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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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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달구지'에 해당되는 글 2

  1. 2008.07.07 [사라져가는 것들 66] 소달구지13
  2. 2008.04.22 [사라져가는 것들 55] 방앗간20
2008. 7. 7. 11:14 사라져가는 것들
아비는 달구지꾼이었습니다.

어릴 적엔, 그 많은 직업 중에 하필 달구지를 몰고 남의 짐이나 나르는 일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아비를 원망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물려받은 것이라곤 바늘 꽂을 땅 한 평 없는 이가,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오갈 데 없던 아비가 남의 집 꼴머슴으로 들어간 것도 주어진 운명 만큼일 겁니다.

꼬박꼬박 모은 새경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키웠던 것도 사주에 그리 적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아비는 한 곳에 주저앉아 일할 팔자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그런 천성을 역마살이라고 불러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슴 살던 주인집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송아지가 부룩소(작은 수소)꼴을 벗자마자 달구지 하나 얹어 세상을 마냥 걸었겠지요.

달구지를 구루마라고 부를 때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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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엄을 낼 때, 추수를 할 때, 방아를 찧으러 갈 때… 어지간한 일에 달구지가 없으면 안 되었습니다.

지게 역시 유용한 도구였지만 일을 해내는 양으로는 달구지의 발밑에도 따라갈 수 없었지요.

장을 보러갈 때도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달구지를 내어 곡식이나 채소, 나무 등을 싣고 갔습니다.

따라서 마을마다 달구지 한두 대는 반드시 있었습니다.

아비의 달구지는 그런 일도 했지만, 짐을 싣고 멀리 떠나는 게 주업이었습니다.

트럭 같은 차들이 이 땅의 신작로를 누비기 전, 달구지는 거의 유일한 장거리 운송수단이었습니다.

먼 곳으로 가는 이삿짐도 소달구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짐이 있을 때마다 아비는 달구지를 몰고 길을 떠났습니다.

어느 땐 아주 멀리 가서 여러 날을 돌아오지 않기도 했지요.

짐을 가득 싣고 터벅터벅 떠나는 모습이 가족에게는 안타까움이었겠지만, 정작 당신은 그런 삶을 기쁜 마음으로 싸안고 살았던 것 같았습니다.

여러 날 만에 빈 달구지로 돌아온 아비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장작도 패고 울바자(대·갈대·수수깡·싸리 따위로 발처럼 엮어서 울타리를 만드는 것)도 손보고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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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짐을 실어다주고 밤길을 걸어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돈을 아끼려 주막거리를 그냥 지난 탓에 배가 등가죽에 붙었어도 아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걸었습니다.

휘영청 떠오른 달과 지나는 바람, 길가의 나무들을 관중 삼아 ‘황성옛터에~’ 노래 한곡을 불러 제치기도 했습니다.

낙천적 성격을 가졌던 아비는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좋았습니다.

하굣길에 그의 달구지를 만나면 아이들에게는 ‘운수 좋은 날’이었습니다.

허리에 두르거나 어깨에 비껴 맺던 책보를 달구지에 던져놓고 뒤에 대롱대롱 매달리거나 온갖 장난을 치며 따라갔습니다.

보통은 그럴 때, “이놈들 저리가라!!”하고 소리치기 마련이지만 아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하는 짓에 껄껄 웃다가, “이놈들, 구루마 타고 싶어 그러지?” 하고는 달구지에 오르도록 허락했습니다.

작은 아이들은 손수 안아서 올려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도 보답을 할 줄 알았습니다.

달구지에 짐을 가득 실은 소가 허연 거품을 물고 고갯길을 오를 땐, 아이들이 영차! 영차! 구령을 맞춰 밀어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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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지는 보통 나무로 짜는데 소가 끌면 소달구지나 우차(牛車), 말이 끌면 마차(馬車)라고 불렀습니다.

바퀴 역시 나무로 만들었는데, 마모를 막기 위해 겉에는 얇은 쇠를 둘렀습니다.

70년대 이후에는 나무바퀴 대신 자동차 타이어를 달기도 했지요.

아비 역시 자동차 타이어를 달아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구하기도 쉽지 않고 가격도 비싸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긴, 이미 그 무렵부터는 달구지 시대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신작로에 트럭들이 달리고, 산골까지 버스가 다니게 되면서 달구지를 쓸 일이 점차 줄어들었던 것이지요.

