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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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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욀뤼데니즈 해변의 패러글라이딩 착륙장. 모래와 잔디밭이라 안전하다.


그녀를 만나다

바바산에서 내려와 헥토르 사무실에 도착하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그녀가 있다. 누구? 헥토르 에이전시에 일한다는 한국인 아가씨.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가출한 여동생을 타향에서 우연히 만난 듯 반갑다. 하지만 그녀는 7년 만에 만나는 오라비나 지을 법한 감동적인 표정을 보고서도 무덤덤하기만 하다. 하도 한국인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이곳이 서울인지 머나먼 이국 땅인지 헷갈리는 것 같다. ‘아니, 또 저런 감동 과잉형 인간이야?’ 하는 표정까지 살짝 내비친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갈 나도 아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간다. 그녀가 터키, 그중에서도 페티예에 정착한 건 3년 전. 여행을 왔다가 눌러 앉았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 있으면 소개하겠지만 코디네이터 엄상욱 씨도 그렇게 무작정 눌러앉은 케이스다. 그럼 나도 이참에…? 아무튼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왔다가 패러글라이딩 회사의 직원이 된 셈이다. 엄청난 용기다. 고국에는 가족도 친구들도 있었을 텐데. 낯선 땅에서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있는 건 용기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헥토르 입장으로 보면 낮잠을 자다가 홍시 하나가 벌린 입으로 떨어진 셈이었을 것이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 그녀가 큰 도움이 됐을 건 안 봐도 비디오고.

다시 한번 미스터 헥토르를 소개합니다!! 그는 끝내 패러글라이딩 값을 받지 않았다.

하필 이 동네에 정착한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대답이 간단하다. “여기가 가장 따뜻해서요” 삶이 무척 추웠던 모양이다. 터키말은 전혀 몰랐는데 살면서부터 배웠다고 한다. 그녀 역시 헥토르가 한국인들을 특별히 좋아한다고 강조한다. 자기 수수료를 포기하고 한국 청년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한단다. 그렇구나. 최소한 동포 말은 믿어야지.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손을 흔들며 떠난 딸이 느닷없이 낯선 땅, 그것도 시골 한구석에 틀어박혔을 때 부모 심정은 어땠을까. 의외로 선선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시더니, 지금은 친구 딸들은 다 시집을 가는데 넌 뭐하느냐고 하세요. 그러다가도, 거기에 자리나 잘 잡아놓으라고….” 그녀의 부모님 속내도 좀 복잡한 게 틀림없다. 이곳에 계속 있을 거냐는 질문에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단답형으로 대답한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 한마디 덧붙인다. “여기가 속 편해요” 그렇지 뭐, 속 편하면 곳이 고향인 게지. 살던 땅으로 돌아간다고 누가 정착자금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아까 헥토르에게 미처 확인하지 못한 몇 가지를 물어본다. 욀뤼데니즈에는 패러글라이딩 사업을 하는 업체가 9개 있다고 한다. 5개는 고정적으로 성업 중이고 나머지 4개는 ‘생겼다 망했다 이름을 바꿔서 다시 시작했다’의 반복이란다.

욀뤼데니즈 해변.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잔잔하다.

가까이 가보면 모래가 아니라 이런 작은 돌들이 깔려있다.


해변을 거닐다


바바산에 길을 닦고 패러글라이딩의 기반을 마련한 건 관공서였다고 한다. 물론 입장료를 받고 관광수입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한국인마다 신기하다는 듯 반복하는 질문에 약간 짜증나는 기색도 없진 않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사진을 찍자고 하니 극구사양이다. 조금 조르면 오케이 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손사래를 친다. 실력부족인가? 터키사람들은 카메라만 들이대면 활짝 웃어주는데 말이 통하는 한국인의 사진을 찍는데 실패하다니. 얼굴을 내밀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있겠지. 그거야말로 존중받아야할 프라이버시. 몰래 한 장 찍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깨끗하게 포기한다. 헥토르는 다큐팀의 패러글라이딩 비용을 끝내 안 받는다. 인터뷰에 응해주고 여기저기 안내도 하고 직원들 일당도 나갔을 텐데. 고마운 일이다. 설령 고도의 장삿속이 숨어 있다고 해도 고마운 걸 ‘속 보인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헥토르의 사업이 번창해서 한국 청년들에게 좀 더 많이 베풀기를 기원하면서 끝내 이름을 묻지 못한 그녀와도 작별을 한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욀뤼데니즈 해변을 탐색해볼 차례. 얼마나 아름다우면 지중해 최고의 해변이라는 찬사가 붙어 있을까. 헌데 여기도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 에구, 어디 가나 그놈의 돈.

