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삼각대'에 해당되는 글 1

  1. 2011.11.07 [터키, 지중해를 따라 걷다 5] '지상의 천국' 보드롬(4)30

 
*이왕 읽어주실 거라면 1회부터^^ 열심히 물어보고 공부했지만 지명과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즉각 수정하겠습니다.

터키에서 첫날밤을 묵었던 KARIA PRINCESS 호텔.

KARIA PRINCESS 호텔

보드롬성 입구 한쪽 구석에, 쓰다 버린 휴지처럼 구겨져 있자니 신세가 처량하다. 혹시 누가 동전을 던져주기라도 할까봐 눈에 힘을 준다. 보긴 이래도 저는 거지가 아니랍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으니 촬영을 마친 다큐팀이 내려온다. 이제 숙소로 가서 쉴 수 있다. 물론 저녁 일정이 잡혀 있으니 일과가 끝난 건 아니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한참 달려 교외로 접어들고, 설마 이런 곳에 호텔이? 싶을 만한 곳에 접어드니 거짓말처럼 하얀색으로 칠한 호텔이 나타난다. 버스에서 내릴 무렵엔 땅거미가 슬금슬금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호텔 이름은 ‘KARIA PRINCESS’. 생각보다 작은 호텔이지만 비교적 정갈해 보인다. 하긴 정갈하고 말고를 따질 처지는 아니다. 우선 샤워가 급하다. 하루 종일 흘린 땀이 적어도 한 됫박은 될 것 같다. 수속을 마치고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는데 언뜻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호텔은커녕 여행자숙소도 못 구해서 애타는 여행자들도 많을 텐데, 나는 누군가가 미리 준비해 둔 호텔에 그것도 독방을 차지하고 자는구나. 자고로 여행자는 먹고 자는 것이 편해서는 안 되는데.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던지고 욕실로 들어간다.

 

KARIA PRINCESS 호텔의 밤 모습.

옷을 벗는데 거울에 비친 몸에 낯선 문신이 눈에 띈다. 양쪽 어깨에 새로 생긴 저 빨간 띠는 무어란 말이냐. 자세히 보니 카메라배낭을 메었던 부분이 금세 벗겨지기라도 할 듯 빨갛게 부풀었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 우리 땅을 헤매고 다닐 때도 종종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타국에서 보니 더욱 안쓰럽다. 불쌍한 어깨, 주인을 잘못 만나는 바람에. 낮에 잠시 함께 걷던 후배 K가 한 말이 생각난다. “선배, 회사에서 부하직원들 피곤해하지 않아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 비행기 안에서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사진을 찍고 수첩에 꼼꼼하게 메모하는 걸 보고 하는 말이다. 남들처럼 풍경을 즐겨야 할 시간에 숨 돌릴 틈도 없이 종종걸음 치는 내가 안타깝고 낯설어 보였던 게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저럴 테니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까지. “글쎄, 윗사람이라는 건 원래 존재만으로도 피곤한 거니까,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하지만 직원들을 크게 닦달해본 적은 없어. 나 자신에 대해서만 칼처럼 잘 벼린 자를 들이대고 타인에게는 무딘 잣대를 들이대는 걸 원칙으로 해서 살아왔으니까.

호텔 숙소의 창을 여니 고향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물러나 있지만, 10년 가까이 한 분야의 책임자를 맡았었다. 내 딴에는 가능하면 피곤한 상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찌 알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게 상처를 입었을지. 그나저나 난 왜 여행을 이 모양으로 하는 걸까. 나도 쉬고 싶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대개 그러하듯이, 그냥 보고 느끼고 즐기기만 하면 될 텐데. 게다가 난 여행글로 먹고살아야하는 프로 여행작가도 아니잖은가. 특히 이번 여행은 럭셔리하게 즐길 수도 있었는데. 편하게 여행해보자고 마음먹은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실천해본 적은 없다. 팔자다. 내가 여행 떠난 걸 알고 있는 그 누군가가, 잔칫집에 간 할머니가 떡을 싸오기 기다리는 것처럼, 내 사진과 이야기를 기다릴 것이라는 강박관념. 실제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다. 그건 아니다. 내가 여행을 간다니까 몇 사람은 눈을 반짝거리며 여행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선배 한 분은 책 한권 낼 분량을 써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 나를 위해서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하는 자체보다, 뒤에 복기하고 기록하는 게 더 재미있어졌다. 그래서 나는 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 때문에.

