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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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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테페 발굴 현장.

아슬란테페 유적지 입구의 석상.

아슬란테페 유적을 찾아간다. 말라티아가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곳이다. 유적은 말라티아에서 6~7km 떨어진 오르두주라는 동네에 있다. 민가가 없어서 그런지 주변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중국 지안(集安)으로 광개토대왕릉을 보러갔을 때의 그 썰렁하던 풍경이 생각난다. 시간은 잠시만 한눈을 팔면 무엇이든 지우려 든다. 아슬란테페를 올려다보면 엄청나게 큰 능처럼 보인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비잔티움 시대에는 공동묘지로 사용했다. 그 이전에는 거대한 사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BC4000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이다. 이 유적지가 발견된 것은 1930년대였는데 1961년부터 발굴에 착수해서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초기에 참여했던 사람은 늙어서 세상을 떠났겠지? 하지만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부분이 더 많다고 한다. 발굴 속도가 늦은 것도 있지만 그만큼 거대한 유적이란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 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BC3000년부터 BC1000년까지 형성된 7개 시대의 흔적이 떡시루처럼 층층이 쌓여있다는 것. 실제로 지금까지 발굴해놓은 8m 높이의 흙벽을 보면 시대별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유프라테스 강이 그리 멀지 않다. 물이 풍부하니 농사를 짓기 좋았을 것이다. 농경이 일반화됐다는 증거도 있다. 불에 그슬린 자국이 확연하게 남아있는데, 화재 때문이 아니고 불을 피워 요리를 한 흔적이다. 농사를 짓고 요리를 하는 고도로 발달된 사회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얘기다.

 

 

신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

가면 쓴 사람을 그린 벽화.

 

이 유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면 쓴 남녀를 그린 벽화. 남녀는 가면을 쓰고 무엇을 했을까. 가장무도회? 수천 년 전의 가장무도회라. 물론 가면을 쓰고 진행하는 제의(祭儀)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무도회라고 설정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 몰래 땡땡이 쳐서 흐드러지게 놀아보려고 가면을 쓴 건 아닐까.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뭐. 요즘으로 보면 아버지 몰래 클럽에 놀러가는 젊은 남녀들. 상상이 과도했나? 기록 없는 오래된 것들은 얼마나 많은 상상거리를 제공하는지. 밖으로 나와 언덕을 오르니 시야가 사방으로 확 트여 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 저 골짜기 어디쯤에 논밭을 일궜겠지. 6,000년 전이 엊그제인 듯 시간 감각이 무뎌진다. 흙 언덕에 오르니 사람의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공동묘지였다는 증거다. 삶의 터전이었던 곳 위에 무덤이 들어서고 그 무덤도 잊혀지고 풍화되고. 수천 년 시간이 지금 내 앞에 엎드려 있다. 무덤을 지나 한참 더 걸어가니 저만치 유프라테스 강의 도도한 물결이 보인다. 드디어 인류 문명을 낳고 또 긴 세월 보듬어 키워온 강 앞에 선 것이다. 저 강은 기억하고 있겠지. 이 땅에 묻힌 인간들의 영욕을. 한낮의 태양은 그 영욕을 태워 버릴 듯 뜨겁게 불타고 있다. 출국 전에 누군가 챙겨준 면 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안전한 여행을 빌어준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따뜻한 응원이 등을 민다. 가자. 또 가보자.

 

공동묘지 자리. 뼈들이 드러나 있다.

저 멀리 구름 아래 유프라테스 강이 보인다.

라반사라이(karavan sarai), 즉 대상숙소는 말라티아의 구읍(舊邑)인 바탈가지에 있다. 바탈가지,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마누라의 바가지'를 상상하지는 마시라. 대상숙소 앞에 서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실크로드를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카라반사라이를 찾아 헤맨다. 모든 게 변한 지금 대상들이 실크로드를 오갔다는 유일한 증거가 이 카라반사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흔적조차 지워버린 곳이 대부분이다. 헌데 막상 그 앞에 서니 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건 좀 심하게 현대식이다. 최근에 수리해서 오픈했다는 걸 감안해도 너무 세련됐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68˟76m의 사각형 건물에는 3방향으로 회랑이 있다. 그리고 정문 맞은편에 대상들이 묵던 숙소가 있다. 카라반사라이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따라서 밖에서 보면 마치 작은 성채처럼 생겼다. 문을 닫아버리면 날개가 없는 한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마당은 정원식으로 꾸며져 있는데 한 가운데는 돌이, 양 옆으로는 잔디가 깔려 있다. 이곳에 말이나 낙타를 매어두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17대 술탄 무라트4세 때인 1637, 재상이었던 무스타파 파샤가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370년이 넘은 건물인데 지을 때도 지금의 모습이었을까? 내 괜한 의심증이 도진 것이기를 바라면서 안으로 들어가 본다. 실내도 무척 화려하다. 돌로 된 굵은 기둥과 샹들리에. 어지간한 호텔은 울고 갈 정도로 잘 꾸며 놨다. 한쪽에는 식사를 준비하던 화덕이 있다. 대상들은 여기서 잠을 자고 음식을 해먹었다.

 

카라반사라이 전경.

 

카라반사라이 실내.

