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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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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우르파의 옛집. ㅁ자형으로 지었다.

대가족의 여자들이 모여앉아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

울루자미를 찾아가는 길. 어느 건물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훌리아에게 물었더니 오늘이 바로 71일 월급날이란다.

월급날이면 사람들이 저렇게 은행 앞에 줄을 서?”

그럼요. 은행에 가야 월급을 찾아오지요.”

그렇구나. 옛날에 월급날이면 누런 봉투를 나눠주던 생각이 난다. 그땐 그마나 그날만큼이라도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가끔은 아내의 살가운 눈길 속에 삼겹살과 소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모든 게 온라인으로 바뀐 뒤부터 월급쟁이들은 월급기계로 전락해버렸다. 괜한 감상으로 가슴이 뜨뜻하다. 울루자미로 가기 전에 키친박물관이라는 곳을 잠깐 들른다. 과거 우르파 사람들이 살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골목 안에 있는 집은 무척 크다. 지금의 큰 건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호가 살았을 것 같다. 지은 지 200년 됐다는데 4각형 구조로 문을 빼면 사방이 모두 막혀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작은 분수대도 있다. 지하층에서는 동물들을 키웠다. 우물도 부엌에 있다. 집안에서 모든 걸 해결한 셈이다. 대가족 제도가 유지되던 시절이라 20~30명이 한 집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결혼을 하면 분가하는 게 아니라 방을 하나 내줘서 함께 사는 방식이다. 그 당시 생활상을 모형으로 꾸며놨는데 여자들 예닐곱 명이 한꺼번에 둘러앉아 음식을 만들고 있다. 시어머니,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 . 날마다 잔칫집 같았겠다.

 울루자미 입구.

 

대사원이란 뜻의 울루자미 역시 샨르우르파 시내에 있다. 이곳은 원래 457년에 36개의 붉은 기둥 위에 세운 교회였다고 한다. 그래서 붉은 교회라고 불렀다. 1175년에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8각형으로 우뚝 솟은 미나레트는 이 도시 최초의 시계탑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는데 왼쪽에 묘지가 보인다. 사원 내 공동묘지인 모양인데 별로 넓지 않은 곳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좀 답답해 보인다. 돌로 만든 구조물 위에 묘비를 세운 것도 있고 맨 땅에 묘비를 세운 것도 있다. 묘비는 제각각이다. 짧은 것, 긴 것, 글씨를 새긴 것, 지워진 것, 모양을 낸 것, 밋밋한 것. 묻혀있는 사람들도 살아있을 때 저렇게 제 각각이었겠지. 죽음으로도 동질화되기 어려운 게 사람인가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내세를 믿는다. 따라서 죽음은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쁘게 받아들인다. 또 시신을 화장할 경우 영혼의 안식처가 소멸된다는 믿음 때문에 매장문화가 일반화 돼 있다. 일종의 영혼이 거주할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슬람사회의 장례절차는 그리 복잡하지 않아서 보통 24시간 이내에 매장한다. 사람이 운명을 하면 사자의 머리를 메카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염을 하는데 염 절차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솜으로 입과 귀, 코 등을 막은 뒤 흰 무명천으로 시신을 둘러싼다. 묻을 때는 관 없이 매장한다. 사람 키 높이 정도로 비교적 깊고 넓게 판 묘실에 얼굴을 메카방향으로 향하게 시신을 안치한다. 시신 위에 일정한 공간을 두고 석판 등으로 덮는다.

사원 내의 공동묘지. 

크고 작은 묘비들.

