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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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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수리 중인 교회는 저렇게 보호 지붕을 쓰고 있었다.

거의 무너진 교회를 보겠다고 참 많이들도 왔다.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다는데...

퇴락한 교회


이젠 성 니콜라스 교회를 본격적으로 탐색할 차례. 교회는 산타클로스 동상이 있는 광장의 끄트머리에 있다. 손수레에 과일을 늘어놓고 파는 아주머니들 곁을 지나고 몇 그루의 야자나무를 지나니 교회로 들어가는 매표소가 나온다. 여기도 또 돈이군. 교회가 광장보다 낮은 곳에 있는데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건 불가능하다. 수리를 위해서인지 보존을 위해서인지 철제 빔으로 기둥을 세우고 현대식 지붕을 씌워놓았기 때문이다. 원래 있었던 지붕은 상당 부분 유실된 것 같다. 언뜻 봐도 여기저기 퇴락한 흔적이 역력하다. 반쯤 붕괴됐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무너진 건지 쌓다 만 건지 돌무더기처럼 형태만 간신히 유지한 돌담도 눈에 띈다. 어느 한 시절 화려한 모습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을 성인의 교회도 세월은 이길 수 없었나보다. 아니, 그보다는 역사의 격랑, 이 땅의 주인들이 바뀌는 과정 속에서 버림을 받았던 건 아닐까. 산타클로스라는 이름 덕분일까. 쇠락한 건물과는 안 어울리게 관람객이 무척 많다. 보드롬 마우솔레움에서 만났던 그 황량했던 풍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교회 입구에도 성 니콜라스의 동상이 서 있다. 풍상을 이끼처럼 뒤집어쓰고 있지만 발등은 반질반질 빛이 난다. 교회를 찾는 신도들이 손을 대고 축원을 한 까닭이리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무엇을 축원할까.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

벽에 그려진 성화들.

손길에 닳아 반들거리는 발등을 보고 있자니, 아들 하나 점지해달라고 손금이 닳도록 빌던 우리네 할머니어머니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어느 동네 돌미륵은, 코를 갈아 마시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코가 다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지. 혹시 나도 그런 지극정성으로 태어난 건 아닐까? 성 니콜라스의 일생을 기록한 안내판을 지나서 입구로 들어선다.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줄을 서서 관람해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벽에 그려진 니콜라스 성화들이 눈길을 잡는다. 색채가 퇴색한 것은 물론 군데군데 벗겨지기까지 해서 만만찮은 세월을 견뎌왔음을 말해준다. 성화를 보니 성인의 모습이 제대로 확인된다. 약간 대머리고 수염이 텁수룩한데다 홀쭉한 얼굴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산타클로스와는 조금도 닮은 곳이 없다. 사람들이 비교적 적은 회랑을 따라가다 마당으로 나선다. 그곳에서 보니 비로소 원래의 건물 형체가 그려진다. 퇴락하기 전에는 제법 크고 웅장했던 것 같다. 외부에서 볼 땐 2층 건물인데 문들은 모두 아치 형태로 돼 있다. 이 교회는 성 니콜라스가 사망한 뒤인 4세기에 건축됐다고 한다. 미라(Myra)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붙인 교회를 짓고 그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석관에 시신을 안치해 두었다. 교회는 6세기에 대지진으로 파괴됐다가 복원됐다. 십자군 전쟁 때에는 성 니콜라스의 시신에도 큰 시련이 닥쳤다.

좌측 마당에서 본 교회. 제법 규모가 크다.

관람객들.

