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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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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당 새끼줄 치성 당집 헝겊'에 해당되는 글 1

  1. 2007.05.16 [사라져가는 것들8] 서낭당2
2007. 5. 16. 18:45 사라져가는 것들

민초들의 삶을 보듬었던 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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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이미 훤하게 밝았지만 아이의 잰걸음은 늦춰질 줄 모른다. 거북고개는 대낮에도 조금 컴컴해서 혼자 넘어가기에는 여간 무서운 게 아니다. 그러니 그 길을 이른 아침에 넘는 것은 오밤중에 뒷간을 혼자 가는 것보다 더 싫은 일이다. 학교에 일찍 가야하는 당번이 아니라면 등을 떠밀어도 도망쳤을 것이다. 고개를 넘어 학교가 있는 면소재지에 거의 도착해서야 아이는 멈춰 서서 턱까지 찬 숨을 고른다. 논과 밭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의 모습이, 보리밥의 강낭콩처럼 띄엄띄엄 박혀있다. 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춘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나 서 있고 느티나무 가지에는 울긋불긋한 천들이 늘어뜨려져 있다. 서낭당이다.

느티나무 주변으로 제단처럼 쌓여진 돌무더기 위에는 탐스러운 시루떡이 올려져 있다. 김이라도 모락모락 올라올 것 같다. 밤새 누가 치성이라도 드린 모양이다. 떡 옆에는 사과와 곶감 같은 과일도 놓여져 있다. 아이가 꼴깍 침을 삼킨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온 터라, 횟배 요동치듯 시장기가 기승을 한다. 얼론 하나만 집어먹어? 누구 보는 사람도 없잖아. 스스로를 달래고 다그쳐보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만다. 서낭당의 치성떡을 몰래 먹었다가 동티가 나서 어찌어찌 됐다는 이야기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이는 고개를 한번 내젓고 도망치듯 내쳐 걷는다. 잠시라도 떡에 대해 욕심을 부렸다는 걸 누가 알기라도 할세라 걸음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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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어지간한 마을이면 입구마다 서낭당이 있었다. 보통 고갯마루나 큰 길 가 등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자리잡게된다. 민초들이 마을과 토지를 지켜준다고 믿었던 존재가 서낭신인데, 그 서낭신이 붙어 있는 오래된 나무(神木, 神樹)나 돌무더기를 서낭당이라고 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서낭신이 머물 사당을 짓기도 했다. 이를 당집이라고 불렀다.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고 잡귀나 병을 막아주는 역할 외에도 먼길에서 돌아오는 가족들을 마중하고, 먼 길을 떠나는 가족들을 배웅하는 만남과 이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난 사람이 있는 집 식구들이 마을 어귀의 서낭당 입구까지 나가 하염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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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지나던 나그네가 서낭당을 만나면 돌을 하나 얹거나 침을 뱉기도 했다. 돌을 얹는 것은 원하는 것이 이뤄지도록 해달라고 염원하는 의식이며 침을 뱉는 것은 길 위를 떠돌아다니는 악령의 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서낭당에는 매년 정초에 동네사람들이 왼새끼로 꼰 금줄을 쳐서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도록, 농사가 풍년이 들도록 제를 지냈다. 당나무에는 아이들의 장수를 위해 부모가 걸어 놓은 헝겊조각, 먼 길을 가는 장사꾼이 장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달아놓은 짚신 등이 걸리기도 했다.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남편의 노름이나 바람기를 재워달라고, 부모님이 무병장수 하게 해달라고 기원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도 서낭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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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고락을 같이했던 서낭당을 보기 힘들게 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불길처럼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던 새마을운동은 서낭당에게 이중포화를 퍼부었다. 길을 넓힌다는 명분으로 아름드리 당나무가 뽑혀나갔고 돌무더기가 사라지기도 했다. 또 다른 시련은 '미신(迷信)타파'라는 이름으로 공개재판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서낭당은 그렇게 하나 둘 사라져갔다. 반드시 그래야 했을까. 마을 길을 넓힌 것이야 살기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쳐도, 미신이란 이유로 처단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공감하기 어렵다. 오랜 세월 풍성한 수확과 마을의 안녕을 빌고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던 서낭당이 백성들을 미혹했다는 게 정말 타당한 주장인지. 어차피 '미신이 아니라는' 종교 역시 마음의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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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서낭당을 보라. 기댈 곳 없는 우리네 민초들이, 가려운 소가 나무에 몸을 비비듯 외로움과 슬픔과 따뜻함을 나누던 존재가 바로 서낭당이었음을 알기 어렵지 않다. 그런 존재를 과연 그렇게 쉽게 쓸어내야만 했는지.
'개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뼈다귀가 움츠러드나 보다, 하고 내가 넌짓넌짓이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서낭당에 돌을 올려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줍소사.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드립죠." 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김유정의 '봄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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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면서] 보통 토종의 '서낭당'과 중국출신의 '성황당(城隍堂)'을 동일한 개념으로 여기지만,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물론 중간에 그 개념이 많이 섞였겠지만, 저 역시 이 둘의 근원이 다르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서낭당을 찾기 위해서, 그나마 제대로 보존됐음직한 강원도지역을 많이 헤맸습니다. 정선 땅에 갔더니 여기저기 당집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만들어 세운지 지 얼마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일종의 관광상품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태백을 걸쳐 삼척 땅 신리 너와마을을 찾았다가 고개를 넘어가는 길, 갑자기 시선이 멈춰 섰습니다. 길가에 아주 작은 당집이, 금줄을 두른 채 고즈넉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 때의 반가움이란…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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