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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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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테페 발굴 현장.

아슬란테페 유적지 입구의 석상.

아슬란테페 유적을 찾아간다. 말라티아가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곳이다. 유적은 말라티아에서 6~7km 떨어진 오르두주라는 동네에 있다. 민가가 없어서 그런지 주변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중국 지안(集安)으로 광개토대왕릉을 보러갔을 때의 그 썰렁하던 풍경이 생각난다. 시간은 잠시만 한눈을 팔면 무엇이든 지우려 든다. 아슬란테페를 올려다보면 엄청나게 큰 능처럼 보인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비잔티움 시대에는 공동묘지로 사용했다. 그 이전에는 거대한 사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BC4000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이다. 이 유적지가 발견된 것은 1930년대였는데 1961년부터 발굴에 착수해서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초기에 참여했던 사람은 늙어서 세상을 떠났겠지? 하지만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부분이 더 많다고 한다. 발굴 속도가 늦은 것도 있지만 그만큼 거대한 유적이란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 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BC3000년부터 BC1000년까지 형성된 7개 시대의 흔적이 떡시루처럼 층층이 쌓여있다는 것. 실제로 지금까지 발굴해놓은 8m 높이의 흙벽을 보면 시대별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유프라테스 강이 그리 멀지 않다. 물이 풍부하니 농사를 짓기 좋았을 것이다. 농경이 일반화됐다는 증거도 있다. 불에 그슬린 자국이 확연하게 남아있는데, 화재 때문이 아니고 불을 피워 요리를 한 흔적이다. 농사를 짓고 요리를 하는 고도로 발달된 사회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얘기다.

 

 

신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

가면 쓴 사람을 그린 벽화.

 

이 유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면 쓴 남녀를 그린 벽화. 남녀는 가면을 쓰고 무엇을 했을까. 가장무도회? 수천 년 전의 가장무도회라. 물론 가면을 쓰고 진행하는 제의(祭儀)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무도회라고 설정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 몰래 땡땡이 쳐서 흐드러지게 놀아보려고 가면을 쓴 건 아닐까.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뭐. 요즘으로 보면 아버지 몰래 클럽에 놀러가는 젊은 남녀들. 상상이 과도했나? 기록 없는 오래된 것들은 얼마나 많은 상상거리를 제공하는지. 밖으로 나와 언덕을 오르니 시야가 사방으로 확 트여 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 저 골짜기 어디쯤에 논밭을 일궜겠지. 6,000년 전이 엊그제인 듯 시간 감각이 무뎌진다. 흙 언덕에 오르니 사람의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공동묘지였다는 증거다. 삶의 터전이었던 곳 위에 무덤이 들어서고 그 무덤도 잊혀지고 풍화되고. 수천 년 시간이 지금 내 앞에 엎드려 있다. 무덤을 지나 한참 더 걸어가니 저만치 유프라테스 강의 도도한 물결이 보인다. 드디어 인류 문명을 낳고 또 긴 세월 보듬어 키워온 강 앞에 선 것이다. 저 강은 기억하고 있겠지. 이 땅에 묻힌 인간들의 영욕을. 한낮의 태양은 그 영욕을 태워 버릴 듯 뜨겁게 불타고 있다. 출국 전에 누군가 챙겨준 면 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안전한 여행을 빌어준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따뜻한 응원이 등을 민다. 가자. 또 가보자.

 

공동묘지 자리. 뼈들이 드러나 있다.

저 멀리 구름 아래 유프라테스 강이 보인다.

