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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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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에 해당되는 글 2

  1. 2008.11.24 [사라져가는 것들 86] 상엿집8
  2. 2007.08.08 [사라져가는 것들20] 전통장례7
2008. 11. 24. 10:37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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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 사건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딱 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다. 미처 해가 지기도 전에 허겁지겁 달려오는 산골마을의 어둠에 묻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낮의 길이는 몽당연필처럼 자꾸 짧아져갔다. 악동들이 영훈네 사랑방에 모여드는 시간도 갈수록 빨라졌다. 사랑방 하면 둘러앉아 새끼를 꼬거나 한담을 하는 남정네들이 떠오르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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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만 영훈네 사랑방은 좀 달랐다. 몇 해 전 영훈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악동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 집 사랑방이 아이들을 모으는 이유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비단처럼 고운 영훈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모이면 하다못해 찐 고구마와 동치미라도 내놓았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밤마다 아이들 입정거리를 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아버지 없는 아들의 기를 살린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그녀였다. 수저를 놓고 돌아서면 뱃속의 거지가 종주먹질을 해대는 아이들에게는 삼년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운 간식이었다. 그날도 아이는 저녁 밥상을 물리기도 전에 영훈네 사랑방으로 갔다. 이미 다른 녀석들이 와서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사랑방에 모여서 숙제를 같이 하거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좀 큰 애들은 어른들 흉내를 내느라 윷을 놀거나 화투패를 돌리기도 했다. 물론 겨울밤 닭서리 같은 악동짓도 빠질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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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아이들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심심했다. 어린아이들이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톡톡 털어 봐도 금세 밑천이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그런 참에 영훈 어머니가 고구마를 내왔다. 악동들의 얼굴이 아침햇살 맞은 나팔꽃처럼 활짝 펴지더니 질세라 고구마에 매달렸다. 어느 녀석은 껍질을 벗길 틈도 없이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러다 목이 메어 캑캑거리기도 했다. 아이 역시 큰 놈으로 하나 베어 물었다. 문제는 막판에 일어났다. 단 하나의 고구마가 남은 것이었다. 악동들의 눈이 병아리를 본 매처럼 빛났다. 순간 두목격인 병구와 먹는 것 하나는 절대 남에게 지지 않는 용득이, 그리고 아이의 손이 단 하나 남은 고구마에 얹혔다. 병구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양쪽 손의 주인공들을 한 번 씩 훑었다. 평소 같으면 그 눈초리가 무서워 얼른 손을 움츠렸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고구마였다. 세 아이의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인상을 쓰는 게 안 먹히자 병구가 으르렁거렸다.
“손들 떼라. 늬들이 이 엉아한테 이러면 쓰것냐?”
"엉아? 우린 동갑인디 늬가 왜 엉아여?“
“얌마. 늬들 같은 겁쟁이한테는 당연히 엉아지. 늬들 용골에 혼자 가봤어? 오밤중에 상엿집 가봤어? 난 형들하고 놀면서 그런 거 다 뗐단 말이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녀석의 표정은 승부가 끝났다는 듯 자신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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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거 나라고 못할까봐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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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 소리가 병구의 입에서 나왔을 거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의 병구는 ‘주눅 든 반편이’가 아니었다. ‘게임’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도깨비바위 옆에 있는 상엿집에 다녀오는 아이가 남은 고구마를 먹기로 했다. 수건 하나를 한 아이가 가져다 상엿집 안에 걸어두면 다른 아이가 가져오는 걸로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간다는 조건이었다. 처음엔 농담 비슷하게 시작됐지만 아이들은 금세 이상한 열기에 휩싸였다. 심심한 게 탈이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고구마가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겁쟁이소리를 듣느냐 누가 용기 있는 자가 되느냐를 판가름하는 자리였다. 