아나톨리아는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실크로드를 통한 대상들의 왕래가 잦았다. 실크로드는 몇 가지 루트가 있었지만 동쪽의 끝, 즉 출발지가 중국의 옛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서쪽 끝은 이스탄불이었다. 이 개념을 신라에서 로마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 억지스러워 보인다. 상품이 거기까지 갔다고 해서 실크로드가 연장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바탈가지도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 대상 교역이 크게 활성화 된 건 셀주크 투르크와 룸 셀주크 시대였다. 이 두 제국은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따라서 대상들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 대상들은 9시간에 40km 정도를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40km마다 숙소를 하나씩 세웠다. 우리의 역참처럼 관급(官給) 숙소를 만든 것이다. 숙소 이용료는 3일까지는 무료였다. 방이 없는 경우에는 마당에서도 잤다. 10시에 문들 닫았으며 아침 7시부터 출발했다. 이 숙소에 머무는 동안에는 마음 편하게 먹고 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물품들을 보관하고 지켜주기도 했다. 중간에 도적들에게 물건을 빼앗기게 되면 물건 값만큼 돈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 일종의 보험제도가 시행된 셈이었다. 그러니 교역이 활기를 띨 수밖에. 중국의 비단이 유럽의 귀족들을 환호하게 했는가 하면, 이탈리아 상인들이 가져온 유리병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카라반사라이 조감도.

카라반사라이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들.

 

아나톨리아 자체에서 생산되는 물품도 짭짤하게 팔려나갔다. 이곳에서 기른 양털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았다. 질 좋은 모직물을 뜻하는 앙고라라는 말은 앙카라 지방에서 수출된 염소의 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대상이 오가던 그 시절을 상상해본다. 낙타에 의지해서 수천km(이 길을 직접 걸었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12,000km라고 썼다)를 오갔을 대상들. 오가는 길에 병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 했겠지. 한번 다녀가면 아이들이 훌쩍 자라 있었겠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두고 또 길을 떠나야 하는 운명. 예나 지금이나 산다는 게 참 만만치 않다. 상념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어 있다. 아마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시절처럼 중국에서 대상이라도 온 줄 아는 모양이다. 바탈가지 읍장도 나왔다. 한국말로 된 설명서를 만들어 비치겠다고 요구하지도 않은 약속을 한다. 고마운 일이지. 대상들이 머물던 방은 오스만 시대의 전통공예품이나 미술품을 만들고 파는 공방으로 변신했다. 하긴 놀려두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사람들 틈을 벗어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어느 작은 방에 들어가 본다. 꼬마아이 하나가 커다란 개 그림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아직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듯 음이 제멋대로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웠는지 그림 속의 개가 두 눈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놀러왔단다. 대상이 별을 꿈꾸던 곳에서 이젠 아이가 키를 키우고 있다.

아이는 피아노를 치고 개는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 

멀리서 온 손님들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청년.

 

땀을 들이고 있는데 누군가 빈 공간에 의자 몇 개를 가져다 놓는다. 배치가 완료되자 수염을 기른 청년 하나가 기타 같이 생긴 걸 들고 나온다. 자세히 보니 줄이 세 개뿐이다. 터키 전통악기 바흘라마란다. 이 카라반사라이에서 공연하는 청년인데 먼 나라에서 온 손님들에게 노래를 선물하겠단다. 터키 사람들이 이렇다니까. 손님 대접을 못해서 안달이다. 청년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시작한다. 곡조가 무척 슬프다. 혹시 대상들이 먼 길을 걸으며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부르던 노래는 아닐까? 아니면 옛날부터 내려오던 터키 전통가요? 노래가 끝나고 물어봤더니 둘 다 아니다. 1960년대 어느 맹인가수가 부른 대중가요라고 한다. 왠지 한() 같은 게 깔려 있더라니. 대상하고는 상관이 없는 걸로 밝혀졌지만 가슴은 이미 촉촉해졌다. 앙코르를 요청했더니 이번엔 신나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그린 노래라는데 당신을 본 순간 세상은 끝났습니다라는 가사로 시작된단다. 호오! 멋진데. 졸지에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세 번째 노래가 나올 때쯤은 국적이고 뭐고 다함께 춤을 추며 어울린다. 나도 신나게 춤을 춘다. 어디서 그런 신명이 나왔을까. 내 나라에서도 사양하는 춤을(솔직히 말하면 출 줄 모르는) 터키의 시골마을에서 추다니. 혹시 내 전생이 멀고 먼 길을 걷던 대상은 아니었을까. 그 대상이 내 몸에 빙의되어 이렇게 춤을 추는 건 아닐까. 나도 나를 알 수 없는 신나는 시간이 그렇게 계속된다. 여행은 예측하지 못한 선물이기도 한다.

 

 

목걸이 만드는 처녀.

 

살구를 나눠주는 꼬마천사.

