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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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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블루모스크. 6개의 미나레트가 모두 잡혔다.

블루모스크 입구의 'ㅅ'자 형태로 늘어진 쇠사슬.

나는 지금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혹은 술탄 아흐메트 1세 모스크앞에 서 있다. 오스만 투르크의 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의 명령에 의해 지은 모스크다. 이름이 좀 복잡한가? 그럼 잘 알려진 이름 블루모스크로 부르자. 블루모스크의 정문인 남동쪽 문을 통해 들어가려다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춘다. 문 상단에 굵은 쇠사슬이 자 모양으로 늘어져 있다. 조금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다행이 사람 키보다 높아서 머리에 걸리는 일은 없다. 대체 무슨 용도로 걸어놓은 쇠사슬일까? 사연이 없을 리가 없다. 이 문을 들어갈 때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바로 술탄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술탄이라도 유일신 알라의 성전에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들어갈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말을 타기는 하되 쇠사슬이 늘어진 만큼 고개를 숙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순전히 내 짐작이지만 이 모스크를 지은 아흐메트 1세가 만들어놓은 게 아닐까. 스스로 낮추고 삼가는 자세. 나 역시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민다. 내정(內庭), 즉 안뜰로 들어서려는 찰나에 하늘이 우르르 내려앉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관람객들이 우왕좌왕 몰려다닌다. 나 역시 사진을 찍다말고 회랑으로 피해 비를 긋는다. 대체 이 비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너무 급하게 보려하지 말고 한숨 돌리라는 뜻일까. 하긴 그렇다. 먹는 것뿐 아니라 보는 것 역시 서두르면 얹히기 마련. 숨을 돌리고 나서 찾은 잠깐의 여유는 한담으로 이어진다. 먼저 명랑소녀, 아니 명랑처녀 훌리아가 바람을 잡는다.

 

블루모스크 정면.

블루모스크의 회랑들.

“(특유의 말투로) 저는 2008년 가이드 시작했는데, 실수 많이 했어요.”

쏟아지는 비에 빼앗겼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한번은 어떤 선생님(어지간하면 다 선생님이다)이 저 건물은 언제 지었냐고 물었는데 제가 뭐라고 대답한 줄 아세요?”

그걸 어찌 알아?’ 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입만 바라본다.

~팔새끼라고 했어요.”(이 문장을 받아 써도 되나? 고민 고민)

? 이게 무슨 잡탕밥에 파리 낙하하는 소리? 고객에게 그렇게 험한 말을.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모두 허리를 꺾는다.

“18세기에 지어진 건물이었거든요.”(두 발음이 거의 차별화가 안 된다)

흐흐. 훌륭한 유머였어. 한국에서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면 18세기 식 농담을 한다고 몰매 맞지 않는 게 다행이겠지만, 그대는 터키인 그리고 훌리아니까.

이젯은 재미있는 에피소드 없어요?”

한쪽에서 같이 웃고 있는 이젯의 허를 찔러본다. 하지만 이 친구 한 5분간 그저 눈만 돌리고 있다. 괜히 물었나. 한참 뒤 드디어 대어 하나 건졌다는 듯이 눈이 반짝거린다.

손님이 옷 시장 가자고 하는데, 해물탕 시장으로 잘 못 알아듣고 물고기 시장 갔어요.”

순간 주변의 공기라 싸늘해진다. 이거 웃자고 한 소리 맞아? 설마. 아무도 웃지 않는다. 이젯의 표정이 급격히 우울해진다.

 

회랑의 벽과 천장.

가만? 이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잖아. 그리고 자신의 실수가 얼마나 황당하고 오래 기억에 남았겠어. 나는 안 그런가? 미국 사람이 milk라고 하면 미역으로 들리더라. 내가 가이드였다면 우유 먹고 싶다고 하는데 미역줄기 사다 줬을 거 아닌가. 그래, 뭐든지 상대방 입장으로도 생각해봐야지. 사해동포라는 말도 있는데. 그제야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하! 이젯의 표정이 더욱 우울해진다. 비는 줄기차게 쏟아진다. 위로도 할 겸 이젯을 불러서 부탁을 하나 한다.

지금 한국에는 비가 안 와서 큰일이거든요. 농사지은 게 다 타고 있어요. 이젯이 이 비를 한국에도 좀 오라고 기도해줘요. 여긴 모스크고 이젯은 무슬림이잖아요. 내가 부탁드리는 것보다 훨씬 잘 들어줄 것 같아서.”

그가 기도를 해줬는지는 모른다. 착한 사람이니까 해줬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 저 빗물을 매개로 400,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빗물은 흐르고 스며들어 저 땅 밑 어디엔가 자취를 묻었을 옛사람에게 동양에서 온 한 사내의 뜻을 전하고 있을지도. 400년 전이라고 하니까 느닷없이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다. 내 왼쪽은 히포드롬이고 오른쪽은 성소피아 성당인데 그럼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블루모스크 이전에 무엇이었을까.

