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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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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21 [사라져가는 것들 122] 학교종10
2009. 9. 21. 09:1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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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종순이가 땡순이라는 새 이름을 얻기까지에는 남다른 곡절이 있었다. 종순 아버지 뻐꾹씨 -유백국(劉白國)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있었지만 모두 그렇게 불렀다-는 어느 날 다짜고짜 아내에게 씨암탉 한 마리를 잡아놓으라고 일렀다. 그러더니 땅거미가 마당을 기어 다닐 무렵 강토국민학교의 교장 공두말(孔頭末) 선생을 앞세우고 사립문을 들어섰다. 강토국민학교는 지난해까지 종순이가 다니던 학교였다. 퇴근길에 바로 끌려온 듯, 양복차림의 교장은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학교 운동장만큼 넓은 이마만 자꾸 쓰다듬었다. 부처님이라도 모시듯 안방에 교장을 모신 뻐꾹씨는, 실팍하게 삶아낸 닭과 함께 제사 때 쓰려고 담가둔 밀주(密酒)를 독채로 내오라고 일렀다. 공두말 선생이 누구던가. 술 한통을 짊어지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갈 수 있다는, 둘 째 가라면 통곡이라도 할 주당(酒黨)아니던가. 그런 그 앞에 잘 익은 술이라니. 처음에는 무슨 꿍꿍이인가 경계도 하고 사양하는 체라도 하더니, 술이 목젖을 타고 한번 내려가자 술독으로 슬슬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뻐꾹씨 또한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리란 건 코흘리개도 아는 터. 아무런 목적도 없이 교장 모셔다가 씨암탉 잡고 찍어먹는 것조차 아까워하던 밀주를 독 채로 내줄 그가 아니었다. 교장선생의 코끝이 늦가을 홍시만큼이나 익어갈 무렵 드디어 본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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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나저나. 교장선생님. 아참, 두말 성님. 우리 종순이년, 공무원 한번 맹글어주쇼.”
“아니, 이 사람아! 공무원 맹글라믄 중고등핵교를 졸업시켜서 셤을 보게 허야지. 워째 나더러…?”
“아 참 성님두. 누가 그걸 물러서 물유? 핵교를 졸업시킬 능력이 되믄 장관이나 국회의원 시키지 뭐한다구 성님헌티 이러겄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소사라도 시켜달라는 거쥬. 종도 치고 청소도 하는 거 있잖유.”
“소사라믄 이미 있자녀. 김씨 말여. 그 사람 하나면 충분헌디 뭔 또 소사여. 그럴만한 예산이 있간디? 그러구 소사가 무신 공무원이여. 그냥 잡부지.”
“아, 나라가 운영하는 핵교에 댕기믄 공무원이지, 공무원은 뭐 이마빡에 레떼루 붙이고 태어났답디여? 저년이 넘덜 클 때 뭘허느라구 저렇게 거시기 똥자루만 혀서… 아직 초조(初潮)도 못 치렀으니 공장도 못 보내구, 갈칠 능력은 더욱 안 되고… 워쩐대유 성님이 좀 챙겨줘야지.”
결론부터 말하면, 그날 교장은 뻐꾹씨에게 졌다. 술 한 독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이다. 문제는 다음날 술이 깬 다음이었다. 다른 기억은 무 베듯 싹뚝 잘려나갔는데 종순이를 학교에 취직시켜주겠다고 한 약속은 찰거머리처럼 뇌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어떻게 취직을 시켜준단 말인가. 교장선생님은 머리를 싸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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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두말 교장의 고민을 시원하게 풀어준 것은, 역시 꾀돌이라는 별명을 가진 조갈량(趙葛亮) 교감이었다. 교장이 이도 저도 어렵게 된 사연을 털어놓자마자 단칼에 해결책을 내놨다.
“쓰지요 뭐. 청소하고 종치는 아이 하나 있으면 좋지요.”
“누가 그걸 물러서 그려? 돈을 뭘루다 주느냐 말이지.”
“간단합니다. 일 손 덜어준다고 하고 선생님들에게 매달 조금씩 걷는 겁니다. 돌려가며 종치는 것도 귀찮을 테니…. 총대는 제가 멜 테니 교장선생님은 보고만 계십시오.
그렇게 해서 종순이는 신 김치와 장아찌를 싼 ‘벤또’를 들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종순 아버지 뻐꾹씨는 딸이 공무원이 됐다고 자랑하느라 이 동네 저 동네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교사도 학생도 아닌 종순이의 주 업무는 종을 치는 일이었다. 물론 교무실을 청소하고 교장이나 교감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다. 종순이는 종치는 일이 좋았다. 자신이 종을 쳐야 수업이 시작되고 끝나니 우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종을 안치면 밤새 수업을 헐지도 물러….’ 혼자 씨익 웃는 날도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종을 안 쳐서 수업이 제대로 끝나지 못한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교사들이 모두 수업에 들어간 뒤 교무실에 혼자 앉아있던 종순이가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교장이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방에서 나와 보니 그 모양이었다. 그날 종순이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다.