라반사라이(karavan sarai), 즉 대상숙소는 말라티아의 구읍(舊邑)인 바탈가지에 있다. 바탈가지,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마누라의 바가지'를 상상하지는 마시라. 대상숙소 앞에 서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실크로드를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카라반사라이를 찾아 헤맨다. 모든 게 변한 지금 대상들이 실크로드를 오갔다는 유일한 증거가 이 카라반사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흔적조차 지워버린 곳이 대부분이다. 헌데 막상 그 앞에 서니 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건 좀 심하게 현대식이다. 최근에 수리해서 오픈했다는 걸 감안해도 너무 세련됐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68˟76m의 사각형 건물에는 3방향으로 회랑이 있다. 그리고 정문 맞은편에 대상들이 묵던 숙소가 있다. 카라반사라이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따라서 밖에서 보면 마치 작은 성채처럼 생겼다. 문을 닫아버리면 날개가 없는 한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마당은 정원식으로 꾸며져 있는데 한 가운데는 돌이, 양 옆으로는 잔디가 깔려 있다. 이곳에 말이나 낙타를 매어두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17대 술탄 무라트4세 때인 1637, 재상이었던 무스타파 파샤가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370년이 넘은 건물인데 지을 때도 지금의 모습이었을까? 내 괜한 의심증이 도진 것이기를 바라면서 안으로 들어가 본다. 실내도 무척 화려하다. 돌로 된 굵은 기둥과 샹들리에. 어지간한 호텔은 울고 갈 정도로 잘 꾸며 놨다. 한쪽에는 식사를 준비하던 화덕이 있다. 대상들은 여기서 잠을 자고 음식을 해먹었다.

 

카라반사라이 전경.

 

카라반사라이 실내.

아나톨리아는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실크로드를 통한 대상들의 왕래가 잦았다. 실크로드는 몇 가지 루트가 있었지만 동쪽의 끝, 즉 출발지가 중국의 옛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서쪽 끝은 이스탄불이었다. 이 개념을 신라에서 로마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 억지스러워 보인다. 상품이 거기까지 갔다고 해서 실크로드가 연장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바탈가지도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 대상 교역이 크게 활성화 된 건 셀주크 투르크와 룸 셀주크 시대였다. 이 두 제국은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따라서 대상들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 대상들은 9시간에 40km 정도를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40km마다 숙소를 하나씩 세웠다. 우리의 역참처럼 관급(官給) 숙소를 만든 것이다. 숙소 이용료는 3일까지는 무료였다. 방이 없는 경우에는 마당에서도 잤다. 10시에 문들 닫았으며 아침 7시부터 출발했다. 이 숙소에 머무는 동안에는 마음 편하게 먹고 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물품들을 보관하고 지켜주기도 했다. 중간에 도적들에게 물건을 빼앗기게 되면 물건 값만큼 돈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 일종의 보험제도가 시행된 셈이었다. 그러니 교역이 활기를 띨 수밖에. 중국의 비단이 유럽의 귀족들을 환호하게 했는가 하면, 이탈리아 상인들이 가져온 유리병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카라반사라이 조감도.

카라반사라이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들.

 

아나톨리아 자체에서 생산되는 물품도 짭짤하게 팔려나갔다. 이곳에서 기른 양털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았다. 질 좋은 모직물을 뜻하는 앙고라라는 말은 앙카라 지방에서 수출된 염소의 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대상이 오가던 그 시절을 상상해본다. 낙타에 의지해서 수천km(이 길을 직접 걸었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12,000km라고 썼다)를 오갔을 대상들. 오가는 길에 병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 했겠지. 한번 다녀가면 아이들이 훌쩍 자라 있었겠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두고 또 길을 떠나야 하는 운명. 예나 지금이나 산다는 게 참 만만치 않다. 상념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어 있다. 아마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시절처럼 중국에서 대상이라도 온 줄 아는 모양이다. 바탈가지 읍장도 나왔다. 한국말로 된 설명서를 만들어 비치겠다고 요구하지도 않은 약속을 한다. 고마운 일이지. 대상들이 머물던 방은 오스만 시대의 전통공예품이나 미술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으로 변신했다. 하긴 놀려두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사람들 틈을 벗어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어느 작은 방에 들어가 본다. 꼬마아이 하나가 커다란 개 그림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아직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듯 음이 제멋대로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웠는지 그림 속의 개가 두 눈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놀러왔단다. 대상이 별을 꿈꾸던 곳에서 이젠 아이가 키를 키우고 있다.

아이는 피아노를 치고 개는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 

멀리서 온 손님들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청년.