아비만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니 왜 모르기야 했을까요.

할 수 있는 거라곤 달구지를 몰고 길을 오가는 일뿐이었으니, 알면서도 고개를 젓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운명은 아비 앞에 똬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짐 하나를 맡아 길을 떠났다 돌아오던 날, 아비는 의식을 잃은 채 달구지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달구지를 타고 오다 어디쯤에서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진 것을, 길을 잘 아는 소가 알아서 집까지 온 것이지요.

간신히 의식을 차렸을 땐, 몸의 반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비의 소달구지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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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달구지를 구경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농촌에 경운기 같은 기계가 대량 보급되면서, 사라져가던 달구지의 운명에 못을 박게 된 것이지요.

요즘도 지역축제 같은 곳에 가면 이것저것 주렁주렁 매단 달구지가 아이들을 태우고 오가지만, 그걸 달구지라고 하긴 낯이 좀 뜨겁습니다.

물론 달구지가 사라진 이 땅엔 더 이상 ‘아비’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 모를 일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소고삐를 질금 잡고 어둠이 질펀하게 깔린 고샅길을 들어서던, 작고도 여윈 아비의 모습이 왜 자꾸 커지는지.

소달구지의 그 삐걱거리던 소리와 구수한 쇠똥 냄새가 왜 몹시도 그리워지는 건지.

올 여름에도 아비의 무덤가에는 무성하게 자란 쐐기풀들이 키를 재고 있을 테지요.