도둑 맞은 유골


1087420일 미라에 온 십자군들은 니콜라스의 석관을 부수고 유골을 추린 뒤 이탈리아로 가져가 로마의 성당에 안장했다. 그 시절에는 성당을 새로 세우면 성인의 유물을 안치해야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남의 유골까지 훔쳐다 놓고 자랑스러워 할 건 뭐람. 군대 생활을 할 때 이웃 내무반에 관물을 훔치러 가야했던 황당한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새로운 성당에 성인의 유골을 모셨으니 자신들은 자랑스러웠을지 몰라도, 내 눈에는 그저 약탈이고 노략질일 뿐이다. 더구나 종교의 이름으로 성인의 시신을 훼손하다니. 그때 미처 가져가지 못한 유골은 수습해서 안탈리아 박물관에 보관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니콜라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지은 성 니콜라스 교회에, 본인의 유골은 없고 빈 석관만 남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2010년인가? 터키가 성 니콜라스의 유해를 돌려달라고 이탈리아에 요청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과연 돌려줬을까? 대답은 글쎄요. 엄연히 우리의 유산인 조선왕실 의궤 하나 찾아오는데도 그렇게 힘든데. 세상의 모든 약탈물은 모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남의 문화재를 훔쳐다가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자랑하는 것이야 말로 나는 도둑의 자손이요, 우리 조상은 약탈자다자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이들에게 뭐라고 가르칠 것인가. 에구, 괜스레 흥분했네. 또 움직여봐야지.

예배를 보던 제대공간.

제대공간의 원형 기둥들.

 다른 문을 통해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홀이 나타난다. 예배를 보는 메인 홀, 즉 제대(祭臺)공간(교회에서는 의례공간이라고 하던가?)인 모양이다. 대부분의 교회나 성당이 그렇듯 밖에서는 2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무척 높은 단층 구조다. 돔형식의 천장은 벽돌(?)로 촘촘하게 쌓았다. 잘 다듬어진 원형 기둥과 반들거리는 돌바닥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교회구조나 용어가 궁금하기 짝이 없는데 물을 사람이 없다. 촬영팀이나 믿음 씨, 엄상욱 씨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찾을 엄두도 안 난다. 하긴 그들은 그들 일이 있으니 돌아가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제대(祭臺)로 올라가는 계단의 뒤에는 벽을 따라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공간이 뚫려있다. 잠깐 들여다보니 안은 캄캄하다. 거기를 한 바퀴 돌면서 참회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나? 얼굴에 소망이라고 써 붙인 사람이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소원은 내가 노력해서 이루면 되지. 그래도 참회할 건 참 많은데. 나도 기다려볼까 하다가 조금 구차한 것 같아서 포기한다. 대신 측면 문을 통해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가본다. 여기서는 또 무엇을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고, 자기 순서가 온 사람들은 경건한 얼굴로 무언인가를 만지며 기도한다.

성 니콜라스 석관을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대부분 러시아인이란다.

성 니콜라스의 시신을 모셨던 석관.

러시아인들이 우는 까닭은?


성 니콜라스의 유골이 들어있던 석관이란다. 어떤 사람은 그 석관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다 끝내 주르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대체 이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길래 여기까지 와서 눈물을 흘리는 걸까. 생긴 걸로 봐서 터키인들은 아니다. 또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이 나라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와 기도할 리도 없거니와 기독교 성인의 석관 앞에서 눈물을 흘릴 일은 더욱 없을 것이다. 마침 믿음 씨를 만나 물어보니 러시아정교회 신도들이라고 한다. 무슨 사연으로 러시아에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기도를 할까. 나중에 확인한 뒤에야 그럴 만하다고 수긍이 간다. 러시아 사람들, 특히 러시아정교회 신도들은 이 교회를 자기들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 Church)의 수장이라고 생각한다. 성 니콜라스 교회와 러시아와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라는 뿌리에서 어떻게 동방정교회와 가톨릭이 분리됐는지부터 알아봐야한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나 지역적 분포, 교리의 차이 등을 모두 알려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나 같은 문외한으로서는 벅차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종교학자나 네이버 지식인에 맡기고 여행자는 아는 만큼 간략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서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여인들이 많았다.

이 석판도 니콜라스의 유물이겠지.

로마의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는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지금의 이스탄불, 즉 콘스탄티노플(당시 이름은 비잔티움)로 로마의 수도를 옮겼다. 이후 기독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5대 관구로 발전했다가 1054년 로마관구가 떨어져 나가면서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양분됐다. , 로마 주교를 위시한 서방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의 정교회가 분리된 것이다. 그런데 왜 러시아는 느닷없이 정교회의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놓고 자신들이 수장이라고 떠드는 것일까. 게다가 이 궁벽한 곳에 있는 교회를 자신들 것이라고 생각할까. 러시아정교회가 동방정교회의 최대 교파인 것은 분명하다. 10세기 말에 키예프 공화국의 블라디미르가(Vladimir)가 기독교를 믿으면서 러시아에 전파됐고 15세기에 비잔틴 교회에서 독립했다. 그래도 이것만 가지고는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울 텐데, 뭘 믿고.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이 망한 뒤 러시아의 이반 3세는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 소피아 팔라이올로고스와 결혼하고 쌍두독수리 문장을 취하면서 자칭 황제가 된다. 그리고 자신을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로, 러시아를 제3의 로마로 불렀다. 로마제국 황제의 마지막 혈족이 러시아로 갔기 때문에 동방정교회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동상 아래의 만국기. 난 기어코 태극기를 찾고 말았다.

