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sagang
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봉숭아물'에 해당되는 글 1

  1. 2008.08.18 [사라져가는 것들 72] 봉숭아물들이기27
2008. 8. 18. 13:20 사라져가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누이야.
아침에 집을 나서다 홀로 핀 봉숭아꽃을 보았다.
까치발로 키를 자랑하는 다른 꽃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수줍게 피어있는 꽃, 봉숭아를 보면서 또 네 생각에 빠져들었다.
봉숭아꽃을 사랑했던, 봉숭아꽃 같았던 아이.
봄이 오면 넌, 지난해 받아서 꼼꼼하게 갈무리했던 봉숭아 씨를 가장 먼저 심었다.
봉숭아는 일부러 심지 않아도 해마다 피었던 자리에 다시 태어나건만, 넌 그 일을 거르지 않았다.
그 까맣고 탄탄해 보이는 작은 씨들과 함께 삶의 희망을 싹틔우겠다는 듯.
그래서 우리 집 싸리울 밑의 주인은 해바라기도 분꽃도 채송화도 아닌 봉숭아였다.
씨앗이 흙을 밀어 싹을 틔우고 앙증맞은 잎을 하나 둘 내밀기 시작하면 너는 울 밑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긴 어른들은 들로 나가고 나마저 학교에 간 새,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늘에서 지고 온 원인도 모르는 병으로 뛰어놀 수도 학교에 갈 수도 없는 네게 무슨 다른 선택이 있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네 소망 때문이었을까.
우리 집 울밑의 봉숭아는 항상 동네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웠다.
분홍색 빨간색 주홍색 보라색 흰색…
작은 꽃들이 점 점 점 등을 내걸어 불을 밝혔다.
꽃이야 해와 비와 바람이 피워냈겠지만, 그 다양한 색깔들은 네가 불러내온 게 아니었을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꽃잎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들은 어린 소녀처럼 여리고 고왔다.
너를 닮아있었다.
여름이 무르익으면 너는 손톱에 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잎과 꽃잎에 백반과 소금을 조금씩 섞고 정성들여 찧을 때면, 네 볼은 봉숭아 꽃잎처럼 붉게 물들었다.
넌 잎과 꽃이 다 찧어지면 나를 불렀다.
찧은 꽃잎을 손톱에 올려놓고 싸매는 건 혼자 힘으로는 어려우니, 집안에 있는 유일한 식구를 부를 수밖에.
하지만 난 얼마나 무뚝뚝하고 못된 오라비였던지.
기껏 친구들을 불러내 참외서리나 모의하는 주제에, 바쁘다는 핑계로 부드러운 손길 한번 주지 못했구나.
꽃잎을 손톱 위에 조심스럽게 얹고 흐트러지지 않도록 푸른 잎으로 감싼 다음 잘 동여매줘야 예쁘게 물드는데.
대충대충 매어주는데도 그조차 고맙다고 미소를 아끼지 않았던 너….

사용자 삽입 이미지
봉숭아물을 들인 날, 넌 갓 시집 온 새댁처럼 조심스러웠다.
누가 손가락이라도 건드릴세라 가만가만 걷던 모습은 지금도 내 눈에 박혀 빠질 줄 모르는구나.
아침에 일어나 실을 풀 때의 모습도 잊지 못한다.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천천히 풀어나가던, 그리고 곱게 물들어진 손톱을 보면서 별처럼 빛나던 네 눈동자.
어른보다 바쁜 세상을 사는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추억이 있겠느냐.
싸맨 손가락 흩어질세라 제대로 자지도 않고 지키던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기억이 되어 가슴에 남는지 지금 아이들이 알 수 있겠느냐.
설령 그것을 안다 해도 그 번거로운 과정을 누가 하려고 할까.
하긴 요즘이라고 봉숭아물들이기가 아주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더라.
가게에 가면 금세 예쁘게 물들일 수 있는 ‘상품’을 판다니, 좋아졌다고 해야 할 지 추억조차 만들어줄 틈이 없는 세상을 한탄해야할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것은 시간과 추억을 물들이는 것이 아니더냐.
인내를 가지고 결과를 기다리는 그 시간을 어찌 헛되다고 할 수 있겠느냐.
봉숭아물은 덧칠하는 원색이 아니라 감춰져 있던 것이 우러나는 은은함이다. 누이야.
너는 꽃이 내미는 그 은은함을 사랑할 줄 알았다.
그 어린 나이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 너에게 왜 하늘은 그렇게 인색했단 말이냐?
너를 너무 사랑했던 것일까?
5월이더냐 6월이더냐? 봄은 만삭의 배를 한껏 내밀고 네가 심었던 봉숭아가 첫 꽃망울을 터트리기 전이었을 게다.
마당가 감나무에는 감꽃들이 누런빛 등을 걸던 계절이었다.
그날따라 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뒷꼭지를 억누르는 초조감에 달리듯 집을 향해 달렸다.
아아!
감나무 아래 미동도 없이 엎드려있는 너를 보는 순간, 나는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는 이별의 예감에 몸을 떨었다.
왜 하필 감나무 아래였을까.
아버지가 길을 떠날 때 매어준 그네만 홀로 흔들리고 있는 곳.
넌 그렇게 떠났다.
배가 부어오르고 가쁜 숨을 몰아쉴 때도 어른들은 설마 했었겠지.
아니, 설령 결말을 어느 정도 예견했다 해도 뼈가 휘도록 일을 해봐야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던 그들이 뭘 어찌할 수 있었을까.
다리목 돌팔이 영감이 처방한 약 몇 첩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며 동산만한 배를 쓸어주는 수밖에.
이 오라비는 학교에, 어른들은 들에 있던 시간, 넌 혼자 그렇게 떠났다.
이상도 하지.
네게 다가가면서 내 두 눈은 이미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는데, 쪼그리고 앉은 나는 네 손부터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경황에 왜 그랬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봉숭아물을 들이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을.
봉숭아물 대신, 길을 떠나기 직전의 고통이 낱낱이 배어 있는 네 손톱 위에 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네 손 안에서 네 나이만큼의 감꽃을 발견했다.
눈물처럼 배릿한 감꽃만이 네가 내게 남긴 유일한 전언이었구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손톱에 들인 봉숭아물이 첫눈 내릴 때까지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데, 누이야 너는 첫사랑이 무언지 알 틈도 없이 떠나버렸구나.
봉숭아물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주술적 의미도 지녔다는데….
누구의 슬픔이 깊다고 시간이 멈춰 서기야 할까.
포말처럼 하얗게 바래가던 네 미소가 눈에 밟혀 밤마다 베개를 적시던 사내아이는 이제 주름 깊은 나이가 되었다.
지금도 고향집 무너진 담장 밑, 잡초 무성한 그 자리에는 봉숭아 한 두 송이 피어나고 있을까?
여전히 네 영혼을 점 점 점 걸어놓고 있을까?
누이야…


손 모델이 되어주고 사진을 찍어주신 송혜민 기자 자매에게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sagang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