묘실을 팔 때는 보통 서너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넓게 파는데, 한 세대가 지나면 한 무덤에 또 다른 가족을 매장하는 관습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나라도 역시 묘 자리가 부족한가보다. 요즘은 묘지를 쓴 뒤 7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을 묻을 수 있다고 한다. 영혼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의 임대차 한도가 고작 7년인 셈이다. 매장문화의 문제점이라고 할까. 하지만 종교를 배경으로 한, 즉 내세 부활을 전제로 생긴 매장문화이기 때문에 단시간 내 바뀔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미망인 얘기나 잠깐 하고 가자. 전통 이슬람사회(터키는 무척 유연할 것이다)에서 미망인은 남편과 사별하게 되면 4개월 10일간 외간 남자와의 접촉을 피해 집에서만 지낸다고 한다. 이게 바로 절대적 재혼 금지기간일 것이다. 보통은 1년이 지나야 재혼이 허용된다고 한다. 재혼의 대상은 제한이 없지만 전통적인 유목사회에서는 근친이나 족내혼을 주로 한다. 다른 가문이나 부족의 남자와 재혼할 경우 집안의 수치로 받아들여 부족 간의 적대관계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쩌다 공동묘지 옆을 지나는 바람에 장례 이야기가 길어졌다. 사원 자체는 특별한 게 없다. 앞에서 언급한 시계탑 정도가 눈에 띌 뿐. 마당 가운데에는 우아하게 지붕을 해 얹은 우물 하나가 있다. ! 이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수건의 전설을 지닌 우물이구나.

울루자미의 시계탑.

사원 내에 있는 해시계.

예수의 얼굴을 닦았던 수건이 이곳에 떨어졌다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예수가 에데사에 언제 어떤 이유로 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나 남겼다. 붉은 교회를 방문한 그가 수건 한 장을 자신의 얼굴에 대자 얼굴의 모양이 그대로 찍혔더란다. (에데사 왕국의 아브가루스왕이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니까 얼굴이 찍힌 수건을 보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성화라고 일컬어지는 성스러운 수건이다. 이 수건은 944년까지 에데사에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943년 비잔티움 제국의 로마노스 1세가 도시를 포위하고 수건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기독교의 유물이리니 돌려달라는 뜻이었겠지. 이슬람에서도 예수는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성스러운 수건일 수밖에. 하지만 힘없는 자가 죽지 않으려면 별 수 있나. 결국 강탈당하다시피 한 수건은 944815일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같은 기독교의 나라를 약탈했던 제4차 십자군이 1207년에 이 수건을 슬쩍한다. 수건은 비잔티움 제국을 떠나 베네치아로 갔지만 그 뒤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건 프랑스에서였다. 루이 9세 때 파리의 성샤펠 성당에 다시 나타났다가 1700년대 후반의 프랑스혁명 때 또 사라졌다. 그 뒤로는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이 없앤 게 아니라 욕심이 없앤 거겠지.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보면 참 한심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깟 수건 한 장 뺏고 빼앗기고. 그럴 시간 있으면 기도나 하지.

 

'성스러운 수건'의 전설이 탄생한 우물.

 

성스러운 수건이라니까 혹시 베로니카의 수건을 두고 착각한 거 아냐? 하는 분도 있을 것 같아 이야기 하나 덧붙인다. 성스러운 수건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피와 땀을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를 본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갖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의 피와 땀을 닦아 줬다고 한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수건에 예수의 얼굴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나왔다는 것이다. 그걸 베로니카의 수건이라 일컬었는데 이 수건이 여러 번 기적을 일으켰다. 목이 마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고 눈먼 자를 고쳐주었으면 심지어는 죽은 자를 소생케 한 일도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이 수건을 성물(聖物)로 정하고 존귀하게 여기도록 했다. 하지만 이 수건 역시 인간들의 손에 의해 우여곡절을 겪는다. 1527년 로마가 이방인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폭도처럼 변한 군중들에 의해서 파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어떤 작가는 베로니카의 수건이 도난당해 로마의 이곳저곳 주점에서 나돌고 있었다고 쓰기도 했다. 혹자는 무슨 소리냐, 바티칸에 그대로 보존돼 있었으며 폭도들이 약탈한 물건 중에서 베로니카의 수건은 없었다고 기록했다. 결론은 분명하다. 설령 베로니카의 수건이 바티칸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고 해도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성물은 아니라는 것. 물론 행방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터키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이런 때 공부 조금 더 한다고 남 주는 건 아니니까. 어떤 경우든 인간들의 욕심이 저지른 파국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원에 놀러온 꼬마들.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울루자미는 우리 일행이 들어서면서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 꼬마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주변을 맴돈다. 그것도 갓 부화한 물고기 떼처럼 한꺼번에 몰려다닌다. 어휴! 귀엽지만 시끄럽다. 이런 땐 어찌해야 되는지 잘 알지. 카메라를 녀석들 앞으로 들이밀었더니 느닷없이 조용해진다. 잠시 뒤에는 저희들끼리 알아서 정렬까지 한다. 거봐. 사진이 특효라니까. 짜낸 것 같은 성스러움으로 위장한 사원보다는 이렇게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 구실도 하는 곳이 훨씬 더 정감이 간다. 아이들은 천사라고 하지 않았는가. 사원에 천사가 찾아오면 최고의 손님이지. 시장으로 가는 길은 번화가다. 좁은 길에 신문가판대도 세워놨고 노점상도 있다. 어디 가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 마을버스도 오간다. 버스요금은 1리라라고 한다. 환율을 700원쯤으로 잡으면 우리와 비슷한가? 물 한 병은 25크루슈. 1크루슈는 1리라의 1/4이다. 그러면 우리 돈으로 170~180원쯤 되겠네. 물 값은 싼 편이군. 걸어가면서 훌리아에게 묻는다.