내게 그늘을 선물한 소나무.

나는야 국수주의자


그렇다면 성 니콜라스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17~18세기경 이 지역에 지진이 또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이 교회가 다시 무너졌는데 러시아 황제가 지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애정을 지나서 소유의식까지 생긴 모양이다. 남의 땅에 보낸 자식을 보러가 듯, 무너지다시피 한 교회를 찾아가 성인의 석관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다. 아무튼 대단한 인연이다. 또 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마음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엉덩이가 드러날 듯, 핫팬츠를 입고 온 젊은 여성도 성 니콜라스 석관 앞에서는 얇은 천이라도 두르고 예의를 표시한다. 경건한 마음이 되어 교회를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 성 니콜라스 동상 하단부의 만국기 틈에서 태극기를 찾아낸다. 곳곳이 벗겨지고 퇴색했지만 분명 우리의 국기다. 느닷없이 솟아오르는 애국심이란.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그냥 지나가도 좋으련만 무슨 억하심정인지 일본의 국기를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어 바퀴 돌 때까지도 일장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싸!! 태극기는 있는데 일장기는 없다. 이 무슨 어린애 같은 심리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국수주의자라고 욕해도 좋다. 커다란 노송이 마련해준 그늘 아래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다큐팀이 다 모일 때까지 나는 여행이 선물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점심으로 먹은 닭꼬치와 감자튀김.

먹음직스런 피데.

시원한 바람을 벗 삼아, 예가 바로 무릉도원 아니더냐~ 아닌들 어떠하랴~ 혼자 신이 나 있는데 호주머니 속의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에구, 짜릿해라. 그런데 이게 어인 진동? 지인들은 거의 내가 터키 여행 중인 것을 알고 있고(통화료 들어가니 본인 사망이 아니면 전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또 지금 서울은 오밤중인데 누가 전화를? 확인해 보니 문자가 와 있다. 터키 한국대사관에서 보낸 것이다. ‘동북 지역은 위험하니 가지 말고내가 이 나라에 있는 걸 어찌 알았지? 바보다. 자국 국민이 들어온 걸 모르면 그게 이상한거지. 동북지역은 쿠르드족이 사고 있는 곳이다. 테러라는 단어를 동반하는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차차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들의 주거지역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아무튼, 여기까지 와서 감시를? 하는 생각에 조금 심술이 나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일이다. 나라가 있으니 이만큼이라도 챙겨주지. 다큐팀과 합류한 뒤 뎀레(미라)와 작별한다. 오전 1130, 안탈리아를 향해 출발. 안탈리아는 안탈리아주의 주도(州都)이며 터키 내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도시다. 가는 길에 중간에 버스가 큰 길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더니 거기서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숲속에서의 점심이라. 이건 또 웬 떡이냐. 이끼를 온몸에 두른 거대한 나무들과 쏟아지는 물줄기, 그리고 자연 속에 깊이 묻힌 음식점. 아름다운 곳이다.

안탈리아 콘야비치. 끝이 없다.

콘야비치의 휴양객들. 차마 '벗은 여인들'은 찍을 수 없었다.

