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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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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에 해당되는 글 1

  1. 2009.02.23 [사라져가는 것들 99] 성냥공장*34
2009. 2. 23. 10:5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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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 잠시 머물렀던 P읍에는 성냥공장이 하나 있었다. 학교운동장만큼 넓은 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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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는 아름드리 미루나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아침에는 수많은 여공(女工)들이 씩씩하거나 혹은 지친 걸음걸이로 공장 문을 들어섰다. 출근행렬이 얼마나 장엄했던지 읍에 사는 처녀모두가 그 공장에 다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청년들이, 애써 만든 위악적인 표정으로 ‘인천의 성냥공장/성냥공장 아가씨…’ 어쩌고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음습한 골목을 싸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성냥공장들은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만들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유엔·아리랑·향로·기린표·새표·복표·야자수·대한·비사표·제비표·두꺼비표·토끼표…. 상표도 많았고 공장도 많았다. 하지만 꽃피는 날은 허무할 정도로 짧았다. 그로부터 불과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 나라에서 성냥공장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워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굳이 시초를 따지자면 1980년대 후반부터였을 것이다. 집집마다 전기밥솥․가스레인지 같은 현대식 취사도구가 들어서고, 일회용 라이터가 애연가들의 호주머니를 점령하면서부터 성냥은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공장 문이 녹슬어가고 야적장에 잡초만 무성하더니, 결국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라져가는 것들 19회 ‘성냥’이라는 테마와 약간 겹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마지막 성냥공장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하기 때문에 불가피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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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하면 인터뷰 같은 거 안 하려고 합니다. TV나 신문에 여러 번 나갔지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경북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769. 그곳에 ‘마지막 성냥공장’이라는 비장한 수식어가 붙은 성광성냥이 있다. 물어물어 그곳을 찾았을 때, 손진국(73) 사장은 지친 표정이었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었다. 들어가는 길에 만난 야적장도, 오랫동안 손을 못 본 듯한 공장건물도 쇠락의 기운이 역력했다.
“억지로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광고용 주문생산으로 견뎠는데 그나마 자꾸 줄고 있어서. 인원을 줄여놓았으니 주문이 많아져도 걱정이고, 그나마 없으면 더 어렵고. 단 하나 남은 성냥공장이 보존될 수 있도록 나라에서 신경 좀 써주면 좋을 텐데….
한탄 같은 그의 소망이 묵직하게 가슴에 얹혔다. 손 사장은 7년 전쯤에 대부분의 일을 아들인 손학익 상무(44)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하도 어려워서 문을 닫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들이 한번 해보겠다고 해서….”
물러나 있다고는 하지만 기울어가는 공장 때문에 단 하루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 같았다.
“정부에 무조건 도와달라는 건 아니고요. 문화재로 지정해서 건물을 보수하고 기계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든지, 아니면 체험관을 만들어서 학생들이 견학할 수 있게라도…. 요즘 애들이 성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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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관을 만들자는 손 사장의 제안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불이야말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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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의 화두가 아니었던가. 이 땅에서도 여자들의 가장 큰 숙제는 불씨를 보관하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불씨를 간수하지 못해 쫓겨난 며느리가 있었겠는가. 그런 고통을 벗어나게 해준 게 바로 성냥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땅에 성냥이 처음 들어온 건 1880년대였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1917년 일본인들이 인천에 세운 ‘조선인촌(朝鮮燐寸)’에서 성냥을 대량생산하면서부터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등잔 밑이나 부뚜막 위에 없어서는 안 될 게 성냥이었다. 혹시 젖지나 않을까 신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했다. 그러니 성냥을 만드는 공장 하나쯤은 보존해서 후세에게 전해주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사명이 아닐지. 더구나 문외한이 봐도 성광성냥은 보존가치가 충분하다. 성냥을 만드는 풀 라인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원목을 잘라 성냥개비를 만든 뒤 붉은 황과 산화제 등을 바르는 윤전은 물론, 통에 담는 입갑(入匣), 선별과 포장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러니 조금만 수리하고 재정비하면 체험관으로 쓰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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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광성냥이 문을 연 것은 1954년 2월8일이었다. 휴전 후 복구 작업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손진국 사장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창립사원으로 입사했다.
