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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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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25 [사라져가는 것들 46] 썰매18
2008. 2. 25. 16:1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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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병구가 낮지만 날카로운 소리로 아이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순간,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멈춰버린다. 용득이의 코 훌쩍거리는 소리가 폭포소리만큼 크게 들린다. 병구의 지휘에 따라 개구멍을 통과한 아이들이 고양이처럼 조심조심 앞으로 나간다. 내내 뒤를 따르던, 깎아 내버린 손톱 같은 초승달이 구름 속으로 숨는다. 코앞의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위가 캄캄해진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제집 안방처럼 익숙한 길이다. 병구가 날다람쥐처럼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가 맨 마지막 교사(校舍) 뒤로 빨려들듯 사라진다. 숙직실과 가장 먼, 5~6학년 교실 있는 곳이다. 그 뒤를 네 명의 아이들이 꺼병이(꿩새끼)들처럼 따라가 어둠 속에 몸을 감춘다. 병구는 잠깐 숨을 돌리고 나더니 유리창 떼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낮에 걸쇠를 풀어둔 창은 별 저항 없이 창틀에서 분리된다.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아이 둘은 병구를 돕고 다른 두 명은 흩어져 망을 본다. 병구는 유리창을 내려놓은 뒤 익숙한 솜씨로 레일 밑에 드라이버를 찔러 넣는다. 병구가 손에 힘을 주면서 레일과 창틀 사이가 점점 벌어진다. 잠시 뒤 긴 레일 하나가 뽑혀 올라온다.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때, 웬 놈들이냐?!!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어둠을 찢는다. 이어 둔탁한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플래시 불빛이 아이들의 얼굴을 핥으며 지나간다. 후닥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한다. 구름 속에 숨었던 달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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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모의 끝에 실행됐던 ‘레일탈취’ 작전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아이들은 겨울만 되면 학교 유리창 밑에 깔린 가이드레일에 군침을 흘렸다. 썰매의 날로 쓰기에는 그만한 게 없기 때문이었다. 썰매 날은 두꺼운 철사를 가장 많이 사용했는데, 물자가 귀한 시골에서 쓸 만한 철사를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헌 스케이트 날로 썰매를 만드는 아이도 있었지만, 그야 말로 언감생심 바라기 힘든 ‘귀물(貴物)’이었다. ‘바께쓰’라 부르는 함석양동이 아래의 철제 링을 빼서 곧게 편 다음 썰매다리에 박아 넣으면 최고의 날이 되기도 했다, 스피드를 내는 데는 그만이었기 때문에 그걸 가진 아이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어디라고 양동이 테두리를 함부로 빼겠는가. 욕심에 눈이 멀어 부모님 몰래 그 짓을 하다가 속옷 바람에 쫓겨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양동이를 버릴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보지만, 양동이가 못 쓰게 될 때면 철제 링 역시 녹슬고 삭아서 쓸 수 없게 된 뒤였다. 그런 형편이니 아이들은 너나없이 ‘철사병’에 걸려서 돌아다녔다. 결국 학교 유리창이 수난을 당하기 일쑤였다. 레일도둑이 극성을 부릴 무렵이 되면 선생님들도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철사를 구한 뒤에도 썰매 하나가 완성되기에는 난관이 많았다. 썰매 다리용 각목과 깔판으로 쓸 판자 역시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리는 아이들 팔뚝 굵기 만한 통나무를 쓰기도 했고, 깔판 역시 가는 통나무를 촘촘히 박아서 만드는 아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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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 만들기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과정은 비교적 간단했다. 다리에 철사를 고정시키고 그 다리 위에 판자를 대고 못질하면 기본은 끝이었다. 철사는 구부려서 다리의 앞에 박거나 못을 여러 개 박아 고정시켰다.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도 썰매를 겨우내 타다보면 철사가 비어져 나오기 일쑤였다. 모양이나 크기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졌다. 썰매 앞에 나무를 덧대거나 장식을 하기도 했다. 작은 아이들은 어른들 손을 빌렸는데, ‘양반자세’로 앉아서 탈 수 있도록 넓게 만드는 게 보통이었다. 