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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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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교회'에 해당되는 글 1

  1. 2012.10.22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 15] 실크 장수로 나서다12

우르파의 옛집. ㅁ자형으로 지었다.

대가족의 여자들이 모여앉아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

울루자미를 찾아가는 길. 어느 건물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훌리아에게 물었더니 오늘이 바로 71일 월급날이란다.

월급날이면 사람들이 저렇게 은행 앞에 줄을 서?”

그럼요. 은행에 가야 월급을 찾아오지요.”

그렇구나. 옛날에 월급날이면 누런 봉투를 나눠주던 생각이 난다. 그땐 그마나 그날만큼이라도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가끔은 아내의 살가운 눈길 속에 삼겹살과 소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모든 게 온라인으로 바뀐 뒤부터 월급쟁이들은 월급기계로 전락해버렸다. 괜한 감상으로 가슴이 뜨뜻하다. 울루자미로 가기 전에 키친박물관이라는 곳을 잠깐 들른다. 과거 우르파 사람들이 살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골목 안에 있는 집은 무척 크다. 지금의 큰 건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호가 살았을 것 같다. 지은 지 200년 됐다는데 4각형 구조로 문을 빼면 사방이 모두 막혀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작은 분수대도 있다. 지하층에서는 동물들을 키웠다. 우물도 부엌에 있다. 집안에서 모든 걸 해결한 셈이다. 대가족 제도가 유지되던 시절이라 20~30명이 한 집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결혼을 하면 분가하는 게 아니라 방을 하나 내줘서 함께 사는 방식이다. 그 당시 생활상을 모형으로 꾸며놨는데 여자들 예닐곱 명이 한꺼번에 둘러앉아 음식을 만들고 있다. 시어머니,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 . 날마다 잔칫집 같았겠다.

 울루자미 입구.

 

대사원이란 뜻의 울루자미 역시 샨르우르파 시내에 있다. 이곳은 원래 457년에 36개의 붉은 기둥 위에 세운 교회였다고 한다. 그래서 붉은 교회라고 불렀다. 1175년에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8각형으로 우뚝 솟은 미나레트는 이 도시 최초의 시계탑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는데 왼쪽에 묘지가 보인다. 사원 내 공동묘지인 모양인데 별로 넓지 않은 곳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좀 답답해 보인다. 돌로 만든 구조물 위에 묘비를 세운 것도 있고 맨 땅에 묘비를 세운 것도 있다. 묘비는 제각각이다. 짧은 것, 긴 것, 글씨를 새긴 것, 지워진 것, 모양을 낸 것, 밋밋한 것. 묻혀있는 사람들도 살아있을 때 저렇게 제 각각이었겠지. 죽음으로도 동질화되기 어려운 게 사람인가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내세를 믿는다. 따라서 죽음은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쁘게 받아들인다. 또 시신을 화장할 경우 영혼의 안식처가 소멸된다는 믿음 때문에 매장문화가 일반화 돼 있다. 일종의 영혼이 거주할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슬람사회의 장례절차는 그리 복잡하지 않아서 보통 24시간 이내에 매장한다. 사람이 운명을 하면 사자의 머리를 메카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염을 하는데 염 절차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솜으로 입과 귀, 코 등을 막은 뒤 흰 무명천으로 시신을 둘러싼다. 묻을 때는 관 없이 매장한다. 사람 키 높이 정도로 비교적 깊고 넓게 판 묘실에 얼굴을 메카방향으로 향하게 시신을 안치한다. 시신 위에 일정한 공간을 두고 석판 등으로 덮는다.

사원 내의 공동묘지. 

크고 작은 묘비들.

묘실을 팔 때는 보통 서너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넓게 파는데, 한 세대가 지나면 한 무덤에 또 다른 가족을 매장하는 관습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나라도 역시 묘 자리가 부족한가보다. 요즘은 묘지를 쓴 뒤 7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을 묻을 수 있다고 한다. 영혼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의 임대차 한도가 고작 7년인 셈이다. 매장문화의 문제점이라고 할까. 하지만 종교를 배경으로 한, 즉 내세 부활을 전제로 생긴 매장문화이기 때문에 단시간 내 바뀔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미망인 얘기나 잠깐 하고 가자. 전통 이슬람사회(터키는 무척 유연할 것이다)에서 미망인은 남편과 사별하게 되면 4개월 10일간 외간 남자와의 접촉을 피해 집에서만 지낸다고 한다. 이게 바로 절대적 재혼 금지기간일 것이다. 보통은 1년이 지나야 재혼이 허용된다고 한다. 재혼의 대상은 제한이 없지만 전통적인 유목사회에서는 근친이나 족내혼을 주로 한다. 다른 가문이나 부족의 남자와 재혼할 경우 집안의 수치로 받아들여 부족 간의 적대관계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쩌다 공동묘지 옆을 지나는 바람에 장례 이야기가 길어졌다. 사원 자체는 특별한 게 없다. 앞에서 언급한 시계탑 정도가 눈에 띌 뿐. 마당 가운데에는 우아하게 지붕을 해 얹은 우물 하나가 있다. ! 이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수건의 전설을 지닌 우물이구나.