콘얄트비치의 나녀들

이런 곳에서 먹으면 없던 입맛도 생기는 법
. 오늘 점심 역시 피데다. 색다른 환경에서 느긋하게 즐기는 점심은 역시 행복하다. 식사를 마치고 안탈리아로 가는 길, 페티예에서 카쉬로 갈 때처럼 버스는 산을 깎아 만든 해안도로를 달린다. 1450분 드디어 안탈리아의 콘얄트(Konyaalt¡)비치 도착. 시내로 들어가기 전 외곽에서 만나는 엄청나게 긴 해수욕장이다. 10월로 접어들었는데도 여긴 여전히 한여름이다. 해변에는 파라솔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파라솔 안에는 둥지에 낳아놓은 알처럼 어김없이 사람이 눕거나 앉아있다. 그런데 다른 비치와는 조금 다른 게 있다. 여성들이 브래지어 정도는 거침없이 벗어던지고 햇살을 즐기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큰 도시라 조금 더 개방적인가? 대부분은 그냥 누워있거나 무엇을 먹고 있을 뿐 책 읽는 사람조차 없다. 휴가는 철저하게 휴가로 즐긴다는 것일까?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 나 같은 일 중독자에게는 굉장한 고통일 것 같다. 노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절감한다. 비치 탐방을 간단하게 마치고 시내까지 가는 트램(tram)을 타러 간다. 안탈리아는 터키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다. 인구는 100만 명 정도인데 1년에 찾아오는 관광객은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다는 것이겠지. 기대로 가슴이 설렌다.

추천(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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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부터 읽어야 재미있습니다.^^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저물어 가는 카쉬의 바다. 저 한 가운데의 파운이 지금의 내 마음이다.

낮에 보았던 카펫 가게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터키의 유료화장실

이국 바닷가 마을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뱃가죽은 자꾸 등이 그립다고 아우성이다. 오래 전 헤어진 다큐팀은 어디서 무얼 하는 걸까. 섬 그늘로 굴 따러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목을 늘리고 두리번거려보지만 지나가던 바람만 뺨을 스칠 뿐이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눈 온데 서리가 또 온다(雪上加霜)’는 말을 믿지 않았건만, 이 참을 수 없는 요의(尿意)? 에구, 결국 올 게 왔구나. 터키에서는 거의 모든 공공화장실에서 돈을 받는다. 그래서 호텔이나 음식점을 갈 때마다 볼 일을 보는 게 좋다. 나 역시 그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 정도 돈이 없다거나 아낄 요량이라기보다는 돈 내고 볼일을 본다는 게 영 정서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남의 집에 마실을 갔다가도 똥, 오줌 마려우면 집에 와서 처리했다는 전설이 아직도 생생하거늘. 그 귀한 걸 주는데 돈을 내라니. 하지만 유료화장실에 대해서 별로 큰 소리 칠 건 없다. 우리나라도 몇 십 년 전까지 공중화장실 앞에서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 저들도 먹고 살아야지. 이번 한번은 인심을 쓰자. 두리번거리며 찾다보니 저만치 화장실 표시가 보인다. 골목을 한참 꺾어 들어가니 드디어 목적지. 들여다보니 노인이 안에 앉아서 돈을 받는다. 어느 곳은 밖에다 작은 책상 하나 달랑 놓고 돈을 받기도 한다. 입구에 가격을 써놓았다. SHOWER 6TL/3EURO, WC 0.50Cent.

내 주머니를 털어간 공중화장실. 돈을 받는만큼 관리가 잘돼 깨끗했다.

샤워는 6리라. 볼일만 보면 50센트.

, 여기서는 공중화장실에서 샤워를 할 수도 있구나. 바닷가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실 이용은 50센트라니까, 300원이 조금 넘겠군. 돈을 내는데 노인이 내 얼굴을 보다 싱긋 웃는다. 저 미소의 의미는? 너처럼 불쌍하게 생긴 녀석은 말만 잘하면 공짜로 해줄 수도 있었다는? 그래, 이왕 돈 주고 들어온 거 본전이나 뽑자. 길고 길게 볼 일을 마친 뒤 화장실에서 나오니 다큐팀이 기다리고 있다. 야호! 이젠 호텔로 갈 수 있다. 호텔은 그리 멀지 않다. 헌데,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에구구! 신음이 절로 터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PRINCESS HOTEL. 이름도 좋고 전망도 좋은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객실은 3층에 있는데 거기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없단다. 저기까지 캐리어를 들고(계단이니 끌고가 아니다)가야한다는 말인데, 지칠 대로 지친 몸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다. 그나마 나는 캐리어가 하나지만 촬영팀 친구들은 저 장비를 다 어쩐담. 하지만 하늘은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벨보이들이 하나 둘 내려온다. 작은 호텔은 보통은 벨보이를 두지 않는데, 이 곳은 워낙 조건이 험하니 짐만 전문으로 옮기는 친구들이 있는 모양이다. 대신 1달러는 기본. 지금 1달러가 문제냐? 오케이!! 호기롭게 짐을 맡긴다. 하지만 키를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또 한 번 예사롭지 않은 풍경 앞에 망연해지고 만다.

