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수배자'에 해당되는 글 2

  1. 2009.01.27 [사라져가는 것들 95] 세실레스토랑5
  2. 2008.06.30 [사라져가는 것들 65] 숙박계-임검2
2009. 1. 27. 10:09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젊은 한 때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으나, 기신기신 앓다가 명줄을 놓아버린 친구의 빈소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이젠 더 이상 ‘레스토랑’으로 불릴 수 없는 ‘세실’을 두 번째 방문하는 길에 든 생각이다. 일주일 넘게 세상을 꽁꽁 얼려놓았던 강추위가 물러간 대신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표정은 환하게 피어있다. 젊은 연인들이 제대로 쌓이지도 않은 눈을 뭉쳐 눈싸움 흉내를 내고 있다. 저들은 이곳에 세실레스토랑이라는 한 시대의 아이콘이 존재했다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쓸데없는 자문을 하다말고 쓴웃음을 놓는다. 세실의 외양은 며칠 전 왔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문도 잠겨있지 않다. 유리문을 밀다말고 주춤 그 자리에 서고 만다.

<손대지 마시오 현장보존처분된 상태임/2009.1.13 주인백>

유리에 붙여놓은 종이가 발걸음을 잡는다. 아!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부고가 여기 이렇게 초라한 형태로 붙어있구나. 한 장의 종이가, 혹시나 하던 마음에 여지없이 쐐기를 박는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나선형계단과 길게 늘어뜨린 샹들리에, 간판은 여전한데 며칠 전까지 보이던 사진이나 장식물은 없다. 결국 세실레스토랑의 죽음을 확인하러 온 셈이다. 쓸쓸히 발길을 돌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실레스토랑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한 시대의 광풍을 가슴으로 맞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세실이라는 이름에 꽤 큰 의미를 부여한다. 대뜸 ‘민주화’ ‘기자회견’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 1979년에 문을 연 이곳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던 8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인사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또 많은 사회단체 등이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그들의 생각을 세상에 알렸다. 진보성향의 사람들이 주로 찾았지만 종교인이나 예술인들도 자주 발길을 했다. 메인 홀 외에도 방이 여러 개 있어 간담회를 열기도 좋았고, 음식 값도 비교적 비싸지 않았다. 또 남녀가 선을 보면 꼭 이뤄진다는 속설이 있어서 젊은 남녀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세실이 이름을 날리게 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성공회 대성당의 부속건물에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 투쟁을 하는 이들에게는 ‘소도’와 다름없는 곳이었다. 시위를 하다 이곳으로 피신하면 더 이상 쫓아 들어가지 못했다. 수배자들도 자주 찾는 곳이었다. 이철씨가 천장구멍을 통해 탈출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손님의 성격도 바뀌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보수 인사들도 자주 찾기 시작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실레스토랑은 서울시내 한복판에 있다. 덕수궁과 성공회성당의 중간에 있는 골목길 초입쯤으로 서울시청의 건너편이다. 1월초, 10일까지만 영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세실레스토랑의 입구는 ‘과도하게’ 소박했다. 조그만 유리문 하나 달랑 달려있는 게 전부였다. 문을 열고 들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면 나선형 계단과 샹들리에가 보이고 벽에는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인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분위기는 요즘 잘 꾸며놓은 레스토랑에 비해 전체적으로 무거운 편이었다. 시계바늘을 20년쯤 뒤로 돌려놓은 느낌까지 들었다. 메인 홀은 무척 넓은 편이었다. 가장 먼저 눈길을 잡는 건 벽에 가득 붙은 서명들이었다. 이곳에 다녀간 유명 인사들이 남긴 흔적이다. 정동영‧김근태‧한화갑에 이명박‧신지호‧박진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정동영과 이명박은 2007년 대선에서 김근태‧신지호는 2008년 총선에서 일전을 겨룬 인연을 갖고 있다. 그밖에도 문인‧체육인‧종교인들이 남긴 흔적들이 벽을 덮고 있었다. 신사참배 문제가 불거진 뒤 세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남겼다는 가수 조영남의 서명도 보였다. 박찬욱이나 윤도현 같은 이들도 한쪽에 이름을 남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중년 남자가 나와서 맞이했다. 세실레스토랑의 업주인 정충만(52)씨였다. 자신은 지배인일 뿐이라고 극구 부인했지만 얘기 끝에 “지분이 좀 있다.”는 말로 업주임을 인정했다. 그가 안내를 자처했다. 민주화 운동의 산실을 운영했다는 자부심과 쫓기듯 문을 닫아야하는 현실에 대한 비감이 얼굴에 교차했다. 명사들이 남긴 서명을 하나하나 짚으며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영삼‧김대중‧지선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님‧한명숙‧박계동‧유시민…. 정파나 종교와 상관없이 나란히 붙은 이름들에서 한 시대의 음영을 읽을 수 있었다. 홀 안쪽에는 기자간담회가 주로 열리던 방들이 있다. 정씨의 설명을 들으며 크고 작은 방들을 돌아봤다. 벽 한쪽에 걸린 액자에서 세상사의 덧없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하고 말았다.