 

블루모스크 내부의 샹들리에.

블루모스크의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들.비잔티움 제국 시절에는 지금의 블루모스크 자리에 황제의 궁전과 히포드롬의 관중석이 있었다고 한다. ! 왠지 전차경주를 했다는 광장에 관중석이 없다는 게 궁금하긴 하더라.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뒤에는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래서 블루모스크를 세우기로 결정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그들의 저택을 구입하고 터를 닦는 일이었다. 비잔티움의 옛 궁전 일부는 그대로 모스크의 기초로 쓰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모든 건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잔티움 궁전의 기초 위에 오스만의 모스크가 들어선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성소피아 성당을 지을 때도 곳곳에 있는 그리스 신전에서 기둥뿌리를 뽑아오지 않았던가.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술탄이 되어 이복형의 반란 등 숱한 도전을 극복하고 24년 동안 오스만 제국을 다스렸던 아흐메트 1. 그는 무슨 심정으로 이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을까. 대개는 성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성전을 지어보겠다는 인간적 욕망으로 해석하지만 반드시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신 알라를 통해 제국을 부흥시켜보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가 제국을 물려받았을 때 오스만은 이미 내리막길로 접어든 뒤였다.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쓴 맛을 보고 그때까지 무시하던 오스트리아를 동등한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치욕스런 현실. 그럴 때 인간은 신을 찾는 법이다. 그래서 지은 게 이 거대한 건축물 아닐까.

양쪽의 육중한 기둥들이 '코끼리 다리'다. 

 

짧은 치마나 바지를 입은 여성들은 입장할 때 보자기 치마를 입혀준다.

이 블루모스크는 박제로 걸어둔 문화재가 아니다. 지금도 현역 이슬람사원으로 숱한 무슬림이 찾아온다. 그래서 성소피아 성당과 달리 입구에서 신발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 들어가야 한다. 또 짧은 치마나 반바지를 입은 여성은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건 없다. 찾아온 손님을 박대해서 내쫓지 않으려 나름대로 준비를 해 놨다. 입구에서 한 여자가 파란 보자기를 둘러 입혀 들여보낸다. 줄줄이 서서 임시치마를 입는 모습 역시 장관이다. 적당히 할 것이지. 계속 그 모습을 찍다가 결국 눈총을 한 방 맞고 쫓겨나고 말았다. 한손에 신발을 넣은 비닐봉지를 들고 여자들 사이에 끼어서 죽어라 셔터를 누르는 꼴이라니. 안으로 들어가니 블루모스크 특유의 위용은 여전하다. 전에는 찬란한 빛을 발하는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거대한 샹들리에,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천장의 문양들만 눈에 보이더니 이번엔 중앙 돔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네 개의 기둥이 강렬하게 눈에 들어온다. 5m짜리 기둥을 흔히 코끼리 다리라고 부른다. 성소피아 성당은 두꺼운 벽으로 돔의 하중을 견디도록 설계했는데 비해서, 블루모스크는 중앙의 거대한 돔을 세계의 작은 돔이 받치고 또 이 돔들을 그보다 작은 돔들이 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태다. 그렇게 하중을 분산시킨 뒤 결정적으로 네 개의 육중한 기둥으로 받쳐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소피아 성당보다 더 위대한 건축물을 짓겠다는 목적은 달성한 것일까. 워낙 거대한 건물들이다 보니, 언뜻 보면 규모나 높이 등이 비슷해 보여 그 궁금증은 더 한다.

 

 

여성 전용 예배공간.

행복해 보이는 무슬림 일가족.

결론부터 말하면 딱히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우선 크기 면에서 차이가 난다. 블루모스크의 중앙 돔의 지름은 23.5m, 높이는 43m. 그럼 성소피아 성당은? 지름이 33m에 높이가 56m. 건물 전체로 봐도 블루모스크는 길이 51m에 너비가 53m고 성소피아 성당은 길이 77m에 너비 71.7m. 앞에서 하중을 견디는 설계를 예로 들었듯이, 건축술 역시 1000년 전에 지은 성소피아 성당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다. 애당초 무엇을 이기기 위해, 혹은 무엇보다 나은 것을 만들겠다는 욕심부터가 허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예술품에 우열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그리 바람직한 것일까. 성소피아가 낫느니 블루모스크가 낫느니 하는 내 잣대 역시 무지한 장삼이사의 안목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슬람의 모스크는 여성과 남성의 예배공간이 다르다. 블루모스크라고 다르지 않다. 여성을 2층에 배치하거나, 1층이라도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놓았다. 남녀차별이 아닌 서로를 인정하는 제도이기를. 밖으로 나와 카메라 메모리를 갈아 끼우다 말고, 아이들과 함께 온 무슬림 가족에 눈을 빼앗긴다. 여자는 하얀 히잡을 쓰고 있고 남자는 평범한 차림에 배낭을 메었다. 두 세 살쯤의 아기와 예닐곱쯤 보이는 형은 아직 천진무구하다. 유모차에 앉아있던 아이가 답답했던지 밖으로 나와 아직 비가 그치지 않은 마당을 뛰어다닌다. 괜스레 내가 나른한 행복감에 빠진다. 저들은 무엇을 기원하고 돌아가는 길일까. 신은 저 아이들을 어느 방향으로 데려갈까. 블루모스크를 벗어난 뒤 광장을 가로질러 성소피아 성당으로 향한다.