그 결과가 앞으로 동네 아이들의 서열을 정하는 기준이 될 터였다. 큰소리 쳤던 용득이가 맨 먼저 가기로 했다. 자기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으니 맨 나중에 가겠다는 병구의 말에는 모두 고개를 끄떡였다. 파란 하늘에 달 하나가 송편처럼 걸려있는 밤이라,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용득이는 신라군과 싸우러가는 계백장군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길을 나섰다. 전날 내려 쌓인 눈을 밟자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났다. 아이들의 얼굴에 걱정과 안도의 표정이 교차했다. 그 와중에도, 용득이가 덜 떨어져서 겁이 없는 거라느니, 다 가지도 못하고 기절할 거라느니 저마다 한마디씩 늘어놓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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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득이가 떠난 뒤 몇몇 아이는 차례가 오기도 전에 겁먹은 표정이 역력했다. 도깨비바위와 상엿집이 어딘가. 어른도 혼자 가기는 무서운 곳이라 하지 않던가. 상여라는 게 죽은 사람을 싣고 무덤까지 가는 것이니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상여를 보관하는 상엿집은 대개 동네와 조금 떨어진 외딴곳에 두게 마련이었다. 밤이면 괴괴한 모습이 더욱 무서웠다. 아이들에게는 늘 기피 대상이었다. 도깨비바위 역시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건넛마을 장쇠가 술에 취해 도깨비바위 옆을 지나가는데 껑충하게 큰 사내가 나타나더니 씨름을 하자고 했다더라… 실랑이 끝에 결국 이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도깨비였다더라…’ 그런 전설이 난무했다. 너도 나도 큰 소리를 치는 통에 질 수 없어 가겠다고는 했지만 두려움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오직 병구만 무표정한 얼굴로 아랫목을 지켰다. 악동들은 갈수록 말이 없어졌다. 용득이를 기다린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돌아오지 않기를 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이 역시 무서웠다. 모두 없었던 일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 두 다리 뻗고 잠들고 싶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눈을 밟는 뽀드득 소리가 들려왔다. 용득이가 벌써? 아이들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병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열었다. 거기에 용득이가 서 있었다. 수건을 들었던 손은 비어있었다. 뒷간에라도 다녀온 듯 편안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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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아이가 갈 순서였다. 평생 굴욕 속에 살 것이냐, 죽을 때 죽더라도 상엿집을 다녀올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니 눈물이 날것처럼 외로웠다. 아이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칼날 같은 바람이 뺨을 할퀴었다. 하늘에 박혀있던 별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달빛도 장대처럼 쏟아져 눈 위에 박혔다. 아이의 몸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공포든 추위든 모두 털어버리기라도 할 듯 아이의 걸음이 빨라지더니 종국에는 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빨리 도깨비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부터 아이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결국 얼어붙어버렸다. 어쩌지? 어쩌지? 상엿집에는 틀림없이 귀신이 있을 텐데…. 재작년에 죽은 순길이할매 귀신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생각이 자라날수록 아이는 공처럼 작아졌다. 하지만 예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건을 들고 가야 얼굴을 들고 살 수 있다. 억지로 발걸음을 떼는데 뽀드득~ 하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상엿집 앞에 선 아이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가까이서 보는 상엿집은 금세라도 무너질 듯 허름했다. 아이가 다시 이를 악물더니 아귀가 맞지 않는 문을 살짝 당겼다. 끼이익~ 비명과 함께 문이 열렸다. 눈앞에 허연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흠칫 놀라 뒷걸음치던 아이가, 그게 용득이가 두고 간 수건이라는 걸 알고 긴 숨을 내쉬었다. 얼른 수건을 손에 쥐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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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득이와 아이가 다녀온 뒤로는 비교적 쉬웠다. 심약한 아이 두엇이 죽어도 못 간다고 나자빠졌지만 나머지는 과감하게 원정길에 나섰다. 결국 모두 다녀오고 병구만 남았다. 왠지 아랫목에서 한참 뭉그적거리던 병구가 느린 걸음으로 떠난 뒤 사랑방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모든 건 끝났다. 이제 고구마를 누가 먹을 것인가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병구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서 아이들의 관심은 창밖으로 모아졌다. 가장 빨리 다녀오겠지 하는 기대를 실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밖에선 기척이 없었다. 조금 더 지나자 방안이 조금씩 들썩거렸다.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정말 귀신이라도? 아니면 도깨비한테?“
“에이, 그럴 리가… 병군데….”