역사의 현장
민주화의 산실인 바로/이 세실레스토랑에서/‘민주 항쟁’ ‘민주화 선언문’을 낭독한 역사의 현장이며/현재에도 가끔 기적이 일어나는/곳으로 ‘세실’에서 그 무엇을/향해 추구하거나 고민하면/이루어지는 곳이며 서울/최고의 명당 자리로 입소문이/나면서부터 하루에도 많은/사람이 방문하는 곳으로/유명합니다.

액자 안에 들어있는 문구다. ‘추구하고 고민하면 이루어진다’는 집에서 어찌 스스로의 운명조차 지키지 못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홀 한쪽에는 세실의 운명 같은 건 아랑곳없다는 듯, 젊은 손님 몇이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업주 정씨는 폐업과 관련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문과 논란이 많았던 민감한 부분이다. 그는 광화문 일대에서 열렸던 촛불시위가 문을 닫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걸 애써 숨기려하지 않았다. “좋은 일을 한다고 켠 촛불이지만 그 뒤에는 아픔도 있었다.”면서 "인파 때문에 이곳까지 올수 없었던 손님들이 예약을 취소했고, 그렇게 줄어든 매출은 그 뒤로도 회복이 안됐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을 전후로 한나라당 인사들이 많이 찾았고 보수 시민단체들도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자주 열었다."며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인사나 단체들이 마주치다 보니 불편해 발길을 끊은 것 같다."고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았다. “권리금을 10억 원 주고 들어왔는데 결국 임대료가 2억 원이나 밀렸다.”면서 “성공회 측에서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그간의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도 이곳이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되는 창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세실의 의미가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소규모 국제회의장으로 쓴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확실치 않다고 전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따지고 보면 세실레스토랑이 문을 닫게 된 게 어찌 촛불 때문 만이랴. 긍정적 결과든 부정적 결과든, 역사의 변화는 단 하나의 계기로 이뤄지지 않는다. 세실의 폐업 역시 여러 원인들이 쌓여 만들어진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세실 자체가 이미 시대의 흐름을 놓쳤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몰래 모여서 기자회견을 하고 민주화운동의 수배자가 천장의 비상구로 탈출하는 세상은 아니다. 세실이 아니더라도 기자회견을 할 곳은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정충만씨의 말대로 좌(진보)와 우(보수)가 한 공간에서 부딪치는 게 불편했을 수도 있다. ‘밥집’이란 레스토랑 본연의 역할로도 마찬가지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굳이 인테리어가 별로 세련되지 못한 세실까지 찾아다닐 이유는 없을 것이다. 결론은 어느 누가 문을 닫게 한 것이 아니라 세월이 닫게 한 것이다. 강물이 흐르듯, 한 시대가 지나가고 그 뒤를 새로운 시대가 메우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하지만 시대의 강을 헤엄쳐온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뒤를 돌아보기 마련이다. 내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실레스토랑의 폐업은 역사의 페이지 한 장을 세월이란 배에 실어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만으로도 아쉬워할 이유는 충분하다.

posted by sagang
2008. 6. 30. 14:11 사라져가는 것들
여인숙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 입구에 서면 나는 빈 의자들하고 흥정을 하고 싶어진다

나를 다시 낳아줄래요?