 

멀리서 본 성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성당 가는 길. 관광객과 상인들이 얽혀있다.

비가 그쳤다. 구름도 조금씩 벗겨져 파란색이 언뜻언뜻 드러나기 시작한다. 블루모스크에서 성소피아 성당으로 가는 길은 운동회 날처럼 인파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벤치 위의 고양이들은 여전히 게으르게 누워 인종 품평회를 하고 있다. 성당 앞의 광장도 지난 가을보다 훨씬 복잡하다. 노점상도 많아졌다. 지도나 장난감을 파는 이들도 있지만, 역시 군옥수수와 밤을 파는 상인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한 눈에 봐도 한국인인 청년 두 명이 다가와 군밤이 든 봉투를 내밀면서 먹어보란다. 조금 전 누가 나눠준 옥수수도 영 맛이 별로여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다. 원래 이곳 옥수수가 그런 건지 미처 익지 않은 걸 구웠는지 모르지만 물컹물컹한 게 성에 차지 않았다. 군밤이라고 특별한 게 있으려고. 그런데, 청년이여! 왜 내게 이른 호의를? 이 친구들은 대답도 하기 전에 킬킬거리며 웃는다.

맛이 없어서요.”

!! 그럼 그렇지. 맛이 없다고 그걸 내게 주나?”

그게 아니라, 성소피아 성당 앞의 군밤은 맛이 없다는 걸 고국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

흐흐, 일리 있는 말이긴 하다. 그래도 그럼 못 쓰느니. 저들도 먹고 살아야지. 그리고 말이다. 청년들아. 우리만 속으면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있어. 한국인들이 많다보니 느닷없이 마주쳐도 전혀 낯설지 않다. 아들 또래의 청년들과 자연스럽게 수다를 떤다.

 

성소피아 성당 정면.

성당 앞에서 옥수수와 군밤을 파는 노점상.

매표소를 지나 성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사각으로 움푹 파놓은 곳이 있다. 대개는 그냥 지나치는 그곳에서 예사롭지 않은 돌들과 만난다. 어떤 돌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기둥의 잔해로 보이는 돌도 있다. 질서 없이 눕거나 서 있는 돌들이 지난 1500년을 이야기 해준다. 이들은 지금의 성소피아 성당 자리에 있었던 옛 성당의 잔해들이다. 저 돌들의 주인인 두 번째 성소피아 성당은 532년의 니카반란에 의해 불타버렸다. 당연히 첫 번째 성당도 있었다. 320년에 세워졌지만 404년 성난 군중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왜 성났는지까지 얘기하려면 너무 복잡해진다. 아무튼 기구한 운명이다. 타고 세우고 타고 세우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돌들이다. 초라한 퇴역군인의 모습이지만, 지금 이 건물을 받치고 있는 돌들보다 훨씬 선배들인 셈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를 어디에 둬야할지 조금 혼란스러워진다. 황제의 허영과 욕망은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건물을 짓기 위해 510개월 4일 동안 1,000명의 목수와 1만 명의 인부가 밤잠을 못 자고 흘린 땀과 눈물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보자.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 장엄한 건축물에 들어서면 내 안에 신성한 기운이 절로 깃드는 것을 느낀다. 내가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알라의 이름이 적힌 원판, 그 옆의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또 그 옆에 선지자 무함마드의 이름을 적은 원판. 그렇게 섞여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불타버린 두 번째 성소피아 성당의 잔해들.

성소피아 성당 내부.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섞여있다.