해변에 세워둔 구조물 사이로 지나가는 배는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산, 바다, 숨은 배...

욀뤼데니즈는 ‘죽음의 바다’ ‘고요한 바다’ 라는 뜻이다. 물에 들어갔다 하면 죽어서 나온다는 잔혹동화 같은 얘기는 아니고, 죽은 듯 잔잔한 바다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말 잔잔하긴 하다. ‘X물에도 파도가 친다’는 말이 있듯이, 어지간한 호수도 기본적인 물결이 있는 법인데. 파랑보다는 초록에 가까운 바다는 한없이 투명해서 속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2km 정도 길게 뻗은 백사장에는 아직도 피서객들이 많다. 눕고 엎드리고 뒤집고, 오븐 속의 생선처럼 몸을 태우기에 여념이 없다. 물이 깊지 않아서인지 노인들도 많다. 그나저나 이렇게 살만 태우고 놀면 소는 누가 키우나. 일중독자 아니랄까봐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백사장은 모래가 아닌 작은 돌들로 이뤄졌다. 엄격한 의미에서 백사장이 아니라 백석장(白石場)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고운 모래가 깔린 해수욕장이 생각난다. 비가 많았던 지난여름엔 얼마나 썰렁했던지. 지금은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기 어렵겠지. 백사장을 지나 블루 라군(blue lagoon) 쪽으로 향한다. 라군은 모래언덕 등에 의해 바다와 격리된 호소(湖沼)를 말한다. 일반 호수와 다른 건 지하에서 해수가 스며들거나 바다와 연결되는 수로가 있어 염분농도가 높다. 일종의 바다호수인 셈이다. 이쪽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바다호수' 블루 라군.

해먹을 흔들어 주는 아빠. 잠이 들어도 끈은 놓지 않는다. 그게 '아비'다.

 

블루 라군을 아십니까

블루 라군 하니 ‘푸른 산호초’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던 영화 ‘블루 라군’이 생각난다. 브룩 쉴즈(Brooke Shields)의 백치미에 가까운 청순한 아름다움은 얼마나 많은 청춘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지. 또 영화 속의 섬과 바다는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나저나 브룩 쉴즈는 지금 어떻게 늙어가고 있을까. 1965년생이니 40대 중반이 넘었고, 배우로서는 환갑이 지난 나인데….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고 있다. 이곳 역시 영화 속의 풍경만큼이나 아름답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안온함을 더해준다. 해변을 벗어나 느린 걸음으로 홀로 걷다가 나무 그늘로 들어가 잠시 몸을 기댄다. 저만치 해먹에 아이를 재워놓고 흔들어주는 젊은 아빠가 보인다. 아빠는 아이가 깰까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조그만 소음에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정지된 풍경에 그 작은 그림 하나를 더하니 세상이 느닷없이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찬다. 욀뤼데니즈를 떠나 돌아오는 길에 조선소가 눈에 띄어 들러 보기로 한다. 숙박하고 있는 호텔과 멀지 않은 곳이다. 말이 조선소지 노천에서 목선을 만드는 곳이다. 목선이지만 건조 중인 배는 제법 커서 30m는 충분히 될 것 같다. 골조를 세우고 송판을 배의 모양에 따라 곡선으로 만들어 붙이는 방식이다. 그 큰 배에 단 두 명이 달라붙어서 망치질을 하고 있다. 쯧쯧, 저 배는 언제나 바다로 나가볼까.

이 큰 목선에 두어 명이 올라가 망치질을 하고 있다. 저 배는 언제나 물 구경을 해보나.