종소리는 교사나 학생들에게만 소용되는 게 아니었다. 농부들은 들판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로 새참을 먹고 시간을 가늠했다. “우리 애기도 벤또 먹을 시간이구먼.” 종소리는 학교 상황을 그림 그리듯 전해주기도 했다. 애나 어른이나 종순이를 보면 땡순이라고 불렀다. 종을 땡땡 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지만 ‘종순’이나 ‘땡순’이나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것도 한몫을 했다. 종순이는 세월이 흘러도 키가 자라지 않았다. 마치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 등장하는 점순이를 보는 것 같았다. 국민학교를 남들보다 두어 살 늦게 들어갔으니 열다섯 살이 꽉 찼건만 기껏해야 3~4학년 정도로 보였다. “저걸 원제 켜서 시집보낸댜.” 종순이 어머니는 걱정을 혹처럼 매달고 다녔다. 열세 살이 되던 해 혹시나 하고, ‘개짐’(여자가 월경을 할 때 헝겊 따위로 기저귀처럼 만들어 차는 것)을 마련해줬건만 몇 년째 장롱 속에서 나올 기색이 없었다. 그런 종순이의 삶을 송두리 째 틀어놓는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에는 교감선생님 이하 모든 교사들이 교무실 난로 가에 둘러앉아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유일하게 혼자 떨어져서 먹는 게 종순이었다. 그녀는 종이 매달린 근처의 자기 책상에서 먹었다. 그날도 4교시 끝나는 종이 울리고 늘 똑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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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화처럼 고요한 그 풍경을 살짝 찢어놓은 사람이 바로 나민암(羅珉巖) 선생이었다. 나 선생은 그 학교의 유일한 총각선생이었다. 교대를 졸업하고 바로 부임해왔으니(1981년 이전까지 교육대학은 2년제였다) 미처 여드름자국도 다 지우지 못한 풋내기였다. 대개는 도시로 부임하기를 원하는데, 무슨 생각인지 나 선생은 산골학교로 자원했다. 선생님을 하늘과 동급으로 아는 종순이에게는, 총각이든 유부남이든 어려운 존재일 뿐이었다. 모두들 아무 말 없이 도시락 파먹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나 선생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종순씨! 추운데서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와요.”
종순이는 설마 그 목소리에 들어있는 ‘종순씨’가 자신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들끼리 얘기려니 하고 크기가 만만찮은 총각김치 하나와 씨름하고 있었다. 모든 선생님의 눈이 나 선생과 종순이 사이를 왕복했다.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 차 있었다. ‘종순이’가 아닌 ‘종순씨’라는 호칭도 그러하거니와 종치는 아이보고 같이 밥을 먹자니…. 어색한 침묵이 교무실을 팽팽하게 채웠다. 그제야 종순이도 사태를 파악했다.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는 사실 외에, 그날의 이야기를 더 길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뒤로도 달라진 건 없었다. 종순이는 다음날도 여전히 자신의 곰보책상에서 밥을 먹었다. 물론 열다섯 소녀의 가슴에 한 남자가 들어앉았다는 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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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순이의 세상은 어느 날 아침 온통 다른 색으로 색칠 돼 있었다. 학교 가는 게 너무 기다려졌다. 전에는 등을 떠미니 다니는 정도였다. 종을 치는 건 좋았지만, 혼자만이 이질적인 존재인 학교 자체에는 그리 정이 가지 않았었다. 가슴은 송장메뚜기 뛰듯 벌떡벌떡 뛰었다. 뺨은 봉숭아 빛이었다. 모든 꽃들은 황금빛 너울을 쓰고 있었고 내에는 오색찬란한 보석이 돌돌돌 흘렀다. 길을 가다 발에 채는 개똥까지 소중했다. 난감한 일도 있었다. 나 선생님을 볼 때가 그랬다.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뱀 만난 개구리처럼 얼어붙고는 했다. 도망치고 싶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일들이 생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즈음에는 종순이가 치는 종소리가 유난히 멀리 울려 퍼졌다. 하지만 행복이란 건 늘 그 꼬리를 생각보다 일찍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그날 변소에서 너무 오래 앉아있었던 게, 불행을 앞당겼는지도 모른다. 변소 뒤 나무그늘에서 남자선생님 둘이 나누는 말이 창을 타고 넘어왔다.
“그렇다고 학기 중에 떠나는 법이 어디 있답니까? 나 선생 그렇게 안 봤는데 영….”
“나 선생 뜻이 아니고 와병 중인 아버지 때문이라잖아.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빨리 올라오라고 그렇게 성화였다니. 어디 성화뿐인가. 그 ‘빽’ 좋다는 양반이 각계에 손을 써서 나 선생을 불러 올렸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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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길어도 내용은 간단했다. 나 선생이 전근을 간다는 것이었다. 순간 변소의 벽이, 아니 눈앞의 모든 것이 우르르 무너졌다. 세상은 더 이상 황금빛 꽃밭이 아니라 시커먼 개흙으로 뒤덮인 수렁이었다. 그날부터 종순이의 넋은 허공을 떠돌았다. 밤이면 먼 길을 걸어 나 선생님이 밥을 붙여먹고 있는 집 주변을 맴돌았다. 한지 창에 그림자라도 어릿거리면 부둥켜안을 듯 달려가 보지만, 결국 저만치 가 있는 건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닭이 홰를 칠 무렵이 되어서야 이슬에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나민암 선생님이 떠나는 날, 종순이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프다는 핑계였지만 꼭 핑계만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아랫배가 쌀쌀 아프고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처음 겪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몇 마디 지청구를 날리던 어른들이 들판으로 나간 뒤 종순이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맨 먼저 자신의 궤짝을 뒤져 오래 전에 보관해두었던 개짐을 꺼냈다. 드디어 쓸 날이 온 것이었다.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처리를 마친 뒤, 궤짝에서 헌옷가지 몇 가지를 꺼내 보자기에 쌌다. 집을 나온 그녀가 조심스레 두리번거린 것도 잠시, 걸음을 재게 놀려 들판을 가로질렀다. 아침저녁으로 두 번 다니는 버스가 올 시간이었다. 멀리서 땡땡땡! 종소리가 울렸다. 다른 날보다 5분쯤 늦게 치는 수업시작 종소리였다. 순간, 맨발에 검은 고무신을 신은 작은 소녀가, 선생님의 새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꼭 쥐고 신작로를 달음질 치기 시작했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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