천장에 그려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사람 눈에 보였든 숨어있었든 그들은 그렇게 500년 이상을 어울려 살았다.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정말 인간의 의지로만 이뤄졌을까. 창으로 들어온 빛이 모두를 감싸 안고 신성을 노래한다. 2층으로 올라가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바닥에 ‘HENRICUS DANDOLO’라고 새겨진 곳. 믿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대리석 바닥을 깨고 만든 무덤이다. 무덤은 예수와 성모마리아, 세례 요한이 그려진 데이시스라는 이름의 성화 맞은편에 있다.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라는 사람이 묻혀 있었다. 그런데 황제나 정교회 수장도 아니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의 무덤이 어떻게 이 위대한 건축물 안에 있을까. 단돌로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을 이끌고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던 사람이다. 다른 시각도 있겠지만 내가 볼 때는 약탈자이자 천하의 악인이다. 4차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 기독교 세력이 기독교 국가를 침략해서 약탈하고 파괴한 행위는 히포드롬에서 조금 비춘 적이 있다. 베네치아 출신의 단돌로는 십자군을 부추겨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게 한다. 12044, 십자군은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엄청난 학살과 파괴, 약탈을 자행한 뒤 라틴 제국을 세웠다. 이때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이익을 확보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 결과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3/8을 차지하게 된다. 이로서 가톨릭과 정교회로 나눠졌던 동서교회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비잔티움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무엇보다 큰 불행은 수많은 문화재와 예술작품이 불타거나 약탈돼 밀반출됐다는 것.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도 저지르지 않았던 역사적 야만행위였다.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

예수와 성모 마리아, 세례 요한이 그려진 '데이시스' 성화.

메카 방향으로 향한 황금색 미흐라브.

아참, 단돌로가 죽은 이야기나 마저 해야지.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다음해인 1205년 사망했다. 그때 나이가 아흔 일곱이었다. 그 나이에 참나 같으면 조용히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겠다. 아무튼 힘이 있던 그는 성소피아 성당 내부, 지금 내가 내려다보는 곳에 묻혔다. 그럼 그걸로 끝? 아니다. 1261년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으면서 무덤은 파헤쳐지고 뼈는 개들에게 던져졌다. 개들도 자존심이 있지 그런 뼈를 먹을리가. 약탈자의 무덤을 보고 나니 더 이상 머물 기분도 아니다. 밖으로 나와 노천카페 의자에 앉아 땀을 들이며 이것저것 메모를 한다. 곧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다. 일행과 합류해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며 걸어간다. 도착한 곳은 ‘ETHNIC’이라는 간판이 붙은 레스토랑 겸 카페.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데 이젯이 메뉴설명을 한다.

오늘 소스는 거지예요.”

거지? 이게 무슨 소리지? 중국에서 거지닭은 먹어봤지만 소스가 거지라는 건 처음인데? 몇 번 확인하는 과정에서 거지가 아닌 가지임이 밝혀진다. 에구, 저 친구 언제 한국말 다 가르치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식당은 경치도 좋고 다른 손님들도 없어 비교적 안락하다. 식사도 푸짐하고 맛이 있다. 먹고 마시니 마음이 한껏 누그러진다.

 

에피타이저 샐러드 메인 요리 '케밥'

메뉴판 속의 비빔밥. 모든 메뉴 중에 가장 비싸다.

"빨리, 빨리"를 외치던 수박 파는 청년.

후식은 바클라바(Baklava)’라는 사탕과자. 버터와 벌꿀레몬시럽의 범벅으로 말 그대로 단맛의 종결자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먹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으니 주인이 다가와 “very very sweet”이란다 최고의 단맛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엄청 sweet”이라고 했더니 그도 엄청 sweet”이라고 따라한다. 그러면서 엄청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뭘 무슨 뜻? 당신 말대로 very very라는 뜻이지. 당신네 나라말로는 이고. 설명을 듣더니 나도 한국말 좀 안다고 으쓱거린다. 한번 해보라니까 삼성, 엘지, 현대란다. 기껏 배운 말이 그 세 단어였어? 그리고 엘지는 한국말도 아니잖아. 안되겠다. 한국어 교습 좀 하고 가야지. “내가 ‘Are you happy?’라고 하면 아저씨는 뭐라고 대답 해야지요?” "으음~ 엄청 happy!!” 그렇지, 그렇지. 참 말도 잘 들어. 하란다고 넙죽넙죽 따라 하냐? 결국 나는 느닷없이 생긴 제자에게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까지 완벽하게 교육했. , 그냥 이 나라에 남아서 한국어 교습이나 할까봐.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메뉴표가 보이길래 한국음식은 없나 싶어 차분차분 들여다본다. 그러다 기어이 낯익은 이름을 찾아낸다. ‘Bibimbap’ 옳지. 신선로까지는 아니어도 그 정도는 있어야지. 그런데 가격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진다. 무려 25리라. 한국 돈으로는? 환율을 700원씩만 쳐도 무려 17,500원이다. 길을 되짚어 나오다 좌판에 잘라놓고 파는 수박이 예뻐 보여서 사진을 찍는데 수박 파는 총각도 한국말로 한마디 한다. “빨리~ 빨리~” 아냐!!! 이건 아니란 말이야! 누군지 좋은 것 가르쳤다.