노래가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내게 급히 뛰어오더니 조그만 돌 하나를 내민다. 이게 뭐지? 돌 위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오늘 춤을 가장 열정적으로 춘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얼마나 급히 그렸는지 그림 위에 칠한 바니시가 덜 말랐다. 이곳에서 일하는 화가 중 하나가 작정을 하고 그린 모양이다. 에구, 이런 영광이. 그나저나 태극 문양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튼 이 나라 사람들 사람 감동시키는 데는 특별한 자질을 타고 났다니까. 또 한 번 가슴이 흠뻑 젖어버린다. 아무리 좋아도 한없이 앉아있을 수는 없는 법. 오른쪽 회랑을 통해 나오다가 눈에 확 뜨이는 아가씨와 만난다. 얼굴을 조금 숙인 채 목걸이 공예를 하고 있는데 예쁘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사진 찍어도 돼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마음의 교환까지 안 될까. 사진을 보여주며 시시덕거리다 보니 주위가 허전하다. 이러다 혼자 남을라. 밖으로 뛰어나오는데 이번엔 한 아이가 앞을 가로 막는다. 손에는 허름한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이거 드세요

드세요? 사세요가 아니고? 비닐봉지에는 아직 덜 익은 살구들이 잔뜩 들어있다. 아이는 외국인들을 찾아다니며 그걸 나눠주고 있다. 저게 절대 공짜는 아닐 텐데. 받아먹는 사람도 있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도 있다. 고개를 흔드는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미술의 거리 입구.

 

내내 카메라를 따라다니던 꼬마들.

 

한 사람이 아이를 부르더니 돈을 쥐어준다. 아이가 손을 흔들며 뒷걸음친다. 어라? 파는 게 아니네? 그럼 왜? 현지인에게 물어봤지만 자신들도 왜 저걸 나눠주는지 모르겠단다. 그럼 하늘에서 살구천사가 내려온 건가? 자신이 따온 살구를 관광객에게 나눠주는 아이, 돈을 달랄까봐 손사래를 치는 어른. 또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이의 얼굴에는 나눠주는 사람 특유의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오늘도 길에서 배운다. 아이와 헤어져 바탈가지 읍내 구경을 나선다. 바탈가지(Battalgazi)BC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도시지만 지금은 인구 16000명의 작은 마을일뿐이다. 1837년 오스만 제국이 주민들을 현재의 말라티야로 강제 이주시켰단다. 고대 성벽 등의 잔해가 곳곳에 남았지만 누구도 돌보지 않아 쓸쓸함만 더해줄 뿐이다. 작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 조금 걷다보니 단순한 골목이 아니다. 밖에서 볼 땐 오래된 골목 특유의 궁색함만 눈에 들어오더니 안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이 바뀐다. 담장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예쁜 조형물들이 손을 흔든다. , ‘미술의 거리구나. 소위 벽화마을이라고 부르는 통영의 동파랑마을이나 홍제동 개미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다. 이런 골목에서는 사람도 소품이 된다. 아이들이 가을날 잠자리 떼처럼 몰려다니다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포즈를 취해준다. 한 녀석은 사진을 한 장 찍더니 조금 있다 제 동생을 데려온다. 골목을 벗어날 때쯤에는 제 누나와 함께 서서 카메라를 키다리고 있다. 에구, 귀여운 것들.

 

허름한 담장에 걸린 시인의 사진.

미술의 거리에 그려진 그림과 조형물.

미술의 거리 전속모델들(?)

무너져가는 집의 담장에 큼지막하게 확대한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 누구냐고 물으니 시인이란다. 시인이 왜 저곳에? 존경 받기 때문이란다. 부럽다. 시인이 존경받는 나라는 이미 부자다. 나는 사진 아래 쪼그리고 앉아 경탄의 눈으로 한없이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과 고풍스런 집들, 그 집들 사이의 골목. 그리고 담장의 그림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 그들이 하나로 어울려 지상 최고의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가장 부러운 점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 학원에 가야하고 컴퓨터와 놀아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절대 예술작품의 될 수 없다. 작품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는 아이들의 얼굴이 꽃처럼 환하다. 담장 앞에 여자들이 나란히 서 있길래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수줍게 웃으며 모델이 돼준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골목의 끝에서 울루 자미를 만난다. '울루'’ '거대한'이란 뜻을 가진 터키 말이다. '자미'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의미하는 터키어. 결국 울루 자미는 지역에서 가장 큰 사원, 즉 대사원을 가리킨다. 과거 바탈가지가 큰 도시였음을 말해주듯, 모스크는 제법 규모가 크다. 1224년 셀주크 투르크 때 지었다니까 굉장히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벽돌은 당시 지어진 그대로고 한쪽 면이 중앙 홀로 열린 형태의 4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중앙 돔을 올려다보니 청색과 보라색의 타일로 장식돼 있다. 이 청색 염료는 이란에서만 생산되던 아주 귀한 것이어서 같은 무게의 황금과 교환됐다고 한다.

 

울루자미의 실내.

청색과 보라색으로 치장된 돔.

울루자미 안에서 바라본 하늘.