울루자미의 시계탑.

사원 내에 있는 해시계.

예수의 얼굴을 닦았던 수건이 이곳에 떨어졌다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예수가 에데사에 언제 어떤 이유로 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나 남겼다. 붉은 교회를 방문한 그가 수건 한 장을 자신의 얼굴에 대자 얼굴의 모양이 그대로 찍혔더란다. (에데사 왕국의 아브가루스왕이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니까 얼굴이 찍힌 수건을 보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성화라고 일컬어지는 성스러운 수건이다. 이 수건은 944년까지 에데사에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943년 비잔티움 제국의 로마노스 1세가 도시를 포위하고 수건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기독교의 유물이리니 돌려달라는 뜻이었겠지. 이슬람에서도 예수는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성스러운 수건일 수밖에. 하지만 힘없는 자가 죽지 않으려면 별 수 있나. 결국 강탈당하다시피 한 수건은 944815일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같은 기독교의 나라를 약탈했던 제4차 십자군이 1207년에 이 수건을 슬쩍한다. 수건은 비잔티움 제국을 떠나 베네치아로 갔지만 그 뒤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건 프랑스에서였다. 루이 9세 때 파리의 성샤펠 성당에 다시 나타났다가 1700년대 후반의 프랑스혁명 때 또 사라졌다. 그 뒤로는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이 없앤 게 아니라 욕심이 없앤 거겠지.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보면 참 한심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깟 수건 한 장 뺏고 빼앗기고. 그럴 시간 있으면 기도나 하지.

 

'성스러운 수건'의 전설이 탄생한 우물.

 

성스러운 수건이라니까 혹시 베로니카의 수건을 두고 착각한 거 아냐? 하는 분도 있을 것 같아 이야기 하나 덧붙인다. 성스러운 수건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피와 땀을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를 본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갖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의 피와 땀을 닦아 줬다고 한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수건에 예수의 얼굴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나왔다는 것이다. 그걸 베로니카의 수건이라 일컬었는데 이 수건이 여러 번 기적을 일으켰다. 목이 마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고 눈먼 자를 고쳐주었으면 심지어는 죽은 자를 소생케 한 일도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이 수건을 성물(聖物)로 정하고 존귀하게 여기도록 했다. 하지만 이 수건 역시 인간들의 손에 의해 우여곡절을 겪는다. 1527년 로마가 이방인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폭도처럼 변한 군중들에 의해서 파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어떤 작가는 베로니카의 수건이 도난당해 로마의 이곳저곳 주점에서 나돌고 있었다고 쓰기도 했다. 혹자는 무슨 소리냐, 바티칸에 그대로 보존돼 있었으며 폭도들이 약탈한 물건 중에서 베로니카의 수건은 없었다고 기록했다. 결론은 분명하다. 설령 베로니카의 수건이 바티칸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고 해도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성물은 아니라는 것. 물론 행방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터키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이런 때 공부 조금 더 한다고 남 주는 건 아니니까. 어떤 경우든 인간들의 욕심이 저지른 파국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원에 놀러온 꼬마들.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울루자미는 우리 일행이 들어서면서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 꼬마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주변을 맴돈다. 그것도 갓 부화한 물고기 떼처럼 한꺼번에 몰려다닌다. 어휴! 귀엽지만 시끄럽다. 이런 땐 어찌해야 되는지 잘 알지. 카메라를 녀석들 앞으로 들이밀었더니 느닷없이 조용해진다. 잠시 뒤에는 저희들끼리 알아서 정렬까지 한다. 거봐. 사진이 특효라니까. 짜낸 것 같은 성스러움으로 위장한 사원보다는 이렇게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 구실도 하는 곳이 훨씬 더 정감이 간다. 아이들은 천사라고 하지 않았는가. 사원에 천사가 찾아오면 최고의 손님이지. 시장으로 가는 길은 번화가다. 좁은 길에 신문가판대도 세워놨고 노점상도 있다. 어디 가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 마을버스도 오간다. 버스요금은 1리라라고 한다. 환율을 700원쯤으로 잡으면 우리와 비슷한가? 물 한 병은 25크루슈. 1크루슈는 1리라의 1/4이다. 그러면 우리 돈으로 170~180원쯤 되겠네. 물 값은 싼 편이군. 걸어가면서 훌리아에게 묻는다.

