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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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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01 [사라져가는 것들 111] 독살12
2009. 6. 1. 09:14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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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2978년 새봄. ‘해지는아름다운땅’의 바닷가를 걷는 씨족장 ‘큰개구리울음’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엊저녁 잠자리에서 아내 ‘달빛받은엉덩이’가 한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저것들이 저리 설쳐대니 어쩐대유. 족장이구 족발이구 저놈들더러 다 해쳐먹으라고 허구 그냥 조용허게 삽시다.” “이빨 뽑다가 혀 뽑힌 년처럼 옹알거리지 말구 잠이나 자.” 괜히 죄 없는 아내에게 핀잔을 하면서도, 저 아래 미주알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한숨을 어쩔 수 없었다. 마당에 피운 화톳불 빛이 움막 위에 거칠게 덮은 이엉 사이를 뚫고 들어와 눈을 찔러댔다. 인기척이 잦아들지 않는 걸 보면 녀석들이 또 뭔가 작당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당이 아니라 가슴에서 불이 타는 듯 갈증이 일었다. 산악지대인 ‘달빛맨먼저내리는땅’에서 해안지대인 해지는아름다운땅으로 씨족을 이끌고 온 건 큰개구리울음 자신이었다. 하늘이 그렇게 속삭였었다. “짐승만 잡아먹고 사는 시절은 끝났다. 무리를 끌고 저 아래 판판한 땅과 큰물이 있는 곳으로 가거라.” 원로들의 반대는 예상보다 거세었다. “짐승은 얼마든지 있고 피 끓는 전사들도 저리 많은데 어딜 가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움막에만 들어박혀 있어서 실정을 잘 모르는 늙은이들의 소리였다. 근래 들어 짐승은 자꾸 줄어들고 식구는 겁이 날 정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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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아름다운땅에 도착한 뒤에도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짐승 한 마리만 잡으면 몇 날을 편히 먹고 사는데 그깟 조개나 캐고 밤‧도토리나 주워서 뭘 하자는 거냐?”는 게 반대편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산으로 돌아가자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개밥줄때낳은놈’이 그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씨족장 결정에서 큰개구리울음에게 진 뒤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녀석이었다. 요즘 들어선 ‘떡갈나무아래서밴놈’이나 ‘똥누다부랄물린놈’ 같은 젊은 녀석들을 꼬드겨서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사실 바닷가로 온 뒤로 씨족은 곤궁한 처지에 있었다. 짐승은 보기 어려웠고, 바닷가의 조개나 야산의 도토리‧나물‧버섯은 식구들의 배를 채우기에 충분치 않았다. 밭을 일궈 씨를 뿌려봤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물고기가 먹을거리를 해결해주리라는 기대가 어긋난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돌작살이나 뼈 낚싯바늘로 잡는 물고기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갔다. 바다를 보며 한숨을 거듭 내쉬던 큰개구리울음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아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쌓아놓은 원형의 돌무더기 안에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던 큰개구리울음이 탁! 하고 무릎을 쳤다. 물고기 두어 마리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밀물 때 들어왔다가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것들이었다. 다음날, 해지는아름다운땅의 씨족들은 모두 바닷가로 모여 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바다에 둥그런 성이 쌓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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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가 사실이니 아니니 따질 사람은 없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믿어도 된다. 이 땅의 독살이 원시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 독살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얕은 바다에 돌로 쌓은 담을 말한다. 일종의 돌 그물인 셈이다. 경사가 약간 진 곳에 ㄷ자형이나 반원형의 둑을 쌓는다. 둑은 밀물 때는 안 보이다가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서서히 드러난다. 조류를 따라 들어왔던 물고기들이 물이 빠져도 돌담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갇히게 된다. 석방렴(石防簾)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바닷물이 드나드는 물목에 대나무를 엮어 세워 조류들 따라온 물고기를 가두는 죽방렴(竹防簾)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원시적인 고기잡이 방식이다. 