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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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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르우르파 공항'에 해당되는 글 1

  1. 2012.12.17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 23] 이스탄불-돌마바흐체 궁전

이스탄불로 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평원.

아타튀르크 댐이 만들어 낸 풍경.

이제는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한다. 터키의 숨겨진 속살을 관통하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말라티아에서는 마음이 통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샨르우르파에서는 깨달음을 준 옛 스승들을 만났다.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으로부터 갈대우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 험난한 여정도 들었고, 선지자 욥을 만나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야곱과 라헬의 사랑이야기도 가슴에 담았다. 샨르우르파 공항,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아쉬운 눈길을 창밖에 고정시킨다. 여전히 황량한 벌판에는 나스카의 지상그림처럼 생긴 도형이 사방으로 뻗어있다. 그 한 가운에 있는 마을은 고립된 듯 외로워보인다. 저 안에 갇힌 저들은 무엇을 꿈꾸며 살까. 아니다. 그들은 저 광활함 속에서 한없이 자유롭거늘, 정작 갇혀 있는 사람은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잠시 뒤에는 사방팔방으로 물길이 뻗어나간 거대한 늪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서 보니 늪이지 사실은 엄청나게 큰 호수고 강이다. 댐에 막혀 길을 잃어버린 유프라테스강은 바다를 흉내 내고 있다. 정녕 인간이 자연을 이긴 것일까. 상념이 낳은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릴 무렵 이스탄불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스탄불 시내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분주하다. 이스탄불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역시 단 하루. 꼭 들르고 싶었던 돌마바흐체 궁전을 찾아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찾아다닌 이스탄불의 유적들이 유럽 쪽의 구시가지에 몰려있었다면 돌마바흐체 궁전은 갈라타 다리를 건너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올라가는 신시가지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외곽 뜰. 바다와 아시아 땅이 코앞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제1문.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조그만 만()을 메운 매립지에 자리 잡고 있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다. , 바다였던 자리를 메우고 정원을 조성했다고 해서 가득 찬 정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지금의 궁전이 들어서 있었던 건 아니고 17세기 초 아흐메드 1세가 정자를 짓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돌마바흐체라 불렀다. 그때의 건축물들은 1814년 화재로 모두 불타고 말았다. 궁전 외곽, 바다와 맞닿아 있는 전망 좋은 곳에는 넓은 야외 카페가 있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건너편의 아시아 땅과 바다 위의 유람선들이 어울린 그림 같은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카페는 그 풍광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그곳에 비비고 앉아 점심을 먹을까하고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무 그늘이 드리운 잔디밭에서 준비해간 점심을 먹는다. 궁전 앞의 점심식사도 제법 괜찮다.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볼까. 돌마바흐체 궁전을 관람하려면 표를 예매하는 게 좋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현장에서 구입하려면 줄을 서야 한다. 나는 미리 준비한 덕에 길게 늘어선 줄 옆을 자랑스럽게 지나갈 수 있다. 그러게 누가 무작정 오래? 사람들이 말이야, 준비성이 있어야지. 쯧쯧! 입장료는 30리라. 환율을 700원 씩 계산해도 21,000. 궁전 구경 하다가 등뼈 휘어져서 가겠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와봐야 할 곳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문을 들어선다.

문 위의 조각들. 

안쪽 문.

 

궁전 본관까지 가기 위해서는 제법 걸어야 한다. 화려한 문도 두 곳이나 통과한다. 다른 오스만 건축양식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유럽풍인데 무척 호화롭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지었다고 하니 까딱 잘못하면 파리쯤에 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일 것 같다. 이 궁전을 착공한 건 1843년이다. 압둘메지드 황제의 지시로 짓기 시작했는데 13년만인 1856년에 완공했다. 이탈리아 건축가 가라베트 발안과 그의 아들 니코코스 발안이 설계했다. 이 궁전이 완공되기 전에는 술탄들이 톱카프 궁전에서 기거했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톱카프 궁전 역시 어느 곳 못지않게 크고 화려한 궁전이다. 그러니 살만한 궁전이 없거나 곳간에 돈이 남아돌아서 새로 지은 건 아니고,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회복해보겠다는 염원이 투영됐을 것이다. 왕권시대에는 동서를 불문하고 나라의 기운이 쇠했다 싶으면 궁전을 짓는 게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이 땅의 흥선대원군도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임진왜란 때 불 타 무너진 경복궁을 새로 짓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뭐하나. 그 역시 약발이 별로였던 것 같다. 새 궁을 지은 지 얼마 안 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이 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으니. 건물 따위로 국운을 돌려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쓸모없는 삽질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 셈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할 무렵은 너도 나도 만만하게 보는 바람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센 개방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여려 가지 모습.

외채는 계속 늘어나고 국가의 재무 상태는 빈사 위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호화로운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 창고 바닥 긁는 소리가 요란했을 것 같다. 참고로 궁전을 지은 압둘메지드 황제는 이곳에서 단 6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이런 경우를 죽 쒀서 뭐 줬다고 하던가? 들어가는 길 내내 마음을 빼앗길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잘 가꿔진 정원에는 접시꽃이 활짝 웃는 얼굴로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특히 분수대가 있는 연못 앞에 서서 바라보는 궁전의 풍경은 환상적이다. 궁전 입구에서는 덧신처럼 생긴 비닐봉지를 하나씩 나눠준다. 신발에 씌우라는 뜻이다. 터키 사람들이 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입장하는 인원도 적절히 시간차를 두어서 복잡하지 않도록 조절한다. 문을 들어서면서 사진을 한 장 찍는데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역시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No Photo!!!" 여기도 촬영금지야? 대체 그 비싼 돈을 받아먹고 사진 한 장 못 찍게 하는 건 무슨 심보야. 톱카프 궁전에서도 불만을 토로했지만,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 한 유물이나 전시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게 내가 가진 상식이다.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이런 엄격한 규제는 들어가고 싶은 마음까지 통째로 뭉개 버린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그 수단을 빼앗겨 버리면 존재가치가 희미해진다. 다른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 다니긴 하지만 흥미는 이미 반감된 상태다. 관람은 1층 입구에서 시작하는데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올라가면 궁전의 본 모습이 펼쳐진다.