 

땀을 들이고 있는데 누군가 빈 공간에 의자 몇 개를 가져다 놓는다. 배치가 완료되자 수염을 기른 청년 하나가 기타 같이 생긴 걸 들고 나온다. 자세히 보니 줄이 세 개뿐이다. 터키 전통악기 바흘라마란다. 이 카라반사라이에서 공연하는 청년인데 먼 나라에서 온 손님들에게 노래를 선물하겠단다. 터키 사람들이 이렇다니까. 손님 대접을 못해서 안달이다. 청년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시작한다. 곡조가 무척 슬프다. 혹시 대상들이 먼 길을 걸으며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부르던 노래는 아닐까? 아니면 옛날부터 내려오던 터키 전통가요? 노래가 끝나고 물어봤더니 둘 다 아니다. 1960년대 어느 맹인가수가 부른 대중가요라고 한다. 왠지 한() 같은 게 깔려 있더라니. 대상하고는 상관이 없는 걸로 밝혀졌지만 가슴은 이미 촉촉해졌다. 앙코르를 요청했더니 이번엔 신나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그린 노래라는데 당신을 본 순간 세상은 끝났습니다라는 가사로 시작된단다. 호오! 멋진데. 졸지에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세 번째 노래가 나올 때쯤은 국적이고 뭐고 다함께 춤을 추며 어울린다. 나도 신나게 춤을 춘다. 어디서 그런 신명이 나왔을까. 내 나라에서도 사양하는 춤을(솔직히 말하면 출 줄 모르는) 터키의 시골마을에서 추다니. 혹시 내 전생이 멀고 먼 길을 걷던 대상은 아니었을까. 그 대상이 내 몸에 빙의되어 이렇게 춤을 추는 건 아닐까. 나도 나를 알 수 없는 신나는 시간이 그렇게 계속된다. 여행은 예측하지 못한 선물이기도 한다.

 

 

목걸이 만드는 처녀.

 

살구를 나눠주는 꼬마천사.

노래가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내게 급히 뛰어오더니 조그만 돌 하나를 내민다. 이게 뭐지? 돌 위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오늘 춤을 가장 열정적으로 춘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얼마나 급히 그렸는지 그림 위에 칠한 바니시가 덜 말랐다. 이곳에서 일하는 화가 중 하나가 작정을 하고 그린 모양이다. 에구, 이런 영광이. 그나저나 태극 문양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튼 이 나라 사람들 사람 감동시키는 데는 특별한 자질을 타고 났다니까. 또 한 번 가슴이 흠뻑 젖어버린다. 아무리 좋아도 한없이 앉아있을 수는 없는 법. 오른쪽 회랑을 통해 나오다가 눈에 확 뜨이는 아가씨와 만난다. 얼굴을 조금 숙인 채 목걸이 공예를 하고 있는데 예쁘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사진 찍어도 돼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마음의 교환까지 안 될까. 사진을 보여주며 시시덕거리다 보니 주위가 허전하다. 이러다 혼자 남을라. 밖으로 뛰어나오는데 이번엔 한 아이가 앞을 가로 막는다. 손에는 허름한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이거 드세요

드세요? 사세요가 아니고? 비닐봉지에는 아직 덜 익은 살구들이 잔뜩 들어있다. 아이는 외국인들을 찾아다니며 그걸 나눠주고 있다. 저게 절대 공짜는 아닐 텐데. 받아먹는 사람도 있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도 있다. 고개를 흔드는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미술의 거리 입구.

 

내내 카메라를 따라다니던 꼬마들.

 

한 사람이 아이를 부르더니 돈을 쥐어준다. 아이가 손을 흔들며 뒷걸음친다. 어라? 파는 게 아니네? 그럼 왜? 현지인에게 물어봤지만 자신들도 왜 저걸 나눠주는지 모르겠단다. 그럼 하늘에서 살구천사가 내려온 건가? 자신이 따온 살구를 관광객에게 나눠주는 아이, 돈을 달랄까봐 손사래를 치는 어른. 또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이의 얼굴에는 나눠주는 사람 특유의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오늘도 길에서 배운다. 아이와 헤어져 바탈가지 읍내 구경을 나선다. 바탈가지(Battalgazi)BC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도시지만 지금은 인구 16000명의 작은 마을일뿐이다. 1837년 오스만 제국이 주민들을 현재의 말라티야로 강제 이주시켰단다. 고대 성벽 등의 잔해가 곳곳에 남았지만 누구도 돌보지 않아 쓸쓸함만 더해줄 뿐이다. 작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 조금 걷다보니 단순한 골목이 아니다. 밖에서 볼 땐 오래된 골목 특유의 궁색함만 눈에 들어오더니 안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이 바뀐다. 담장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예쁜 조형물들이 손을 흔든다. , ‘미술의 거리구나. 소위 벽화마을이라고 부르는 통영의 동파랑마을이나 홍제동 개미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다. 이런 골목에서는 사람도 소품이 된다. 아이들이 가을날 잠자리 떼처럼 몰려다니다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포즈를 취해준다. 한 녀석은 사진을 한 장 찍더니 조금 있다 제 동생을 데려온다. 골목을 벗어날 때쯤에는 제 누나와 함께 서서 카메라를 키다리고 있다. 에구, 귀여운 것들.