터키는 국토의 3면에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도 조선산업 역시 원시적 수준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는 지중해를 품에 안고 천하를 오시했지만,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튀르크족이 이 땅을 정복한 뒤에는 배고 바다고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페티예의 조선소는 이 동네에 모두 모여 있다고 한다. 그래봐야 가내공업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3곳뿐이다. 우리가 들른 곳이 그나마 가장 규모가 크고, 다른 두 곳은 배를 만들기보다는 수리하는 정도다. 부자들은 배를 외국에서 수입해서 쓴다고 한다. 배를 만드는 나무는 주로 아프리카에서 들여온다. 잠시 뒤 쉬는 시간인지 목재를 자르고 켜던 인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는다. 배 위에서 망치질을 하던 사람들도 내려와 합류한다. 예외 없이 차이를 마신다. 앞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터키사람들의 차이 사랑은 유별나다. 차이가 없는 터키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하루의 시작도 끝도 차이와 함께한다. 보통 하루에 10잔 이상, 많이 마시는 사람은 20잔까지 마신단다. 한 시간에 한 잔씩 마신다고 하면, 차를 마시기 위해 네 시간만 자야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직접 끓이기도 하고 주문해서 마시기도 하는데 가격은 비교적 싼 편이다. 그래도 500원씩만 쳐도 하루 20잔 이상을 마시면 살림이 거덜 날 판이다. 그래서인지 여럿이 모인 곳에는 대개 차이를 끓일 수 있는 준비를 해놓았다.

나무를 곡선형태로 만들어 붙이는 형식으로 배를 짓는다.

수리를 위해 대기 중인 배들.


터키인들의 차이 사랑


어느 동네를 가든지 차이를 파는 차이하네(Cayhane)나 차이에비(Cayevi)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도심에서도 야외 찻집인 차이 바흐체시(Cay bahcesi)가 곳곳에 있다. 일터에서도 어김없이 차이를 마시는데, 쉬기 위해 차이를 마시는 게 아니라 차이를 마시기 위해 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터키의 차이는 19세기 후반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서 전해져 왔다고 한다. 차이라는 말은 중국의 차(茶)에서 왔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녹차가 발효되면 우롱차가 되고 거기서 발효가 더 진행되면 차이가 된다. 차이를 더 발효시키면 홍차가 된다. 그래서 차이는 엷은 홍차 맛이 난다. 기호에 따라서 설탕을 적당히 넣어서 마시면 된다. 난데없이 차이 얘기가 길어졌지만 터키를 이야기할 때 차이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한번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차이와 비슷한 것으로 짜이가 있다. 인도나 네팔 등에서 마시는 밀크티를 말한다. 그 동네 발음이 ‘짜이’에 가깝다는 것이지 이것도 ‘차이’가 원음이다. 이름이나 뿌리는 같지만 제조법은 많이 다르다. 냄비나 주전자에 소량의 물로 홍차를 끓여낸 뒤 우유를 부어 장시간 우린다. 이후, 설탕을 넣어 맛내기를 한다. 우유가 들어가는 게 차이와 가장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짜이를 파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차이 한 잔 하실까요. 저 붉은 색의 유혹이란.

조선소 인부들의 휴식시간. 자세히 보면 모두 차이를 들고 있다.

차이를 마시던 인부들이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는 나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시커먼 차이 주전자에서 한잔을 따라준다. 잔은 자신이 마시던 걸 물에 대충 헹군 것이다. 사양을 미덕으로 삼는 한민족의 후예답게 손사래를 몇 번 쳤지만, 인심을 미덕으로 삼는 튀르크족의 후예답게 쉽사리 물러날 자세가 아니다. 터키 말을 알아야 구체적으로 사양이라도 하지. 물론 내가 차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아니, 그 맛에 은근히 반해서 휴게소에서 다른 사람들이 커피를 마실 때도 난 차이를 마시곤 했다. 호텔에서 식사를 할 때도 커피 옆에는 늘 차이 주전자가 놓여있기 마련인데 난 망설임 없이 차이를 선택한다. 사양한 것은 물론 체면 때문이다. 길바닥 체질인 내가 언제 찬밥 더운밥 가렸던가. 못이기는 체 홀짝거리며 한잔을 마셨더니 이 남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얼른 또 한잔을 따라준다. 어라? 이러다가 차이로 배를 채우겠네. 얼른 입에 털어놓고 늙은 노새처럼 헤벌떡 웃으며 잔을 넘긴다. 고마워하는 마음을 알아달라는 뜻이다. 그도 더 이상 권하지는 않는다. 원래 터키인들은 잔이 차면 곧바로 채워주는 것이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 마시고 싶을 때는 나처럼 헤프게 웃지 말고 차 스푼을 찻잔 위에 살짝 올려놓으면 된다.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보지 않는 이유

나뭇잎을 뜯어먹는 개. 저렇게 키우면 사료값 안 들어서 좋겠다.