발르클르 연못(성스러운 물고기 연못)을 한국말로 뭐라고 한다고?”

~ 물고기 수영장요.”

흐흐흐, 아직도 물고기 수영장이냐? 물고기 연못이라고! 물고기 연못!!”

무슨 소리인가 하면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을 아무리 가르쳐도 연못이라는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물을 때마다 수영장이란다. 그 재미에 묻고 또 묻는다. 이젯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다. 혹시, 내가 이들을 놀리는 게 아니라 이들이 짜고 날 놀리는 건가?

 

시장으로 들어가는 길.

고춧가루 종류가 열 가지도 넘는다.

시를 쓰는 노점상.

구두닦이? 광약 장수? 정체가 불분명한 노점상.

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여러 번 하는 말이지만 나는 역시 시장 체질이다. 느닷없이 피가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한다. 곡물가게 앞에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건 곱게 빻아놓은 고춧가루다. 터키에 무슨 고춧가루?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샨르우르파는 고추의 주산지다. 그래서 이 동네는 매운 케밥으로도 유명하다. 요리에 고추구이가 필수적으로 딸려나온다. 심지어는 가지만한 풋고추를 우적우적 씹어 먹기도 한다. 현지인이 먹는 걸 보고 한번 따라했다가 매워서 사망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내가 워낙 매운 걸 못 먹기도 하지만 여기 고추는 맵기가 보통이 아니다. 고추를 먹고 음식에 고춧가루가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 사람들과 동료의식을 느낀다. 고춧가루도 참 여러 가지다. 분홍에 가깝게 빨간 것, 아주 빨간 것, 거무스레한 것, 아주 검은 것. 종류별로 나눠 나눠놓은 비닐포대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원래 고추 자체의 종류가 그리 많은 건지, 건조 과정에서 색깔이 달라진 것인지. 좌판을 벌여놓고 잡동사니를 파는 할아버지는 뭔가 열심히 기록하고 있다. 혹시 길거리의 시인이 아닐까. 광약을 파는 건가? 구두를 닦는 건가? 조금 애매해 보이는 아저씨도 앉아있다. 조그만 문을 지나가니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쇠전도 아니고 시장 한복판에 광장이라니 좀 느닷없다. 사람들이 파라솔 아래 나무의자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차이를 마시고 있다. 카라반사라이가 있던 자리인가? 시장 한가운데에 대상들이 쉴 수 있는 큰 뜰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가만히 둘러보니 남자들뿐이다. 시장에도 금녀구역이 있는 모양이군.

 

시장 안의 휴식광장.

실크 상가.

실크상가에서 만난 사내.