 

posted by sagang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멀리서 본 블루모스크

히포트롬에 서 있는 이집트 오벨리스크

고향 떠난 오벨리스크 앞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이스탄불을 하루 만에 돌아보겠다는 것은 이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게 주마간산으로 둘러볼 곳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어쩌랴. 이번에는 신이 내게 준 시간이 그뿐인 것을. 맛보기라도 하려면 뛰듯이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내가 세운 여행 철학과는 어긋나지만 이런 기회라도 주어졌음에 감사해야지. ! 어서 가자. 트램을 내린 술탄아흐메트 정류장에서 로마와 비잔틴 시대 전차 경주가 벌어지던 히포드롬은 코앞이다. 보통은 성소피아 성당(아야소피아 박물관)에서 출발해서 술탄 아흐메트 1세의 자미(블루모스크), 이곳 히포드롬 순서로 돌아보게 되지만 1분이라도 아까운 나는 그 코스를 거꾸로 잡았다. 세로 500m, 가로 117m의 히포드롬은 공원이 돼 있다. 이곳은 비잔틴 제국의 중요한 국가행사가 치러지던 곳이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높다랗게 솟아있는 기둥. 이집트 오벨리스크(Egyptian Obelisk). 지금부터 3500년 전인 BC 16세기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룩소르의 라크라크 신전에 세운 2개의 기둥 중 하나라고 한다. 신전 이름이 어떻게 간이침대 이름 같냐. 지금 그거 신경 쓸 땐 아니지.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가져와서 지금 있는 자리에 세웠다. 오벨리스크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한다는데, 그 상징성에 눈독을 들인 것이겠지. 이집트가 로마의 속국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짐작은 가지만 한 나라의 상징물이 점령자의 욕심에 의해 제 땅을 떠난 건 마뜩치 않다.

오벨리스크 기단에 새겨진 부조.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뱀기둥.

 이 오벨리스크는 기단에 새겨진 부조로 유명하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명령에 의해 그의 가족과 측근들이 마차 경주를 관람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무지함으로 뒤덮인 내 눈에는 숱한 조각품들 중 하나일 뿐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게 뱀이 휘감은 듯 나선으로 된 기둥. 재료는 청동으로 보인다. 이 뱀기둥은 BC 478년 페르시아를 물리친 기념으로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앞에 세운 승전탑이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제가 있던 곳에서 살 팔자가 못 됐던지 콘스탄티우스 대제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원래는 높이가 8m에 달했지만 머리 등이 파손되고 5m정도만 남아 있다. 본의 아닌 타향살이도 서러울 텐데 훼손까지 당한 걸 보니, 꿈도 의지도 사라지고 몸까지 쇠락해버린 망명객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떨어져 나간 뱀 머리 가운데 하나는 이스탄불 국립 고고학박물관에, 또 하나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니 이별이 멀고도 길다. 광장을 벗어나 블루모스크로 접어든다. 블루모스크, 정식 이름은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 자미는 이슬람 사원을 말하는데 터키어로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모스크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 같은데 두 단어 사이의 정확한 차이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길게 풀어 써보자면 오스만 제국의 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가 지은 이슬람 사원정도가 될 것 같다.

여러 방향에서 본 블루모스크. 세번 째 사진에서 여섯개의 미나레트를 확인할 수 있다.

블루모스크에 담긴 사연

블루모스크는 1609년에 착공돼 1616년에 완공됐다. 이 사원이 유명한 것은 내부의 아름다움에 있다.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실내를 비추는데, 그 빛이 21000장의 푸른색 타일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느낌을 불러온다. 그 때문에 블루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보통은 맞은편의 성 소피아성당을 먼저 둘러보고 블루모스크를 보는데 거꾸로 들어가다 보니 역사를 거꾸로 걷고 있는 셈이다. 순서야 어쨌든 이 두 건물은 가까이 있다는 것 이상으로 깊은 연관이 있다. 그 사연을 잠깐 듣고 지나가보자. 오스만 제국의 14대 황제였던 아흐메트 1세는 성소피아 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그 무엇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이 성당에 미나레트(첨탑)를 세우고 모스크로 바꾸긴 했지만 비잔티움제국이 세운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찜찜하기도 하고 열도 받았던 것이다. 고심 끝에 그는 성소피아 성당보다 더 멋진 모스크를 하나 세우기로 한다. 결국 블루모스크라는 역작은 성소피아라는 불세출의 걸작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셈이다. “그래, 결심했어술탄은 그 당시 가장 잘 나가는 건축가 메흐메트 아가를 불러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문제는 그 당시 오스만 제국의 경제력은 그 정도 건물을 지을 형편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충성스런 건축가였던 아가, 그런 현실과 지금은 때가 아님을 간곡히 진언했지만 왕이라는 캐릭터는 원래 주변 말을 안 듣고 어깃장 놓는 게 주특기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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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모스크의 안뜰.

