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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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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누리길'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7.09 [길따라 바람따라 4] 서삼릉누리길10
2012. 7. 9. 08:30 길따라 바람따라

3호선 원당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여기서 출발. 도로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길이 나온다.

경기도 고양시. 3호선 원당역 6번 출구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며느리 친정나들이 보낸 시어머니 얼굴처럼 편안하지 않다. 그렇다고 금방 비가 올 기세도 아니다. 기상청 예보에도 비 얘기는 없었다. 요즘 예보는 신경통 앓는 노인보다 훨씬 정확해졌다. 믿자, 믿어. 오늘 걸어야 할 길은 서삼릉(西三陵)누리길. 지금까지 걸었던 길 중에서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길 소개는 천천히 하고, 일단 출발이다. ? 그런데 어디로 가지? 늘 그렇듯이 첫 걸음을 떼는 게 문제다. 전철역을 뒤로 하고 직진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안내판이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조금 망설이다가 일단 직진해서 큰 길로 들어선다. 왼쪽으로는 고가도로가 오른쪽 하늘에는 전철이 다니는 길이 걸려있다. 저 길을 계속 가면 우주정거장이 나올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버릇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조금 걷다보니 오른쪽으로 작은 길이 보인다. 맞아. 저 길이었어. 얼른 밭을 가로질러 그 길로 접어든다. 걷는 이에게 찻길은 늘 부담이다. 조금 가면 첫 번째 경유지인 배다리술박물관이 나올 것이다. ‘이라는 단어에 입에 침이 고인다. ,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길로 가야되는데 처음엔 큰 길로 갔다. 길치 같으니...

여기서 다리 쪽으로 좌회전

! 최소한 코스는 숙지하고 가야지. 서삼릉누리길은 총 8.28km로 여유롭게 걸으면 2시간15분가량 걸린다. 전철 3호선 원당역과 삼송역 사이에 있어서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코스는 원당역배다리술박물관수역이마을서삼릉종마목장농협대학솔개약수터삼송역 순이다. 물론 반대로 삼송역에서 출발해도 뭐라는 사람은 없다. 걷는 도중에 세계문화유산인 서삼릉과 원당종마목장 등을 경유하기 때문에 역사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따라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 너무 이른 시간인가? 그렇지도 않은데. 시계를 보니 10. 혼자면 어때? 길을 걷는다는 건 배낭에 외로움을 지고 가는 것이다. 자꾸 동반자를 찾기 시작하면 길의 참맛을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이다. 조금 벗어나니 서삼릉누리길이라는 첫 번째 알림기둥이 보인다. 거기서 조그만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접어든다. 길가의 텃밭에는 온갖 푸성귀들이 키를 재고 있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와 새 생명들을 저만큼 키워놓았다.

 

배다리술박물관 전경

증류주를 만들고 있다.

곳곳이 박물관

5분쯤 걸었을까. 저만치 배다리술박물관 간판이 보인다. 그냥 지날 수 없지. 마당에 들어서니 여기 저기 놓여있는 술독부터 예사롭지 않다. 한 바퀴 돌아보다가 마당가에 허술하게 지은 작은 집을 들여다본다. 노인 한 분이 술을 빚고 있다. 아궁이에서는 장작이 끄느름하게 타고 있고 소줏고리의 주둥이를 타고 내려온 맑은 술이 유리병으로 들어간다. 요즘은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제사장처럼 경건해 보이는 노인의 뒷모습에 말도 못 붙이고 조용히 물러나온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말 그대로 박물관이다. 1, 2층으로 구성돼 있는데 현관에서부터 유물들이 빽빽하게 전시돼 있다. 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빚기에서부터 보관까지 온갖 도구들이 다 있다. 술 뿐 아니라 제례혼례 와 관련된 각종 전통용구와 옷들도 진열돼 있다. 이 집 주인의 관심과 취미가 보일 듯하다. 하긴 전통 관혼상제 어딘들 술이 빠지던가. 특히 눈에 띄는 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한 자료들. 막걸리를 마시는 밀랍인형도 있고 벽에는 생전의 사진도 붙어있다. 배다리술도가의 막걸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애용주로 이름을 날렸다는 이야기도 거기서 확인한다.

 

전시물을 설명하고 있는 박관원 관장

옛날에 썼던 술 빚는 도구들

각종 전시물들

관혼상제 때 쓰던 옷들

1층으로 내려오다가 술을 빚던 노인과 마주친다. 언뜻 봐도 장인들이 가진 꼿꼿한 기운이 전신에서 풍겨 나온다. 적어도 80은 돼 보이는데 석양에 든 세대가 갖기 쉬운 열패의 기운은 조금도 없다. 묻지 않아도 배다리술도가의 4대 가주(家主)이자 박물관을 세운 박관원 씨라는 걸 알 수 있다.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묻는다.

