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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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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14 [사라져가는 것들 67] 신작로9
2008. 7. 14. 11:24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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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걸음이 도살장에 가는 소처럼 질질 끌린다. 아이의 손에 쥐인 삽도 징징 울며 따라간다. 귀찮아 죽겠다는 듯 삼태기(
싸리·댓가지·칡덩굴·짚 등의 재료로 엮어 재·퇴비·흙·돌을 나르는 도구)는 아예 머리에 썼다. 빈 지게를 지고 가던 영택이 아버지가 아이를 보고 한마디 건넨다. “네가 부역((賦役 : 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제도) 나가냐? 할머니는 어디 가시고?” “몸살이 나서.” 목소리가 잠에서 덜 깬 듯 깔깔하다. 영택이 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더니 걸음을 재촉한다. 신작로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일을 시작한 듯 분주하다. 이장이 아이를 보더니 아는 체 한다. “할머니는 그예 못 나오셨냐? 이거야 원 빼 줄 수도 없고… 쯧쯧, 이따 좀 도와주마.” 전날 이장이 부역 통보하러 왔을 때 아이의 할머니가 앓아누운 것을 봤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할머니의 몸살은 유난스러워서 최소 일주일은 누워 있어야 했다. 한 여름에도 한전(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리는 증상)이 난다면서 두꺼운 솜이불을 쓰고 있었다. 이장이 그런 광경을 보았으니 혀를 찰만도 했다. 하지만 신작로 부역이란 게 할당된 몫이 있어서 어느 집을 빼주고 말고 할 수도 없었다. 


*신작로(新作路)는 ‘새로 만든 길’이라는 뜻으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새로 낸 길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굳이 따지자면 신작로를 ‘사라져가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비포장도로를 신작로와 동일한 의미로 쓴다.


아이가 삽과 삼태기를 내려놓고 철퍼덕 주저앉는다. 어른이 해도 쉽지 않을 일이니 엄두가 안 날 수밖에 없다. 신작로부역이란 도로를 집집마다 일정구간씩 나눠서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큰 비가 와서 도로가 깎여 내려갔거나, 자갈을 깔아야할 때 그리고 도로변의 풀베기를 할 때 등은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했다. 물론 자기 집에 할당된 부분만큼만 하면 된다. 어느 곳에서는 ‘비럭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비럭질은 남에게 구걸하는 일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부역을 비럭질이라고 부른 건 ‘나라가 대가도 없이 백성의 노동력을 구걸한다’는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식구가 많은 집은 여럿이 나와 후딱 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노동력이 없는 집은 부역이 고역일 수밖에 없다. 돈 좀 있는 집은 놉을 사서 대신하도록 하기도 했다. 한숨만 토해내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 삼태기에 돌을 담기 시작한다.  아이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금세 송골송골 솟아오른다. 몇 번 돌을 나르다가 힘에 부치는지 길가에 주저앉는다. 언제나 끝날지 아득하기만 하다. 새벽에 나와 일찍 일을 마친 몇몇이 도구를 챙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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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는 한 때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실감하게 만들던 존재였다. 일제가 곡물수탈을 위해 철도를 놓고 도로를 냈다는 점은 통탄할 일이지만, 오지와 대처 간의 통로 역할을 한 것이 신작로임에는 틀림없다. 돈짝만한 하늘과 눈앞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살던 사람들이 신작로가 뚫리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산길을 지나고 고개를 몇 개 넘던 장에 가는 길이, 신작로가 뚫리면서 반쯤은 줄어들기도 했다. 새로 난 신작로에는 가끔 트럭이 달렸다. 자동차라는 걸 처음 보는 사람도 많던 세상이니 트럭 하나도 신기할 때였다. 아이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트럭의 꽁무니를 쫓았다. 신발이 벗어지고 숨이 턱이 닿을 때까지 마냥 달렸다. 트럭이 저 넓은 세상으로 가는 전령사나 되는 것처럼. 그래서 산골의 소식을 대처에 전하기라도 할 것처럼. 더 이상 트럭을 따라갈 수 없게 되고 흙먼지마저 가라앉을 때쯤이면, 아이들은 그 자리에 서서 한없이 손을 흔들었다. 차라고 해봐야 가뭄에 콩 나듯 띄엄띄엄 다니던 때라, 농부들은 신작로에 곡식을 넣어 말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길 위에서 딱지도 치고 팽이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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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는 이별과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신작로 들머리에 발을 딛기만 해도, 삽짝이라도 밀고 들어선 듯 두근거렸다. 고개 위에 올라 게딱지처럼 엎드린 초가집들이 눈으로 들어오면 가슴은 뛰다 못해 저려왔다. 바쁜 걸음 재촉하여 흰머리의 어머니가 기다리는 다리목에 들어서면 목울대까지 치오르는 울음을 자꾸 구겨 넣어야 했다. 그 아들이 다시 고향을 떠나는 날,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들을 따라서 걸었다. 들어가시라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고갯마루에 서서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눈이 아프도록 담고 또 담았다. 신작로가 뚫린다고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지로 나가는 길이라고는 산길 하나뿐이던 동네에 신작로가 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랐다. 마을의 수호신이었던 아름드리나무들이 베어져 나가기도 했고 누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서낭당이 희생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마찰이 일었다. “서낭나무를 베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버티는 동네 어른들과 길을 내야하는 사람들의 싸움은 치열했다. 우회도로로 결말이 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예정대로 도로가 뚫리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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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작로 역시 세월 앞에서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신작로들은 ‘도로포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선거철만 되면 ‘어디어디 도로를 포장해주겠다’는 공약이 난무했다. 비포장도로는 그렇게 하나 둘 사라졌다. 이제 전국 대부분의 도로는 아스팔트 또는 시멘트로 짙은 화장을 했다. 먼지가 구름처럼 일던 신작로에 쌓였던 추억도 단단한 아스팔트 아래 고스란히 묻혀 버렸다. 고무신에 책보 비껴 메고 터벅터벅 걷던, 트럭 꽁무니를 쫓아서 씩씩거리고 달리던 그 신작로를 생각하고 고향을 찾은 이에게는 실망스러운 풍경일지도 모른다. 도로가 포장되면서 바뀐 건 그것 말고도 많다. 숨을 헐떡거리며 오르던 고개는 깎여나가 흔적도 없고, 어지간한 산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다. 몇 시간이고 걸어서 가던 읍내도 승용차로 10~20분이면 도착한다. 좋아진 것도 분명하지만 무언가 허전한 것도 분명하다. 먼지 날리던 옛길이 좋았다고 새삼 한탄할 것까지야 없지만, 가끔은 아스팔트 아래에 깔려있을 그 시절의 풍경을 꺼내보고 싶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마음에 낀 시커먼 세월의 때가 조금이라도 벗어질 것 같은….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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