뭔 잔말이 그렇게 많다냐? 그냥 지어. 특히 미나레트는 본때 있게 황금으로 떡칠 혀봐.” 그래서 할 수 없이 짓기 시작한 게 이 블루모스크다. 술탄은 기공식에 직접 나와 삽질을 하고 흙을 나를 만큼 기대가 컸단다. 쯧, 삽질 좋아하는 거 하고는그런데 특이한 건 이 블루모스크의 미나레트가 6개라는 점이다. 이웃의 성소피아 성당 등 대부분의 모스크는 2~4개의 미나레트가 고작이다. 미나레트 자체가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오로지 이슬람 성지 메카의 모스크만 6개를 세운다고 한다. 완공 후 현장에 간 술탄이 기가 막혀 물었다. “아니, 저것이 워째서 여섯 개랴?” “아따, 시방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허신대유. 원래 여섯 개 세우라고 혔잖유?” 이렇게 어긋나게 된 사연이 있다. 물론 기록에는 없는 야사(野史). 터키어로 6알투(Altu)’, 황금은 알툰(Altun)’이다. 왕은 알툰, 즉 황금 미나레트를 세우라고 지시했는데, 건축가는 그걸 알투, 즉 여섯 개를 세우라는 말로 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 건축가의 귀가 어두워서 그리 된 걸까? 그렇지 않았다는 후문이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린다. 술탄은 철없이 고집을 피우지만, 미나레트마저 황금으로 세우면 나라 곳간이 완전 바닥날 걸 염려한 건축가가 미친척하고 알툰대신 알투미나레트를 세웠다는 것이다. 물론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말도 있다. 술탄이 원래 여섯 개를 세우라고 해놓고 메카의 눈치를 보느라 건축가의 어두운 귀를 탓했다는 설이다.

블루모스크 내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환상적이다.

 
환상의 푸른빛을 보다

이제 블루모스크에 직접 들어가 볼 차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만찮은 위용에 감탄사부터 나오게 된다. 지금까지 터키에서 본 건축물 중 가장 크고 당당하다. 높이 43m, 직경 27.5m의 거대한 중앙 돔을 4개의 중간 돔이 받치고 있어 무척 안정적이다. 또 그 주변으로 또 30개나 되는 작은 돔들이 배열돼 있어 장관을 연출한다. 마치 크고 작은 몽골 게르들을 보는 것 같다. 본당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6개의 미나레트 앞에 서서 역사의 기록이 숨겨뒀던 뒤안길을 더듬어본다. 실내로 들어가면 감탄사는 더욱 커진다. 수없이 많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들이 쳐놓은 환상적인 푸른 커튼. 아름답다. 어쩌면 이 빛을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나머지 까마득한 돔형 천장이나 거대한 샹들리에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밖으로 나와 잘 가꾼 정원에서 조금 전 본 걸작을 되새김질 해본 뒤 성소피아 성당으로 향한다. 블루모스크와 성소피아 성당 사이에는 깔끔하게 단장된 광장이 있다. 그곳에는 각국에서 온 관광객과 한가한 고양이들이 햇볕을 즐기고 있다. 나도 잠시 돌 의자에 몸을 기댄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의 하나. 교과서에서 시작해 숱하게 듣고 사진으로 봤던 성소피아 성당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감동스런 순간은 잠깐의 뜸을 들인 뒤 마주칠 때 더 가슴을 뛰게 하는 법이다.

성소피아 성당.

성소피아 성당의 원래 명칭은 그리스어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였다. 신성한 지혜라는 뜻이다.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뒤에는 아야소피아(Ayasofya)라고 불렀다. 지금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성소피아 성당, 이슬람 세계에서는 성소피아 사원이라고 하는데 1934년 박물관으로 지정된 뒤 공식이름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다. 멀리서 얼핏 보면 블루모스크와 비슷한 것 같은데, 또 집중해서 보면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지은 사람이나 시기의 차이일까. 높이 54m, 동서 길이 77m, 남북 길이 71.7m. 정사각형의 벽 위에 지름 32.96m짜리 돔 지붕을 올린 비잔티움 시대의 대표적인 성당. 우선 외관부터 기가 질릴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성소피아 성당도 덩치나 역사만큼 숱한 이야기와 사연을 품고 있다. 지금의 성당이 있는 자리에는 비잔티움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0년에 세운 큰 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불타버리고 416년에 다시 지었다. 그러나 이 건물 역시 532년에 일어난 시민들의 폭동(니카의 반란)으로 불타는 비운을 맞이한다. 창녀 출신이었다는 말도 있는 여걸 테오도라 황후 덕분에 반란을 평정한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는 화재로 없어진 성당보다 더 크고 견고한 성당을 짓도록 명령한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의 모든 것이 동원됐다. 목수 1000 명과 노동자 21만 명이 투입됐고 최고의 건축자재를 사용했다.