보드롬 항구의 야경.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울, 여행

 상념은 샤워 물줄기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난 여행이 나 자신을 찾아 가는 과정임을 굳게 믿는다. 집에 걸린 거울에는 내 겉모습을 비춰볼 수 있지만, 여행은 내 깊숙한 내면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삶터를 떠나 낯선 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평소에 만나지 못하던 또 다른 자아가 느닷없이 얼굴을 드러낸다. 물론 긍정적인 모습도 있고 추한 모습도 있다. 그것이 모두 나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아니 자주 외롭고, 어느 땐 엄청난 고통에 스스로의 발등을 깨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성큼 자란 자아와 함께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행은 큰 스승이다. 쓰라린 어깨를 달래며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한다. 내 여행 철칙 중 하나는 그날 입은 옷은 그날 빤다는 것이다. 피곤해 쓰러질 지경이라도 가능하면 이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 어느 땐 아침에 드라이기로 옷을 말릴 때도 있다. 내 보따리에 땀에 전 옷들이 있다는 걸 못 견디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결벽증은 절대 아니다. 빨래를 널고 나니 식사시간까지는 조금 더 남았다. 창문을 연다. 전원풍경이 안길 듯 다가선다. 내 고향에 돌아간 듯, 아름답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다. 이 짧은 시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또 느닷없이 전신을 감싸는 행복감에 나른해진다.

보드롬성의 야경.

호텔에서 먹는 저녁식사는 여느 곳처럼 뷔페식이다. 준비된 음식은 제법부실하지만 먹는 환경은 예상보다 훌륭하다. 죽죽 뻗은 야자나무 숲(?)과 넓은 풀장. 그 곁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긴다. 다만 술이 없는 게 안타깝다. 에구, 난 왜 이렇게 술을 밝히는 거야. 약간의 닭고기와 과일을 고른다. 어딜 가든 과일은 지천이다. 특히 포도는 전혀 시지 않고 당분이 넘쳐난다. 신 것을 먹지 못하는 나로서는, 여행 내내 먹은 포도가 평생 먹은 포도보다 많을 정도다. 몸이 많이 피곤해서인지 입맛은 썩 좋지 않지만 이것저것 많이 먹어두기로 한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라는 여행자 수칙은 피곤하다고 예외일 수 없다. 저녁을 먹은 뒤 다시 출정이다. 호텔을 나서면서 내가 외다리라 부르는 모노포드를 챙긴다. 낮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 바람의 언덕으로 오른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차에서 내리니 불어대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다. 무더위도 바람에 날아갔는지 시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예감은 불길해진다. 바람이 이 정도면 곤란하다. 모노포드가 아니라 튼튼한 삼각대를 세워도 날아갈 판이다. 이러면 사진이고 뭐고 어려워지겠는데. 이래서 잔머리를 굴리면 안 된다. 서울에서부터 찜찜했던 일이 현실화된 것이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기념품가게들.


밤에는 돈을 인출할 수 있는 ATM기도 한 풍경 한다.

쓰디 쓴 잔머리의 결과

출발하기 전에 가장 큰 고민이 삼각대였다. 분명 야간촬영을 할 기회가 생길 텐데, 그렇다면 삼각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평소에 쓰는 삼각대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다. 간이삼각대로는 카메라와 렌즈의 무게를 버틸 수 없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모노포드를 새로 샀다. 그걸 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보조기능, 즉 간이 삼각대 기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모노포드로 쓰고 필요하면 안에 갈무리 했던 보조다리를 꺼내서 삼각대처럼 쓰게 만든, 일석이조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 꿩 먹고 알 먹고가 그리 흔하든가. 모노포드를 꺼내서 바람의 언덕에 세우는 순간 쓸데없는 짐만 지고 다녔음을 직감한다. 갈대처럼 속절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바람 앞에 등불이라더니 바람 앞의 모노포드다눈물을 머금고 포기하는 수밖에. 카메라 ISO를 높여서 몇 컷 찍어봤지만 제대로 된 사진이 나올 리 없다. 한 번의 잘못 생각이 낳은 참혹한 결과 앞에서 통렬한 반성을 한다. 여행 짐을 싸는 것이야말로 선택과 집중이 필수 조건이다. 갈 곳의 날씨를 면밀히 체크해서 필요없는 옷 같은 건 과감히 덜어내고, 꼭 필요한 것을 선택해 넣어야 한다. 이론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건 더 잘못이다.
 