대개 초등학교 3~4학년 이상이 되면 스스로 썰매를 만들기 시작한다. 고학년에 올라갈수록 간신히 발을 올릴 만큼 작아졌다. 작을수록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참 썰매꾼’들은 외발썰매를 만들어 타기도 했다. 외발썰매는, 말 그대로 다리를 양쪽으로 두 개 대는 게 아니라 가운데 한 곳에만 만들었다. 균형 감각이 뛰어나지 않으면 올라설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얼음에 닿는 면적이 적은만큼 저항이 적어져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썰매를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스키의 스틱이라 할 수 있는 송곳이었다. 송곳은 가을에 가늘고 곧게 뻗은 소나무를 다듬어 잘 말려두었다가 썼다. 긴 대못의 머리를 두드려 나무에 거꾸로 박고 T자 모양으로 손잡이를 만들었다. 작은 아이들은 짧은 송곳을, 큰 아이들은 긴 송곳을 썼다. 송곳이 길면 썰매를 서서 타야하지만 그만큼 힘을 받기 때문에 스피드를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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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얼음판에서 살다시피 했다. 겨울에는 아이들이 도울 집안일도 별로 없기 때문에 온종일 나가놀아도 어른들은 별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공부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놀았다. 방학 내내 놀다가 개학을 앞두고 ‘방학책(탐구생활)’이나 벼락치기로 메워가지고 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썰매는 강이나 내 혹은 마을 앞 둠벙에서 타기도 했지만, 대개 논에 물을 대어 썰매장을 만들었다. 겨울 초입에 동네에서 가장 큰 논에 물을 적당히 가둬놓으면 최고의 썰매장이 되었다. 자신의 논이 아이들 놀이터가 돼도 뭐라는 논주인은 없었다. 아이들은 아침밥을 먹으면 썰매를 송곳에 꿰어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요즘처럼 방한이 잘되는 옷은 구경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찬바람이 여린 가슴을 파고들고 볼은 빨갛게 얼기 일쑤였다. 그래도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날마다 그렇게 신나게 타건만 얼음판에 썰매를 올려놓고 송곳을 불끈 쥘 때마다 가슴은 두근거렸다. 아이들은 세상 끝까지라도 갈듯 씽씽 달렸다. 논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누가 먼저 가나, 혹은 몇 바퀴를 누가 먼저 도나 경주도 했다. 욕심이 앞서서 나동그라지기도 하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지치면 얼음판 한쪽에서 팽이를 치기도 하고 논둑에 올라 연을 난리기도 했다. 그렇게 놀다보면 금세 점심때가 되었다. 밥을 먹으러 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집에 가봐야 먹을 게 없으니 내처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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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닥불에 고구마나 가래떡을 구워먹는 재미도 남달랐다.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집에서 몰래 가져온 고구마를 묻어놓으면 조금 뒤 매혹적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호호 불며 껍질을 벗기다 보면 손이니 얼굴이니 온통 깜둥이가 되었지만 노랗게 잘 익은 속살 한입 메어 물면 꿀맛이 따로 없었다. 날이 따뜻할 때는 가끔 얼음이 꺼지기도 했다. 그러면 양말이나 옷을 흠뻑 적신 아이들이 모닥불가로 모여 들었다. 말린다고 널어둔 양말을 불길이 날름 삼키기도 했다. 나일론 소재의 점퍼에 불티가 튀어 숭숭 구멍이 뚫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아이는 그날 저녁에 경을 칠 수밖에 없었다. 모자나 장갑도 없이 놀다보면 손발에 얼음이 박히거나 살갗이 툭툭 갈라졌지만, 아이들은 얼음판을 떠날 줄 몰랐다. 겨우내 그렇게 놀다 새 학기가 되어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은 냇가의 미루나무만큼 훌쩍 커있었다. 지금은 어딜 가도 썰매 타는 아이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시골에 아이들도 드물거니와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아이들 역시 학원 가랴 공부 하랴 바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도 TV는 끊임없이 채널돌리기를 강요하고 컴퓨터 속의 게임은 모든 걸 잊을 만큼 자극적이다. 그러니 찬바람 씽씽 부는 들판에 나가 고생을 사서할 아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산골마을을 지나다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거나 팽이 치는 아이들을 만나면 끌어안고 싶을 만큼 반갑다. 부모 손잡고 가서 타는 스키나 눈썰매가 겨울놀이의 전부인 줄 아는 아이들에게, 아빠나 삼촌이 들려주는 썰매 이야기는 먼 옛날의 전설만큼이나 아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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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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