맨 처음 나를 낳은 것은 어머니였지만 아랫도리를 내리고 나를 두 번 째 낳은 것은 여인숙이다,

그날 밤의 나를 어머니, 다시 깨끗하게 낳아줘요, 매달리고 싶게 만든 것도 여인숙이다


가끔 나는 숙박계에 이 세상에 없는 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쓰고 벽에 구름의 바지를 걸어놓고 잠든 적도 있다

그런 어느 날 번갯불이 유리창에 금을 그으며 지나가고 백열전구는 밤새 깜박거리며 어둠의 알을 낳았다


골목은 훌쩍 커버렸다 골목이 밖에 나가 놀다 오면 지금도 젖을 꺼내 물린다는 늙은 여인숙,

그녀가 골목의 어머니였다


세상의 모든 여인숙 간판의 불을 끄지 말자 비어 있는 방이 있다는 거다

몇겹 페인트칠이 벗겨진 것은 누군가 허벅지 비비는 밤을 보내고 있다는 거다

나이 든 어머니에게 애인을 붙여주자


안도현 <세상의 모든 여인숙> 전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척 추운 날씨다. 온 세상이 얼어붙은 것 같다. 어둠은 진즉에 주렴을 내렸지만,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다. 거리에는 강아지 한 마리 보기 힘들다. 취객 하나가 자꾸 꼬이는 두 다리를 추스르며 지나간 뒤로 인적이 끊겨버렸다. 큰길에서 이어진 골목은 먹지라도 깔아놓은 듯 캄캄하다. 그 어둠속에서 한 쌍의 눈이 빛난다. 잠시 뒤 한 사람이 민첩한 움직임으로 골목을 지나간다. 조금 들어가자 외롭게 서 있는 가로등 하나가 나타난다. 불빛 아래로 골목을 지나온 사람의 윤곽이 드러낸다. 스물 한 둘이나 되었을까. 오래 갈아입지 못한 듯한 입성에 몹시 지친 얼굴이다. 하지만 언뜻 보이는 눈빛은 날카롭다. 그 눈빛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다. 가로등과 조금 떨어진 곳에 2층짜리 여관이 하나 서 있다. 타일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벽에는 퇴락의 흔적들이 훈장처럼 매달려있다. 문 앞에는 둥그런 갓을 씌운 백열등 하나가 희미한 불빛을 밝히고 있다. 한참 주변을 탐색하던 청년이 빠른 동작으로 여관 문을 민다. 딸랑딸랑! 문에 매단 종이 자지러진다. 하지만 인기척이 없다.