 

허름한 담장에 걸린 시인의 사진.

미술의 거리에 그려진 그림과 조형물.

미술의 거리 전속모델들(?)

무너져가는 집의 담장에 큼지막하게 확대한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 누구냐고 물으니 시인이란다. 시인이 왜 저곳에? 존경 받기 때문이란다. 부럽다. 시인이 존경받는 나라는 이미 부자다. 나는 사진 아래 쪼그리고 앉아 경탄의 눈으로 한없이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과 고풍스런 집들, 그 집들 사이의 골목. 그리고 담장의 그림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 그들이 하나로 어울려 지상 최고의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가장 부러운 점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 학원에 가야하고 컴퓨터와 놀아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절대 예술작품의 될 수 없다. 작품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는 아이들의 얼굴이 꽃처럼 환하다. 담장 앞에 여자들이 나란히 서 있길래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수줍게 웃으며 모델이 돼준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골목의 끝에서 울루 자미를 만난다. '울루'’ '거대한'이란 뜻을 가진 터키 말이다. '자미'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의미하는 터키어. 결국 울루 자미는 지역에서 가장 큰 사원, 즉 대사원을 가리킨다. 과거 바탈가지가 큰 도시였음을 말해주듯, 모스크는 제법 규모가 크다. 1224년 셀주크 투르크 때 지었다니까 굉장히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벽돌은 당시 지어진 그대로고 한쪽 면이 중앙 홀로 열린 형태의 4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중앙 돔을 올려다보니 청색과 보라색의 타일로 장식돼 있다. 이 청색 염료는 이란에서만 생산되던 아주 귀한 것이어서 같은 무게의 황금과 교환됐다고 한다.

 

울루자미의 실내.

청색과 보라색으로 치장된 돔.

울루자미 안에서 바라본 하늘.

예배시간이 아니라서인지 사원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성소(聖所)에 왔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예의를 지켜야지. 빨간 카펫의 촉감을 즐기며 천천히 걷다가 한쪽에 가만히 앉아서 시간과 공간을 되새김질한다. 카펫은 온 몸을 감쌀 듯 편안하고 주변은 고요하다. 나는 지금 시간과 공간의 속에 있다. 여행자에겐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집을 떠나 낯선 땅을 헤매는 자체가 틈을 찾는 과정 아니던가. 삶의 본질 역시 그 틈을 통해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온몸은 땀에 젖고 배낭에 짓눌린 어깨는 벗겨져서 쓰리다고 아우성이다. 그래도 난 지금 이곳에서 최고의 안온을 맛보고 있다. 마음은 고요하고 세상의 근심은 저만치 물러나 있다. 무엇을 성취하게 해달라고 간구할 생각 같은 건 없다. 세상을 떠돌며 산다고 소망조차 없지는 않지만 떼를 쓴다고 될 일은 아니다. 대신 오욕으로 가득한 업장(業障) 보따리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가벼워진 몸뚱이 주억주억 조아린다. 신이시여! 그 정도는 용서하소서.

 

posted by sagang

말라티아 고고학박물관 입구.

박물관에 전시된 칼.