아무튼 이렇게 타인에 대해 별 경계도 없고 인심도 좋은 게 바로 터키 사람들이다. 낯선 사람일지라도 무언가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게 또 우리나라 사람들의 속성이 아니었던가.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런 나눔의 인심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산업화 현대화 도시화라는 ‘화’자 돌림의 괴물들이 온 국토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아무데나 주저앉는 바람에 톱밥이니 흙이니 묻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서는데 바닥에 사지를 펴고 늘어져 있던 큰 개도 느릿느릿 따라 일어난다. 이 나라의 동물들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천국이 따로 없다. 나를 전송이라도 하려고 일어난 줄 알았더니 커다란 화분에 가서 간식이라도 먹듯, 나뭇잎을 아작아작 뜯어먹는다. 이 동네 개들은 밥 대신 잎을 먹고 사나? 그럼 신선개? 밥값은 따로 안 들어서 좋겠다. 한국에서는 헛소리 하는 사람에게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한다’고 하는데. 신기해서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노인 한 분이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빙 돌린다. 그러면서 "problem"이란다. 머리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아무리 봐도 미친개는 아닌 듯한데…. 에이, 아저씨, 전요… 솔직히 말하면 아저씨가 더 의심스러워요. 호기심 많은 이곳 사람들은 내가 무언가 하고 있으면 와서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거리낌 없이 씨익~ 웃는다.

걸어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 넘어진 배를 보았다. 홀로 넘어진 배는 홀로 일어서지 못한다.

노인과 그런 미소를 주고받는데 마침 근처의 모스크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울려 퍼진다. 전국에는 모두 7만7000여 곳의 모스크가 있기 때문에 어느 궁벽진 곳에 가도 이 소리를 피할 길은 없다. 며칠 듣다보니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한다. 새벽에도 아잔소리 때문에 잠을 깨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아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일손을 멈추고 모스크로 가는 건 아니다. 하긴 하루에 다섯 번 씩 쫓아다니다가는 언제 일을 하나. 배를 만드는 인부들도 자신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아잔소리를 듣는 순간, 믿음 씨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터키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과 같은 층에서 기도하는 게 금지돼 있다고 한다.(전 이슬람권이 그런지는 못 물어봤다) 메카를 향해 절을 할 때, 여자 뒤에 있는 남자들이 ‘나쁜 생각’을 품어 정신이 혼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믿음 씨는 나쁜 생각이라고 표현했지만 엉큼한 생각이라는 말이 더 맞겠지. 이건 남녀차별이야? 여성 보호야? 이렇게 순박하게 생긴 아저씨들도 그런 생각을 하나. 이럭저럭 저녁 시간이 가까워온다. 시내로 보충 촬영을 나가는 다큐팀과 헤어져 지척에 있는 호텔까지 걸어간다. 페티예에서의 마지막 밤은 홀로 고적하게 보내볼 생각이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이왕 읽어주실 거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보드롬 바닷가. 배들이 빽빽하게 정박해 있다.

보드롬 해변과 거리의 카페.

아잔, 그리고 무슬림의 예배

아주 오래된 빵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이다.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와 좁은 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다 보니, 언덕 위에서 보았던 보드롬성 근처의 해변에 닿는다. 이곳은 아직 휴가의 여진으로 들끓고 있다. 벌거벗은 인파가 물고기 떼처럼 거리를 유영한다. 하긴 9월말이라고는 해도 30도를 웃도는 날씨니 바다를 떠나기는 아쉬울 것이다. 부두에는 호화롭게 치장한 요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몸을 부비고 있다. 부자들의 개인요트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세용이다. 요트를 세 내어 인근 바다에 나가 수영도 하고 배에서 만들어주는 즉석 해물 요리로 점심식사를 하는 재미가 근사하단다. 말 그대로 저 바다에 누워평화로운 한낮을 보낼 수 있다는 얘기다. 돈만 있다면. 대부분 유럽인들이 이용한다고 한다. 유럽에 비해서 비교도 안될 만큼 싼 가격에 호화로운 피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보드롬이다. 해안가를 따라 각종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부터 카페, 음식점, 바들이 나란히 서 있다.