두리번거리던 청년이 작은 미닫이창을 똑똑 두드린다. 조금 뒤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부스스한 머리 하나가 불쑥 나온다. 이 추운 날 누가 오랴 싶어서 초저녁잠에 빠졌던 모양이었다. “주무시고 가시게?” 여자가 청년의 아래 위를 훑으면서 말을 잘라먹는다. 청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203호로 가요” 여자가 고갯짓으로 2층을 가리킨다. "1층은… 없나요?“ 여자가 다시 한번 청년을 훑어본다. ”끝에서 두 번째 방. 107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드르륵 닫는다. 방은, 많은 사람과 긴 시간이 조금씩 남기고 떠난 퀴퀴한 냄새로 청년을 맞는다. 다행이 방바닥은 뜨겁다. 갑자기 더운 곳에 들어온 청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린다. 청년이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여차하면 튀어나갈 듯한 자세로 비켜선다. 그러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한숨을 깨물며 다시 앉는다. 여자가 쟁반을 내려놓더니 숙박계를 슬그머니 청년 앞에 밀어놓는다. 숙박계에는 볼펜 하나가 포로처럼 묶여진 채 따라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청년의 볼펜이 ‘성명’란 앞에서 잠시 주춤하더니, 금세 ‘조필수’라고 적는다. 그리고는 일사천리다. 주민등록번호, 주소, 직업, 행선지…. 막힘없이 써내려간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이름부터 주민등록번호까지 누구의 소속도 아닌 것들이 적혔을 것이다. 여자는 신상 따위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아니면 어차피 가짜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껌을 씹는다. 다 쓴 숙박계를 내밀자 여자는 청년을 다시 한번 힐끔 쳐다보고 방에서 나간다. 곧바로 문을 잠근 청년이 바닥에 눕는다. 모처럼 등에 닿는 따뜻함이 황홀하다는 표정이다. 그러다가 금세 코를 곤다. 하지만 평화는 너무 빨리 깨져버리고 만다. 청년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문으로 다가가 귀를 댄다. 언제 코를 골았나싶을 정도로 눈빛이 반짝거린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임검…" 어쩌고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입구 쪽 방이다. 청년이 빠른 동작으로 창 쪽으로 가 문을 열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훌쩍 뛰어내린다. 고양이처럼 민첩하다. 호루라기 소리가 간헐적으로 골목을 달린다.

1990년대 후반? 2천년대 초반?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언제부턴가 숙박계(宿泊屆)니 임검(臨檢)이니 하는 말들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숙박계는 여관·여인숙 등에 묵는 사람이 이름이나 주소·행선지 등의 인적사항을 적는 서류이다. 까만 표지에 까만 철끈으로 묶여져 있었다. 숙박부, 숙박신고서 등으로도 불렀으며 본인이 직접 기재하도록 했다. 여관에 들어갈 때 숙박비를 치루면서 쓰기도 했지만, 보통 종업원이 방으로 물주전자와 함께 들고 들어왔다. 숙박계의 내용은 관할 경찰관서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간첩 색출이나 범죄예방 및 범죄자 검거’가 목적이었다. 일제 때 소위 불령선인이나 독립운동가를 단속하기 위한 ‘위생법’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가장 먼저 버렸어야할 치욕의 유산이다. 이 숙박계의 효과 역시 의심스럽다. 누가 하룻밤 묵으면서 자신의 신상을 시시콜콜 밝히고 싶겠는가.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이 가짜 이름이나 주소를 적기 마련이었다. 특히 수배자들은 ‘가짜 신상명세서’를 숙지하고 다니기 때문에 망설일 것도 없었다.


임검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행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담당공무원이 사무소·영업소·공장·창고 등에 가서 업무의 실시상황이나 장부·서류·설비, 기타 물건을 검사하는 일’이라고 돼 있다. 원래의 뜻이야 어쨌든, 경찰관이 여관 등에 불시에 찾아와 투숙객을 검문하는 것을 임검이라고 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가장 난감했던 건 남녀투숙객이었다. 오밤중에 불쑥 “임검 나왔습니다”하고 방문을 두드리면 자다가도 문을 열어줘야 했다. 부랴부랴 옷을 꿰입고 문을 열면 주민증 내놔라, 숙박계에 쓴 것과 왜 다르냐, 둘은 어떤 관계냐는 등 꼬치꼬치 따지기 일쑤였다. 대답을 제대로 못하거나 조금 수상하다 싶으면 경찰서까지 동행하는 일도 많았다. 임검이 악용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여관주인이 적당하게 ‘인사’를 치르면 임검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뻣뻣하게 굴면 수시로 드나드는…. 냉전시대의 산물이었다든가 범죄예방을 위해 불가피했다든가 하는 ‘시대의 변명’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국민의 사생활이 양말짝만도 못하게 다뤄졌던 시절이었음은 분명하다.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