예배시간이 아니라서인지 사원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성소(聖所)에 왔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예의를 지켜야지. 빨간 카펫의 촉감을 즐기며 천천히 걷다가 한쪽에 가만히 앉아서 시간과 공간을 되새김질한다. 카펫은 온 몸을 감쌀 듯 편안하고 주변은 고요하다. 나는 지금 시간과 공간의 속에 있다. 여행자에겐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집을 떠나 낯선 땅을 헤매는 자체가 틈을 찾는 과정 아니던가. 삶의 본질 역시 그 틈을 통해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온몸은 땀에 젖고 배낭에 짓눌린 어깨는 벗겨져서 쓰리다고 아우성이다. 그래도 난 지금 이곳에서 최고의 안온을 맛보고 있다. 마음은 고요하고 세상의 근심은 저만치 물러나 있다. 무엇을 성취하게 해달라고 간구할 생각 같은 건 없다. 세상을 떠돌며 산다고 소망조차 없지는 않지만 떼를 쓴다고 될 일은 아니다. 대신 오욕으로 가득한 업장(業障) 보따리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가벼워진 몸뚱이 주억주억 조아린다. 신이시여! 그 정도는 용서하소서.

 

posted by sagang


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욀뤼데니즈 해변의 패러글라이딩 착륙장. 모래와 잔디밭이라 안전하다.


그녀를 만나다

바바산에서 내려와 헥토르 사무실에 도착하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그녀가 있다. 누구? 헥토르 에이전시에 일한다는 한국인 아가씨.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가출한 여동생을 타향에서 우연히 만난 듯 반갑다. 하지만 그녀는 7년 만에 만나는 오라비나 지을 법한 감동적인 표정을 보고서도 무덤덤하기만 하다. 하도 한국인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이곳이 서울인지 머나먼 이국 땅인지 헷갈리는 것 같다. ‘아니, 또 저런 감동 과잉형 인간이야?’ 하는 표정까지 살짝 내비친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갈 나도 아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간다. 그녀가 터키, 그중에서도 페티예에 정착한 건 3년 전. 여행을 왔다가 눌러 앉았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 있으면 소개하겠지만 코디네이터 엄상욱 씨도 그렇게 무작정 눌러앉은 케이스다. 그럼 나도 이참에…? 아무튼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왔다가 패러글라이딩 회사의 직원이 된 셈이다. 엄청난 용기다. 고국에는 가족도 친구들도 있었을 텐데. 낯선 땅에서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있는 건 용기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헥토르 입장으로 보면 낮잠을 자다가 홍시 하나가 벌린 입으로 떨어진 셈이었을 것이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 그녀가 큰 도움이 됐을 건 안 봐도 비디오고.

다시 한번 미스터 헥토르를 소개합니다!! 그는 끝내 패러글라이딩 값을 받지 않았다.

하필 이 동네에 정착한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대답이 간단하다. “여기가 가장 따뜻해서요” 삶이 무척 추웠던 모양이다. 터키말은 전혀 몰랐는데 살면서부터 배웠다고 한다. 그녀 역시 헥토르가 한국인들을 특별히 좋아한다고 강조한다. 자기 수수료를 포기하고 한국 청년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한단다. 그렇구나. 최소한 동포 말은 믿어야지.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손을 흔들며 떠난 딸이 느닷없이 낯선 땅, 그것도 시골 한구석에 틀어박혔을 때 부모 심정은 어땠을까. 의외로 선선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시더니, 지금은 친구 딸들은 다 시집을 가는데 넌 뭐하느냐고 하세요. 그러다가도, 거기에 자리나 잘 잡아놓으라고….” 그녀의 부모님 속내도 좀 복잡한 게 틀림없다. 이곳에 계속 있을 거냐는 질문에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단답형으로 대답한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 한마디 덧붙인다. “여기가 속 편해요” 그렇지 뭐, 속 편하면 곳이 고향인 게지. 살던 땅으로 돌아간다고 누가 정착자금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아까 헥토르에게 미처 확인하지 못한 몇 가지를 물어본다. 욀뤼데니즈에는 패러글라이딩 사업을 하는 업체가 9개 있다고 한다. 5개는 고정적으로 성업 중이고 나머지 4개는 ‘생겼다 망했다 이름을 바꿔서 다시 시작했다’의 반복이란다.

욀뤼데니즈 해변.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잔잔하다.

가까이 가보면 모래가 아니라 이런 작은 돌들이 깔려있다.


해변을 거닐다


바바산에 길을 닦고 패러글라이딩의 기반을 마련한 건 관공서였다고 한다. 물론 입장료를 받고 관광수입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한국인마다 신기하다는 듯 반복하는 질문에 약간 짜증나는 기색도 없진 않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사진을 찍자고 하니 극구사양이다. 조금 조르면 오케이 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손사래를 친다. 실력부족인가? 터키사람들은 카메라만 들이대면 활짝 웃어주는데 말이 통하는 한국인의 사진을 찍는데 실패하다니. 얼굴을 내밀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있겠지. 그거야말로 존중받아야할 프라이버시. 몰래 한 장 찍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깨끗하게 포기한다. 헥토르는 다큐팀의 패러글라이딩 비용을 끝내 안 받는다. 인터뷰에 응해주고 여기저기 안내도 하고 직원들 일당도 나갔을 텐데. 고마운 일이다. 설령 고도의 장삿속이 숨어 있다고 해도 고마운 걸 ‘속 보인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헥토르의 사업이 번창해서 한국 청년들에게 좀 더 많이 베풀기를 기원하면서 끝내 이름을 묻지 못한 그녀와도 작별을 한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욀뤼데니즈 해변을 탐색해볼 차례. 얼마나 아름다우면 지중해 최고의 해변이라는 찬사가 붙어 있을까. 헌데 여기도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 에구, 어디 가나 그놈의 돈.

