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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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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에 해당되는 글 2

  1. 2009.11.23 [사라져가는 것들 126] 빨래터11
  2. 2008.05.26 [사라져가는 것들 60] 공동우물18
2009. 11. 23. 09:0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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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여자가 있다. 두 여자는 맷방석만큼 널찍한 돌 위에 빨랫감을 놓고 방망이질을 하고 있고, 그 앞에는 한 여자가 냇물 속에서 옷을 헹구고 있다. 건너편 바위에 앉은 또 다른 여자는 감은 머리를 땋고 있다. 곁에 있던 아이가 젖이 고팠는지 어미의 품을 파고든다. 여자들 모두 간편하게 치맛자락을 허리춤에 꽂았고 속바지는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 육덕진 속살이 허여멀겋게 드러났다. 그리고 한 사내가 있다. 그 사내는 아낙네들 뒤에 있는 너럭바위에 몸을 숨기고 있다. 부채로 가려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아낙네들이 멱 감고 빨래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갓을 쓰고 도포까지 갖춘 차림으로 보아서는 선비 끝물이라도 되는 것 같은데, 아녀자들 속살을 훔쳐보는 모습은 시정잡배가 울고 갈만하다. 단원 김홍도가 남긴 ‘빨래터’의 풍경이다. 소재로 볼 때 김홍도보다는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풍에 가까운 듯한데, 단원도 어느 날 춘심이 동하는 바람에 약간은 에로틱한 붓질을 한 모양이다. 아무튼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빨래터의 풍경을 해학적으로 그려낸 걸작임에 틀림없다. 근래에는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를 놓고 진위논란이 지루하게 이어졌던 걸 보면, 그림 소재로는 빨래터가 나름 인기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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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아니더라도, 빨래터야말로 전통 농경사회 풍경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낯선 객지에서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걸리게 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공동우물이 그렇듯, 빨래터 역시 아낙네들을 위한 ‘소도(蘇塗)’와 같은 존재였다. 부부싸움을 했거나 시어머니로부터 잔소리라도 들은 날에는 빨래터가 유일한 피신처였다. 그곳에는 가슴 쓰린 ‘동료’ 한 둘 쯤 나와 있기 마련이었다. 게서 서방이나 시어머니 흉 좀 본다고 흠이 될 건 없었다. 어차피 같은 처지, 흉도 나눠야 재미있는 법이니까. 물론 혼자라도 좋았다. 너른 돌 위에 애벌빨래 올려놓고 팡, 팡, 팡! 방망이질을 하면 근심걱정 훨훨 날아가고, 물 없이 고구마 먹다 얹힌 체증까지 뻥 뚫리게 마련이었다. 술에 곤죽이 되어 새벽에 들어온 서방이 대수더냐. 속 뒤집어놓는 자식 놈이 별거더냐. 시어머니 잔소리야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고. 방망이질에 신명이 붙을수록 처녀시절 복순이가 되고 순심이가 되고…. 그리운 친정어머니 저만치서 손짓하는 듯 하고…. 물론 빨래터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장소만은 아니었다. 공동우물처럼 정보의 산실이기도 했다. 삼식이네 집에 은수저가 두벌 들어왔다느니, 순녀네 집 강아지가 새끼를 열한마리 낳았다느니 하는 소식은 빨래터에서 시작되어 온 동네에 퍼져나가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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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는 보통 공동우물 아래나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있었다. 우물 밑 빨래터는 물의 정화까지 고려해서 만들기 마련이었다. 흘러내려온 물을 가두는 저수조와 빨래판으로 사용하는 돌을 놓는 것은 어느 곳이나 비슷했다. 빨래를 한 뒤 땟물이 빠져 나가는 곳은 미나리꽝이었다. 미나리꽝이 정화시설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맑아진 물이 논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냇가의 빨래터에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늘어트린 수양버들이라도 서있기 마련이어서, 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는 했다. 빨래터에 돌을 놓아주는 건 남정네들이었지만, 완성된 다음에는 ‘남성금지구역’이 되었다. 아낙네들이 멱도 감고 수다도 떠는 고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엄마를 따라간 아이들은 빨래터 주변에서 물고기도 잡고 물장구도 치며 놀았다. 