1720년에 지은 모스크(이슬람교의 예배당)

해변 탐색은 뒤로 미루고, 일단 빵집이 있다는 바자르(이슬람 특유의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 보통 시장을 이르며 상점이나 공방이 늘어선 골목도 그렇게 부른다)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보드롬성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쇼핑타운이다. 바자르로 들어가기 직전, 광장에서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소리와 마주친다.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어쩌면 불경을 외는 소리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한. 그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거리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 무슬림들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이구나. 그러면 저곳이 이슬람사원인 모스크. 그나마 공부 좀 했다고 바로 눈치를 챈다. 이슬람교도들은 아침에 해 뜨기 전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 정오를 넘긴 낮, 오후, 해가 질 무렵,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도(聖都)인 메카 쪽을 향하여 모두 다섯 번의 기도를 한다. 그 기도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리는 소리가 아잔이다. 물론 새벽에도 아잔은 울린다. 전에는 모스크 한쪽에 높은 미나레트(첨탑)를 세워 담당 무슬림, 즉 무아진이 육성으로 기도시간을 알렸다는데 지금은 모두 확성기를 이용한다.

기도를 하기 전에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다.

이 아잔은 노래에 가까울 정도로, 특유의 리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러 번 들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뜻은 알라는 지극히 크시도다. 우리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맹세하노라. 예배하러 오너라. 구제하러 오너라. 알라는 지극히 크도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느니라라고 한다. 과연 조금 있으니까 무슬림들이 모스크를 향해서 꾸역꾸역 모여든다. 바자르나 인근에서 생업을 하는 사람들이리라. 모스크 입구에는 1720년에 지었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긴 세월에 감탄하고 있는데, 누군가 저 정도면 그리 오래된 모스크는 아니라고 일러준다. 무슬림들을 따라 슬그머니 모스크로 들어가 본다. 일찍 온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가 기도 준비를 하고, 미처 못 들어간 사람들은 마당에 자리를 잡는다. 묵묵히 기도를 준비할 뿐, 누구도 이방인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오른쪽 마당으로 가보니 수도꼭지들이 있고 그 앞에 나란히 의자들이 놓여 있다.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거기서 손발을 씻는다. 젊은이들이 제법 많은데, 그 중엔 곱상하게 생긴 친구도 우락부락한 친구도 있다.

모스크 실내가 차면 자리를 깔고 바깥에서 기도한다.

튀르크족, 즉 지금의 몽골 땅에서 살던 돌궐족이 언제부터 이슬람교를 접했는지는 딱 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다. 아나톨리아로 땅으로 들어오기 훨씬 전인 8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돌궐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아바스왕조(7501258년에 동방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칼리프조)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슬람교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터키 인구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국교는 아니다. 터키공화국을 수립한 아타튀르크가 1928년 헌법을 수정하면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히잡을 쓰는 등 종교적 특성을 나타내는 행위는 금지된다. 이를 세속주의라고 하는데 종종 저항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세속화와 서구화에 대한 반대하고 이슬람으로 복귀하자고 주창하는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도 했다. 세속화의 영향으로 터키에서 교리의 적용은 다른 이슬람국가에 비해 그리 엄격하지 않다. 음주도 비교적 자유롭다. 일부 터키사람은 농담 삼아 스스로를 사이비 이슬람교도라고 칭하기도 한다.

바자르로 들어가는 길.


바자르에서 만난 사람들

기도를 더 이상 방해하면 안 되지. 모스크에서 나와 바자르로 들어간다. 햇볕을 막기 위해 친 하얀 차양이나 나무 넝쿨이 멋진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관광객들은 느긋하게 거리를 오가고 갖가지 상품들이 손짓을 한다. 나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길을 걷는다. 동양인이 신기해서일까? 장사를 하는 사람마다 “Where are you from”을 아끼지 않는다. 하긴 보드롬을 돌아다니는 내내 동양인들을 본 적이 없다. 대답을 안 하면 물건 파는 건 뒷전이고 따라오면서까지 국적을 캐묻는다. 재팬? 차이나? 그러다 코리아라는 대답이 나오면 곧바로 “My brother!!!“가 튀어나온다. 17년 전에 헤어진 형이라도 상봉한 듯 호들갑스럽다. 물론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다. ”네가 코리언이고 내 형제니까 특별히 ‘Good price’로 줄 테니 물건 하나 보고 가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는다. 그쯤이면 궁금해진다. 정말 한국인이 반가운 거야, 아니면 누구에게나 하는 장삿속이야. 설령 장삿속이라고 해도 불쾌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귀찮게 물고 늘어지지도 않거니와, 물건을 사든 안 사든 낄낄거리며 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점을 치는 아저씨도 있고 달랑 저울 하나 밑천 삼아 몸무게를 재주고 돈을 받는 아이도 있다. 자유와 활기가 넘치는 거리다.