배와 같은 도구는커녕 그물조차 없었던 시절에 조수간만의 차이를 고기잡이에 활용한 것이다. 독살의 설치를 위해서는 지리적 여건도 중요하지만 돌을 쌓는 기술도 필요하다. 돌담의 길이는 짧으면 30m에서 길게는 100m까지 다양하다. 기초가 되는 아래 부분은 큰 돌을 이용해 넓게 쌓아 올리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게 된다. 쌓는 과정에서 돌 사이의 공간을 메우기 위해 잔돌을 끼워 넣는다. 독살에 든 물이 빠져나가는 길목에는 구멍을 내고, 그 앞에 고기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대발을 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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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에 든 고기를 잡는 건 식은 식은 죽 먹듯 간단하다. 물이 거의 빠져 나갈 무렵이면 물고기들이 구멍 쪽으로 모여든다. 주인은 뜰채로 떠서 바구니에 담기만 하면 된다. 돌 틈으로 들어간 고기는 손으로 잡기도 한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불며 흙탕물이 들어오는 날에 고기가 많이 든다고 한다. 조기, 우럭, 놀래미, 전어, 숭어, 고등어, 멸치, 낙지, 주꾸미, 새우 등 온갖 고기가 잡혔다. 고기가 많이 들어 혼자 힘으로 엄두가 안 나는 날은 동네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하고 수확물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물고기를 나누면 독살을 수리할 때 손을 빌릴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독살은 날마다 달라지는 조수간만의 차를 정확히 헤아려서 관리해야 한다. 물때를 잘못 짚어서 조금 늦게 가면 누군가가 먼저 슬쩍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또 파도와 해풍 등으로 손상되기 때문에 해마다 한 두 번은 허물어진 돌을 다시 쌓거나 바닥에 쌓인 개펄을 퍼내야 한다. 독살이 얼마나 성행했는지는 삼국사기나 고려사 등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15세기에 펴낸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황해도에 127개, 충청도에 136개, 전라도에 50개, 경기도에 34개, 경상도에 7개, 함경도에 2개가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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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만드는 건 어지간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엄청난 숫자의 돌을 쌓아야 하기 때문에 다수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부잣집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으면 그 가치는 대단히 컸다. 독살 하나가 논 서마지기 값을 웃돌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돈을 투자해서라도 독살을 소유하기 원했고, 서해안 일대에는 우후죽순처럼 독살이 쌓여지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개인소유를 금하고 마을 공동재산으로 관리했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독살이 충청‧황해‧전라도 등 서해안에 집중돼 있었던 이유는 자연적 조건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대부분 해안은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독살을 설치하기 수월한데다 물고기의 산란장 역할을 하는 개펄이 넓게 형성돼 있다. 특히 충남 태안 일대에는 한 때 100여개의 독살이 있었을 만큼 좋은 조건을 갖췄다. 그 영향을 받아 지금도 태안군 일대에는 꽤 많은 독살이 남아 있다. 특히 안면도, 근흥면, 소원면, 원북면, 이원면 등에 가면 거의 온전하게 보존돼 있는 독살을 볼 수 있다. 서천군에도 비인면 장포리에 두 개의 독살이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일반 물고기도 잡지만 주로 자하(紫蝦, 곤쟁이)잡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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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독살들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노인들이 심심파적으로 관리하거나 마을 수익사업으로 체험행사에 활용하는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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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다. 생산성이 없기 때문이다. 대형 어선이 먼 바다에서 산더미처럼 고기를 잡아들이고, 촘촘한 그물이 바닥까지 훑는 싹쓸이 어업이 판치는 마당에 누가 돌담에 걸리는 멍청한 고기 따위나 기다리고 있으랴. 게다가 바다 곳곳에 쳐놓은 그물 때문에 독살까지 들어 올 물고기가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에는 늘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 첨단 장비를 이용해 바다를 쥐어짜는 각박한 어로는 바다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바다와 나누던 여유와 풍류를 빼앗아 갔다. 가는 고기는 보내고 내 담 안에 들어온 고기만 잡는다는 욕심 없는 마음이 만들어 낸 독살. 그 독살과 함께하는 마음이야말로 자연과 공존을 꿈꾸던 조상들의 자세가 아니었을지. 정마저 화석화 돼가는 세상, 한줌의 여유가 유난히 그리워진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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