성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공식명칭인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라고 써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기 전의 회랑.

회랑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화. 가운데가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

성소피아 성당이 생긴 사연

특히 목재로 지었기 때문에 화재가 잦았다는 핑계로, 고대 신전의 기둥까지 뽑아다 썼다. 이때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델피 신전의 대리석 기둥도 징발돼 머나먼 이곳으로 옮겨졌다. 황제의 성당 욕심에 나라의 기둥뿌리가 남아나지 않은 셈이다. 5322월에 착공한 성당은 510개월 만인 53712월에 완공됐다. 준공테이프를 끊고 성당에 들어서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외쳤다는 한 마디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진다. “,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 아무튼 황제 정도 하려면 뭔가 멋있는 말 한 둘쯤은 준비하고 다니나 보다.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아름다운 걸작을 자기 대에 완성했다는 감동에서 나온 말이었다. 성소피아 성당은 돔 양식 건축물의 백미로 꼽힌다. 중앙 내부 면적은 7000m². 엄청나게 넓다. 비잔티움 석조 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107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이 성당은 동방 정교회 수장인 대주교가 머무는 곳으로 비잔티움 제국 기독교 신앙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진, 화재 등으로 수난을 겪다가 12044차 십자군 원정 때는 성상과 성물들이 대거 약탈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이교도도 아닌 기독교도가 기독교의 상징을 턴 것이다. 결정적인 시련은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에 의해 함락 당하면서 일어난다.

성소피아 성당의 내부. 숱한 샹들리에와 이슬람문자가 새겨진 원판이 눈에 띈다.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의하면 점령지에는 3일 간의 약탈이 허용된다고 한다. 당연히 성소피아 성당도 약탈 대상이 됐다. 하지만 성당의 아름다움에 압도된 점령군주 메흐메드 2세는 병사들에게 건물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 뒤 이 성당에 미나레트를 세워 이슬람 사원으로 만들고 모자이크로 된 기독교 성화 위에 회칠을 해서 가려버렸다. 비극이지만 부숴 없애지 않을 것만으로도 고마워 할 일이다. 그렇게 회칠로 덮여졌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회반죽벽에 그려진 벽화기법)1931년 미국인 조사단에 의해 발견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역사를 훑어봤으니 이제는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씩 확인할 차례. 성당은 줄을 서서 입장해야 할 정도로 인파가 넘쳐난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와 관광객들이다. 문을 들어서니 본당 앞에 큰 회랑이 나타난다. 기도를 준비하던 곳이라고 한다. 여기서 본당으로 들어서는 문은 모두 9개인데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문이 황제만 드나드는 전용 문, 황제의 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황제는 간데없고 세상의 온갖 장삼이사들이 그 문을 드나든다. 물론 나도 잠시 황제가 되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들어선다. 황제의 문 바로 위에 모자이크화가 보인다. 성당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성화다.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은 천사 가브리엘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는 비잔티움 황제 레오 6세다.

내부 천장. 두번 째 사진 가운데 상단에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가 보인다.

성소피아 성당에 들어가다

그림의 내용은 황제가 예수 앞에서 아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황제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신권, 새삼 경외심이 든다. 오른쪽 문 외벽 위에는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 모자이크가 있는데 오른쪽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콘스탄티노플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봉헌하고 있다. 왼쪽은 성소피아 성당을 지은 유스티아누스 황제인데 그가 지은 성당을 봉헌하고 있다. 봉헌이라는 단어를 입에 되뇌다 보니 서울시를 자신이 믿는 신에게 봉헌했다는 전직 시장님이 떠오른다. 원래 이렇게 봉헌들을 하는구나. 시장은커녕 통반장 할 자격도 못되는 난 뭘 봉헌하지? , 다행스럽게도 내겐 봉헌 받을 신이 없구나. 본당으로 들어서면 누구나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우선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거대한 돔과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빛, 숱한 샹들리에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종교와 상관없이 온몸은 성스러움으로 충만해진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충동이 든다. 중앙 돔을 중심으로 이슬람 문자가 크게 새겨진 원판이 시선을 잡는다. 무하마드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을 써놓은 것이란다. 직경이 7.5m나 된다는 이 글씨 판은 이슬람 세계 최고의 달필로 손꼽힌다는데 이 까막눈이 제대로 알아볼 수나 있나. 금색으로 치장한 이슬람교 예배의 표상 마흐라브(Mihrab)는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는데 이는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성당 내부 모습.