보석 가게.

 

보석 노점상. 주인아가씨가 무척 예뻤다.

하릴없이 다큐팀의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바람의 언덕을 내려온다. 다음 코스 역시 낮에 갔던 보드롬 해변. 차에서 내리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그곳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낮과 밤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밤이 되면 짙은 화장을 하고 거리로 나서는 여인을 보는 것 같다. 거리에는 낭만이 넘실거리며 흘러 다닌다. 화려한 조명이 거리의 속살까지 활짝 열어 놓았고, 통기타가수들의 공연이 이어지는 카페에서는 웃음소리가 그칠 줄 모른다. 모두가 행복해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들이다. 젊은 경찰관도 예쁜 아가씨와 수다 떨기에 바쁘다. 하긴 뭐 신경 쓸 일이 없으니.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길가에는 난장(亂場)이 펼쳐져 있다. 낮에 보이지 않던 각종 좌판들이 환하게 불빛을 밝혔다. 보석을 파는 여인, 즉석에서 유리공예품을 만드는 남자 모두 동화 속 주인공처럼 환상적이다. 광장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있길래 가보니 커다란 스크린을 걸어놓고 공연을 중계해주고 있다. 그 앞에서 많은 이들이 환호하면서 춤추고 있다. 외국인들도 있지만, 낮과 달리 현지인이 더 많아 보인다. 술집의 테라스에는 연인이나 부부, 혹은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들로 넘쳐난다.

 

저렇게 개까지 밤새 모여서 논다. 멀리 모스크 첨탑이 보인다.

시계를 보니 열한시가 넘었다. 한국은 새벽 다섯 시. 하지만 누구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아니, 열두시가 넘어야 본격적인 밤 문화가 시작된단다. 금요일은 밤을 꼬박 새우고 노는 게 보통이란다. 참 신명이 많은 사람들이다. 신명뿐일까. 터키사람들은 호기심도 많고 성격도 급하고 열정적이다. 오지랖은 또 얼마나 넓은지. 현지인 가이드가 그걸 증명하는 이야기를 해주며 웃는다. 누가 차를 몰고 가다가 한가한 도로 옆에 서면 보통 여섯 대 정도는 연달아 차를 댄단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뒤에는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차를 댔는지 잊어버리고 두세 명씩 모여 수다를 떤단다. 오지랖만 넓은 게 아니라 정도 많다. 다큐팀이 자리를 빌려 촬영한 바닷가 카페에서는 장사에 방해가 될 텐데도 귀찮은 기색 하나 없다. 미안한 마음에 차이를 한 잔씩 주문해 마시고 나오는데 끝내 돈을 받지 않는다. 이거야 원, 신세 지고 공짜로 얻어 마시고. 그게 터키 사람들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뒤로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촬영을 마치고 나니 열두시가 다 됐다. 서울로 보면 여섯시. 평소 같으면 잠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밤을 꼬박 새웠다는 얘긴데.

한밤의 해변 카페. 저만치 보드롬성이 보인다.