 

궁전에서 바라본 아시아 땅.

궁전 내부로 들어가면서 찍은 첫 번째 사진.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도둑 셔터로 찍었다.

고국에 뭔가 전해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뷰파인더를 보지 않는 상태에서 셔터를 몇 번 눌러보지만 사진이 제대로 나올 턱도 없고 굳이 도둑 사진까지 찍어야 되나 싶어 그만 둔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경비원들이 서서 네가 무슨 짓 하려는지 다 알고 있으니 쫓겨나기 싫으면 그냥 구경이나 해하는 눈초리로 쏘아보는 탓에 자꾸 움츠려든다. 사실 궁전은 바깥보다 내부가 더욱 화려하다. 곳곳의 천장마다 걸려있는 샹들리에는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할 정도로 크고 호화롭다. 이 궁전을 지을 때 내부 장식에만 총 14t의 금과 40t의 은이 사용됐다고 한다. 총면적은 15,00m²인데 궁전 내부에는 남성만 들어갈 수 있는 셀람륵과 황제 외에 남성의 출입을 금하는 여성의 영역 하렘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렘지역은 파란방이라고 부른다. 방은 총 285개고 홀이 43개인데 그밖에도 68개의 화장실과 11개의 목욕탕이 있다. 방이나 홀의 장식도 제각각 다르다. 바닥에 깔린 수직 양탄자의 넓이는 4,455m²나 되며 벽에는 600점이 넘는 명화가 붙어있다. 많은 때는 5,320명이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화려함의 극치다. 물론 내게는 숨바꼭질하기 딱 좋은 곳 이상은 아니다. 잘 따라 다녀야지 괜히 잘난 체 하고 혼자 돌아다니다 길을 잃으면 밤새 헤맬 것 같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한다. 이 궁전 내부를 전부 둘러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사실 내게는 그 방이 그 방 같고 그 홀이 그 홀 같아서 그저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보냈다는 샹들리에는 아니지만 기념으로 찍었다.

아타튀르크를 기려 09시05분에 멈춰진 궁전 내부의 시계.

황제 일가의 일상생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궁전 내에는 황제의 아이들을 가르치던 작은 학교도 있고 선생님들을 위한 교무실도 있다. 물론 황제가 썼다는 화장실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 있다. 별게 다 기념물이 되는 세상이다. 또 궁전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전시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유럽에서 보내왔다는 수많은 보석과 도자기, 그릇들이 눈부시다. 거북 껍질로 만든 수저도 있다. 거대한 곰 가죽은 러시아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처럼 생긴 기둥은 진짜 대리석이 아니다. 밤나무에 석회를 바르고 대리석처럼 칠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다. 별 기술이 다 있구나. 정말 감쪽같다. 거대한 시계 옆을 지나다 걸음을 멈춘다. 시계바늘은 95분에서 잠들어 있다. 태엽을 주지 않았거나 건전지가 떨어져서가 아니다. 여기서는 참았던 도둑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저 시계를 보러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시계 자체야 별게 있을 턱이 없지만 아타튀르크라는 위대한 독재자가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궁전을 완공한 뒤 이곳에서 살았던 오스만 황제들은 모두 6명이었다. 1877년에는 오스만 제국 사상 처음 개원된 의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터키공화국이 출범하고 난 뒤에는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이스탄불 집무실로 쓰였다. 그는 1938111095분 집무 중에 이 궁전에서 사망했다. 건국의 아버지인 그를 기리기 위해 궁전의 모든 시계들은 95분에 멈춰져 있다. 터키 사람들이 아타튀르크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나라 전체가 존경할 사람을 가졌다는 건 무척 부러운 일이다. 드디어 그랜드 홀에 들어선다. 관람 코스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다.

 

저 문을 나가 걸어가면 바다에 닿는다.

 

홀에 들어서는 순간, 안내를 하던 훌리아가 멈춰서더니 눈을 감으란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 둘 셋을 세면 눈을 뜨고 천장을 보란다. 셋을 세는 순간, 우와!! 하는 감탄사가 터진다. 탁 트인 공간에 매달린 엄청나게 큰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이 거대한 샹들리에도 한몫했다. 36m 높이에 매달려있는 이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이다. 무게만도 4.5t이나 나가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750개의 등이 달렸는데 1912년까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수백 개의 촛불을 켰다고 한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이 방에는 재미있는 게 또 하나 있다. 원래 천장은 삼각형인데 그림으로 동그란 돔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일종의 착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삼각형의 흔적은 없다. 76개의 대리석 기둥역시 모두 나무다. 이곳에서는 대형 연회가 열렸다는데 2층에는 연주자들의 자리가 있다. 지금도 이 그랜드 홀은 결혼식장으로 대여된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돈이다. 1년에 2~3회 정도 아랍의 부호들이 거액을 주고 빌려 쓴다.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황금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호사를 누리게 하는 셈이다. 나는 사진 한 장 못 찍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연회를 열 수도 있구나. 괜한 심술로 혼자 중얼거려본다. 전투 장면 등을 그린 그림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바로 바다가 펼쳐진다. 눈이 시원해지니 섭섭함도 별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바다에 푹 빠져 있다. 나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는 메마른 가슴에 꿈 씨 하나쯤은 파종하고 가야할 것 같다.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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