“그럼 혼자 집에 가서 자빠져 자는겨? 혹시 모르니 우리 같이 상엿집에 가보자”
모두들 고개를 끄떡거렸다. 여럿으로 뭉쳐진 아이들은 도깨비바위도 상엿집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상엿집에 도착할 때까지 병구는 보이지 않았다. 맨 앞에 섰던 아이가 상엿집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악!!! 하는 비명이 겨울의 빈 들판을 찢었다. 바닥에 병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뭔가에 놀라 도망치다 나온 듯 입구 쪽을 향해서였다. 입에는 허연 거품을 물고 손에는 수건을 꼭 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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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8. 18:53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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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를 담당하는 후배기자가 찾아와 불쑥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금세기 최후의 유림장…전통 사대부 장례 재현' 등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구미가 확 당기는 소식이었다. 그에게 출장 길에 상여행렬이 보이면 사진을 찍어다달라고 부탁했던 참이었다. 내가 쓰는 글에 필요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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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 직접 찾아다니며 찍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지만 전통장례, 특히 상여행렬만큼은 이 원칙을 지키기 쉽지 않았다. 시간에 쪼들리는 직장인의 애로 외에도, 요즘은 어디에서도 상여를 보기 힘들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후배는 사진 대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정보를 가져온 셈이었다. 최근 작고한 화재(華齋) 이우섭 선생의 장례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언론을 통해서 많이 보도됐지만 화재선생은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巨儒)로 불리는 유학자다. 기호학파는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생전의 화재선생은 유림계의 종장 또는 큰 스승이라 불렸다. 어려서부터 부친 월헌(月軒) 이보림 선생으로부터 가학을 전수 받는 등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고, 약 40여권의 방대한 분량의 글을 저술하는 등 존경받는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알림글에는 장례식이 유월장(踰月葬 조선시대 전통적 사대부 장례형식과 절차)인 16일장으로 치러지는데, 금세기 마지막이 될 것이라 예고하고 있었다. 유월장은 초상난 달을 넘겨 치르는 장례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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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덕망이 높은 유학자가 타계했을 때 전 유림차원의 유림장을 치르게 된다. 유림장으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 요구된다. 고인이 평소 유림의 어른으로 인정받을 만한 덕행을 갖춰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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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학문적으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겨야한다. 현재 이런 조건을 갖춘 유림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번 장례가 마지막 유림장이 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제대로 격식을 갖춰서 치르는 장례식, 그리고 상여와 만장, 상두꾼 등을 규격대로 갖춰 치르는 장례행렬을 보는 것은 하늘이 돕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행사일 거란 생각이 결단을 재촉했다. 하지만 역시 시간이 문제였다. 장례식이 평일에 치러진다면 아무리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통했는지 마침 장례일자는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엔 모임이 하나 있었지만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에 출근을 해야하기 때문에 시간 분배를 잘 해야했다. 가기 쉽지 않은 먼길이니 달랑 장례장면만 보고 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해가 어디인가. 수로왕릉 등 유적이 즐비한 곳, 역사의 보석들이 곳곳에 묻힌 도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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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토요일 아침 여덟시였다. 서울에서 비를 맞으며 출발했는데, 김해의 하늘은 말짱했다. 새벽부터 서둘렀는데도 시간은 빡빡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궁핍여행'을 고집하는 평소와는 달리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는 여행이기도 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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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달린 곳이 김해시 장유면 덕정리 월봉서원(月峰書院). 택시비로 2만5천 원을 달라고 했다. 미터기에는 그보다 훨씬 적은 액수가 찍혀있었다. 촌놈이라는 이유로 뒤집어써야하는 비용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었다. 월봉서원 입구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틈을 헤치면서 장례식이 열리는 마당으로 올라갔다. 마당에 눈처럼 하얀 상여가 놓여있었다. 상여에게도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능할까. 눈이 부셨다. 마침 붉은 천으로 둘러싼 관을 옮기고 있었다. 잠시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 다음 카메라를 꺼냈다. 나 말고도 엄청난 카메라맨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보도진은 아닌 듯 한데, 좀 과장해서 조문객 반 카메라맨 반이라면 딱 맞을 듯 했다. 