해변에 세워둔 구조물 사이로 지나가는 배는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산, 바다, 숨은 배...

욀뤼데니즈는 ‘죽음의 바다’ ‘고요한 바다’ 라는 뜻이다. 물에 들어갔다 하면 죽어서 나온다는 잔혹동화 같은 얘기는 아니고, 죽은 듯 잔잔한 바다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말 잔잔하긴 하다. ‘X물에도 파도가 친다’는 말이 있듯이, 어지간한 호수도 기본적인 물결이 있는 법인데. 파랑보다는 초록에 가까운 바다는 한없이 투명해서 속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2km 정도 길게 뻗은 백사장에는 아직도 피서객들이 많다. 눕고 엎드리고 뒤집고, 오븐 속의 생선처럼 몸을 태우기에 여념이 없다. 물이 깊지 않아서인지 노인들도 많다. 그나저나 이렇게 살만 태우고 놀면 소는 누가 키우나. 일중독자 아니랄까봐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백사장은 모래가 아닌 작은 돌들로 이뤄졌다. 엄격한 의미에서 백사장이 아니라 백석장(白石場)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고운 모래가 깔린 해수욕장이 생각난다. 비가 많았던 지난여름엔 얼마나 썰렁했던지. 지금은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기 어렵겠지. 백사장을 지나 블루 라군(blue lagoon) 쪽으로 향한다. 라군은 모래언덕 등에 의해 바다와 격리된 호소(湖沼)를 말한다. 일반 호수와 다른 건 지하에서 해수가 스며들거나 바다와 연결되는 수로가 있어 염분농도가 높다. 일종의 바다호수인 셈이다. 이쪽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바다호수' 블루 라군.

해먹을 흔들어 주는 아빠. 잠이 들어도 끈은 놓지 않는다. 그게 '아비'다.

 

블루 라군을 아십니까

블루 라군 하니 ‘푸른 산호초’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던 영화 ‘블루 라군’이 생각난다. 브룩 쉴즈(Brooke Shields)의 백치미에 가까운 청순한 아름다움은 얼마나 많은 청춘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지. 또 영화 속의 섬과 바다는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나저나 브룩 쉴즈는 지금 어떻게 늙어가고 있을까. 1965년생이니 40대 중반이 넘었고, 배우로서는 환갑이 지난 나인데….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고 있다. 이곳 역시 영화 속의 풍경만큼이나 아름답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안온함을 더해준다. 해변을 벗어나 느린 걸음으로 홀로 걷다가 나무 그늘로 들어가 잠시 몸을 기댄다. 저만치 해먹에 아이를 재워놓고 흔들어주는 젊은 아빠가 보인다. 아빠는 아이가 깰까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조그만 소음에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정지된 풍경에 그 작은 그림 하나를 더하니 세상이 느닷없이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찬다. 욀뤼데니즈를 떠나 돌아오는 길에 조선소가 눈에 띄어 들러 보기로 한다. 숙박하고 있는 호텔과 멀지 않은 곳이다. 말이 조선소지 노천에서 목선을 만드는 곳이다. 목선이지만 건조 중인 배는 제법 커서 30m는 충분히 될 것 같다. 골조를 세우고 송판을 배의 모양에 따라 곡선으로 만들어 붙이는 방식이다. 그 큰 배에 단 두 명이 달라붙어서 망치질을 하고 있다. 쯧쯧, 저 배는 언제나 바다로 나가볼까.

이 큰 목선에 두어 명이 올라가 망치질을 하고 있다. 저 배는 언제나 물 구경을 해보나.

터키는 국토의 3면에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도 조선산업 역시 원시적 수준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는 지중해를 품에 안고 천하를 오시했지만,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튀르크족이 이 땅을 정복한 뒤에는 배고 바다고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페티예의 조선소는 이 동네에 모두 모여 있다고 한다. 그래봐야 가내공업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3곳뿐이다. 우리가 들른 곳이 그나마 가장 규모가 크고, 다른 두 곳은 배를 만들기보다는 수리하는 정도다. 부자들은 배를 외국에서 수입해서 쓴다고 한다. 배를 만드는 나무는 주로 아프리카에서 들여온다. 잠시 뒤 쉬는 시간인지 목재를 자르고 켜던 인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는다. 배 위에서 망치질을 하던 사람들도 내려와 합류한다. 예외 없이 차이를 마신다. 앞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터키사람들의 차이 사랑은 유별나다. 차이가 없는 터키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하루의 시작도 끝도 차이와 함께한다. 보통 하루에 10잔 이상, 많이 마시는 사람은 20잔까지 마신단다. 한 시간에 한 잔씩 마신다고 하면, 차를 마시기 위해 네 시간만 자야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직접 끓이기도 하고 주문해서 마시기도 하는데 가격은 비교적 싼 편이다. 그래도 500원씩만 쳐도 하루 20잔 이상을 마시면 살림이 거덜 날 판이다. 그래서인지 여럿이 모인 곳에는 대개 차이를 끓일 수 있는 준비를 해놓았다.

나무를 곡선형태로 만들어 붙이는 형식으로 배를 짓는다.

