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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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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나스'에 해당되는 글 1

  1. 2012.11.19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 19] 지워진 도시 하란

당나귀 수레를 타고 평원을 지나가는 일가족.

지워진 도시, 하란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시원하게 뚫려 있다. 샨르우르파를 벗어나면 그 끝을 가늠하기 쉽지 않은 들판이 펼쳐진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시퍼런 물빛을 자랑하는 수로. 풍부한 수량과 빠른 유속을 자랑한다. 이 수로들은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걸까. 인간의 끝없는 도전 정신에 새삼 혀를 내두른다. 이게 바로 GAP프로젝트의 결과다. 유프라테스 강에서 끌어들인 물을 실핏줄처럼 이어진 수로로 보내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것이다. GAP프로젝트가 미치는 범위는 터키 땅의 10%나 된단다. 관계자들은 이스라엘 땅보다 더 크다고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지금 지나고 있는 이 하란 평원은 터키에서 가장 넓은 평야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지만 비가 많지 않아서 농사에 애로가 많았지만 물이 풍부하게 공급되면서 터키 제1의 곡창지대로 우뚝 섰다. 특히 이곳에서는 목화가 많이 난다.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은 파란 목화밭이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다. 목화가 벌기 시작하면 장관일 것 같다. 버스는 당나귀 마차를 타고 밭 사이를 지나는 일가족을 지나친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선 듯 평화롭다. 조금 더 내려가면 같은 나라 사람끼리 죽고 죽이는 전쟁터가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하란은 샨르우르파에서 남쪽으로 44km쯤 떨어져 있다. 내전이 한창인 시리아와는 접경을 이루고 있다. 계속 달리던 차가 느닷없이 좌회전을 한다. 훌리아가 중요한 걸 놓쳤다는 듯이 급하게 말한다.

지금 좌회전한 데서 10km만 더 가면 시리아 국경이 나와요.”

, 조금만 일찍 말해주지. 이정표라도 찍어놨어야 하는데.”

 

하란으로 가는 왕복 4차선 도로.

구경이 아닌, 뭔가 기록해야한다는 목적을 가진 취재여행은 고통을 동반한다. 신경줄을 팽팽하게 당겨놓고 챙긴다고 챙기지만 뭔가 놓치는 것 같다는 느낌에 시달린다. 늘 하는 소리지만, 혼자 온 여행이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시리아 국경선으로 갔을 것이다. 곡창지대를 벗어나 하란으로 가까이 갈수록 조금씩 황량해지는 느낌이다. 마치 사막에 들어선 것 같다. 푸른색보다는 누런 황토색이 더 많아지고 먼지마저 풀풀 날린다. 조금 더 달리니 길옆으로 하란성이 나타난다. BC 4000년부터 있었던 성이라고 하니 그 역사를 헤아려본다는 게 부질없어진다. 세월 탓인지 사람 탓인지, 지금은 거의 폐허가 돼 있다. 8개의 문이 있었는데 다 무너지고 1개만 남았다. 곧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옛 도시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 말이 옛 도시지 어딜 가나 쓸쓸한 풍경뿐이다. 둘러보기도 전에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그 유서 깊은 고대도시가 이렇게 몰락하다니. 하란이 얼마나 오래된 곳인가 하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정착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물론 전설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방증으로 삼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또 하란은 구약성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그의 며느리가 되는 리브가,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리브가의 아들인 야곱은 모두 이 하란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그 이야기는 뒤에 천천히 하기로 하자. 하란 여행에서 구약성서를 빼놓으면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으니까.

 

하란에 들어서면 이런 폐허들이 나타난다.