지금도 술을 직접 빚으세요?”

그럼요. 내년이 우리 술도가 100주년이거든. 직접 100년 주를 만들 거예요. 외국에 가보면 몇 백 년 된 술, 코냑 그런 게 있잖아. 그런데 우린 그런 전통술이 없어요. 일제 때문에 전통주가 모두 사라진 거지.”

그냥 지나갔으면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말문이 터지자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진다. 지금은 5대째인 아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지만 손자가 합류해 6대로 이어질 거라고 자랑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긍심이 묻어있다.

 

느닷없이 비가 쏟아졌다.

배다리막걸리 한 잔 하시려우?

너무 오래 지체했나싶어 다시 길을 나서려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갑자기 우르르 쾅쾅!!! 소리가 나더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진다. 어라? 천하의 술꾼이 술도가에 와서 술 한 잔 안 마시고 간다고 하늘이 노했구나. 이러니 내가 술을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가 없지. 배낭에 맥주를 충분히 넣어갖고 왔는데 어쩐담. 그래도 하늘의 뜻을 무시할 수 있나. 점심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박물관 한쪽에는 술과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비가 장엄하게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막걸리와 안주를 시킨다. 어차피 마음 한켠에는 이런 일이 벌어지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내가 술도가를 그냥 지나친다는 건 개가 X을 보고 그냥 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막걸리 맛은 자랑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맛이 좋다. 하긴 지금 내 입에 무엇인들 맛이 없으랴.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르고 술잔을 기울이는 내 손도 좀처럼 쉴 줄 모른다. 에헤야~ 데헤야~ 길이 늦어지면 어떠랴.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되지. 역시 술이 좋긴 좋다.

 

비가 그친 뒤의 싱그러운 숲길

위의 숲길을 가지고 장난도 치고

숲길을 벗어나니 동네가

저곳이 바로 주꾸미로 유명한 수역이마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던 비는 내가 마지막 술잔을 비우자 거짓말처럼 그친다. 역시 술 한 잔 마시고 가라는 뜻임이 확인됐다. 비가 그친 대지는 싱그럽다. 진흙길을 피해 조심스레 걷다가 숲길로 접어든다. 카메라로 줌인 샷 놀이도 하고 동네 개들과 메롱놀이도 하면서 가다보니 골프장을 끼고 도는 길이 나타난다. 높은 담장너머 골프장의 잔디들이 비를 맞아 푸른 보석처럼 빛난다. 하지만 공이 날아올지 모르니 출입을 삼가 달라는 입간판 앞에서 살짝 정이 떨어진다. 내가 그곳을 들어갈 일도 없겠지만, 저런 류의 경고문은 늘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날아오는 공에 안 맞으려면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골프장을 지나니 수역이마을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식당들이 나란히 서있다. 그 유명한 주꾸미 마을이다. 수역이마을의 어원은 수역(水域)이 마을이라고 한다. ‘물의 경계. 뭔가 있어보인다. 원래는 넓은 들을 낀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 식당들이 한 둘 들어서면서 지금은 유명한 먹거리촌이 됐다고 한다. 특히 주꾸미 요리로 유명하다. 하지만 배부른 자는 주꾸미 아니라 낙지로 미끼를 삼아도 유혹당하지 않는 법. 배고플 때 찾아오리라 다짐하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다시 숲길이 이어지고

여기서 우회전

이제부터 능역이다. 또 우회전

맞으면 너만 손해니 알아서 피하라는 거야?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서 2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만난다. 깊 옆에는 찔레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왜 나는 찔레꽃만 보면 소복 입은 여인이 생각나는지. 가객(歌客) 장사익의 찔레꽃을 흥얼거리며 한국스카우트 연맹이라는 알림기둥을 따라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이제부터 아스팔트길을 걸어야한다. 걷기여행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구간이 나타난 것이다.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참 걷다보니 저만치 넓은 숲이 보인다. 이제 서삼릉 언저리에 들어선 셈이다. 그렇다고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한국스카우트연맹 중앙훈련원을 지난 뒤에도 서삼릉은 까마득하다. 도중에 비닐하우스도 만나고 골프장도 만난다. 역시 골프공을 조심하라고 써 놨다. 언젠가는 골프공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 나오겠다. 왕릉 유역에 골프장은 또 뭔지. 조상님들이여. 얼마나 속상하십니까? 날이면 날마다 굿 샷!” 소리 들으며 잠에서 깨시는 건 아닌지요. 다행이 길 옆으로 인도를 만들어 놓아서 걷기는 수월하다. 드디어 허브랜드 간판과 만난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만큼 아스팔트길을 걷는 건 피곤하다. 이제부터 서삼릉 들어가는 길의 시작이다.

 

차도를 줄여 인도를 만들어놨다. 나야 고맙지 뭐.