수리를 위해 대기 중인 배들.


터키인들의 차이 사랑


어느 동네를 가든지 차이를 파는 차이하네(Cayhane)나 차이에비(Cayevi)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도심에서도 야외 찻집인 차이 바흐체시(Cay bahcesi)가 곳곳에 있다. 일터에서도 어김없이 차이를 마시는데, 쉬기 위해 차이를 마시는 게 아니라 차이를 마시기 위해 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터키의 차이는 19세기 후반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서 전해져 왔다고 한다. 차이라는 말은 중국의 차(茶)에서 왔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녹차가 발효되면 우롱차가 되고 거기서 발효가 더 진행되면 차이가 된다. 차이를 더 발효시키면 홍차가 된다. 그래서 차이는 엷은 홍차 맛이 난다. 기호에 따라서 설탕을 적당히 넣어서 마시면 된다. 난데없이 차이 얘기가 길어졌지만 터키를 이야기할 때 차이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한번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차이와 비슷한 것으로 짜이가 있다. 인도나 네팔 등에서 마시는 밀크티를 말한다. 그 동네 발음이 ‘짜이’에 가깝다는 것이지 이것도 ‘차이’가 원음이다. 이름이나 뿌리는 같지만 제조법은 많이 다르다. 냄비나 주전자에 소량의 물로 홍차를 끓여낸 뒤 우유를 부어 장시간 우린다. 이후, 설탕을 넣어 맛내기를 한다. 우유가 들어가는 게 차이와 가장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짜이를 파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차이 한 잔 하실까요. 저 붉은 색의 유혹이란.

조선소 인부들의 휴식시간. 자세히 보면 모두 차이를 들고 있다.

차이를 마시던 인부들이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는 나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시커먼 차이 주전자에서 한잔을 따라준다. 잔은 자신이 마시던 걸 물에 대충 헹군 것이다. 사양을 미덕으로 삼는 한민족의 후예답게 손사래를 몇 번 쳤지만, 인심을 미덕으로 삼는 튀르크족의 후예답게 쉽사리 물러날 자세가 아니다. 터키 말을 알아야 구체적으로 사양이라도 하지. 물론 내가 차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아니, 그 맛에 은근히 반해서 휴게소에서 다른 사람들이 커피를 마실 때도 난 차이를 마시곤 했다. 호텔에서 식사를 할 때도 커피 옆에는 늘 차이 주전자가 놓여있기 마련인데 난 망설임 없이 차이를 선택한다. 사양한 것은 물론 체면 때문이다. 길바닥 체질인 내가 언제 찬밥 더운밥 가렸던가. 못이기는 체 홀짝거리며 한잔을 마셨더니 이 남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얼른 또 한잔을 따라준다. 어라? 이러다가 차이로 배를 채우겠네. 얼른 입에 털어놓고 늙은 노새처럼 헤벌떡 웃으며 잔을 넘긴다. 고마워하는 마음을 알아달라는 뜻이다. 그도 더 이상 권하지는 않는다. 원래 터키인들은 잔이 차면 곧바로 채워주는 것이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 마시고 싶을 때는 나처럼 헤프게 웃지 말고 차 스푼을 찻잔 위에 살짝 올려놓으면 된다.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보지 않는 이유

나뭇잎을 뜯어먹는 개. 저렇게 키우면 사료값 안 들어서 좋겠다.

아무튼 이렇게 타인에 대해 별 경계도 없고 인심도 좋은 게 바로 터키 사람들이다. 낯선 사람일지라도 무언가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게 또 우리나라 사람들의 속성이 아니었던가.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런 나눔의 인심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산업화 현대화 도시화라는 ‘화’자 돌림의 괴물들이 온 국토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아무데나 주저앉는 바람에 톱밥이니 흙이니 묻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서는데 바닥에 사지를 펴고 늘어져 있던 큰 개도 느릿느릿 따라 일어난다. 이 나라의 동물들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천국이 따로 없다. 나를 전송이라도 하려고 일어난 줄 알았더니 커다란 화분에 가서 간식이라도 먹듯, 나뭇잎을 아작아작 뜯어먹는다. 이 동네 개들은 밥 대신 잎을 먹고 사나? 그럼 신선개? 밥값은 따로 안 들어서 좋겠다. 한국에서는 헛소리 하는 사람에게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한다’고 하는데. 신기해서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노인 한 분이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빙 돌린다. 그러면서 "problem"이란다. 머리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아무리 봐도 미친개는 아닌 듯한데…. 에이, 아저씨, 전요… 솔직히 말하면 아저씨가 더 의심스러워요. 호기심 많은 이곳 사람들은 내가 무언가 하고 있으면 와서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거리낌 없이 씨익~ 웃는다.

걸어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 넘어진 배를 보았다. 홀로 넘어진 배는 홀로 일어서지 못한다.