카쉬에서 하루 신세를 졌던 호텔. 여인숙 수준이지만 밤풍경은 좋았다.

여인숙 같은 호텔

우리나라 70년대 여인숙에 들어선 느낌이 이럴까? 방은 엉덩이 큰 사람은 드나들기도 어려울 만큼 비좁은데 화장실에 물은 뚝뚝 떨어지고 샤워기는 아무리 돌려도 감감무소식이다. 이게 원래 장식용이었나? 답답해서 문이라도 열어둘까 했더니 발코니로 통하는 문은 황소고집이다. TV는 구식 중의 구식(사실 볼 일도 없지만)이라 켜질까 의문이고 냉장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다른 물건들도 방금 골동품가게의 창고에서 탈출한 듯 고색창연하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건 침대 다리는 네 개 모두 있다는 것. 그럼 됐지. 언제부터 고급스럽게 살았다고 투정이야. 그동안 너무 호강을 했던 게지. 방은 좀 그래도 한 층 아래에 있는 야외식당은 제법 괜찮다. 음식이야 별로 특별할 건 없지만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한다. 저만치 있는 바다는 어둠 속에 몸을 묻어 뭍과의 경계를 지웠고 작은 불빛들만 유난히 반짝거린다. 오랜만에 보는 어둠이다. 그래, 가끔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바라보기도 할 일이다. 세상살이가 이리도 험한 것은 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어둠 속에서의 안온을 잊어버렸다. 덕분에 별빛도 달빛도 잃었다. 그것들을 잃으면서 꿈조차도 희미해졌다.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많은 법이거늘.

호텔방에서 바라본 밤바다.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데도 밤새 끙끙 앓았다. 그래도 여섯시 무렵에는 어김없이 잠에서 깬다. 하늘은 여전히 맑다. 아침 식사를 한 뒤 바로 호텔을 출발한다. 0830. 오늘은 안탈리아로 가는 날이다. 가다가 성 니콜라스(St. Nicholas) 출생지에 들를 계획이다. 성 니콜라스. 산타클로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산타의 고향이 터키의 궁벽한 곳이라고? “에이~”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또 산타클로스의 고향은 핀란드 아냐? 자신 있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잘못된 지식을 갖고 있다. 산타클로스는 지금의 터키, 아나톨리아반도의 남단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죽었다. 그런데 왜 산타의 고향이 북구인 핀란드라고 알려져 있을까. 그 배경은 이렇다. 2차 대전으로 초토화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핀란드 정부는 관광산업 육성에 집중 투자했다. 산타마을은 70여개 기업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건설한 인위적인 마을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 산타마을에서는 세계 어린이들의 편지를 받고 답장도 써준다. 물론 대역이다. 사연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산타가 그곳 사람인 줄 안다. 산타클로스, 즉 성 니콜라스의 고향은 지금의 터키 남쪽 지중해 연안의 안탈리아에서 144km 떨어진 소도시 뎀레(Demre)다. 그 당시 이름은 미라(Myra). 이곳이 바로 성서에 나오는 무라(Mura)’인데 AD 60년 사도 바울이 로마로 끌려갈 때 탔던 배가 이곳 항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카쉬에서 안탈리아로 가는 길에 만난 울트라마라톤 지원팀.

