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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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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죽'에 해당되는 글 2

  1. 2008.04.14 [사라져가는 것들 53] 쟁기질19
  2. 2008.03.17 [사라져가는 것들 49] 가마솥10
2008. 4. 14. 16:45 사라져가는 것들
이랴~ 이랴~ (ㅉ, ㅉ, ㅉ) 이랴~ 이랴~ (ㅉ, ㅉ, ㅉ) 워! 워!

 

나무들이 겨우내 품고 있던 초록을 잔가지마다 밀어내기에 분주할 즈음 들녘에는 논밭을 가는 농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봄은 농부의 땀과 쟁기의 보습을 타고 논으로 밭으로 마을로 춤추듯 옵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은 봄바람의 간지럼에 키득키득 웃다가 자신도 모르게 눅지근하게 풀어져버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보여도 그 땅에 그대로 씨를 뿌리는 농부는 없습니다.

깊이 숨었던 땅의 속살을 끄집어내어 햇볕과 바람 아래 널어두는 것으로부터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됩니다.

지난해 농작물에게 양분을 다 내어준 땅거죽을 갈무리하여 쉬게 하고, 1년간 힘을 비축한 속살을 불러내는 게 바로 쟁기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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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은 추수가 끝난 늦가을부터 새 봄의 농사를 준비합니다.
보습이 녹슬지 않도록 잘 닦아서 보관하는 것은 물론, 겨우내 지극정성으로 소를 돌봅니다.
쇠죽을 끓일 때마다 쌀겨를 듬뿍 넣고 사람도 아껴먹는 콩으로 보신을 시키기도 합니다.
소는 겨울에 잘 먹여둬야 봄에 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새내기 일소에게는 코뚜레도 하고 멍에를 얹어서 무거운 것을 끌고 다니는 훈련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야 봄에 꾀를 안 부리고 논밭갈이를 잘 합니다.
남녘으로부터 꽃소식이 들려오면 농부는 살이 두둑하게 오른 소를 앞세우고 논밭으로 갑니다.
멍에를 얹고 부리망(풀을 뜯어먹는 등 딴전 피우기를 막기 위한 입마개)를 채우고 쟁기를 맨 다음 “자! 올해도 잘해보자”하고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겨울에 새끼를 낳은 암소는 안타까운 풍경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엄마를 따라 밭으로 나온 송아지는 쟁기질을 하는동안 왔다갔다 따라다닙니다.
어미는 그런 새끼가 눈에 밟혀 일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그러다 잠시 쉴 때면 가쁜 숨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선 채로 젖을 물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아무 소나 쟁기를 끄는 게 아니듯이 농부도 아무나 쟁기를 부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쟁기질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처음 쟁기질 하는 사람은 소에게 질질 끌려 다니다가 삐뚤빼뚤 땅거죽만 벗겨놓고 말기 십상입니다.

보습을 적당히 박아 넣어 제대로 갈아엎지 않으면 쟁기질을 하나마나입니다.

그렇다고 보습이 땅에 박혀버릴 정도로 깊이 찔러 넣으면 힘만 빠지지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와의 교감입니다.

좋은 농부는 소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소는 기계처럼 부리는 게 아니라, 가족처럼 일을 나누는 것이라는 순리를 아는 까닭이지요.

대충 이랴~ 이랴~ 하며 따라다니면 논밭이 갈아지는 것 같아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가 말을 잘 듣기도 하고 꾀를 부리기도 합니다.

소를 아는 농부는 함부로 욕도 하지 않습니다.

쟁기질에 능숙한 농부는 이곳저곳에서 일을 해달라고 찾기 때문에 농사철에는 눈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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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구경하기 힘든 궁벽한 마을, 놉을 사기도 어려운 농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아내가 소가 되고 남편이 쟁기잡이가 되어 밭을 갈기도 했습니다.
원래는 작물을 심어놓은 밭의 이랑을 돋울 때, 다른 작물을 다치않기 위해 사람이 끌던 것이지만 소가 없어서 끌기도 했지요.
지금은 거의 보기 힘든 장면입니다.
하긴 요즘은 인간이 끄는 쟁기질은커녕 소가 끄는 쟁기질도 보기 어렵습니다.
어지간한 벽지, 손바닥만한 논밭에도 기계가 들어앉아 쟁기질을 합니다.
소를 거두는 것도 힘들지만, 쟁기질을 할만한 근력을 가진 젊은 농부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경운기를 몰 능력마저 안 되면 눈물을 머금고 묵정밭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지요.
소쟁기질을 보려면 산골짜기 비탈밭이나 기계가 들어가기 어려운 다랑논을 찾아가야 합니다.
사연이야 어떻든 간에, 농촌에 갈 때마다 소쟁기질이 사라진 풍경은 낙락장송이 빠진 산수화처럼 허전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은 앞으로 달려가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선천적 그리움증’ 환자가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같이 들고요.