발르클르 연못(성스러운 물고기 연못)을 한국말로 뭐라고 한다고?”

~ 물고기 수영장요.”

흐흐흐, 아직도 물고기 수영장이냐? 물고기 연못이라고! 물고기 연못!!”

무슨 소리인가 하면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을 아무리 가르쳐도 연못이라는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물을 때마다 수영장이란다. 그 재미에 묻고 또 묻는다. 이젯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다. 혹시, 내가 이들을 놀리는 게 아니라 이들이 짜고 날 놀리는 건가?

 

시장으로 들어가는 길.

고춧가루 종류가 열 가지도 넘는다.

시를 쓰는 노점상.

구두닦이? 광약 장수? 정체가 불분명한 노점상.

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여러 번 하는 말이지만 나는 역시 시장 체질이다. 느닷없이 피가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한다. 곡물가게 앞에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건 곱게 빻아놓은 고춧가루다. 터키에 무슨 고춧가루?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샨르우르파는 고추의 주산지다. 그래서 이 동네는 매운 케밥으로도 유명하다. 요리에 고추구이가 필수적으로 딸려나온다. 심지어는 가지만한 풋고추를 우적우적 씹어 먹기도 한다. 현지인이 먹는 걸 보고 한번 따라했다가 매워서 사망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내가 워낙 매운 걸 못 먹기도 하지만 여기 고추는 맵기가 보통이 아니다. 고추를 먹고 음식에 고춧가루가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 사람들과 동료의식을 느낀다. 고춧가루도 참 여러 가지다. 분홍에 가깝게 빨간 것, 아주 빨간 것, 거무스레한 것, 아주 검은 것. 종류별로 나눠 나눠놓은 비닐포대만 해도 10개가 넘는다. 원래 고추 자체의 종류가 그리 많은 건지, 건조 과정에서 색깔이 달라진 것인지. 좌판을 벌여놓고 잡동사니를 파는 할아버지는 뭔가 열심히 기록하고 있다. 혹시 길거리의 시인이 아닐까. 광약을 파는 건가? 구두를 닦는 건가? 조금 애매해 보이는 아저씨도 앉아있다. 조그만 문을 지나가니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쇠전도 아니고 시장 한복판에 광장이라니 좀 느닷없다. 사람들이 파라솔 아래 나무의자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차이를 마시고 있다. 카라반사라이가 있던 자리인가? 시장 한가운데에 대상들이 쉴 수 있는 큰 뜰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가만히 둘러보니 남자들뿐이다. 시장에도 금녀구역이 있는 모양이군.

 

시장 안의 휴식광장.

실크 상가.

실크상가에서 만난 사내.

실크상가로 들어간다. 실크로 만든 모든 상품이 있는 곳이다.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데 날카로운 눈초리 하나가 등에 와 박히는 느낌에 움찔한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언젠가, 굳이 따지자면 인간이 숲에서 벗어나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릴 때쯤 잃어버렸던 본능 같은 게 살아나는 걸 실감할 수 있다. 굳이 경계의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좀 미흡한, 필요 없다고 어디엔가 내던졌던 민감한 신경같은 것일 게다. 시선 쪽으로 눈을 돌리니 한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시장 풍경과는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내다. 타임머신을 타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군단에 용병이라도 다녀온 것 같은 느낌. 그런 단단함과 날카로움이 적절히 버무려진 사내.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온다. 그런 땐 독일병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도 있는 걸음걸이다. 가까이 온 그가 나를 끌어안더니 자신의 뺨을 내 뺨에 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반대쪽 뺨. 다음엔 손을 내민다. 나 역시 아무 거부반응 없이 손을 내민다. 악수를 마친 그가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더니 거수경례를 한다. 나는 경례를 받는 대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눈은 웃고 있는데 입은 독일병정처럼 꼭 다문 저 사내는 나와 무슨 인연으로 여기서 인사를 나누는 것일까? 왜 내겐 낯선 사내의 거친 뺨이 낯설지 않은 것일까? 전생, 어디를 흐르는 강쯤에서 헤어졌다가 이리 만난 것일까? 눈짓으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인파 속으로 묻힌다.