하지만 그런 풍경은 이제 추억속의 그림이 되고 말았다. 집집마다 버튼만 누르면 빨래가 해결되는 세탁기가 놓여지고, 수도꼭지만 틀면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세상. 빨래터로 빨래를 들고 갈 틈도 없거니와, 그럴만한 빨래터도 사라진지 오래다. 빨래터에서 생산되어 유통되던 정보는 TV와 컴퓨터가 전해주고, 옆집에 강아지는커녕 아이가 새로 태어나도 아무 관심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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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 이들이 있을까? 혼자 묻고 혼자 고개를 저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는 또 발걸음을 길로 내몰았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곳은 강화였다. 강화향교 근처에 ‘현존하는’ 빨래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간 터였다. 향교와 빨래터, 뭔가 어울릴 것 같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해 향교 주변을 뱅뱅 돌아봐도 빨래터는커녕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현대식 주거시설들만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결국 지나가는 노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로 조금 올라가니 지금까지 본 것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도시에서 시골로 순간이동을 한 격이라고나 할까. 그 한가운데에 빨래터가 있었다. 산 아래에 약수터가 있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물이 큼지막한 빨래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빨래터 치고는 ‘호화판’이었다. 튼튼한 철제구조물을 세우고 지붕을 해 덮었다. 번듯한 시멘트 수조에는 중간중간 빨래판을 만들어놓았다. 물은 맑고 깨끗해보였다. ‘아무리 잘 만들어놓으면 뭘 하나. 빨래할 사람이 없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텅 빈 빨래터를 찍고 있는데,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초로의 아주머니 한분이 빨래를 가득 담은 작은 손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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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아직도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사람이…?‘ 오래 헤어졌던 가족이라도 상봉한 듯 반가운 마음이었다. 아주머니는 빨래터 한쪽에 자리를 잡더니 빨랫감을 주섬주섬 꺼내 물에 담그기 시작했다. 아이들 옷이나 양말에서부터 운동화까지 각종 빨랫감이 쏟아져 나왔다.
“안녕하세요?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빨래하는 사진을 찍어서 뭐하려고 그런대요?”
“요즘은 밖에 나와 빨래하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서요. 제가 사라져가는 걸 사진으로 찍어서 책을 내는 사람이거든요.”
아주머니는 별 짓을 다하는 인간도 있다는 듯 가벼운 미소로 승낙한다.
“늘 이렇게 나와서 빨래를 하세요?”
“예, 그렇지요. 노는 셈 치고 설렁설렁 해도 집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잘 빨아지거든요. 물이 좋아서 세제를 안 써도 세탁기로 한 빨래보다 깨끗해요.”
“그래도 세탁기로 하는 게 편하실 텐데…”
“세탁기는 감질나잖아요. 이렇게 나와서 하면 전기세, 물 값도 안 들어가고 얼마나 좋아요. 관에서 이 빨래터를 없애려는 걸 주민들이 서명해서 막은 적도 있어요.”
아주머니의 빨래터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황금빛 가을 햇살이 널어놓은 빨래들 위로 국수발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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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찾아간 곳은 부산시 사하구 괴정동에 있는 빨래터였다. 정보는 확실한 편이었지만, 부산 같은 도시에 빨래터가 남아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내내 가시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은 도로 한복판에서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습니다.’하는 말만 남기고 나자빠졌다. 빨래터까지 알려주길 바랐던 내가 잘못이지. 아무튼 찾아보는 수밖에. 골목에 차를 세워놓고 근처를 뒤지는데, 아! 있었다. 주택가의 자그마한 건물들 사이, 땅보다 1~2m 아래로 숨듯이 자리 잡고 있는 빨래터가 보였다. 게다가 마침 할머니 한 분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구르듯 뛰어 내려갔다. 허락부터 얻고 숨 가쁘게 셔터를 눌렀다. 할머니가 초겨울 날씨에 땀까지 흘리며 사진을 찍는 중년 사내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늘 여기서 빨래를 하세요?”