실크상가로 들어간다. 실크로 만든 모든 상품이 있는 곳이다.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데 날카로운 눈초리 하나가 등에 와 박히는 느낌에 움찔한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언젠가, 굳이 따지자면 인간이 숲에서 벗어나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릴 때쯤 잃어버렸던 본능 같은 게 살아나는 걸 실감할 수 있다. 굳이 경계의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좀 미흡한, 필요 없다고 어디엔가 내던졌던 민감한 신경같은 것일 게다. 시선 쪽으로 눈을 돌리니 한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시장 풍경과는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내다. 타임머신을 타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군단에 용병이라도 다녀온 것 같은 느낌. 그런 단단함과 날카로움이 적절히 버무려진 사내.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온다. 그런 땐 독일병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도 있는 걸음걸이다. 가까이 온 그가 나를 끌어안더니 자신의 뺨을 내 뺨에 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반대쪽 뺨. 다음엔 손을 내민다. 나 역시 아무 거부반응 없이 손을 내민다. 악수를 마친 그가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더니 거수경례를 한다. 나는 경례를 받는 대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눈은 웃고 있는데 입은 독일병정처럼 꼭 다문 저 사내는 나와 무슨 인연으로 여기서 인사를 나누는 것일까? 왜 내겐 낯선 사내의 거친 뺨이 낯설지 않은 것일까? 전생, 어디를 흐르는 강쯤에서 헤어졌다가 이리 만난 것일까? 눈짓으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인파 속으로 묻힌다.

 

카메라에 관심이 많았던 모녀.

옛날식 다리미도 있고.

카메라를 들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진사가 되는 건 금방이다. 히잡을 두른, 모녀로 보이는 두 여자가 자꾸 내 카메라에 시선을 보낸다. 표정은 수줍기 짝이 없지만 낯선 물건에 대한 관심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카메라를 가리키며 무슨 말인가 연신 주고받는다. 그런 땐 무기가 있지. 삶은 콩 얻어먹은 당나귀처럼 잇몸까지 보이며 웃어준다. 마음이 놓이나 보다. 젊은 여자가 묻는다.

필름?”

노 필름

이 정도면 서로 영어 좀 되지 않는가? 디지털 어쩌고 안 하고도 서로 하고 싶은 말 다했다. 사진보다는 카메라 자체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카메라를 내밀면서 한번 찍어 보라고 했더니 고개를 젓는다. 찍을 줄은 모르고 자신들을 찍어서 보여 달라는 것이다. 수줍음 속에서도 할 건 다한다. 오케이, 오케이! 얼마든지요. 노소 무슬림 여성을 모델로 시장 한가운데서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사진을 보여줬더니 할머니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고맙단다. 디지털 카메라를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보시하기 쉬운데 뭘. 모델 확보해서 좋고 고맙다는 인사 들어서 좋고. 카메라를 들고 있다고 늘 이렇게 저절로 모델이 구해지는 건 아니다. 우선 인상이 좋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항상 웃는 얼굴이어야 한다. 찡그린 사진사에게 모델이 돼주는 경우는 없다. 다음으로 눈이 마주치면 현지 말로 인사 정도는 할 줄 알아야한다. 예를 들어 터키에 가면 귀나이든(잘 잤어요? 좋은 아침!!)~ 메르하바~(안녕하세요?) 정도는 입에 달고 사는 게 좋다. 인사한다고 욕하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다.

 

이 아이 대신 장사를 해줬다.

대장장이.

주석공방 골목.

어느 가게 앞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아이들이 일하는 걸 보는 게 이젠 낯설지 않다. 방학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에 가게를 보는 아이들이 많다. 헌데, 이 녀석 정말 기특하다. 서 있는 나를 보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앉으란다. 이런 경로사상이 투철한 아이가 있나. 아니면 내가 불쌍해 보였나?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지. 아이를 한쪽에 세워놓고 장사를 시작한다.

싸요, 싸요. 최고급 실크 머플러가 말만 잘하면 공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일행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모여든다. 다른 터키 사람들도 이방인이 싸구려를 외치니 신기하다는 듯 모여든다.

다른 데 갈 것 없어요. 싸게 드릴 테니 여기서 사요.”

손님과 아이 사이에서 흥정을 벌인 끝에 두 장을 팔았다. 물론 사는 사람들도 혜택을 봐야하니까 30리라짜리를 25리라로 깎아줬다. 아이도 불만스럽지 않은 표정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뭐. 아이와 작별을 하고 실크 상가를 벗어난다. 바로 앞에 대장간이 있다. 대장간 분위기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화덕과 모루, 각종 장비그리고 대장장이의 힘찬 망치질. 만드는 물건은 좀 다르다. 도끼나 칼 등도 있지만 주로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만든다. 저게 뭘까? 물어봤더니 케밥을 만들 때 쓰는 꼬챙이란다. 대장장이는 다섯 살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해서 45년 동안 이 일만 해왔다고 한다. 쉰 살이라는데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인다. 평생 불 앞에 살아서 그럴 거야. 익은 거지 뭐.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 공방들이 줄지어 있다.