이번 유월장이 유독 눈길을 끈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장례형식과 절차를 그대로 재현한다는 점이었다. 굴건제복을 갖춰 입은 상주, 제자들을 보며 전통의례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례뿐만 아니라 1년 뒤의 소상과 2년 뒤의 대상 등 3년상이 모두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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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영구가 장지로 출발하는 절차), 견전(영구가 장지로 떠나기 전에 올리는 제), 운구(영구를 운반하는 것) 등 장례절차를 소상히 설명할 능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장례식은 전국에서 모인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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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고인의 문하생, 조객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카메라맨들의 과열경쟁이 엄숙한 분위기를 깨트리기도 했지만, 나 역시 같은 모습으로 보일 테니 손가락질 할 수는 없었다. 장지로 떠나기 전 마지막 제를 올릴 때 터져 나온 상주들의 곡(哭)이 연신 가슴을 두드려댔다. 옛사람들은 천붕(天崩)이라 했던가. 그들의 슬픔이 보이지 않은 끈을 타고 와 가슴을 적셨다. 오래 전 할머니, 아버지를 여읜 뒤 갈무리해뒀던 눈물이 꿈틀꿈틀 살아 나왔다.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미망인의 슬픔은 그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제가 끝나고 상여가 출발했다. 사진에 담고 싶은 대상이 상여였기 때문에 부지런히 따라야 했다. 죽음을 그리 표현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상여행렬은 근사했다. 역설적으로, 고인이 태어나 평생 살았던 곳을 떠나는 마지막 행사가 축제처럼 근사해 보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어 보지는 못했지만, 상두꾼만 해도 족히 30명은 돼 보였다. 상주 및 복인(服人 상복을 입은 사람) 역시 100명이 넘어 보였다. 만장도 셀 수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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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 위에 올라선 소리꾼의 소리가 구성졌다. 명인이라고 했다. 역시 다시는 들을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귀에 담았다. 뭐니뭐니해도 맨 앞에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는, 붉은 색깔의 방상씨(方相氏)탈이 눈길을 잡았다. 방상씨탈은 사대부 장례행렬 맨 앞에서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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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고 길을 열어나가면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번 장례식에 선보인 방상씨탈은 탈 명인(名人) 이도열 고성 탈박물관 명예관장이 특별히 2점을 만들었다고 한다. 과연 악귀가 도망갈 만큼 무섭게 생겼다. 악귀야 도망가면 그만이겠지만, 한 여름 뙤약볕 아래 그걸 쓰고 춤을 춰야하는 '얼굴 없는 사람'의 노고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들은 바로는 하회탈 같은 예능탈은 많이 남아 있지만 방상씨탈은 장례에 사용한 뒤 태워서 묻기 때문에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월봉서원을 출발한 장례행렬은 동네를 천천히 지나서 큰길로 나갔다. 내심 바라던 시골길이 아니어서 섭섭하긴 했지만, 길이 넓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장지인 선산까지는 2㎞남짓이라고 했다. 운구 중간에 하촌마을 입구와 선영이 있는 화산정사에서 두 번의 노제를 지냈다. 김해에서 해야할 나머지 일정을 잡아놓는 바람에 하관까지는 보는 건 무리였다. 사람들 틈을 뚫고 내려오면서 아쉬움에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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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은 쇼가 아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거나 감동을 받았다고 쓸 수는 없다. 장례식에는 환호도 박수도 없다. 하지만 원래의 모습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 있고, 수천 년 우리 겨레의 곁을 지켜온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그리고 그 끈은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묶어 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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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되게 만든다. 그 곳에서는 슬픔도 기쁨도 하나로 이어진다. 그 자리에 선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들여다 볼 기회를 얻게된다. 어차피 전통장례는 형식적인 요소가 많고, 형식이란 건 거추장스럽기 마련이다. 그러나 형식이란 틀 안에 있음으로서 내용이 지켜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건강한 육신이 있어야 영혼이 평안하게 깃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요즘은 시골에 가도 상여를 보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병원에서 장례를 치른다. 집에서 절차를 갖춘 장례를 치르기도 쉽지 않거니와,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이 사라진지도 오래다. 더구나 요즘 농어촌에는 상여를 멜 사람조차 없다. 그런 마당에 새삼  전통장례의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버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복원시키려 해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은 지역축제 혹은 박물관이나 가야 흔적이라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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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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