“예. 여기서 하는 게 편해요. 세제를 안 써도 때가 잘 빠지거든요. 그러다보니 멀리서 일부러 오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래도 겨울엔 손이 시리실 텐데….”
“안 그래요. 손 한번 넣어보세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서 불편한 거 몰라요.”
하라는대로 손을 넣어보니 바깥기온보다 훨씬 따뜻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만한 온도면 한겨울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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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벽 아래에 있는 구멍에서 제법 힘차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나온 물이 빨래터를 한 바퀴 돌아 하수구로 빠져나갔다. 근처에 수원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 물은 어디서 나옵니까?”
“저 너머 샘이 있어요. 거기 물이 이쪽으로….”
할머니가 가르쳐준 곳으로 넘어가보니 꽤 규모가 큰 샘이 있었다. 샘보다 먼저 시선을 잡은 건, 긴 세월을 구부정한 등에 지고 있는 회화나무 두 그루였다. 아, 그래서 동네 이름이 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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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구나. 회화나무 괴(槐)에 우물 정(井). 회화나무는 수 백 년의 시간만큼 노쇠했지만 고유의 기품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샘 위에는 지붕을 해 올렸고, 샘가 석축 사이 두어 곳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에 복을 빌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나무와 샘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우주에 위성을 쏘아올리고 시속 300km의 속도를 자랑하는 열차가 국토를 누비는 시대지만 세상은 그런 첨단 문명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 한쪽에는 여전히 낡은 전통과 오랜 삶의 흔적에 가치를 두고, 그걸 보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빨래터에 방망이를 두드리는 저 노인, 세탁기 앞에 섰을 때보다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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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5. 26. 10:46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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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분쟁이 그렇듯이, 그 날의 싸움도 애당초 심각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우물가에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던 월산댁이, 물을 길러온 초랭이(원래 이름은 철홍이다) 엄마를 보자 한 마디 툭 던진 게 발단이었다. “그러잖아도 찾아가려고 했더니만, 초랭어매 잘왔네. 거 애 단속 좀 지대로 혀” “예? 왜요? 우리 초랭이가 뭔 일을 저질렀남요?” “왜는 뭔 왜여. 어제 우리 집 텃밭에 들어가서 익지도 않은 토마토를 죄다 따서
” “어이구, 애새끼가 극성맞어서. 그런디 성님, 애들이 놀다보면 그러기도 허구….” 그나마 대화처럼 생긴 건 딱 거기까지였다. 월산댁의 입에서 “뭣이 어쩌고 어째?” 라는 호통이 천둥소리 만하게 터지면서 급기야 대판싸움으로 변한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월산댁이 폭발한 건, 초랭이 엄마가 말끝에 “당최 애를 키워봤어야 알지” 어쩌고 하며 구시렁거린 때문이었다. 차라리 호랑이 코털을 뽑는 게 낫지. 그러잖아도 애를 낳지 못해, 한이 수박 만하게 맺힌 여자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었으니 그게 보통 일인가. 급기야는 우물가에서 엎치락뒤치락 육탄전이 벌어졌다. 곁에 있던 동네여자들이 뜯어말렸지만 서로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어찌 손 써볼 수가 없었다. 결국은 상대방의 머리카락을 한주먹씩 뽑은 다음에야 씩씩거리며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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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우물가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물론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성님, 아우님으로 돌아가는 게 이 땅의 여인네들이었다. 우물가에서 매일 만나야 하는 처지에 끝까지 원수처럼 살 수야 없었다. 전에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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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마다 공동우물이 있었다. 물이야말로 촌락이 형성되기 위한 필수요소였다. 지하수가 흔한 동네에서는 집집마다 따로 샘을 갖기도 했지만 대개는 공동우물을 파기 마련이었다. 공동우물은 부정을 타면 안 되는 귀한 존재여서, 팔 때는 금줄을 치고 정성들여 작업을 했다. 우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만들어주는 끈이기도 했다.