 

완성된 주석 제품들.

주석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웃는 얼굴로 일하는 아이.

전통기법으로 주석 용기를 만드는 곳이란다. 주석이 이렇게 예쁜 물건으로 변할 수도 있구나. 보석 못지않게 화려하다. 한 집에 들어갔더니 부자(父子)로 보이는 장년 사내와 아이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동그란 주석 판에 문양을 새기고 아들은 판 위에 열심히 망치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어려 보인다. 아홉 살 쯤? 커다란 나무망치를 들고 연신 내리치는데 그 나이에 하기에는 조금 벅차 보인다. 하지만 이 녀석 조금도 싫증난 표정이 아니다. 입가에 미소까지 매달고 있다. 착하고 착한지고. 저렇게 일하는 아이도 있는데 어른인 내가 여행을 하면서 뭐가 힘들다고. 배낭을 추슬러 올리고 힘차게 나서보자.

posted by sagang

성스러운 연못으로 흐르는 수로.

성스러운 연못과 모스크.

아브라함은 정말 샨르우르파에서 태어난 것일까? 그 대답을 확실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를 좀 추적해보자. 아브라함은 아담의 후손이다.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고 175세에 세상을 뜬 그는 노아의 방주노아와도 58년이나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의 출생은 전설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삶의 궤적은 전설보다 역사 쪽에 가깝다.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는 홍수 심판이 있은 지 대략 292년이 지난 뒤고 바벨탑 사건 이후 100년 정도 지난 뒤이다.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고대 바빌론의 황제 함무라비 보다는 200년쯤 앞서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그의 행적은 갈대아 우르에서 시작해 하란과 세겜을 거쳐 가나안에 이른다. 그런데 왜 태어난 곳이 그리 명확하지 않을까? 그 답은 갈대아 우르에 들어 있다. 잠깐 구약성서를 보고 가자. 아브람(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이다)이라는 사람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창세기 1126절부터다.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흘과 하란을 낳았더라(창세기 11-26)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창세기 11-29)

 

문제는 본토라고 적은 갈대아 우르가 어디인지 확실히 증명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터키 사람들은 샨르우르파야 말로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갈대아 우르라고 주장한다. 또 오랫동안 그렇게 여겨져 왔다. 1930년대 이후 시리아의 몇 곳에서 출토된 토판 문서를 해독해보니 우르라는 도시가 여러 곳 있으며 모두 하란 근처에 위치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브라함 동굴 같은 유서 깊은 곳도 이곳에 있지 않은가.

 

장작이 변했다는 물고기의 후손들.

먹이를 탐하는 물고기들.

하지만 학자들은 옛 바빌로니아가 있었던 유프라테스 강 하류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지역, 즉 지금 이라크 남부와 쿠웨이트가 있는 지역을 우르라고 본다. 북쪽의 우르, 즉 샨르우르파에서 남쪽으로 1,500km 떨어진 곳에 고대도시 우르가 있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울리라는 사람에 의해 발굴되면서 바로 갈대아 우르가 이곳이라는 게 정설이 되었다. 발굴된 지하 무덤, 부장품 등이 갈대아 우르임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특히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여기저기 떠도는 별 볼 일 없는 유목민으로 묘사돼 있지만, 사실은 그의 고향 우르에서는 대도시의 귀족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아브라함은 빈손으로 가나안 땅에 간 것이 아니라 발달된 도시 문명의 법과 도덕 등을 가지고 가서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했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그렇게 입증됐다니 믿을 수밖에. 그런데도 왜 나는 자꾸 샨르우르파 쪽에 정이 더 갈까? 내가 이라크에 있다는 우르를 직접 가보지 못해서 그럴까? 과학보다는 전설을 믿고 싶어 하는 비과학적 사고방식 때문일까? 구약과 지도를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꾸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데라가 그의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창세기 11-31)

 