역사에서도 하란은 중요한 도시였다. 히타이트 제국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탄니 왕국의 중심지였다. 히타이트에 패망한 뒤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뒤 바빌로니아, 파르티아의 영토가 되었다가 알렉산도르스왕에게 점령당한다. 한때는 시리아에 흡수되기도 했고 에데사, 즉 지금의 샨르우르파에 수도를 둔 오스로에네 왕국의 주요 거점이 된다. 지금은 침묵하는 땅, 하란평원이 품은 이야기는 밤을 새워도 부족할 만큼 많다. 그중에서도 로마의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끈 인물 중 하나인 크라수스가 이 평원에서 최후를 마친 이야기는 듣고 가야한다. 크라수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 공화국을 주무르던 실세였다. 그런 그가 왜 이곳에서 죽어갔을까. 따지고 보면 과도한 욕심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는 사업가지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부동산에 특히 능력을 보였는데, 그것으로 로마 최고의 부호가 될 정도였다. 지금 태어났으면 땅값 좀 올려놨을 것 같다. 크라수스는 돈을 모으는 데 물불을 안 가렸다. 상도? 그런 건 개에게 던져줘 버렸다. 카이사르가 집권하기 이전의 로마에는 경찰서나 소방서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치안대 같은 게 만들어진다. 여기서 크라수스의 도적질에 가까운 재능이 발휘된다. 어느 부호의 집에 불이나면 크라수스가 치안대를 이끌고 나타난다. 그리고는 집 주인을 불러 그 집을 팔라고 한다. 물론 불에 타고 있는 집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후려친다. 판다고 하면 불을 꺼주고 싫으면 그냥 가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결국 주인은 두 손을 들고 그렇게 산 집을 비싸게 되판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 뺨을 칠 사람이다. 혹시 직접 불을 지른 건 아닌지 모르지.

 

무너진 성 위엔 전봇대 뿐.

그런 그가 집정관으로 당선되면서 로마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된다. 헌데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폰토스 미트리다테스 왕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폼페이우스나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에 비해 전쟁 공훈이이 없었다. 지도자로서 엄청난 콤플렉스였다. 그렇게 비극은 시작된다.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로마 시민이 인정하는 승리를 얻겠다는 열망으로 파르티아 원정에 나선다. 이 원정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며 유능한 장군으로 성장의 아들 푸블리우스도 큰 몫을 했다. 물론 원정에 나서게 된 가장 큰 목적은 한 몫 잡아보자는 것이었다. 시리아에서 크라수스가 가장 열심히 한 일은 예루살렘신전을 비롯한 곳곳의 신전에서 보물을 약탈하는 것이었으니 더 말해 무얼 하랴. 예나 지금이나 있는 것들이 더한다니까. BC 53년 크라수스는 총 6개 군단에 약간의 오리엔트 용병, 그리고 아들 푸블리우스가 이끄는 갈리아 기병대 1천기까지 약 4만 명을 이끌고 원정을 나선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승패가 군인의 수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당시 하란 지방의 군주였던 오스로에네 왕국의 아브가루스 2세가 파르티아와 내통하고 있었지만 크라수스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길잡이가 된 아브가루스는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가는 대신 하란 평야로 로마군을 유인했다. 길 안내를 맡은 사람이 아브가루스가 아닌 아랍의 귀족이란 설도 있다. 로마군을 사막지대로 유인하는 임무를 띤 첩자였다고 한다. 안내자가 누구였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크라수스는 애초부터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배회하는 소들.

한편 하란 평야에는 물자와 무기를 넉넉히 챙겨둔 파르티아군이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덫은 단단했고 그물은 촘촘했다. 파르티아에는 수레나스라는 젊고 유능한 장군이 있었다. 그가 이끄는 파르티아 기마병 2만여 기와 로마군이 만났다. 짜식들~ 2만이야? 4!! 크라수스는 로마군 특유의 정사각형 형태의 밀집대형으로 군사들을 배치한다. 그러나 수레나스는 순식간에 기마병을 활을 쏘는 궁기병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낙타들을 이용해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화살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파르티아의 궁기병은 돌격해서 맞장을 뜨는 대신 멀리서 화살을 쏘기 시작한다. 문제는 파르티아 군의 활이 워낙 강해서 로마군의 방패가 그대로 뚫린다는데 있었다. 속수무책.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크라수스는 아들 푸블리우스에게 파르티아 궁수들의 뒤를 쫓으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궁기병들은 퇴각하면서 몸을 180도로 비틀어 활을 쏘는 파르티아군 특유의 공격(파르티안 샷)을 퍼붓는다. 용맹을 자랑하던 갈리아 기병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푸블리우스는 추격을 자제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적들에게 우롱 당했다는 분노로 머리에서 김이 풀풀 날 지경이었다. 결국 퇴각이 불가능할 정도로 깊숙이 들어가고 말았다. 아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안 크라수스는 전군에게 진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 역시 독 안으로 찾아 들어가는 쥐 꼴이었다. 황무지 한가운데서 로마군은 완전 포위되었다. 로마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이번엔 파르티아 보병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무너진 옛 신전.

