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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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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천막'에 해당되는 글 1

  1. 2007.07.04 [사라져가는 것들 15] 서커스2
2007. 7. 4. 18:58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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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서커스라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산골을 벗어나 보지 못했던 아이에게, 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마냥 신기했다. TV라는 것도 처음 보았다. 아이의 눈에 비치는 것은 모두, 하다 못해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조차도 고향의 그것과는 다르게 보였다. 서커스 천막이 쳐진 곳은 5일장 쇠전 옆의 공터였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햇살이 노루꼬리만큼 짧아지고 허술한 광목천의 교복을 파고드는 바람에 어깨가 움츠려들 무렵이었다. 그 작은 읍에 서커스가 들어온 것부터가 신기한 일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서울 근교를 떠돌다가 겨울을 앞두고 따뜻한 남쪽지방으로 이동하던 어느 서커스단이, 날개 부러진 철새처럼 중간에 짐을 풀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더니 공터에 높다란 천막이 들어섰다.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어쩌고 하며 궁벽한 고향동네까지 들어왔던 천막극장과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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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는 천막이 완성될 때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트럼펫과 북을 앞세우고, 얼굴에 온갖 칠을 한 어릿광대가 거리를 돌며 광고를 하고(전문용어로 '마찌마리'라고 한다), 벽마다 각종 쇼와 공연모습을 담은 포스터가 나붙은 다음에야 상황을 대충 짐작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서커스가 무엇이라는 걸 알았다는 것과, 아이가 서커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이가 서커스를 구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좁쌀? 아니 누에씨만큼도 없었다. 손자를 가르치겠다고 읍내까지 나온 아이의 할머니에게는 하루를 연명할 양식과 땔거리가 급급한 판이었다. 그런데 운명의 지침은 엉뚱한 곳에서 아이 쪽을 가리켰다. 읍내에서 20년 넘게 여관을 운영해온 동성여관집 아들, 박상수를 짝으로 두었던 건 여러가지로 행운이었다. 점심마다 그 풍성한 도시락반찬을 얻어먹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한 판에 또 하나의 기회가 다가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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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단 수뇌부가 묵는 곳이 바로 상수네 동성여관이었다. 하긴 두어 곳 쓰러져 가는 여인숙을 빼고, 여관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소읍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서커스단 소속이라고 다 여관에 묶는 것은 아니었다. 오야지(단장)나 총무, 그리고 '에이스급'이거나 돈이 좀 있는 단원만 여관에 묶고 나머지 하급단원이나 지원조(후견이라 불렀다)는 천막 안, 무대 아래에 숙소를 만들어서 그 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상수는 학교에 오자마자 아이에게 서커스단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 일에 열중했던지 선생님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떠들다가 둘 다 벌을 섰을 정도였다. 상수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얘기는 도서관에서 읽었던 아라비안나이트보다 더 재미있었다. 서커스단은 전국 어디 건 다니지 않는 데가 없다고 했다. 더구나 서커스단에는 아이 또래의 여자 애들(상수는 무지무지 예쁘다고 했다)도 많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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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결정적으로 설레게 한 것은 상수가 귀에 대고 은밀히 한 약속이었다. "기도 보는 아저씨가 언제든지 오기만 하면 그냥 넣어주겠대. 그 아저씨 우리 집에서 묵지도 않으면서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하거든…흐흐, 난 그게 우리 누나 때문이란 걸 알지. 뭐 아무렴 어떠냐? 너도 준비하고 있어." 단원 중에 누군가 상수의 누나를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서커스를 볼 수 있다는데…. 또래 중에 서커스를 구경할만한 조건을 가진 아이들은 드물었다. 고등학교 형들 중 몇이 천막 뒤쪽을 찢고 몰래 들어갔다거나, 읍내를 휩쓰는 주먹들이 총무와 적당히 사바사바해서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어린 중학생들에게는 실감하기 어려운 이야기일뿐이었다. 그리고 서커스 천막 입구에는 힘깨나 쓸만하게 보이는 청년들이 지키고 있어, 고등학교 형들의 '전설'도 상당부분은 허풍일 거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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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극장조차 언감생심 구경하기 힘들었던 아이에게 서커스를 본다는 건 꿈과 같은 일이었다. 서커스는 보통 하루 3회 공연을 했다. 물론 손님이 없으면 2회로 줄거나, 대박이 터지면 4회로 늘기도 했다. 