산책 나온 무슬림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 머물렀다는 창세기의 내용을 기억한 뒤 지도를 보자. 학자들이 갈대아 우르라고 주장하는 이라크의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아까 말했듯이 1,500km나 된다. 그곳에서 가나안, 즉 지금의 팔레스타인 서쪽 해안지역은 서쪽으로 방향만 틀어서 곧장 가면 그 거리를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남쪽으로 갔다는 그들이 왜 북쪽에 있는 하란으로 갔을까? 차는커녕 마차 한대 없는 그들이 굳이 그 먼 길까지 올라간 이유는 뭐였을까. 또 지나가는 길이었다면 그냥 지나갈 것이지 그 낯선 하란에서 말뚝 박고 살 건 또 뭐란 말인가. 혹자는 가로지르는 길이 사막이라서 좋은 길을 택하다 보니 돌아서 갔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직접 가보지 않아서 큰 소리 치긴 좀 그렇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벗어나면 그 어느 곳도 광야이긴 마찬가지다. 하란으로 가는 길이라고 아스팔트가 깔려있을 턱이 있나. 그렇다면 지금의 샨르우르파, 아브라함의 전설을 지닌 그곳이 창세기에 나오는 우르에 더 가깝지 않을까? 손자까지 봤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문제였을 것이다. 샨르우르파를 당당하게 출발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란쯤 걸어가다가 아이구! 허리도 아프고 난 더 이상 못 가겠다하면서 그냥 주저앉아 버린 건 아닐까. 믿음이 별로 깊지 않았던 그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고향을 떠나 멀고먼 가나안땅까지 갈까. 하란까지만 갔으면 성의를 보인 거지. 별 지식도 없이 너무 따지는 건가? 내가 성서 전문가들이나 고고학자들의 견해를 뒤집을 방법은 없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금증의 뿌리는 여전히 뽑히지 않는다.

 

동네 아이들도 많이 눈에 띈다.

이제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구경을 가보자. 연못은 아브라함의 동굴에서 그리 멀지 않다. 수로를 따라가다 보면 르즈마니예와 압두르하르만이라는 두 개의 모스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직사각형의 긴 연못을 볼 수 있다. 이 연못은 도시의 더위를 식혀주는 역할도 하는 듯,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거닐고 있다. 그런데 왜 이곳이 성스러운 연못이 되었을까? 아브라함 동굴에서 끊어진 전설은 여기서 계속된다. 신상을 파괴한 죄로 감옥에 갇힌 아브라함은 드디어 사형대에 오르게 된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님로드 왕, 그냥 죽이기에는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성 꼭대기에 화장용(火葬用) 장작을 쌓고 아브라함을 매단 다음 불을 질렀다. 말 그대로 화형(火刑)을 시행한 것이다. 이걸 그냥 두면 하나님이 아니지.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아브라함을 에워싸려고 하자 느닷없이 천둥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치기 시작했다. 화형장은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님로드 왕이 도망쳤는지까지는 모르겠다. 아브라함은 성 아래 장미 밭으로 떨어지고, 그 장미 밭은 호수가 되었다. 타다 만 장작들은 물고기로 바뀌어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 연못에 있는 물고기들이 바로 그때 타다만 숯이 변한 물고기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잉어처럼 생긴 이 물고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뭇거뭇한 자국을 볼 수 있다. 기적의 증거인 이 물고기들은 아무도 잡지 않는다. 만약 잡아먹게 되면 곧바로 장님이 된다는 설도 있다. 연못을 들여다보니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이다. 물고기들이 너무 많다 보니 저희들끼리 교통정리를 하는 것도 일일 것 같다.

 

저거 하나 건져봐?

물고기 밥을 조금 얻어서 던져본다. 물고기들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몰려들더니 저희들끼리 머리를 박고 꼬리를 치고 난리도 아니다. ! 이게 바로 아귀다툼이라는 거구나. ‘배가 고프든 안 고프든 일단 먹고 보자가 그들의 모토인 것 같다. 나는 왜 이 성스러운 물고기들에게서 지옥도를 보는 걸까. ‘너 죽고 나 살자고 진흙탕에서 구르는 욕심 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그들과 자꾸 겹쳐진다. 대체 성스러운 것은 무엇이고 속된 것은 무엇인가. 그 경계는 누가 어떻게 지어준단 말인가. 아이 둘이 지나가길래 불러서 묻는다.