이곳이 바로 허브랜드

허브랜드에 핀 꽃들

핀 꽃을 그냥 지나치면 예의가 아니지. 허브랜드에 들러 이 꽃 저 꽃을 둘러본다. 허브 향기가 피로를 한결 덜어준다. 힘을 얻었으니 이제 서삼릉으로 갈 차례.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차와 사람이 엉켜 무척 혼잡하다. 조금 들어가니 오래된 은사시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은사시 나무. 이름만 들어도 뭔가 있을 것 같은 이 느낌은? 은사시나무는 잎의 뒷면이 하얀 솜털로 덮여 있는데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마치 사시나무가 떠는 것처럼 보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 은색 사시나무다. 하지만 은사시는커녕 사시나무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시나무처럼 떤다는 표현이 실감이 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또 자연공부를 좀 하고 갈 일이다. 사시나무는 한자로 백양(白揚)이라고 한다. 나뭇잎이 팔랑팔랑 움직인다고 '팔랑버들' 또는 '파드득나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왜 이 나무는 떠는 나무로 알려져 있을까. 사시나무는 생장이 무척 빠르기 때문에 많은 양의 물을 뿌리에서 잎으로 빨아올린다고 한다. 그렇게 생긴 수분을 공기 중에 빨리 방사하기 위해 잎을 마구 떨어댄다는 것이다. 우리가 손에 물이 묻으면 탈탈 터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과학 공부를 꽤 열심히 한 나무인 것 같다.

 

서삼릉 들어가는 길

종마목장의 풀밭

사시나무 잎이 팔랑거리는 이유를 독특한 구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사시나무 잎은 커다란 부채 모양으로 생겨서 바람을 잘 받는다. 또 잎자루가 가늘고 길기 때문에 탄력성이 뛰어나다. 그러니 조그만 바람에도 민감하게 움직일 수밖에. 하지만 아무리 과학의 시대라도 나무에 전설이 빠질 수는 없는 법. 중국 주나라에는 묘지에 심는 다섯 가지의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군주의 능에는 소나무, 왕족의 묘지에는 측백, 고급관리는 회화나무, 학자는 모감주나무를 심었다. 그렇다면 장삼이사 서민들의 무덤에는? 바로 사시나무를 심었다. 문제는 한번 서민은 죽어서도 서민이라는 것. 서민 무덤에서 자란 사시나무들은 높은 사람만 지나가면 말 그대로 사시나무 떨 듯떨었다는 것이다. 에구, 예나 지금이나 민초들은 죽어서도 불쌍한 존재다. 고개를 넘으니 눈앞에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다. 종마목장(경마연수원)에서 가꾼 초지(草地). 방금 풀을 베어낸 듯,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풀들이 흘린 피 냄새다.

 

표부터 끊으세요.

난 이런 숲이 좋더라.

 

먼저 서삼릉에 들르기로 한다. 현재 이곳 능역은 관리주체가 나뉘어져 있어서 허가 없이 서로 통행할 수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지. 그래서 일반 시민들은 효릉을 뺀 예릉과 희릉, 즉 서이릉만 볼 수 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서삼릉에 대해 공부 좀 하고 지나가자. 서삼릉은 앞에 밝힌 대로 효릉과 예릉, 희릉을 일컫는 말이다. 효릉(孝陵)은 중종의 아들인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의 능이다. 이 능에는 슬픈 사연이 배어있다. 인종은 단명한 왕이었다.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했는데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는 소망대로 아버지 중종과, 자신을 낳고 산후병으로 25세에 요절한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곁에 묻혔다. 딱 거기까지만 좋았다. 그의 계모였던 문정왕후가 훗날 지아비 중종의 능을 한양으로 이장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간절한 소망은 한 여인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철종과 철인왕후가 누운 예릉

봉분이 잘 안보인다.

정자각 내부. 제례에 대해 자세히 안내해 놓았다.

희릉(禧陵)은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능이다. 장경왕후는 태종의 능인 헌릉에 안장됐다가 지금의 장소로 이장됐다. 중종이 승하하자 비()가 묻힌 이곳에 안장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했다. 그 상태로 두었으면 아무 일 없었으련만, 앞에서 나온 문정왕후의 왕릉 이장이 또 하나의 비극을 만들었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였던 문정왕후, 질투였는지 자신의 죽음 이후를 계산했는지 중종의 능을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으로 이장해 버렸다. 결국 부부를 떼어놓아 장경왕후만 남은 희릉이 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이장의 이유로 중종의 능자리가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점을 들었지만, 옮긴 곳은 지세가 낮아 홍수가 나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조금 더 계속된다.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던 문정왕후 역시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의 단릉(單陵)에 안장됐다. 결국 중종은 시샘 많은 두 번째 계비 탓에 죽어서도 쓸쓸히 지내고 있는 셈이다. 예릉(睿陵)은 농투성이에서 졸지에 만인지상(萬人之上)이 된 비극의 왕 철종과 철인왕후 안동김씨가 묻힌 능이다. 철종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별도의 설명은 생략한다.