산타클로스 이야기

우리 일행은 카쉬에서 출발했으니 안탈리아의 반대쪽에서 내려가는 셈이다. 가는 길에 믿음 씨는, 철거됐던 산타클로스 동상이 다시 세워졌을지 모르겠다고 걱정이다. 자신도 오랜만에 가보는 지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걱정이 되는 이유는 지금 터키의 수상이 이슬람당이기 때문이란다. 이슬람당은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타 종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산타클로스 동상을 세우는데 관심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교도가 97%라는 이 나라에도 알게 모르게 종교적 갈등이 존재하는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뎀레를 향해 달려가는 중에, 길에서 뜻밖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다. 엊그제 페티예에서 손을 흔들어 장도를 빌어줬던, 리키아 울트라마라톤 선수들을 지원하는 팀이 길에서 쉬고 있다. 선수들도 어제 카쉬에 도착해서 묵고 오늘 아침 안탈리아 쪽을 향해 출발했단다. 이런 인연이. 고향친구들을 만난 듯 반가워서 한참 수다를 떨다 헤어진다. 믿음 씨가 차 안에서 산타클로스가 된 성 니콜라스 주교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성 니콜라스의 생애를 기록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의 실재를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터키사람들은 그들의 땅에서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긴 한 성인의 존재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 분이 바로 산타클로스가 된 성 니콜라스.

성 니콜라스는 AD 280년 경 지중해 연안 리키아의 주요도시 중 하나인 파타라(Pttara)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부유한 곡물 상인이었다. 니콜라스가 존경을 받게 된 것은 그의 너그러운 미음과 따뜻한 동정심 때문이었다. 부친이 사망하자 상속자가 된 그는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기로 작정했다. 어느 날, 파타라 시에 사는 몰락한 귀족에게 장성한 딸이 셋이나 있는데 결혼 지참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곤궁에 처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그 당시는 지참금이 없으면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 귀족의 집에는 언제나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그 귀족을 몰래 돕기 위해서 가족들이 잠든 사이 큰 딸의 방 창문으로 금주머니를 던져 넣었다. 큰 딸은 그 돈으로 혼인을 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다른 두 딸들에게도 지참금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 창문이 모두 잠겨 있어서 금주머니를 전할 방법이 없었다. 궁리 끝에 그 집 굴뚝으로 금주머니를 던져넣었다. 여기서 드디어 산타클로스의 굴뚝 출입설에 대한 근거가 나온다. 니콜라스는 선원들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배를 기도로 구하고, 익사할 위기에 있는 선원들을 소생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성 니콜라스 동상이 서 있는 거리.

성 니콜라스의 행적을 적어놓은 것 같다.

성 니콜라스의 기적들

성 니콜라스가 남긴 이야기는 그밖에도 강가의 모래 만큼이나 많다. 고향인 파타라에서 이웃 도시인 미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기적은 계속 일어난다. 미라지역에 기근이 들었던 어느 해, 니콜라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비잔틴으로 곡물을 운반하는 배들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선장들에게 각 배에서 두 말씩의 곡식을 넘겨달라고 부탁했다. 선장들은 마지못해 응했는데 항해가 끝나고 돌아와 보니 그들의 곡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선장들이 남겨 두고 간 곡식은 미라 사람들이 2년 동안 양식을 하고도 씨를 뿌릴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고 한다. 흉년과 관련한 이야기는 또 있다. 어느 해 큰 흉년이 들어 끼니를 못 때우는 집이 속출했다. 니콜라스는 커다란 자루에 양식을 넣고, 이곳저곳 마을을 찾아다니며 가난한 집에 몰래 전했다. 어느 날 그는 어느 숲속에 있는 여관에 도착하였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이상한 영감을 받게 된다. 그 여관의 주인은 흉악한 강도였다. 소년들을 유괴해서 시체를 토막 내어 소금에 절였다가 그 고기를 나그네들의 특별 메뉴로 내놓고는 했다. 니콜라스가 그 여관에 도착했을 때에도 세 소년이 소금에 절여지고 있었다. 영감을 통해 그 사실을 안 니콜라스는 소년들을 절여 넣은 독 위에서 십자가를 긋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독을 두드리자 뚜껑이 열리며, 독 안에서 세 소년이 뛰어 나왔다.

거리엔 과일장수도 있고.