“정신없이 바빴어요. 공장에서 자면서 아침에 일할 준비하고 불 피우고…. 그때 세분이 공동출자해서 공장을 설립했는데 그분들이 저를 무척 예쁘게 봤지요.”
그는 물불 안 가리고 일을 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창업자들의 눈에 들어 훗날 주주가 될 수 있었고, 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면서 회사를 인수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으로는 상투를 잡은 셈이었다. 최종 인수를 했을 때는 이미 성냥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든 뒤였다. 그는 지금도 성냥공장이 젊은 종업원으로 들끓던 시절을 돌아보면 행복하다고 한다. 한창 호황을 누리던 시절에는 직원이 200명이나 됐다고 한다. 게다가 성광성냥에서 만든 ‘향로성냥’은 경상도와 강원도 해안지역에서 알아주는 명품이었다.
“우리 성냥이 아래로는 부산 영덕에서 위로는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 바닷가라면 안 간 데가 없었습니다. 바다 근처는 염분이나 습기가 많아서 성냥이 금방 눅눅해지는데, 우리 성냥은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화려했던 날을 반추하는 손 사장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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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사장의 안내로 공장을 한 바퀴 돌았다. “저 아래 보이지요? 공장이 잘 될 때는 저기까지 원목이 쌓여있었습니다.” 손 사장의 손가락 끝에는 가건물만 쓸쓸히 늙어가고 있었다. 공장 입구에는 한 직원이 작두칼 같은 걸로 짧게 잘라낸 통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요즘엔 이태리포플러가 원료로 쓰인다고 한다. 껍질을 벗긴 나무를 일정한 두께로 두루마리처럼 벗겨내는 게 첫 공정이었다. 그 다음 두루마리들을 간추려 기계에 넣으니 반대편 출구에서 ‘머리 없는’ 성냥개비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작업하는 이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었다. 그 옛날에 성냥공장으로 끝없이 들어가던 아가씨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공장이나 시설은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조그만 작업장에서 종업원 몇 명이 성냥개비에 황을 묻히고 갑에 집어넣는 작업을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손 사장이 앞서가면서 기계마다 용도를 설명해줬지만, 어찌나 빠른지 쫓아다니기도 버거웠다. 기계들은 거의 서 있는 상태였다. 마지막 공정에서 다시 작업에 분주한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윤전이나 갑에 넣는 과정은 대부분 자동으로 처리되고 선별이나 포장 등을 손으로 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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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이라는 상호가 찍힌 성냥이 많이 눈에 띄었다. 주 수요처가 그런 곳이라는 뜻이리라. 요즘도 사찰 같은 곳에서 통성냥을 쓰긴 하지만, 대부분의 매출은 광고업자들의 주문하는 홍보용 성냥에 의존한다고 한다.
“1년 매출이 2억5000만 원쯤 됩니다. 10년 전에 비하면 정확하게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지요.”
혼자 계산해 봤다. 연 매출이 2억5000이면 한 달에 2천만 원 남짓이라는 것인데 종업원 10명의 임금을 주고 공장 가동비를 빼면…. 얼핏 생각해도 한숨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액수다. 그러니 화려했던 지난날들이 그리울 수밖에. 손진국 사장의 이야기는 되돌이표를 달고 자꾸 지난 시절로 돌아갔다.
“업자들끼리 그런 말을 하고는 했지요. 성냥 큰 통에 보통 750개비가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서울에서 정전 한번 되었다 하면 3만 통이 소비됐다고….”
이 나라의 마지막 성냥공장 성광성냥, 시간의 왕성한 식욕에 빠르게 풍화돼가는 그곳을 나서면서 못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성냥이 다시 팔릴 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마저도 문을 닫으면 성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줄 수 없을 것 같아서 붙들고 있다.”는 말이 끊이지 않고 귓전을 맴돌았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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