마흐라브 옆에는 설교단인 밈베르(Mimber)가 있고 왼쪽은 술탄이 앉던 자리가 있다. 천장에는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쏟아지는 빗살 위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별 사전 지식 없이 이 글을 읽는 분은 이 친구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야? 대체 기독교 성지에 간 거야, 이슬람 성지에 가 있는 거야한 마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슬람 술탄 얘기를 하다 느닷없이 아기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튀어나오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난 두 눈으로 본 대로 전할뿐이다. 현장에 있는 사람도 정신없을 정도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상징물들이 혼재돼 있다사람에 따라서는 정체성을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는 엉덩이를 조금씩 좁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촌로들처럼 보기 좋다. 칼을 맞대고 싸우던 종교 간에 이런 공존도 가능하구나낯선 자각을 하게 된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강제로 지워지는 게 인류가 남긴 궤적 아니었던가. 그런데 난 두 개의 종교가 한 공간에서 기나긴 세월을 동거해온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하긴, 문제는 신의 뜻 보다는 해석하고 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신은 애당초 인간에게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라고 일렀을 것이다. 그래서 신(어느 쪽이라고 규정할 건 없다)은 이런 공존의 현장을 남겨 욕심과 아귀다툼으로 날을 새우고, 나와 다른 건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건 아닐까. 이교도의 상징물을 차지하고도 예술품들을 파괴하지 않고 미래의 어느 날을 열어뒀던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2세에게 새삼스레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땀 흘리는 기둥에 붙어 있는 동판. 저 구멍에 엄지를 넣고 한 바퀴 돌리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2층으로 올라가는 경사로.

경사로 바닥의 돌은 세월을 흠뻑 머금고 있다.

모자이크화가 주는 감동

인간이 반드시 파괴적이고 잔인한 존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가슴은 더 없이 포근해진다. 감동은 감동, 탐색은 탐색!! 2층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입구 쪽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떡이라도 나눠주나? 비집고 들어가 본다. 떡은 없고 그 유명한 땀 흘리는 기둥이 서 있다. 기둥이 땀을 흘린다고? 하긴 피눈물 흘리는 성모상도 있고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어대는 나무도 있다는데 기둥이 땀 좀 흘린다고 흉 될 건 없을 게다. 기둥에는 구멍이 뚫린 동판이 있다. 줄을 선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 동판의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씩 돌린다. 완전히 한 바퀴 돌리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세상에 소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줄이 길어질 수밖에. 줄에는 기독교인도 이슬람교도도, 동양인도 서양인도 있다. 산타클로스의 고향,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도 소망을 빌기 위해 어두운 통로를 한 바퀴 도는 사람들을 봤는데. 소망을 이루겠다는 마음은 어디든 다르지 않구나. 돌부처 앞에서 손금이 닳도록 무언가 간구하던 우리네 민초들의 모습이 다시 한 번 오버랩 된다. 나도 잠깐 망설인다. 줄을 섰다가 한 바퀴 돌려? 에라, 나 같은 속물이야 기껏 복권 어쩌고 할 텐데, 그냥 팔자대로 살다 가자. 그 시간에 사진이라도 한 장 더 찍지. 1층 탐색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간다. 회랑의 왼쪽 끝에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2층은 여성들이 예배를 보던 곳이라고 한다.

가장 유명한 벽화. 가운데가 예수, 왼쪽이 성모 마리아, 오른쪽이 세례 요한이다.

성소피아 성당의 외부.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아닌 자 모양으로 이어지는 경사로로 만들어 놨다. 조금 어두컴컴한 길은 붉은 조명을 받아 약간의 으스스한 느낌과 경외감을 동시에 제공한다. 돌로 된 바닥은 시간을 흠뻑 머금어 반질반질 빛을 발한다. 2층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것은 모자이크화다. ‘천국의 문이라 이름 붙은 대리석 문을 지나면 익히 보고 들은 모자이크화가 기다리고 있다. 가운데 예수가 있고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 그리고 왼쪽에 성모 마리아가 있는 그림이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인간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회칠을 하고 벗기는 과정에 겪었던 시련 때문인지 상당 부분 훼손돼 있다. 그 상처가 있어 더욱 가치 있고 소중해 보인다. 모자이크화에 시간이 남긴 이야기가 얹힌 셈이다. 이밖에도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엄마, 이쪽으로 와봐!” “어이구, 다리 아퍼 죽겄다중간 중간에 우리말도 제법 많이 들린다. 이스탄불에서 한국인과 부딪히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1, 2층을 한 바퀴 돌고 났더니 급격하게 피로가 밀려온다. 사람들 틈을 헤치고 밖으로 나와 뜰에 잠시 앉는다. 건물의 엄청난 규모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른다. 이런 작품을 남긴 옛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음을 옮긴다. 메두사의 머리로 유명한 지하궁전으로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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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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