그 소년들은 소아시아의 부잣집 아들들로서, 공부하러 아테네로 가는 도중 흉악한 강도에게 걸려들게 됐다는 것이었다. 니콜라스에 의해 구원 받은 소년들의 이 이야기가 곳곳으로 퍼지면서, 그는 어린이와 학생들의 보호 성자로 숭배를 받게 됐다. 16세기의 그림과 조각에는 여관 주인이 식칼로 아이들의 몸을 자르는 것을 니콜라스가 다시 살려내는 장면을 그린 것이 많다. 그 미술품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산타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나? 남의 얘기 빌어서 여행기 공짜로 먹으려고 한단 얘기 듣기 전에 그만 해야지. 그래도, 산타클로스가 아닌 주교 니콜라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 니콜라스 역시 초대 교회 당시의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훗날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석방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쇄신과 선교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325년에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성직자를 때렸다가 투옥됐다. 옥중에 있던 그에게 한밤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는데, 예수는 그에게 성서를 건네주었고 마리아는 그에게 오모포리온(omophorion, 정교회 사제의 전례의상)을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간수가 보니 니콜라우스가 감옥 안에서 오모포리온을 두른 채 성서를 읽고 있었다.

성 니콜라스 교회로 들어가는 길.

상업주의가 만든 산타

그렇게 숱한 이적을 행하던 니콜라스는 65세가 되던 해 126일 미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의 산타클로스는 그가 남긴 여러 이야기에 숱한 전설이 결합돼서 창조된 것이다. 믿음 씨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버스는 어느 새 뎀레에 도착해서 광장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다행이 성 니콜라스의 동상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 쪽 어깨에 사내아이를 올려놓고 한쪽 손에는 조금 큰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봐 온 산타클로스의 모습과 하나도 안 닮았지? 하얀 수염에 빨간 옷을 입고 조금 뚱뚱하고 루돌프를 탄 산타클로스는 어디로 간 거야. 거기엔 이유가 있다. 성 니콜라스 이야기가 유럽 쪽으로 건너가면서 숱한 변모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는 상업주의가 낳은 변종이라고 한다. 1931년 코카콜라의 겨울철 판매량이 감소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캠페인 전략으로 코카콜라 브랜드의 상징색인 붉은색 옷을 산타에게 입혀 홍보에 나선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흰 수염은 콜라 거품을 상징한다나? 결국 자본주의는 성인의 수염까지 팔아먹는구나. 아무튼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에 의해 친근하지만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재창조된 셈이다. 또 산타의 썰매를 끄는 루돌프는 오딘이라는 신이 순록을 끌고 다닌다는 것에서 착안해서 접목시켰다고 한다. 하긴 남부 지중해에 눈이 올 턱이 있나. 재주들도 참 좋다.

인도의 수행자 같았던 노숙인(?)

경찰관과 한바탕 하고 있다.

! 믿음 씨에게 성 니콜라스 동상 이야기를 들을 때 왜 철거했는지 묻지 못했는데, 원래 코카콜라 산타였기 때문이었구나.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해서. 성 니콜라스의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흰 수염에 만만치 않은 눈빛, 마치 인도의 수행자 사두같다. 나무 그늘이 있는 화단 턱에 앉아있는데 바닥에 이불과 베개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이 그의 인가 보다. 결국 노숙인인 셈인데 입성이 깨끗하고 운동화는 하얗게 빛나서 절대 남에게 신세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있는데 경찰관 한 사람이 다가와 노인에게 뭐라고 하더니 금세 언성이 높아진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대충 알 것 같다.
여기서 나가라. 이러고 있으면 관광객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못 나간다. 여긴 내 자리다. 난 원래 여기에 있었고 관광객들은 스쳐가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무슨 권리로 앉아있는 것조차 못하게 하는가?”
사실 내가 경찰관이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경찰관은 진퇴양난이다. 칼은 빼들었는데 내리칠 호박은 없고 그냥 물러나자니 자존심 상하고. 한참 멋쩍게 서 있더니 결국 그냥 돌아선다. 경찰관이 간 뒤에도 노인은 분이 안 풀렸는지 큰 소리로 욕을 해댄다. 정부를 향한 욕이라고 한다.(궁금해서 엄상욱 씨에게 물어봤다) 그 잠깐의 해프닝에서 무질서나 불협화음보다는 자유를 느낀다. 경찰관에게 대놓고 나라 욕을 할 수 있는 나라. 그 나라는 국민이 존중 받는 국가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산타클로스 얘기를 신나게 하다 보니 성 니콜라스 교회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이번 회가 끝났다. 교회가 코앞이니 다음 회에 좀 더 충실히 전해드리는 수밖에.


추천
(view on)과 댓글 감사합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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