바자르를 오가는 관광객들.

오래된 빵집은 골목 중간쯤에 있다. 하지만 그 앞에 서는 순간 실망감이 앞선다. 화려한 겉모습이 여느 현대식 빵집과 다르지 않다. 종업원들도 세련된 모습이다. 허름한 가게에서 늙어 꼬부라진 영감님이 빵을 굽고 있을 거라는 상상이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들어가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마침 내가 서 있던 집이 음식점 앞이었나 보다. 돌아보니 음식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입에 환한 웃음을 베어 물고, 얼음을 가득 채운 오픈형 냉장고를 가르친다. 얼음 속에는 문어나 각종 생선이 터키 맥주 에페스와 함께 묻혀 있다. 그걸 먹고 가라는 것이다. 얼음 속에서 문어를 꺼내 싱싱하다고 흔들어 보이기까지 한다. 한 냉장고에 생선과 맥주를 동거시키다니 참 특이하다. 먹을 생각이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 아저씨도 그냥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카메라를 보더니, 식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굉장한 풍경이 있다면서 “Take photo”를 외친다. 떠밀리다시피 들어가 보니 식당과 바다가 맞닿아 있고 차양 아래 관광객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며 한낮을 즐기고 있다. 유유히 떠다니는 배들, 저만치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보드롬성. 자랑할 만도 하다.

우연히 들어가게 된 음식점. 맥주와 생선이 한공간에...

맥주와 음료를 즐기는 관광객들. 저만치 보드롬성이 보인다.

135년을 이어온 빵집을 가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눈치 없는 종업원이 다가와 ‘One beer’를 외친다. 콜라 한 잔이라도 팔겠다는 결의가 얼굴에 가득하다. 사진 찍으러 들어온 거라고, 사양하면서 나오는데 굳이 따라 나오면서 말을 건다. 당연히 “Where are you from”이다. 코리아라는 대답에 반색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혹시 터키 초등학교 교과서에 동양인을 보면 그렇게 물어야 한다고 나와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진다. 이 친구 끝내 따라 나오면서, 자기네 사장이 태국의 방콕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고 자랑한다. 코리아와 방콕이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의 이웃인 줄 아나보다. 결국 나를 사장에게 데려가더니, 이 사람이 한국에서 왔다고 입에 거품을 문다. 사장 역시 반색을 하면서 자신이 애인과 함께 방콕을 세 번이나 다녀온 사람이라는 걸 거듭 강조한다. 그래, 좋겠다. 네 번 다녀오면 확성기 들고 돌아다니겠다. 별로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수다를 떨다 작별하고 나오는데, 그제야 빵집 간판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SINCE 1876’. 가만 계산해보니 135년이다. 참 오래도 됐다. 10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빵장사 하나로 버텼다니, 뭔가 들을 만한 얘기가 있을 것 같다.

135년 된 빵집 내부. 너무 현대식이라 세월을 실감할 수 없다.

빵집 간판

빵집 주인은 친절이 뼛속까지 배어있다. 장사에 방해가 될 법도 한데 다큐팀이 영상장비를 들고 들쑤시고 다녀도 마냥 웃는 얼굴이다. 어쩌면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터키인의 주식은 빵이다. 쌀농사도 조금 짓기도 하지만 소비가 많지는 않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빵을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에는 대부분 기계가 만든 빵을 사다 먹는다. 이 빵집도 전에는 식사용 빵만 만들다가 요즘은 케이크나 다이어트용 등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판다고 한다. 그 말을 뒷받침 하듯 수백 가지의 빵들이 진열돼 있다. 그런데 운영방침이 좀 독특하다. 관광객이 몰려오는 여름을 중심으로 6개월 동안은 24

빵집 주인. 전형적 낙천주의자다.

시간 장사를 하고 겨울시즌에는 문을 닫고 논단다
. 그거 참 괜찮다. 아예 눌러앉아 취직을 해버려? 주인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빵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일종의 가족기업이다. 지금 함께 일하는 종업원들도 모두 친척이란다. 빵은 공장에서 새벽 3시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손으로 빵을 만들던 시절은 이제 아득한 옛날이 되었다는 걸 그의 말에서 읽는다. 그래도 한 장소에서 135년 동안 대대로 빵을 파는 사람들, 그 또한 장인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랴.