말라티아 고고학박물관은 인근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한 곳이다. 지금 터키가 자리 잡고 있는 땅, 아나톨리아는 굴러다니는 돌 하나까지 문화재급이다. 그러다 보니 가는 곳마다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별로 크지는 않지만 아슬란테페 유적 등 다양한 유물들과 만날 수 있다. 아슬란테페 유적? 이름 자체가 낯설 테니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히타이트 제국 등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명멸한 문명들이 남긴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이라고 해두자. 낯선 단어만 나오다 유프라테스 강 하니까 귀가 번쩍 뜨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학교에서 들어본 단어 아니던가. 물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일어난 유프라테스 강이 터키 땅에 있어? 에이, 금시초문인데. 이렇게 되면 또 막막해진다. 인류 역사를 설명하는 게 왜 이렇게 복잡하단 말이냐. 그나마 조금 덜 낯선 히타이트 문명부터 풀어가자. 이름이 낯선 사람도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들어 사용하던 제국이라고 하면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히타이트 제국은 BC 18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북중부, 하투샤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국이다. 당시 유럽은 청동기 문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철로 만든 무기를 휘두르는 자들이 나타났으니 양들 한가운데에 늑대를 풀어놓은 격이었을 것이다. 파죽지세의 히타이트 제국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과 시리아 북서부, 남쪽으로는 지금의 레바논까지,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장악했다. 그때 인류의 가장 오래된 평화 조약인 카데시 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항아라등 도자기류.

고대 쐐기문자.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카데시라는 벌판에서 전쟁을 벌였다. 소설 람세스로 유명한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 역시 용감무쌍했지만 무른 청동칼로 단단한 쇠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때 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평화조약이 카데시 조약이다. 히타이트는 철 생산기술을 절대 다른 나라에 알려주지 않았다. 돈을 가져와 사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철값이 금값의 5, 은값의 40배까지 치솟기도 했다. 그렇다면 철을 기반으로 지중해가 마르고 아라랏산이 닳도록 번영을 누려야 했을 그 거대한 제국이 어떻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답은 예상 외로 좀 싱겁다. BC 1180년 이후 사라진 건 분명한데 뚜렷한 이유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바다의 민족(그리스계 도리아인으로 추정)에 의해 멸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갑자기 그런 종족이 하늘서 떨어진 걸까? 엄청난 화재를 겪었다는 설도 있다. 또 전염병에 의한 멸망설도 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전쟁을 할 때 히타이트에 사로잡힌 이집트 포로들은 천연두에 감염돼 있었다고 한다. 결국 군인들은 물론 히타이트 왕과 그의 후계자까지 천연두에 전염되면서, 급격히 쇠퇴하여 멸망했다는 설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생물학전의 원조가 아닐까. 아무튼 아무리 강한 자도 영원할 수 없다는 교훈은 분명히 남겼다. 주먹 세다고 너무 큰 소리 칠 건 없다. 히타이트 얘기는 이쯤 하자. 남의 땅의 문명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한반도에 찍힌 공룡발자국만 하랴. 지금 나는 히타이트 제국이 융성했던 땅에 서 있고, 내가 들어서는 이 박물관에 그들의 유물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설명이 좀 길어졌다.

 

화살촉 등 석기.

각종 장신구.

아기 옹관. 어린 아이의 뼈가 보인다.

박물관은 규모가 별로 크지 않다. 하지만 전시물들의 이력은 만만치 않다. 유물 중에는 BC 6000년경에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옛날 얘기를 많이 듣다 보니 면역이 돼서 BC 6000년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떡 끄덕 하지만 따지고 보면 놀랄만한 것들이다. 단순하게 비교해보자. 우리는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BC 2333년으로 본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의 유물들이 환웅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뒤 웅녀를 만나 단군을 낳은 것보다 무려 3,600년 전쯤에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단군이 남긴 유물들이 있던가? 각설하고 고고학의 문외한인 내 눈에는 별로 특별해 보이는 게 없다. 돌화살 같은 석기시대 유물과 그 뒤에 만들어졌을 각종 토기, 그리고 히타이트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칼들이 눈에 띈다. 아슬란테페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폭풍의 신이 뱀과 벌이는 전투, 문의 사자, 타르훈자 왕의 조상, 생명의 나무, 풍요의 여신 쿠바바, 사슴사냥 등의 이름이 붙은 유물들이다. 이름들은 멋지지만 뭐가 뭔지 알 방법이 없다. 1986년 유프라테스 강에 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유물도 많다고 한다. 역시 삽질은 반문명적이라니까. 밖으로 나오니 거리의 온도계가 34도에서 36도를 오르내린다. 서울보다는 높지만 이 정도야 뭐. 점심을 먹을 곳은 말라티아 전통가옥. 도심의 시네마 거리에 있는 이 가옥들은 1900년대에 지어진 2층집들이다. 2008년에 복원했는데 박물관, 예술의 집, 전통음식 음식점 등으로 쓰이고 있다.