터키의 닭은 개처럼 운다

다시 호텔로 향한다. 좁은 길 때문에 돌아가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터키의 길은 무척 좁다. 그래서인지 거의 일방통행이다. 로마시대에 만들어놓은 길을 넓히지 않고 그대로 쓰기 때문이란다. 그 때는 적들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길을 좁게 만들었단다. 설상가상으로 그 좁은 길에다 주차를 해놓으니 운전이 아니라 곡예에 가깝다. 호텔로 돌아오니 몸은 물을 가득 머금은 솜. 기상할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니 체질적 불면을 지병처럼 안고 살아온 몸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젊은 기자 시절에는 철야를 밥 먹듯 했는데 이제는 밤 한 번 새고 나면 후유증이 2~3일씩 간다. 샤워를 하고 비장의 무기위스키를 꺼내 조금 마신다. 이 피 같은 술을 수면용으로나 쓰다니. 가만히 누워있자니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창 틈을 파고든다. 기온으로 보면 아직 한 여름인데. 그나저나 터키의 귀뚜라미도 귀뚤귀뚤 우는구나. 잠은 오지 않는다. 위스키 한 모금으로 해결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이게 시차적응의 고통이구나. 이리 저리 뒤척거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부유한다. 난 또 어떤 인연으로 지금 이 곳에서 불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어느 순간 깜박 의식을 놓는다.

호텔 수영장.

 간신히 붙잡은 잠에서 다시 깬 건 반복되는 소음 때문이었다. 짧은 잠이 안타까운 몸은 여전히 잠 끝을 붙잡고 발버둥 치지만 이미 정신은 제자리에서 똬리를 틀고 앉았다. 처음엔 개 짖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러 번 들어보니 닭울음소리다. 이상한 건 아무리 들어봐도 귀에 익숙한 꼬끼요~!! 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확실히 터키 말, 아니 터키 울음이다. 귀뚜라미는 만국공통어로 울던데. 그나저나 무슨 닭이 개처럼 울지? 그럼 운다고 해야 돼, 짖는 다고 해야 돼? 아무리 교외에 자리 잡은 호텔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다. 개는아니, 닭은 한두 마리가 아니다. 소음은 갈수록 심해진다. 동네 닭들이 모두 일어나 환영식을 하는 것 같다. 아니면 새벽에 반상회를 하는지도. 이 동네는 수탉만 키우나? 시계를 보니 여섯시에 가깝다. 그래도 서너 시간은 잔 것 같다. 이 정도면 남은 잠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주섬주섬 일어나 머리맡에 둔 책을 집어 든다. 밖은 아직 컴컴하다. 조금 있자니 이번엔 고양이들의 반상회가 시작된다. 하필 내 방 창 밑에 와서 세레나데를 부를 건 뭐람. 다행이 고양이들은 만국공통어인 야옹야옹으로 운다. 닭만 터키 말을 쓰나보다.

 

호텔엔 이런 놀이시설도 있다.

호텔 담장의 나팔꽃. 파란색이 너무 짙어서 좀 징그럽기도 했다.

습자지에 먹물 번지듯
,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미명이 스탠드 불빛을 조금씩 지워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몸살기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말 다 나은 걸까. 아니면 그보다 더 큰 고통 때문에 몸살 기운을 못 느끼는 걸까. 여기까지 와서도 일에 매달려 있는 내 스스로가 미워지려고 한다. 다시 누워봐야 헛일일 테니 차라리 산책을 가기로 한다. 어제 빨아놓은 옷은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문을 열고나오니 호텔은 정적에 싸여 있다. 밖에서 보기에 무척 작았던 호텔은 마치 호리병처럼 안으로 갈수록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저녁식사를 했던 나무숲과 수영장을 지나 담장을 따라 걷는다. 아무도 없는 길, 참 아름답다. 담장 가득 덮은 파란 나팔꽃들이 활짝 꽃잎을 벌려 새 아침을 맞아들이고 있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게 빛나고 볼을 스치는 바람은 상쾌하다. 다행이다. 잠을 좀 빼앗긴 대신 이렇게 홀로 산책하는 시간을 얻었지 않은가. 우리네 삶이 그렇다. 완전하게 잃는 것도, 완전하게 얻는 것도 없는 것. 작은 일에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다. 발걸음이 점차 가벼워진다. 오늘은 마우솔레움에 가는 날, 그리고 보드롬을 떠나는 날. 또 힘차게 시작하고 볼 일이다.


 

추천(view on)과 댓글 오늘도 그냥 지나치진 않으실 거지요?^^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