케밥을 만들기 위해 돌려가면서 구운 고기를 자르고 있다.

케밥과 맥주 한 잔의 기쁨

빵집에서 나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다. 뱃가죽이 등으로 달라붙은 지 오래다. 차를 통한 이동이나 식사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니 별 수 없다. 기내식을 제외하면 터키에서 먹는 첫 번째 식사다. 기대가 크니 더욱 배가 고프다. 프랑스와 중국에 이어 터키음식을 세계 3대 음식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터키 대신 인도를 앞세워 4대 음식에 넣기도 한다. 3대면 어떻고 4대면 어떠랴. 맛있다는 얘기겠지. 특히 다양한 종류와,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케밥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야외 음식점에 자리를 잡은 뒤 케밥을 시킨다. 터키에서는 글과 말을 몰라도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찾기 어렵지 않다. 식당 앞 큰 메뉴판에 음식 사진과 가격을 함께 적어놓은 곳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들어가서도 메뉴판을 달라고 해서 맛있어 보이는 걸 가리키면 된다. 음료는 터키의 전통요구르트 아이란(Ayran) 외에도 콜라나 스프라이트, 과일주스 등이 있다. 보통 생맥주도 파는데 당연히 가격은 음료수보다 비싸다. 음식점을 찾는 또 하나의 팁은, 가능하면 화덕이 있는 집으로 가라는 것이다. 다양한 음식을 맛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맛도 어느 정도 보장된다. 화덕은 보통 입구 근처에 있기 마련이다.

터키에서 첫 식사로 먹은 케밥.

불에 구운 요리를 뜻하는 케밥은 그 종류가 셀 수 없이 많아서 일일이 구분하고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 고기를 매달아놓고 돌려가면서 구운 뒤 얇게 잘라서 야채와 함께 빵 사이에 끼워 먹는 되네르(Döner)케밥이다. 국민요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케밥은 길거리 노점에서부터 카페, 식당 등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양도 제법 많아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잘 알려진 대로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송아지고기나 양고기를 재료로 쓴다. 닭고기를 재료로 하는 음식도 제법 많다. 케밥은 음료수와 함께 먹기도 하지만, 앞에 말했듯이 보통 아이란을 곁들인다. 터키의 요구르트는 걸쭉하기 때문에 보통은 떠서 먹는데, 아이란은 여기에 시원한 물을 타서 묽게 만든 것이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해물 요리도 먹을 수 있다. 나는 단 한 번 먹어봤는데 가격은 그리 싼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회는 없었다. 또 유명한 터키음식 중의 하나가 이스탄불 갈라타다리 부근에서 파는 고등어샌드위치. 일정 마지막에 이스탄불에 갔지만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이것 역시 먹어보지 못했다. 다음엔 꼭 먹어보리라 다짐하며 돌아섰던 아픈 기억이 있다.

터키식 피자인 피데를 만드는 청년.

다 만든 피데를 화덕에 넣고 있다.

조금 뒤 나온, 되네르케밥은 역시 맛있다. 허겁지겁 먹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남기는 사람도 있다. 막입인 나만 맛있는 걸까? 남들이 콜라나 생수를 시킬 때 눈총을 무릅쓰고 맥주를 시킨다. 흘린 땀이 얼만데. 몇 시간 전부터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했다. 가이드와 몇몇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점심 먹으며 술 마시는 사람도 있네? 혹은, 기자라는 족속들은 역시그런 눈초리. 아무렴 어떠랴. 이 황홀한 순간을 포기할 수 없는 걸. 잠시 뒤 화덕 쪽에서 수런수런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청년이 나와서 터키식 피자인 피데 만드는 시범을 보인다. 식사를 해 준 이방인들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피데쇼를 보여주는 것 같다. 밀가루를 두드리는 장단이 아주 경쾌하다. 미안하게도 밀가루 반죽을 허공에 던져서 넓히는 장면은 한국에서도 여러 번 봤다. 하지만 신기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쳐다봐준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청년의 동작에 신명이 붙고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른 아침 샘물처럼 맑은 얼굴이다. 하루 동안 만난 터키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욕심이나 원망보다는 긍정과 희망이 가득 찬 얼굴들. 거기서 힘을 얻는다. ! 일어나자. 또 걸어야지. 어쩌자고 하늘은 저렇게 푸르단 말이냐.

 

추천과 댓글란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님은 참 아름다운 분입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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