로마군이 대패하고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서자 수레나스는 크라수스에게 화평을 제의한다.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넘기라는 조건이었다.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했지만 로마 병사들은 회담장에 나가라고 압력을 가했다. 개죽음 당하기 싫다는 것이었겠지. 크라수스는 만약 자기가 죽더라도 적의 속임수 때문이지 아군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남기고 혼자 적을 향해 걸어갔다. 참 쓸쓸한 뒷모습이다. 총사령관을 혼자 보내는 게 못할 짓이라 생각한 참모장 옥타비우스가 장교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 수레나스는 크라수스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는 강가에 따로 장소를 마련해두었으니까 거기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면서, 마부를 시켜 말을 끌고 오게 했다. 말이 한 마리뿐인 것을 본 옥타비우스는 수레나스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알아챘다. 즉각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고 마부를 찔러 죽였다. 놀란 수레나스와 수행 장교들도 칼을 빼들었다. 그 때 옥타비우스가 소리쳤다.

"우리는 로마군이다! 총사령관을 빼앗기는 설욕을 참을 수 없다!!"

파르티아의 장교들과 로마 장교들의 칼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 옥타비우스가 숨지면서 크라수스도 숨을 거뒀다. 그를 찌른 건 아군이었다. 총사령관을 적의 포로가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갸륵한 생각이었겠지. 찌른 자가 적의 편으로 갔다면 나쁜 놈이겠지만 같이 죽었다면 그 또한 충정일 터. 그런 과정을 거쳐 지휘관을 잃은 로마군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울루자미로 가는 길은 쓸쓸하다.

장신구를 파는 아이들.

BC 53년 크라수스의 나이 62세였다. 장군으로서 무능했든 오로지 돈만 알았든 삼두정치의 한 축이 그렇게 황야에서 숨진 건 충격이었을 것이다. 돈에 살고 돈에 죽는 걸 좌우명으로 삼았던 한 사내의 욕심 끝은 그렇게 비참했다. 나는 전쟁사를 읽을 때마다 빛나게 혹은 부끄럽게 죽어간 장군들보다는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병사들을 생각한다. 크라수스나 푸블리우스, 옥타비우스가 아닌 장삼이사란 이름의 집단에 묻힌, 기억되지 않는 숱한 생명들. , 잊고 갈뻔한 뒷얘기가 하나 있다. 그 싸움에서 포로가 된 로마인들은 지금의 한나라와의 국경에 수비병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얼떨결에 중국인들을 만난 최초의 유럽인이 아니었을까. 기원전, 그것도 멀고먼 나라의 집정관이 죽은 이야기를 너무 길게 썼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하란 평야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찌 그를 만나지 않고 갈 수 있으랴. 버스는 삭막한 땅 한가운데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왜 이곳을 이렇게 내버려 둘까. 샨르우르파 주에서는 이곳 자체를 야외박물관으로 보존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래서 건물의 신축이나 도로 포장을 허가하지 않는다. 반문명적인 내 시각으로는 무척 잘하는 일이다. 비까번쩍하는 건물이 들어서는 순간 풍경이 얼마나 망가질까. 눈앞에는 커다란 건물 하나가 서 있다. 말이 건물이지 거의 무너져가고 있기 때문에 황량한 들판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의연함이 있다. 8세기에 만들어진 신전이라고 한다. 금화 1000만개를 들여서 지었다고 하니 그 당시로는 엄청난 건물이었을 것이다. 한 때는 대상들의 숙박시설, 즉 카라반사라로 쓰였다고 한다. 이곳은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저 낙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득한 옛날이 돌로 남았다.