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나그네와 동네처녀 사이의 사연은 대부분 공동우물가에서 시작됐다. 고려 태조 왕건도 그런 인연으로 장화왕후를 얻었다든가…. 우물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뉘었다. 지하수가 풍부하게 흐르는 곳은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오기 때문에 간단하게 돌을 쌓거나 시멘트로 우물을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는 항상 물이 철철 넘쳐흘러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썼다. 또 샘 아래쪽으로 흐르는 물을 가둬 빨래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물이 귀한 동네에서는 물길이 잡힐 때까지 땅을 파서 ‘노깡’(시멘트 토관)을 박거나 돌로 벽을 쌓고 두레박을 걸쳐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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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공동우물은 물을 길어가는 곳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소통과 정보교환의 장으로서의 역할도 컸다. 어젯밤 누구네가 부부싸움을 했다든지 누구누구 일가족이 야반도주를 했다든지 하는 소식은 새벽에 물을 길러온 아낙네들의 입으로부터 온 동네에 전해졌다. 그런 정보를 듣기 위해 샘이 있는 집의 아낙도 공동우물로 나오고는 했다. 공동우물은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이기도 했다. 힘겨운 노동과 고부간의 갈등이 반복되는 삶에서 조금이라도 비껴날 수 있는 유일한 틈이 바로 공동우물이었다. 아낙네들은 울화가 치솟아 오르면 물동이를 이거나 함지박에 빨래거리를 주섬주섬 담아 우물가로 나갔다. 그 곳엔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대신 속을 풀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나와 있기 마련이었다. 퍽퍽퍽! 빨래방망이를 두드려대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공동우물에서는 가끔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샘 앞에서 애들을 씻긴다고 핀잔을 주다가 싸움이 나기도 하고, 물 가까이에서 빨래를 했다고 다투기도 했다. 또 동네마다 앙숙이 한 둘 쯤은 있어서, 누가 뽕밭에서 뭘 했느니 말았느니 흉을 보다가 그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가 아니라 공동우물에서 만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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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공동우물 풍경은 시골과는 조금 달랐다. 수돗물의 혜택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달동네나 변두리에서는 동네사람들끼리 돈을 추렴해서 공동우물을 팠다. 하지만 어렵게 물길을 잡아 우물을 파놔도 물은 여전히 부족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툭하면 물싸움이 나고는 했다. 도시의 우물은 주로 깊게 파서 두레박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두레박질이라는 게 도르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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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놔도 감질이 날 만큼 더딘지라 양동이를 줄 세워놓고 기다리게 마련이었다. 아침이나 저녁 무렵이면 그 줄이 더 길어졌다. 그러다 화장실 간 사이에 새치기를 했느니 원래 내 자리였느니 하는 자리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름철에 가뭄이라도 길어지면 우물은 시나브로 말라갔고, 그에 비례해서 사람들의 가슴은 쩍쩍 갈라져갔다. 그럴 땐 물 한 방울이라도 더 긷기 위해 밤새 우물가를 지키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도시의 공동우물이라고 갈등만 있는 건 아니었다. 비가 흔전하게 내려 물이 많을 땐 동네 인심도 넘쳐흐르게 마련이었다. 상추를 씻으러 왔다가 이웃에 한주먹 집어주거나 모처럼 사온 참외를 씻다가 슬그머니 찔러주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제대로 된 담조차 없이 사는 변두리 사람들의 삶이라 워낙 숨길 게 없기도 했지만, 우물가에 아낙 몇 명이 앉으면 누구네 집 부엌의 은수저 도둑맞은 얘기까지 낭자하게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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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시골이든 도시든 공동우물을 보기가 쉽지 않다. 어지간한 오지까지 수도가 놓여 있기 때문에 공동우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돼버렸다. 그 많던 우물은 메워져 흔적조차 없거나 뚜껑을 뒤집어 쓴 채 쓸쓸히 늙어가고 있다. 설령 메워지지 않은 우물이라도 가끔 강아지나 찾아가 얼굴을 비춰볼 뿐 찾는 이가 없다.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우고 바가지를 얹어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던 우리네 어머니와 누이가 다시 우물가를 찾을 날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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