노인과 그런 미소를 주고받는데 마침 근처의 모스크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울려 퍼진다. 전국에는 모두 7만7000여 곳의 모스크가 있기 때문에 어느 궁벽진 곳에 가도 이 소리를 피할 길은 없다. 며칠 듣다보니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한다. 새벽에도 아잔소리 때문에 잠을 깨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아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일손을 멈추고 모스크로 가는 건 아니다. 하긴 하루에 다섯 번 씩 쫓아다니다가는 언제 일을 하나. 배를 만드는 인부들도 자신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아잔소리를 듣는 순간, 믿음 씨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터키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과 같은 층에서 기도하는 게 금지돼 있다고 한다.(전 이슬람권이 그런지는 못 물어봤다) 메카를 향해 절을 할 때, 여자 뒤에 있는 남자들이 ‘나쁜 생각’을 품어 정신이 혼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믿음 씨는 나쁜 생각이라고 표현했지만 엉큼한 생각이라는 말이 더 맞겠지. 이건 남녀차별이야? 여성 보호야? 이렇게 순박하게 생긴 아저씨들도 그런 생각을 하나. 이럭저럭 저녁 시간이 가까워온다. 시내로 보충 촬영을 나가는 다큐팀과 헤어져 지척에 있는 호텔까지 걸어간다. 페티예에서의 마지막 밤은 홀로 고적하게 보내볼 생각이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이번 주부터 터키, 그중에서도 지중해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카메라 배낭에 밴 땀이 하얀 소금 꽃으로 피어날 정도로 많이 걷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함께 떠난 일행이 있었지만, 각자의 일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혼자 걷고 생각하는 여행자가 되려고 애썼습니다. 여러분을 제 여행길에 모십니다. 읽고 나서 댓글도 남겨주시고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이스탄불의 모습. 여긴 조금 변두리?

비행기 안에서 잠이 깨다

뭔가 불편한 느낌에 자꾸 몸을 뒤척인다. 요의로 하복부가 묵지근한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간신히 잡은 잠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본능으로 조금씩 돌아오려는 의식을 향해 자꾸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손짓 정도로 막을 상황은 아니다. 꿈이 가득 찼던 자리를 의식이 대체하기 시작한다. 혼미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 여기가 어디지? ! 그래. 비행기 안이었구나. 그래. 난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어. 내 생애에 가장 긴 휴가를 가고 있는 중이야. 콧물이 흐른다. 머리도 띵하고 몸도 무겁다. 감기몸살 기운은 엊그제부터 찾아왔다. 며칠 무리한 탓이리라. 열흘 넘게 자리 비우는 턱을 한다고 불난 집 며느리처럼 대중없이 종종걸음을 치다보니 자연스레 얻은 전리품이다.

저 아래 경기장이 보인다. 터키 사람들도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애당초 무리한 여행이었지만

열흘 이상 자리를 비운다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처음 터키 여행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떠나는 팀을 이끄는 후배가, 내 개인작업(여행, 사진촬영, 쓰기)과 성격이 맞으니 합류하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물론 생각이 없어서 고개를 저은 건 아니었다. 아니, 내 평생 가고 싶은 곳 중 하나가 그곳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아나톨리아 반도로 달리고 있었다. 히말라야에서 몇 달 쯤 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중국의 윈난성(雲南省) 리장(麗江)에 가서 하릴 없이 배회하고 싶고, 터키에 가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지났던 실크로드를 걷거나 세계사의 용광로에 몸을 담그고 싶고. 늘 꿈꾸는 것들이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프랑스 퇴역기자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는 얼마나 터키에 대한 열병을 앓게 했던지. 고통과 위험에 가득한 그 길이. 비록 제안 받은 곳이 실크로드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땅에 가고 싶었다.

그런 열망에도 터키행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1주일에 한번 씩 하는 방송이었다. 케이블TV 시사뉴스의 앵커, 대체요원조차 없는 그 자리는 내가 마음에 내킨다고 함부로 비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방송을 맡은 뒤로는 감기 한번 마음 놓고 앓아보지 못했다. 목이 상할까봐 노래방 가는 것조차도 참았다. 게다가 기자 또는 신문사 뉴미디어 분야의 책임자로 평생 일하면서 3~4일 이상의 연속휴가를 가본 적이 없던 내게, 11일이란 숫자는 느닷없이 등에 날개가 솟는 것만큼이나 현실감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방송부서 데스크를 맡은 후배 부장에게 슬그머니 의중을 털어놓았다. 찔러나 보자는 심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OK가 떨어졌다. 이 참에 늙은 기자가 아닌 젊은 대타 한번 써보자는 심리였을까? 이거, 이러다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앵커 자리 날아가는 거 아냐?

역시 이스탄불의 모습. 가운데 흐르는 건 강이 아니라 바다다. 자세한 내용은 시리즈 후반 '이스탄불편'에 나온다.

그건 훗날 닥칠 문제. 그 순간 내 등에는 정말 날개가 돋았고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그리고 바빠졌다. 방송 외에 맡은 일도 이것저것 챙겨야 하고, 신문의 인터뷰 기사도 써놔야 하고 블로그 연재물도 미리 채워놔야 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취재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맡은 잡지 편집도 잠을 줄이는 걸로 해결했다. 출발 전에 꼭 만나봐야 할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자 진리의 신봉자로서 여행지에 관한 책을 읽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준비해간 자료만도 책 한 권 분량이 넘었다. 그렇게 13~4역을 했지만 몸은 핑핑 날아다녔다. 나는 터키 땅으로 간다. 그러다 얻은 몸살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11922일 금요일. 정신없이 방송녹화를 마치고 메이크업을 지울 새도 없이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115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야, 내가 생애 가장 긴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함께 떠나는 일행과는 비행기 안에서 잠깐 눈인사를 나눴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이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해준 K뿐이었다.