 

1900년대 지어진 전통가옥.

우리로 보면 삼청각 쯤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음식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다. 역시 빵과 케밥이 주류. 하지만 역시 고급음식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입맛이 썩 당기지는 않는다. 내가 왜 이러지? 어디를 가도 없어서 못 먹는 내가 이번 여행엔 자꾸 입맛 타령을 하게 된다. 몸이 안 좋은 건가. 음식을 앞에 놓고 깨작깨작 속투정을 하다 보니 어제 이젯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이젠 제법 친해져서 농담까지 스스럼없이 할 정도가 됐다.

일본 사람들 재미없어요. 심각해서 농담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정말 재미있어요.”

정말? 혹시 일본 사람 만나면 한국 사람 재수 없다고 그러는 거 아냐?”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한국 사람이 훨씬 재미있어요. 한국 음식도 훨씬 맛있어요.”

그래? 내가 좀 재미있기는 하지. 그런데 한국에 갔을 때 뭐가 가장 맛있었어?”

김치찌개요. 그리고 라면.”

에이 참. 그게 뭐니? 입이 왜 그렇게 싸구려야?”

그런 대화를 나눴다. 헌데, 그런 말을 한 게 후회된다. 김치찌개와 라면이 싸구려라니. 그 맛있는 음식이? , 돼지고기 듬뿍 넣은 김치찌개 먹고 싶다. 고급음식 앞에서 김치찌개 타령을 하고 있자니 내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 나도 배부른 여행자가 다 된 게야. 그러다 벌 받을 텐데.

 

점식식사로 나온 빵과 샐러드.

괜히 말 시켰나봐. 이젯의 김치찌개에 대한 열망은 집요했다.

그런데,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안 넣었으면 좋겠어요.”

? ? 김치찌개하고 돼지고기가 궁합이 얼마나 잘 맞는데 그래. 그거 없으면 고무줄 없는 거시기지.”

말을 하다 보니 아차 싶었다. 이슬람국가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실수를 한 셈이었다. 절에 가서 스님에게 왜 맛있는 새우젓을 안 드세요하면 기분 좋겠는가. 무슬림들은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걸까. 터키로 출발하기 전에 누가 농담 삼아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슬람국가에서 왜 돼지고기를 안 먹는 줄 아세요? 옛날에 어느 힘 있는 사람이 먹어보니까 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만 먹으려고.”

, 그건 종교를 모독하는 발언이지. 혹시 먹는 것에서 초탈하라는 교훈 때문이면 몰라도. 이슬람에서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근거가 분명하다. 역사 공부를 하느라 머리도 아플 테니 잠시 그 얘기를 풀어놓고 가자. 우선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꾸란)을 읽어보면 돼지고기에 대해 분명히 언급해놓았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먹지 말라고 써놓은 것이다.

 

믿는 자들이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부여한 양식 중 좋은 것을 취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만을 숭배하라.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마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다. 하느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한 분이니라. (코란 2172~173)

 

 

말라티아의 일반 가옥.

 

말라티아 거리 풍경.

코란의 저런 말씀은 왜 나온 걸까. 일반적으로 돼지고기에는 여러 가지 병원균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해롭다, 돼지의 품성이 게을러서 가까이 할 게 못된다, 고기가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사막의 기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들 말 한다. 그것 말고도 돼지고기가 이슬람에서 환영 받지 못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막이나 평원에서는 이동 거리가 넓기 때문에 육포를 만들어서 갖고 다니며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한다. 헌데, 돼지고기는 그 조건에 완전 미달이다. 지방질이 많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건조되는 대신 부패되기 쉽다. 지금이라면 통조림이라도 만들었겠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젖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도 선택받지 못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먹기만 하고 나눠주지를 않다니, 고연 것. 뭐 이렇게 미움을 받지 않았을까. 또 잡식성인 돼지야말로 풀만으로는 키울 수 없다.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판에 곡식을 나눠주다니. 안 키우고 말지. 사막이든 산악지대든 초식동물의 배설물은 대부분 말려서 연료로 쓴다. 헌데 아무거나 먹어대는 이 돼지란 녀석의 배설물은 석 달 열흘을 말려도 냄새만 날뿐이다. 남 흉볼 것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것뿐인가. 다른 곳에도 쓸모가 별로 없다. 등에 짐을 나를 수 있나? 타고 적과 싸우러 전쟁터에 나갈 수 있나? 털로 실을 만들 수 있나? 그런 돼지고기가 한국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니, 이슬람 전파에 애로사항이 많을 것 같다.

