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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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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21 [사라져가는 것들 54] 떠돌이약장수8
2008. 4. 21. 16:28 사라져가는 것들
자아~ 자아~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녀. 기회는 딱 한 번. 저기 가는 아저씨 얼른 와서 깡통 깔고 앉어. 자, 거기 아줌마는 업은 애 깔고… 아, 그건 아니고. 아무거나 깔고 앉어. 자, 이것이 무엇이냐. 안 사도 뭐라고 안하니까 끝까지 들어나 봐.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만병통치약 신통산이여. 그동안 우리 회사 약 많이 팔아줘서 고맙다고, 이참에 시골양반들도 구경이나 한번 해보시라고, 저 서울 구로동에 자리 잡고 있는 본사에서 직접 선전을 나온 것이여. 자, 그럼 이 약이 얼마나 신통방통하길래 신통산이냐. 논밭에 나가 삽질 몇 번만해도 팔 다리 허리 아프다고 아구구~ 소리가 절로 나오시는 분. 잠만 들면 식은땀이 오뉴월 장마처럼 쏟아져 요가 한강이 되는 분. 맹물만 먹어도 명치끝에 걸려 끅끅거리다가 소다 한 숟갈씩 퍼 자시는 분. 이제부터 걱정 꽉 붙들어 매. 그것뿐이냐. 그것뿐이면 오지도 않았어. 진짜는 지금부터여. 마누라가 어쩌다 목간이라도 할라치면 냅다 도망치고 싶은 분. 이거 한통 사다가 잡숴봐. 며칠만 지나면 초저녁부터 불 끄자고 난리가 날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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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목청 높여 약을 파는 사람은 3류 떠돌이약장수가 틀림없다. 떠돌이약장수도 등급이 있었다. 모두 ‘뱀장수 스타일’로 목청을 높여 약을 판 건 아니었다. 현란한 마술을 앞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갖 악기와 무희까지 동원해 쇼를 하거나 차력을 해서 사람을 모으기도 했다. 그도 저도 아니면 최소한 털 빠진 원숭이라도 내세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았다. 약을 팔기 위해서는 믿음직하게 보여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격식(?)있게 홍보를 했다. 하지만 마술도 할 줄 모르고 노래 할 마누라도 없고 차력은 다칠까봐 엄두도 못 내고 원숭이 살 돈마저 노름판에서 날려버린 약장수야, 유일한 재산인 몸뚱이를 밑천 삼아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밖에. 그런 ‘나홀로약장수’는 오로지 믿을 게 입심밖에 없었다. 한도 끝도 없이 사설을 엮어내던 그들의 내공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대단했다. 어쩌면 요즘의 연기자나 코미디언처럼, 나름대로 그 시대를 울리고 웃기던 예인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구경거리 별로 없는 시골사람들은 그들의 재담에 모처럼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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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에 한번씩 서는 장날이면 양말장수도 어물전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누가 뭐래도 떠돌이약장수가 빠지면 새알심 빠진 팥죽처럼 허전하기 마련이었다. 장이라는 게 절간처럼 조용하면 재미가 있을 턱이 없다. 장날이면 떠돌이약장수들은 한쪽에 전을 펴고 현란한 솜씨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쇼나 차력을 하는 약장수는 꽤 인기가 좋아서 서커스에 버금갈 만큼 질펀한 판을 벌이기도 했다. 파는 약은 다양했다. 고약이나 무좀약, 위장약, 두통약, 모든 병이 싹 가신다는 만병통치약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 중에는 정말 병을 낫게 하는 약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그런 재료로 조악하게 만든 약들이었다. 만병통치약이라는 게 있을 턱도 없으려니와, 있다고 한다면 장마당을 전전할 까닭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약은 쏠쏠하게 팔렸다. 나들이 삼아 나온 장이니 시간도 남고 심심도 하던 차에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약장수 앞에 앉아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홀딱 빠져들게 된다. 화려한 언변에 노골노골 녹아서 고추 두어 근 판돈을 몽땅 주고 약을 사들고 갔다가 아무런 효험도 못보고 땅을 치는 일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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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거센 바람에 떠돌이약장수 역시 사라져갔다. 요즘은 5일장을 뒤지고 다녀도 떠돌이약장수와 부딪힐 일이 거의 없다. 장터에서 약을 살만큼 어수룩한 시절도 아니거니와 시골에도 의료혜택이 전보다 나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떠돌이약장수의 맥이 완전히 끊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연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5일장이 아니라 서울 한복판에서 그 시절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한 공원 앞을 지나다 길에서 그들을 만났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기에 들여다보니 한 사람이 담 앞에 앉아 독성을 제거해준다는 뿌리열매를 팔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또 한 사람이 약재를 늘어놓고, 그 약재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약을 팔고 있었다. 펼쳐놓은 책에 ‘발기부전’ 같은 글자가 쓰여 있는 걸 보니 무슨 용도의 약인지 짐작할 만 했다. 두 사람 모두 마이크를 목에 걸고 자신이 파는 것이 얼마나 좋은 약인지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옛날처럼 익살과 재담은 없었지만 그 시절 떠돌이약장수와 스타일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주로 노인들이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만난 약장수팀은 과거 ‘규모 있는’ 약장수팀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공터에 그럴듯한 차력도구도 차려놓았고, ‘품격 있게’ 생긴 한 사람이 승려차림을 한 채 약을 홍보하고 있었다. 둥글게 모여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다른 두 곳에 비해 꽤 많았다. 구경꾼은 역시 노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중년의 사내들, 아주머니,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어디어디에 무슨무슨 절의 불사할 돈을 모으기 위해 특별히 약을 팔고 있다는 것이었다. 승려 옷을 입은 사람의 구경꾼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그들이 정말 좋은 약을 파는 것인지, 떠돌이약장수들처럼 ‘적당히’ 조제한 약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사라져가는 것을 찾는데 목말라 있는 내게는 반가운 장면임에 틀림없었다. 끝내 약을 사지 않는 ‘불량 관객’이었지만, 덕분에 모처럼 과거의 풍경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떠돌이약장수. 비록 엉터리 약으로 가난한 촌부들의 푼돈을 탐내기도 했지만, 무작정 돌을 던질 수만은 없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그 남루한 삶 역시 우리네 자화상 중 하나였을 테니까.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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