 

장경왕후가 혼자 누워있는 희릉

 

효릉은 가볼 방법이 없으니 건너뛰고 먼저 예릉에 들른다. 철종을 생각해본다. 강화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원범으로 살았으면 훨씬 행복하지 않았을까. 안동김씨의 세력에 눌려 뜻 한번 펼쳐볼 새 없이 살다가, 30대 중반에 승하하고 말았으니 그 또한 신데렐라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능은 잘 가꿔져 있다. 하지만 특별한 감흥은 없다.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과 신도비가 안치된 비각을 둘러보고 먼발치에서 봉분을 휘휘 둘러보고 돌아설 뿐이다. 장경왕후가 혼자 누워있는 희릉도 별로 다를 바 없다. 이곳 서삼릉에는 지금까지 본 능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의 만행은 이곳에도 숨어있다. 강점자들은 전국에 산재해 있던 왕들의 태실과 후궁왕자공주들의 묘들을 서삼릉의 경내로 이장했다. 집중 관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조선 왕릉의 격을 훼손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공통된 해석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문화재는 제 자리에 있을 때만 제 가치를 발한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서삼릉엔 3개의 능과 효창원의령원 등 3개의 원, 후궁들과 왕자 공주의 묘 46, 태실 54기가 있는 커다란 능역이 되었다.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의 회묘도 이곳에 있다.

 

종마목장 들어가는 길

말 팔자가 상팔자

홍당무를 얻어먹겠다고...

능을 벗어나 종마목장으로 향한다.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는 경마연수원은 경주마와 종마의 육종보호를 위해 만든 곳이다. 질 좋아 보이는 말들이 푸른 초원에서 마음껏 뛰놀고 있다. 저 정도면 개 팔자가 아니라 말 팔자가 상팔자다. 하지만 그리 흔쾌하지만은 않다. 왕릉 곁에 종마장이라니. 지하에 묻힌 왕들은 골프 치는 소리로도 모자라 배설물의 냄새까지 맡아야 할 것 같다.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법 치고는 좀 고약스럽다. 종마목장에는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이 많다. 설렁설렁 둘러보고 되짚어 나온다. 서삼릉 입구에서 다시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역시 아스팔트길이다. 더구나 인도를 따로 내놓지 않아서 영 불편하다. 가족단위로 걷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서삼릉에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농협대학을 지나고 솔개약수터를 가리키는 알림기둥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여기서 좌회전해야 할 것 같은데 확신이 안 선다. 길 입구에 홍익교회 큰숲비전센터라는 간판과 돌문이 서 있어서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에라, 일단 가고 보자. 게다가 교회인데 누군들 못 들어가랴. 다행이 길은 교회 옆으로 이어져 있다. 조금 더 걸으니 솔개약수터라고 쓴 작은 알림기둥이 서있다.

 

다시 걷는다. 위험한 이차선 도로를.

농협대학

교회라고 겁내지 말고 그냥 들어가시길.

이제 거의 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느닷없이 도로공사현장이 나오면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삼송역으로 방향을 잡아야하는데 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산등성이를 넘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등성이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이거야말로 낭패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길을 잃었으니 뭐라고 전해줘야 한단 말인가.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내 길눈이 어둡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안내된 길에서 길을 놓친 경우는 없다. 길이 제대로 돼 있는데 못 찾은 것이라면 안내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길 찾기의 천재들만 걷는 게 길이 아니다. 또 도로공사 때문에 지형이 바뀌었다면 임시 안내판이라도 설치했어야 했다. 길을 만들고 사람을 초청한 이들의 예의다. 이리저리 헤매는데 빗방울까지 떨어진다. 아무도 없는 공사장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다. 굴러다니는 토관에라도 들어가 비를 피할까 하다가 무슨 험한 꼴인가 싶어서 큰 길로 방향을 잡아 뛰듯이 걷는다. 도로공사 뿐 아니라 곳곳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도로공사현장. 이 근처에서 길을 잃었다.

드디어 삼송리. 야호!!

길의 종점인 삼송역. 제법 복잡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허덕거리며 걷다보니 조그만 도시가 나온다. 다행이 오늘의 종착점인 삼송리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만난 삼송역. 전철역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있었던가. 역사로 들어가 젖은 옷을 말리며 오늘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아스팔트 구간이 꽤 길고 마지막에 길을 못 찾아 불편했던 건 사실이지만, 서울 근교에 이만한 길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특히 곳곳에 이야기를 품고 있는 길은 보석보다 더 귀한 존재다. 심신에 배인 길의 향기가 흩어질세라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전철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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