 

간이 점포에서 옥수수 등을 팔고 있다.

지나가던 훌리아가 자신이 빠지면 큰 일 날세라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물론 음식 얘기는 끝난 지 오래였다.

터키 여자들이 가장 즐겨 입는 옷이 무슨 색깔인 줄 아세요?”

글쎄, 나는 뭐 여자들을 유심히 안 보는 점잖은 사람이라.”

킥킥!(뻥 치시네) 빨간 색 옷을 많이 입어요.”

?”

터키 국기가 빨간색이니까요.”

이거 진담이야? 사실이라면 대단한 애국심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가 이념싸움에 볼모로 잡혔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훌리아가 빨간 옷을 입었네? 진즉에 예쁘다고 해줄 걸.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터키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어딘 줄 아세요?”

으음~ 글쎄? 한국?”

물론 한국도 좋아하지만 미국을 가장 가깝게 생각해요. 경제적으로 가까운 곳은 유럽이지만.”

그럼,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어딘데?”

그리스요.”

터키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리스 사람은 터키 사람을 죽도록 싫어한다. 원래 이웃이란 건 그렇게 가깝고도 먼 것인가? 잠시 일본이라는 나라가 떠올랐다.

 

거리의 작은 가게.

그리스 하면 대개 발칸반도 남단의 반도 국가를 떠올린다. 틀린 건 아니지만 거기서 끝나면 반만 알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는 국가 이전에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정석이다.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둔 그리스 문화는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로 발전했고, 그리스도교와 함께 서양문화의 양대 축을 형성했다. 또 하나, 그리스는 국가라는 틀 이전에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이 먼저다. 그들이 문화를 꽃피운 곳, 즉 그리스화가 가장 잘 이뤄진 곳이 바로 지금 터키가 차지한 아나톨리아 반도다. 숱한 사람이 오가고 숱한 국가가 명멸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오랜 시간 이 땅에서 살아왔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면서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의 새 주인은 오스만이 되었다. 오늘 날 앙숙이 된 결정적 계기였다. 비잔티움 제국, 즉 동로마제국의 백성은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름이야 어떻든 그리스인들로 보면 자신들의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오스만 체제하에서 간헐적으로 독립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리스라는 국가가 태어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8세기부터 불기시작한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이 그리스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829325일 정식으로 독립 국가를 수립한다. , 지금의 그리스라는 나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악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패하면서 동네북이 된 터키는 왕년에 우습게 보던 그리스에게도 핍박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거리의 온도계. 현재 온도 34도.

그리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고토를 수복하고,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919년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를 공격한다. 1920년에는 아나톨리아 서부 대부분을 차지했다가 후퇴하면서 도시들에 불을 질러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921년에 또 다시 침공했지만 무스타파 케말에게 패퇴한다. 더 큰 미움의 씨앗은 1923년 체결된 로잔조약이었다. 세계 1차대전 패전국 터키와 연합국간에 체결된 이 조약에서 터키는 이스탄불을 지키는 대신 에게해의 섬들을 그리스에게 내주고 만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 이 조약에 의해 자국 국민이 교환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살던 130만 명의 그리스인이 터키를 떠났고 그리스 땅에 살던 40만 명이 터키로 돌아갔다. 터키인들은 지금도 바다만 바라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코앞의 섬들이 전부 그리스 영토니 볼 때마다 혈압이 오를 수밖에. 증오가 얼마나 큰지 터키에서는 TV에 그리스인이 나타나기만 해도 토마토를 던지며 괴성을 지른다고 한다. TV 깨질까봐 차마 돌은 안 던지는 것 같다. 이 정도면 견원지간이란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얼마나 '다정한' 이웃인지. 끝으로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더. 우리나라 사람들, 그중 세계 역사 좀 안다는 사람에게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가 태어난 곳은 어디지요?’라고 물으면 터키라는 대답이 나오기도 한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혼동 때문이다. , 우리처럼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땅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다. 헤로도투스든 사도 바울이든 소아시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터키 땅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터키 사람은 아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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