하란이 얼마나 철저하게 부서졌으면 신전조차 폐허로 변했을까. , 크라수스 이야기를 먼저 하다 보니 하란의 역사를 건너뛰었구나. 로마의 치욕은 크라스수의 죽음 정도로 끝날 팔자는 아니었나보다. 296년에는 로마의 갈레리우스 황제가 이곳 하란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한판 벌였다가 참패를 당했다. 때문에 651년 이슬람군이 차지할 때까지 하란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세월이 흐른 뒤 유럽과 이슬람이 부딪힌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104년 제1차 십자군과 이슬람군이 하란성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는데 유럽의 참패였다. 바로 이웃인 에데사는 별 문제 없이 점령해서 나라까지 세웠는데 망신살이 뻗친 셈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하란의 역사가 끝난 건 아니다. 잘 나가던 도시가 왜 이렇게 폐허로 남았는지는 얘기하고 가야지. 셀주크투르크가 지배하고 있던 1259. 몽골에서 일어난 정복자 징키즈칸의 손자인 홀레구가 이끄는 원정군이 이곳에 도착했다. 셀주크군은 그들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함락되고 만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주거 역사를 자랑하는 땅, BC 2000년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해 고도의 문명을 자랑했던 고대도시, 한 때 아브라함이 살았던 땅은 말굽 아래 짓밟히고 사람들은 죽어갔다. 건물은 기둥뿌리까지 뽑혀 폐허가 되었다. 몽골군이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했던지 길고 긴 세월이 흘러도 하란은 다시 도시로 피어나지 못했다. 오늘날까지도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마을일 뿐이다. 어찌 사람만 죽어갔으랴. 그 긴 역사가 키워낸 문명과 유적들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흔적만 남은 울루자미.

 

무너진 모스크를 구경하고 있는데 흙집과 돌무더기 사이에서 나타난 송아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니 일행을 구경한다.

아저씨들은 어디서 왔어요?”

짜식,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이 동네에서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만 통제받지 않고 돌아다니는 동물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소와 염소가 많다. 땅 위에 거뭇거뭇 한 것은 모두 소똥이라고 보면 된다. 귀에 인식표가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이 있는 녀석들이다. 모래뿐인 이곳에서 저들은 대체 무엇을 찾아다니는 걸까. 몇몇 녀석은 별 것도 없는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한다. 하란 특유의 고깔모양의 흙집을 지나 황량한 벌판을 걸어간다. 너무 쓸쓸하다. 인간이 인간의 흔적을 이렇게 파괴할 수도 있구나. 한낮의 기온은 기어이 온도계를 깨트려버리겠다는 듯 계속 치솟는다. 바로 시리아의 이웃이니 사막의 기온을 제대로 맛보는 셈이다.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 한 그루 없는 대지,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걸어가며 나는 자꾸자꾸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른 건지, 마음이 마른 건지. 울루자미로 가는 길에 대여섯 살 쯤 돼 보이는 아이들을 만난다. 손에는 역시 목걸이 같은 조잡한 기념품을 들고 있다. 내가 만난 일하는 아이들중 가장 어려 보인다. 사라는 말도 없이 그저 관광객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무엇이 저 아이들을 이 뜨거운 햇살 아래 세웠을까.

 

저 문으로 누군가 드나들었겠지.

폐허에 쳐놓은 철조망은 무엇을 의미할까.

루자미, 아니 그 잔해는 평원에 누워있다. 그 와중에 저 홀로 우뚝 선 33.3m의 미나레트가 생뚱맞다. 나머지는 대부분 무너지고 깨어졌다. 흔적만 남은 담장, 아치형의 문. 그게 전부다. 누가 이곳이 소아시아에서 최초로 지어진 모스크였을 거라고 짐작이나 할까. 모스크를 중심으로 엄청나게 큰 도시가 형성됐었다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모스크는 우마이아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마르완 2세 때 지었다고 한다. 혹자는 이슬람 세계에 지어진 최초의 대학이라고도 한다.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기 전 이 자리에는 고대 세계의 점성가와 석학들이 모여들어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원이 있었다. 주로 의학, 수학, 천문학 등을 가르쳤다. 이곳은 뜻밖에도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다. 야훼 하느님은 그 때문에 아브라함을 이 땅으로 인도한 것일까? 하란은 세계 최초로 파가니즘이 생겨난 곳이라고 한다. BC 1100년경 신(SIN이라는 달의 신을 숭배하는 아시리아 사람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을 사비라고 부르고 종교는 사비아교라고 불렀다. 이 종교는 초창기 그리스도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그리스 철학과 과학을 이슬람 세계에 전해주었다.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정복하면서 그들의 신전을 이슬람 양식의 모스크로 개조하고 신학교를 만들었다. 그렇게 세상살이는 교대를 하는 것인가 보다. 누군가 살던 땅을 타인이 점령하고, 또 누구는 점령자들의 문화를 초토화시키고. 철조망 사이로 아무리 안쪽을 들여다봐도 사람 사는 이치를 가르쳐 주는 이는 없다. 쓸쓸히 몸을 돌려 돌아가는 수밖에.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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