posted by sagang
2008. 4. 22. 19:1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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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어쩌면 실제로 겪지 않았던 일이 우연히 뇌리에 들어와 박혀버린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게 몇 살 때였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주워온 강아지 나이를 어림하듯, 초등학교 2~3학년쯤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상한 것은, 막상 따지고 보면 별 일도 아닌 그 장면이, 미처 꺼내지 못하고 굳어버린 손끝의 가시처럼 아픔으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리도 깊이 박힌 걸까. 그날 아이는 어머니를 따라 방앗간에 갔었다. 아이의 집은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또 방아를 찧을만한 곡식도 없었다. 그러니 그날 방앗간을 찾은 건 양식을 빌려볼까 해서였을 것이다. 아이의 가족은 여러 날을 제대로 먹지 못한 터였다. 아이의 어머니로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쌀이 있으니 갈 수밖에 없는 곳이 방앗간이었을 것이다. 그들 모자(母子)가 안으로 들어서도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밝은 곳에 있다가 갑자기 들어선 방앗간은 꽤 컴컴해서 처음에는 사물이 구별되지 않았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고막을 찢어놓기라도 할 듯 달려들었다. 잠시 뒤 시야가 좀 트였을 때 꿈틀거리고 있는 커다란 괴물이 맨 먼저 보였다. 구동축과 피대(皮帶, 벨트)가 어지러울 정도로 돌아가고 있었고 시커먼 자루에서는 하얀 쌀이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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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가라는 이 없는 그곳에서, 그들 모자는 망연하게 서 있었다. 비록 가족의 삶을 지키려 찾아갔다고 해도 쌀을 빌려달라는 말이 쉽사리 나올 리는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심정 한편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망설임 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통이 명멸하고 있을지. 그런 건 말로서가 아니라 가슴과 가슴으로 전이되는 것이니. 그냥 돌아가자고 말하려, 어머니에게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구름 속에 숨었던 해가 얼굴을 내밀었는지, 열린 창을 통해 햇빛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온갖 부유물을 뚫고 쏜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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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달리는 햇빛은 날카로운 창들 같았다. 그 햇빛폭포가 달려서 멈춘 곳이 하필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 순간 아이는 갑작스레 햇빛에 드러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주춤 물러섰다. 그 얼굴은 그동안 알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었다. 가난 속에서도 항상 빛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는 어디로 사라지고 한없이 초라한 얼굴 하나가 거기 있었다. 그 얼굴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가로 세로로 달리고 있었다. 착잡함과 부끄러움과 슬픔을 내포한…. 그게 전부였다. 그 외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금세 걸음을 옮겨 햇빛폭포에서
벗어났고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기억에 없다. 하지만 그 날 그 자리에 서있던 어머니의 모습은, 두고두고 기억 속으로 찾아왔다. 세월 가도 해석할 길이 없는 그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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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는 ‘정미소’라는 이름의 기계식 방앗간이 적어도 두세 동네에 하나씩은 있었다. 방앗간은
학교 다음으로 큰 건물이었다. 대부분 신작로 옆에 있었는데 추수철이면 벼 가마니를 실은 소달구지가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 물론 방앗간이 벼만 찧는 곳은 아니었다. 설을 앞두고는 가래떡을 뽑았고 가끔 고추방아도 찧었다. 아이들은 동그란 관을 통해 매끈하게 빠져 나오는 하얀 가래떡을 얻어먹는 재미에, 떡을 할 때는 엄마를 따라가곤 했다. 방앗간의 터줏대감은 당연히 발동기였다. 발동기는 어지간한 바위만큼이나 커서 아무나 시동을 걸 수 없었다. 덩치 큰 사내가 쇠를 걸고 얼굴이 벌겋게 될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돌렸다. 처음엔 시~~코~~ 시~코~ 시코하는 소리와 함께 힘겹게 돌아가다가 어느 정도 가속이 붙으면 텅 텅 텅~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렸다. 돌리는 사람의 힘이 달리면 시코 시코 하다가 피이~하고 나자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발동기에는 커다란 구동바퀴가 붙어있었다. 그 육중한 쇠바퀴와 천정 구동축에 걸린 바퀴가 넓적한 피대로 연결되었다. 피대는 8자 모양으로 돌아가면서
천장에 곶감처럼 매달려있는 바퀴들을 돌렸다. 발동기에서 시작한 에너지가 피대를 타고 바퀴들을 돌리고 그 힘으로 쌀도 찧고 고추도 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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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은 힘과 기운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발동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조용하던 마을이 기지개를 켜며 두런두런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들판을 달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펴줬다. 방앗간은 가을이 가장 바빴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서 발동기가 쉴 새 없이 돌기 시작해서 초겨울 찬바람이 들판을 점령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농부들에게는 가장 보람 있는 시기였다. 찧어진 햅쌀이 가마니에 채워질 때 나던 그 향기는 어쩌면 그렇게 달콤했는지. 그렇게 한철을 보내고 겨울이 오면 방앗간은 특별한 날을 빼놓고는 쉬게 마련이었다. 그때부터는 참새와 아이들의 놀이터로 바뀌었다. 방앗간 마당은 소달구지나 드물게는 트럭도 드나들기 때문에 여느 마당보다 넓었다. 그러니 아이들의 놀이터로는 최고였다. 사내애들은 구슬치기, 말뚝박기(말타기)놀이에 정신이 팔렸고 여자애들은 사방치기, 고무줄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방앗간은 또 숨바꼭질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왕겨가 쏟아져 쌓이는 곳이나 각종 장치가 있어 몸을 숨기기 좋았다. 왕겨더미에서 놀다가 온 몸이 껄끄러워 혼이 나기도 했다. 짧은 겨울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놀다보면 광식아, 정자야 부르는 소리가 고샅을 달려 메아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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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는 아픔을 내포한 방앗간이지만 농촌출신들에게는 추억의 보고이자 고향의 깃발이었다. 먼 길을 떠났던 이가 피로를 등에 지고 돌아오는 길에는, 방앗간 발동기 소리가 먼저 반겨줬다. 고갯마루에 서서 아련한 그 소리를 들으면 지친 발걸음에 힘이 솟아 내닫듯 고개를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런
방앗간도 세월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80년대 이후 곳곳에 정미공장들이 들어서면서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방앗간 주인들의 기운이 떨어지는 것과 비례해 수익성도 떨어졌기 때문에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었다. 요즘 농가에서는 집에서 먹는 쌀은 개인용 정미기계를 설치하여 필요할 때마다 찧는다. 그렇다고 모든 방앗간이 문을 닫은 건 아니다. 양철지붕은 벌겋게 녹슬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하얀 쌀을 쏟아내는 방앗간은 아직도 꽤 많이 남아있다. 중년의 사내가 된 아이는, 지금도 시골길을 가다가 방앗간이 보이면 멈춰 서서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어머니가 아직 그 자리에 있을 리는 없지만, 어머니가 남긴 슬픔만은 어딘가 떠돌고 있을 것 같아 쉽사리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밥 굶지 않고 살만한 세상이 된지 오래건만, 왠지 견디기 힘든 공복감에 시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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