 매달려있다. 문 앞에는 둥그런 갓을 씌운 백열등 하나가 희미한 불빛을 밝히고 있다. 한참 주변을 탐색하던 청년이 빠른 동작으로 여관 문을 민다. 딸랑딸랑! 문에 매단 종이 자지러진다. 하지만 인기척이 없다.

두리번거리던 청년이 작은 미닫이창을 똑똑 두드린다. 조금 뒤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부스스한 머리 하나가 불쑥 나온다. 이 추운 날 누가 오랴 싶어서 초저녁잠에 빠졌던 모양이었다. “주무시고 가시게?” 여자가 청년의 아래 위를 훑으면서 말을 잘라먹는다. 청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203호로 가요” 여자가 고갯짓으로 2층을 가리킨다. "1층은… 없나요?“ 여자가 다시 한번 청년을 훑어본다. ”끝에서 두 번째 방. 107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드르륵 닫는다. 방은, 많은 사람과 긴 시간이 조금씩 남기고 떠난 퀴퀴한 냄새로 청년을 맞는다. 다행이 방바닥은 뜨겁다. 갑자기 더운 곳에 들어온 청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린다. 청년이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여차하면 튀어나갈 듯한 자세로 비켜선다. 그러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한숨을 깨물며 다시 앉는다. 여자가 쟁반을 내려놓더니 숙박계를 슬그머니 청년 앞에 밀어놓는다. 숙박계에는 볼펜 하나가 포로처럼 묶여진 채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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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볼펜이 ‘성명’란 앞에서 잠시 주춤하더니, 금세 ‘조필수’라고 적는다. 그리고는 일사천리다. 주민등록번호, 주소, 직업, 행선지…. 막힘없이 써내려간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이름부터 주민등록번호까지 누구의 소속도 아닌 것들이 적혔을 것이다. 여자는 신상 따위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아니면 어차피 가짜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껌을 씹는다. 다 쓴 숙박계를 내밀자 여자는 청년을 다시 한번 힐끔 쳐다보고 방에서 나간다. 곧바로 문을 잠근 청년이 바닥에 눕는다. 모처럼 등에 닿는 따뜻함이 황홀하다는 표정이다. 그러다가 금세 코를 곤다. 하지만 평화는 너무 빨리 깨져버리고 만다. 청년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문으로 다가가 귀를 댄다. 언제 코를 골았나싶을 정도로 눈빛이 반짝거린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임검…" 어쩌고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입구 쪽 방이다. 청년이 빠른 동작으로 창 쪽으로 가 문을 열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훌쩍 뛰어내린다. 고양이처럼 민첩하다. 호루라기 소리가 간헐적으로 골목을 달린다.

1990년대 후반? 2천년대 초반?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언제부턴가 숙박계(宿泊屆)니 임검(臨檢)이니 하는 말들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숙박계는 여관·여인숙 등에 묵는 사람이 이름이나 주소·행선지 등의 인적사항을 적는 서류이다. 까만 표지에 까만 철끈으로 묶여져 있었다. 숙박부, 숙박신고서 등으로도 불렀으며 본인이 직접 기재하도록 했다. 여관에 들어갈 때 숙박비를 치루면서 쓰기도 했지만, 보통 종업원이 방으로 물주전자와 함께 들고 들어왔다. 숙박계의 내용은 관할 경찰관서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간첩 색출이나 범죄예방 및 범죄자 검거’가 목적이었다. 일제 때 소위 불령선인이나 독립운동가를 단속하기 위한 ‘위생법’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가장 먼저 버렸어야할 치욕의 유산이다. 이 숙박계의 효과 역시 의심스럽다. 누가 하룻밤 묵으면서 자신의 신상을 시시콜콜 밝히고 싶겠는가.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이 가짜 이름이나 주소를 적기 마련이었다. 특히 수배자들은 ‘가짜 신상명세서’를 숙지하고 다니기 때문에 망설일 것도 없었다.


임검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행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담당공무원이 사무소·영업소·공장·창고 등에 가서 업무의 실시상황이나 장부·서류·설비, 기타 물건을 검사하는 일’이라고 돼 있다. 원래의 뜻이야 어쨌든, 경찰관이 여관 등에 불시에 찾아와 투숙객을 검문하는 것을 임검이라고 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가장 난감했던 건 남녀투숙객이었다. 오밤중에 불쑥 “임검 나왔습니다”하고 방문을 두드리면 자다가도 문을 열어줘야 했다. 부랴부랴 옷을 꿰입고 문을 열면 주민증 내놔라, 숙박계에 쓴 것과 왜 다르냐, 둘은 어떤 관계냐는 등 꼬치꼬치 따지기 일쑤였다. 대답을 제대로 못하거나 조금 수상하다 싶으면 경찰서까지 동행하는 일도 많았다. 임검이 악용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여관주인이 적당하게 ‘인사’를 치르면 임검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뻣뻣하게 굴면 수시로 드나드는…. 냉전시대의 산물이었다든가 범죄예방을 위해 불가피했다든가 하는 ‘시대의 변명’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국민의 사생활이 양말짝만도 못하게 다뤄졌던 시절이었음은 분명하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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