이 물고기 잡아먹으면 어떻게 돼?”

죽어요.”

정말? 네가 봤어?”

아뇨. 먹고 죽은 사람이 있대요.”

몇 사람에게 물어봐도 왜 먹으면 안 되는지 분명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성스러운 물고기니까’ ‘병에 걸린답니다’ ‘눈이 멀어버린대요대답도 가지각색이다. 하긴 정답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나는 직장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있는 면접요원처럼 집요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왜 이 물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지 물어본다. 재미있는 대답도 있다.

이건 나무가 변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물고기를 먹으면 나무를 먹는 거지요.”

흐흠, 그건 그렇겠네. 나무를 먹으면 반칙이지. 지금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시절도 아니잖아.

 

반대쪽 모스크.

 

결정적인 대답을 듣고 질문 행각을 멈춘다.

나 같이 종교를 안 믿는 사람은 먹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정 그렇다면 한번 해보세요.”

어떻게 되는데요?”

잡으려고 손을 넣는 순간 다른 사람들한테 맞아죽을 걸요?”

그래. 그게 정답이네. 맞아죽지 않으려고. 그럼. 이 먼 곳까지 와서 맞아죽으면 안되지. 사실 나도 그 신성함을 믿는다. 신성은 보호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그 영역까지 무너트리고 나면 대체 어디에 기댈 것인가.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늘 그 영역을 들여다보지 못해 안달이다. 나야말로 이 물고기들이 영원히 신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남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곳 사람들은 이 연못에서 하얀색 물고기를 보면 천국에 간다고 믿는다. 천국행 티켓 한 장 확보해볼까 하고 열심히 들여다보지만 풍진에 물든 흐리멍덩한 눈에는 회색빛 물고기 한 마리 들어오지 않는다. 이 연못을 비롯한 공원 수로를 흐르는 물은 모두 성채가 있는 담라즉 언덕에서 흘러들어온 지하수라고 한다. 그런데도 물고기가 워낙 많다보니까 지하에 산소를 공급하는 파이프를 묻어놓았다고 한다. 또 프랏대학교 연구진이 조사를 해봤더니 모두 네 종류의 물고기가 살고 있더란다. 그러니까 장작이 네 종류나 있었다는 얘기?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눈에는 비슷비슷하다.

 

샨르우르파 지도.

 

샨르우르파의 역사를 잠깐 얘기하고 가야지. 해발 540m에 자리 잡은 이 도시의 역사는 9,000년을 헤아린다. 아니, 뒤에 가볼 괴베클리테페를 감안할 때는 그보다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 같다. 역사에는 약 4,500년 전에 일어난 일부터 기록돼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후리라고 불렀던 종족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후리아인이인데 BC 2500년경에 코카서스 산맥을 출발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아나톨리아 남동부와 시리아, 이라크 북부까지 내려가 정착했다. 이들은 우르퀘쉬라는 왕국을 세우고 잘 나가는 듯 했지만 BC 2000년대 초반 바빌로니아 제국의 힘이 팽창하면서 그 속국으로 편입된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바빌로니아 역시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불꽃처럼 일어났던 히타이트에 망하고 만다. 그게 BC 1531. 후리아인들은 다시 미탄니라는 왕국을 세우지만 또 히타이트 왕국으로 흡수되는 운명을 맞는다.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뒤 BC 6세기부터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BC 333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에 들어간다. BC 303년 알렉산드로스의 휘하 장군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는 이곳 동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마케도니아 퇴역병들을 정착시킨다. 낯선 땅에서 살게 된 그들은 이 곳을 자신들의 고향인 마케도니아의 수도 이름을 따서 에데사라고 부르게 된다. 이 에데사라는 이름을 잘 기억해 두자.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에데사는 BC 63년 로마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다. 그 뒤 로마의 중요한 요충지 중 하나로 성장하는 것은 물론 초기 기독교 교회도 발달하게 된다.

 

샨르우르파 거리.