이스탄불 주택가. 높은 빌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잦은 지진의 영향일까?

비행기는 실크로드 위를 날고

잠은 더 이상 올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조금 더 있으면 밥 먹으라고 깨울 텐데 뭐. 장거리 비행은 식사시간이 문제다. 먹고 싶든 아니든 잠에서 깨는 수밖에 없다. 남들 먹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퍼져 잘 만한 배짱이 없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앞에 달린 모니터를 보니 2시간 남짓 남은 것으로 표시돼 있다. 이스탄불공항에서 갈아타고 최종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을 합하면 열 두 시간이 넘는 긴 비행이다. 배낭에서 몸살 약을 꺼내 입에 털어넣는다. 이 약으로 깨끗이 나아야 하는데. 감기몸살 정도는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지라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모니터에 그려지는 비행 항로를 보니 실크로드와 거의 비슷하게 날고 있다. 실제로는 많이 다른 길이겠지만 축약된 길은 거의 똑같아 보인다. 실크로드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니터 화면의 지도는 끊임없이 광활하고 황량한 산악지대 위를 달리고 있다. 아니, 지도가 아니라 비행기가. 언젠가 저 길을 가리라. 시속 746km, 바깥기온 섭씨 56.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런던이 저 쪽에 있다. 누군가는 낙타를 타고 장사를 위해, 또 누구는 말을 타고 정복을 위해 지났을 저 길. 나는 비행기를 타고 쉽게도 지나고 있다. 내 나라 땅은 신발이 몇 켤레 닳을 정도로 돌아다닌 나지만 이렇게 해외로 나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비행기의 소음이 빗소리처럼 귀를 파고든다. 어느 산사에서 빗소리를 듣는 듯 나 혼자 고즈넉하다. 가만히 개인 등을 켜고 책을 꺼내 읽는다.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한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이다. 처음 읽을 때처럼 프랑스의 퇴역기자와 고통과 기쁨을 공유한다.

여명 속의 아타튀르그국제공항. 환승을 위해 기다리는 중에 찍었다.

조금 있으니 아침 식사가 나온다. 잠을 깨우는 건 불편하지만 밥 먹는 걸 불편해 할 내가 아니다. 어디 가든지 안 줘서 못 먹는타고난 식성 덕분에 주는 몫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먹는다. 뭘 찾아먹을 땐 평소와 달리 영어까지 유창하게 나온다. 이름도 모르는 식사를 하고 없어 못 마시던 와인까지 두 번이나 주문한다.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곧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하니 준비하라는 멘트가 나온다. 창문 블라인드를 올리니 이스탄불 시내의 불빛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터키 하늘에 진입한 것이다. 저 아래에 수천 년의 영욕이 잠들어있겠지. 내내 잠을 자던 터키 사내(로 보이는)가 비행기에서 지급한 양말에 슬리퍼까지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는 것을 보고 나도 그래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텅!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다. 그 순간 모든 근심을 털어버린다. , 나도 몰라. 이젠 돌아가라고 해도 못가. 방송 펑크 나든 말든 내 책임 아냐!!

이 비행기가 보드롬까지 우리를 태워다 줬다.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환승하다

이스탄불공항의 공식명칭은 아타튀르크국제공항(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이다.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는, 말 그대로 터키의 국부(國父)인데 앞으로 제법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한다. 시간을 보니 0552. ? 이것밖에 안됐어? 당연하지, 시차를 계산해야지. 한국과 터키는 여섯 시간의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몸을 적응시키는데 애 좀 먹어야한다. 하지만 아직 어리바리해서 시차고 뭐고 느낄 틈이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하는데 척 봐도 한국인인 수녀님들이 뒤에 서 있다. 대체로 연세가 드신 분들이다. 얼굴에 설렘이 이스탄불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한국 떠난 지 몇 시간 안됐지만 이국땅에서 듣는 우리말이 반가운 모양이다. 반갑게 마주 인사를 한다.
수녀님들은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성지순례 왔어요. 맨 먼저 소피아성당을 갈 거예요.”
소피아성당, 그 역사의 도가니. 마치 가보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운 이름이다.

입국수속은 빠르고 간단하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터키에서 형제의 나라’ KOREA가 찍힌 여권은 대부분 무사통과란다. 무비자 체류기간은 90일인데 연장도 그리 어렵지 않단다. 수녀님들과 눈짓으로 작별을 하고 다시 간단한 검색과정을 거친 뒤 국내선으로 이동해 휴게실에 자리 잡는다. 몇 시간 뒤에 보드롬(Bodrum)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한다. 이번 여행은 에게해(Aegean Sea)의 맨 끝에서 지중해(Mediterranean Sea)를 따라 쭉 내려가는 코스다. 맨 먼저 가보고 싶던 곳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기 때문에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위안한다. 일행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나니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다 그저 죽치고 기다리는 수밖에. 비행장에 깔렸던 어둠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하면서 불빛이 옅어져 간다. 나는 지금 이국땅에서 새 아침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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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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