 

카메라에 관심이 많았던 모녀.

옛날식 다리미도 있고.

카메라를 들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진사가 되는 건 금방이다. 히잡을 두른, 모녀로 보이는 두 여자가 자꾸 내 카메라에 시선을 보낸다. 표정은 수줍기 짝이 없지만 낯선 물건에 대한 관심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카메라를 가리키며 무슨 말인가 연신 주고받는다. 그런 땐 무기가 있지. 삶은 콩 얻어먹은 당나귀처럼 잇몸까지 보이며 웃어준다. 마음이 놓이나 보다. 젊은 여자가 묻는다.

필름?”

노 필름

이 정도면 서로 영어 좀 되지 않는가? 디지털 어쩌고 안 하고도 서로 하고 싶은 말 다했다. 사진보다는 카메라 자체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카메라를 내밀면서 한번 찍어 보라고 했더니 고개를 젓는다. 찍을 줄은 모르고 자신들을 찍어서 보여 달라는 것이다. 수줍음 속에서도 할 건 다한다. 오케이, 오케이! 얼마든지요. 노소 무슬림 여성을 모델로 시장 한가운데서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사진을 보여줬더니 할머니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고맙단다. 디지털 카메라를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보시하기 쉬운데 뭘. 모델 확보해서 좋고 고맙다는 인사 들어서 좋고. 카메라를 들고 있다고 늘 이렇게 저절로 모델이 구해지는 건 아니다. 우선 인상이 좋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항상 웃는 얼굴이어야 한다. 찡그린 사진사에게 모델이 돼주는 경우는 없다. 다음으로 눈이 마주치면 현지 말로 인사 정도는 할 줄 알아야한다. 예를 들어 터키에 가면 귀나이든(잘 잤어요? 좋은 아침!!)~ 메르하바~(안녕하세요?) 정도는 입에 달고 사는 게 좋다. 인사한다고 욕하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다.

 

이 아이 대신 장사를 해줬다.

대장장이.

주석공방 골목.

어느 가게 앞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아이들이 일하는 걸 보는 게 이젠 낯설지 않다. 방학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에 가게를 보는 아이들이 많다. 헌데, 이 녀석 정말 기특하다. 서 있는 나를 보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앉으란다. 이런 경로사상이 투철한 아이가 있나. 아니면 내가 불쌍해 보였나?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지. 아이를 한쪽에 세워놓고 장사를 시작한다.

싸요, 싸요. 최고급 실크 머플러가 말만 잘하면 공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일행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모여든다. 다른 터키 사람들도 이방인이 싸구려를 외치니 신기하다는 듯 모여든다.

다른 데 갈 것 없어요. 싸게 드릴 테니 여기서 사요.”

손님과 아이 사이에서 흥정을 벌인 끝에 두 장을 팔았다. 물론 사는 사람들도 혜택을 봐야하니까 30리라짜리를 25리라로 깎아줬다. 아이도 불만스럽지 않은 표정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뭐. 아이와 작별을 하고 실크 상가를 벗어난다. 바로 앞에 대장간이 있다. 대장간 분위기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화덕과 모루, 각종 장비그리고 대장장이의 힘찬 망치질. 만드는 물건은 좀 다르다. 도끼나 칼 등도 있지만 주로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만든다. 저게 뭘까? 물어봤더니 케밥을 만들 때 쓰는 꼬챙이란다. 대장장이는 다섯 살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해서 45년 동안 이 일만 해왔다고 한다. 쉰 살이라는데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인다. 평생 불 앞에 살아서 그럴 거야. 익은 거지 뭐.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 공방들이 줄지어 있다.

 

완성된 주석 제품들.

주석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웃는 얼굴로 일하는 아이.

전통기법으로 주석 용기를 만드는 곳이란다. 주석이 이렇게 예쁜 물건으로 변할 수도 있구나. 보석 못지않게 화려하다. 한 집에 들어갔더니 부자(父子)로 보이는 장년 사내와 아이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동그란 주석 판에 문양을 새기고 아들은 판 위에 열심히 망치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어려 보인다. 아홉 살 쯤? 커다란 나무망치를 들고 연신 내리치는데 그 나이에 하기에는 조금 벅차 보인다. 하지만 이 녀석 조금도 싫증난 표정이 아니다. 입가에 미소까지 매달고 있다. 착하고 착한지고. 저렇게 일하는 아이도 있는데 어른인 내가 여행을 하면서 뭐가 힘들다고. 배낭을 추슬러 올리고 힘차게 나서보자.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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