낯선 땅의 역사를 편년체로 늘어놓는다고 머리에 쏙쏙 들어올 리가 있나. 이왕 그리스도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람 이야기나 하나 하고 넘어가자. 통치자들 중에 세계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굴까. 바로 샨르우르파에 있었던 에데사 왕국의 아브가루스 왕이다. 아브가루스 왕은 끔찍한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예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예수에게 편지를 썼다. 병을 낫게 해주소서. 예수는 답장을 한다. 내가 요즘 바빠서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제자들 가운데 한명을 보내겠소. 예수의 보내진 70중 한 명인 타데우스(다대오)가 에데사 왕국의 궁전에 들어서는 순간 왕은 그의 얼굴에서 놀라운 환상을 보고 엎드려 절을 한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환상이었다. 우리 왕이 죽을 병에 시달리더니 맛이 좀 간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시선이 문제가 아니다. 왕이 묻고 타데우스가 대답한다.

당신이 예수께서 보내겠다고 약속한 제자입니까?”

왕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을 진심으로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온 것입니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왕이 예수와 성부를 믿는다고 고백하자 타데우스는 왕에게 손을 얹었다. 병은 순식간에 나았다. 타테우스는 그곳에 머물면서 왕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복음을 전했다. 아브가루스 왕은 성자로 추앙되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511일을 그의 축일로 삼고 있다.

 

숙소에서 바라본 샨르우르파.

에데사는 로마를 거쳐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된다. 609년에는 페르시아에 정복당하지만 622년에 되찾는다. 하지만 638, 페르시아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이슬람군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1087년에는 셀주크투르크 제국에 편입된다. 이 에데사가 역사, 특히 유럽사에 이름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계기가 또 한 번 있었는데 바로 십자군 원정이었다. 1차 원정 때 참가한 젊은 지도자 보두앵 백작은 에데사를 점령하고 왕국을 세웠다. 그는 12년 동안 이 왕국을 통치 한 뒤, 예루살렘 왕국의 성묘 수호자였던 형 고드프루아가 사망하자 그곳 왕으로 옮겨간다. 그 뒤 에데사 왕국은 침체일로에 놓이게 된다. 결국은 11441224일 이슬람의 강자 젠기(장기)의 대대적 공세에 의해 무릎을 꿇고 만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스러운 크리스마스이브, 이 왕국에 끔찍한 불행이 닥친다. 남자들은 모두 학살당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서방세계는 죽 솥처럼 들끓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게 아니냐는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에데사 왕국이 망한 데에는 그럴 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십자군 원정사를 읽을 때마다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있다. 1차 십자군들이 어떻게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었을까. 십자군은 나라에서 보내는 군인이 아니라 개인들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병보충이 될 리 없었다. 싸우다 죽고 부상당해 죽고 늙어서 죽으니 병력은 갈수록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네 개의 나라를 세웠다. 물론 이슬람 세력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자신들이 무단으로 점령한 곳이라는 사실을 잊은 지 오래인 서방세계. 성스러운 도시 에데사를 탈환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2차 십자군이 출발하지만 땅 한 뼘 찾지 못하고 궤멸된다. 셀주크투르크 이후 에데사는 몽골, 티무르, 이집트의 맘룩 조 등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으로 치면 엄청나게 드센 팔자다. 1517년에 오스만투르크 땅이 된 뒤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1637년에는 지명이 에데사에서 우르파로 바뀌었는데, 그 근원은 이 지역을 거쳐 간 왕국 중의 하나인 오로아 또는 오흐하에서 온 것이다. 우르파가 오스만투르크가 아닌 다른 나라 땅이 되었던 적이 또 한 번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끝난 뒤. 독일편에 가담했던 오스만투르크가 패전국이 되면서 처음에는 영국군이 그 뒤에는 프랑스군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이슬람 민병대는 이곳을 시리아 영토로 포함시키려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끈질기게 저항했다. 1920411일에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1924년 이 지역은 새로 들어선 터키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샨르우르파라는 지금의 이름은 1984년 얻게 됐다. 샨르는 영광스러운이란 뜻으로 터키 혁명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도시들에게만 허용되는 명칭이다. 우르파 지역 주민들은 이 이름을 얻기 위해 10년 이상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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