두번 째 사진은 서울신문 사진부 남상인 부장이 제공했습니다.

posted by sagang
2008. 3. 17. 18:3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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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K의 전화를 받은 건 토요일 아침이었다. 휴일 새벽이면 카메라가방을 메고 어디든 떠나는 게 오랜 습관이지만, 몸이 개운치 않은 탓에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P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P는 지난해까지 서울에서 살다가 갑작스레 시골로 내려간 친구였다. 아버지가 노환으로 누운 데다 가문을 이어갈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어느 날 식솔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살벌한 ‘IMF 치하’에서도 꿋꿋이 지켜냈던 직장도 미련 없이 버렸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가문 잇기’ 타령이냐고 친구들이 펄펄 뛰었지만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계속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K의 차에 동승하여 P의 고향으로 향했다. P의 집은 눈 밝지 못한 내가 봐도 명당이다 싶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설의 아흔아홉 칸’ 까지는 안 되겠지만 규모도 꽤 크고 오랜 세월 쌓아왔을 '위엄'  있는 집이었다. 가문타령을 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종 전에 병원으로 모시려했지만, P의 아버지가 끝내 집을 떠나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가는 길에 K에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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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문의 위세답게(?) 상가는 분주했다. 바깥마당부터 차일을 여러 개 치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게, 농촌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해줬다. 안마당으로 들어서는데, 한쪽에 커다란 가마솥을 서너 개 걸어놓고 장작을 지피고 있었다. 제법 탐스러운 불땀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솥 하나에서는 밥 익는 냄새가 구수했고 다른 솥에서는 국이 끓는지 김이 푸짐했다. 정작 발길을 잡고 놓지 않는 건 그 옆의 풍경이었다. 초로의 아낙들이 솥뚜껑에 전을 부치고 있었다. 고소한 기름 냄새, 지글거리며 익는 전들. 침이 꿀꺽, 목을 타고 넘어가더니 오래 잠자고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나왔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가마솥은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 1호였다. 농촌의 하루는 가마솥과 함께 시작했다. 겨울엔 쇠죽부터 끓였다. 소는 겨우내 잘 먹여놔야 농사철에 힘을 쓴다. 아버지는 날이 밝기도 전에 가마솥에 겨와 콩깍지, 짚 썬 것 등 쇠죽거리를 넣고 장작을 지폈다. 쇠죽이 끓기 시작하면 구수한 냄새가 아침을 가득 채웠다. 그맘 때쯤이면 부엌의 작은 가마솥에서도 밥이 푸푸 끓어올랐다. 어머니는 불을 조절하면서 작은 종지에 계란을 하나 풀어 솥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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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이 있는 풍경은 세월이 가도 어제 일처럼 정겹다. 불 때는 아궁이에 감자나 고구마를 묻어놓고 기다리던 시간은 얼마나 달콤했던지. 가마솥 뚜껑에 김치전이라도 지지는 날이면 쪼그리고 앉았다가 갓 부친 전 한 장 받아들고 후후 불어가며 입에 구겨 넣을 땐 차라리 감동이었다. 가마솥으로 지은 밥은 유난히 맛이 있었다. 가마솥의 재료인 무쇠 자체가 뜨겁게 가열되는 전체가열방식이기 때문에 밥이 고르게 익는 것은 물론 밥맛도 뛰어났다. 또 솥뚜껑의 무게 때문에 수증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 수증기가 솥 안의 기압과 온도를 빠르게 높여줘 요즘의 압력밥솥과 같은 효과를 냈을 것이다. 높은 온도에서 빠르게 익힌 밥이 찰기와 향기가 뛰어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밥을 푸는 기색이면 부엌문 앞에 눌어붙어 있기도 했다. 밥을 다 푼 다음 어머니가 손에 쥐어주던 따뜻한 누룽지 한 덩어리. 아껴가면서 조금씩 떼어먹던 누룽지 맛은 도시에 나와 먹었던 그 어떤 고급 음식도 비교가 안될 만큼 입에 달았다. 가마솥은 메주를 쑤거나 두부를 할 때, 엿을 고을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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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의 역할과 의미는 단순히 솥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족공동체가 형성되고, 그 것이 누대로 이어져올 수 있게 한 매개체 중 하나가 가마솥이었다. 한 두 사람의 밥을 짓기 위해 가마솥을 쓸 일은 없다. 대가족이 한 공간에 둘러앉아 먹을 밥을 준비하기 위해서 가마솥 규모의 취사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을 공동체 역시 가마솥을 매개로 음식을 같이 만들고 나눔으로써 결속을 다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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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경사든 흉사든 어느 집에 일이 생기면 부뚜막을 만들고 가마솥부터 걸었다. 그런 때는 이웃의 가마솥들도 동원되게 마련이었다. 공동경작 역시 가마솥을 통해 음식을 나누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산업화시대의 고개를 숨 가쁘게 넘는 과정에서 대가족은 소가족, 핵가족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더구나 농기계의 급격한 보급은 공동경작이라는 오랜 전통을 무너뜨렸다. 가족의 해체와 공동경작의 붕괴는 사회형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젠 대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거나, 논둑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참을 먹고 막걸리 잔을 돌리는 모습을 구경하기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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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하게 가마솥의 역할도 끝났다. 여기서 채이고 저기서 녹슬고, 가족과 짐승의 먹을거리를 한 몸으로 책임졌던 터줏대감이 고물상이나 반기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 앞에서 쇠죽을 쑤고 밥을 하는 풍경은 깊은 산골이나 찾아가야 볼 수 있게 되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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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 둘러앉아 밥을 먹거나, 이웃 간에 음식을 나누며 솜이불처럼 도타운 정을 과시하던 모습은 전설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가마솥’을 내세운 밥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에서도 쓸 수 있는 가마솥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하지만 그저 그럴 뿐이다. 음식점에서 가마솥 밥을 판다고해도서 그 밥에 사라진 정서까지 넣어 팔 수는 없는 일. 가마솥과 구수한 숭늉 맛이 사라진 뒤 세상이 이렇게 삭막해졌다고 말하면 억지일까? 가마솥과 함께 사라진 나눔의 미덕이 너무 아쉬워서 하는 말이다. P의 상가에 머무는 내내 가마솥 안에 매몰돼 헤어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엔, P가 도시를 떠나 태가 묻힌 자리로 찾아든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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