아이와 상수는 저녁공연에 맞춰 가기로 했다. 컴컴할 때 들어가야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띌 거라는 계산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밖에서 보는 서커스 천막은 우람하고 당당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입구에는 얼굴에 칠을 하고 고깔모자를 쓰고 소매서부터 넓게 퍼져 올라간 옷을 입은 난쟁이 어릿광대가 연신 손님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그 옆에는 원숭이 한 마리가 어릿광대를 흉내내며 연신 손뼉을 치고 있었다. 아이가 넋이 빠져있는 사이 상수가 팔 소매를 잡아 끌었다. 아마 얘기가 잘된 모양이었다. 둘은 누구 눈에 띌세라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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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 것과 동시에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사회자의 장황한 멘트가 이어진 다음에 서커스가 시작됐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가수의 노래가 첫 순서였다. 주인집 마루에서 언뜻언뜻 훔쳐 본, TV 속의 쇼무대처럼 무희들이 뒤에서 춤을 췄다. 이어서 나이 지긋한 사내가 마술을 선보였다. 아이에겐 쇼보다 마술이 훨씬 재미있었다. 모자에서 꽃이 나오고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마다 박수가 터졌다. 마술이 끝나고 나서야 본격적인 서커스가 시작됐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접시가 흔들리며 돌아가는  접시돌리기, 현란한 원반돌리기, 아슬아슬한 통굴리기, 비틀비틀 줄 위에서 자전거타기, 덤블링, 외줄타기…. 연속으로 이어지는 현란한 묘기에 아이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천막 안은 밝아 보이거나 들떠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 가슴마다 바윗덩이라도 올려놓은 듯 약간은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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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빨간 옷에 비단신을 신은 소녀가 작은 그릇을 들고 나왔다. 소녀는 그릇을 머리에 올리기도 하고, 발에 놓고 몸을 굴리기도 하고 남자의 손을 짚고 물구나무서서 온갖 동작을 펼쳤다. 활처럼 휘고 구르고…. 왜 그랬을까.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 속에 들어선 것처럼 눈이 매캐해지고 목이 칼칼해졌다. 그러더니 결국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시작됐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소녀가 특별히 불쌍해 보인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공연은 아이 또래 만한 어린 소녀들 중심으로 이뤄졌다. 매일 고된 훈련을 할 테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니지만,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픔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눈물은 두 남자가 펼치는 공중그네타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흘러내렸다. 천막의 벌어진 틈 사이로 초겨울의 바람이 칼날을 내밀고 있었다. 바람은 가마니 위에 어깨를 움츠리고 앉아있는 관객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천막은 밖에서 보던 것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헤진 가마니처럼 낡아가고 있었다. 서커스에 대한 아이의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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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하는 것은 그 자체에 짙은 슬픔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날 한 아이가 서커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 이미 서커스는 끝없는 추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11년 일본인에 의해서 부산에서 첫 말뚝을 박았다는 서커스는, 이 땅의 놀이패였던 사당패가 몰락한 이후 최고의 볼거리로 부산부터 만주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는 서커스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70년대만 해도 소속 단원들만 250명이 넘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으며 영화배우 허장강, 코미디언 서영춘을 비롯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 장항선씨와 가수 정훈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스타가 배출됐다."(동춘서커스 홈페이지
http://circus.co.kr)고 그 시절의 서커스를 돌아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미 사양길의 짙은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 있었던 건 터져 나오는 기침처럼 감출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밖에. 간단한 장비만으로 전국 어디나 돌아다닐 수 있는 활동사진이 판치고 시골마을에도 텔레비전 안테나가 불쑥불쑥 솟아오르던 시절, 찬바람을 맞으며 가마니가 깔린 서커스 천막 안에 앉아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럴수록 서커스단원들의 주름과 한숨은 깊어가고 어린 소녀들의 아픔도 한 여름 해바라기처럼 자꾸 커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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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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