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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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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전철'에 해당되는 글 1

  1. 2010.12.27 [사라져가는 것들 154] 경춘선 기차6
2010. 12. 27. 20:40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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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 기차. 서울에서 청춘기를 맞이한 이 치고, 이 다섯 글자에 추억 한 자락 걸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MT를 가기 위해 연인과의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젊은이들은 경춘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유장하게 흐르는 북한강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던,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으로 낭만이 넘실대던 열차. 누구는 사는 게 유난히 팍팍하다는 생각이 들면 기름칠 하는 셈 치고, 누구는 이별의 아픔으로 생긴 가슴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경춘선을 탄다고 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고 내렸던 이들 또한 얼마나 많았으랴. 그 기차가 사라진단다. 시대에 밀리고 첨단에 쫓겨 이별을 고한단다. 역마다 다 참견하고 다니던 비둘기호나 그보단 조금 빠르지만 특별할 것도 없었던 통일호가 사라질 때까지만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예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다. 이제 ‘기차’라는 이름의 추억은 종착역에 섰다. 2010년12월20일부로 모든 건 과거로 흘러가버린다. 하행선 열차는 20일 밤 10시 15분 청량리역을 마지막으로 출발하고, 상행선은 남춘천역에서 밤 9시 25분에 출발, 11시 12분에 청량리에 도착한다. 그게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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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떠난 자리를 전철이라는 매끈한 전동차가 대신 달린다. 21일 05시10분 상봉역을 출발하는 첫차부터 전철로 바뀐다. 그 순간 다른 세상이 열린다. 무궁화호는 청량리역에서 남춘천역까지 1시간50분 걸렸지만 복선전철은 급행 63분, 일반 79분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운행횟수도 하루 38회에서 137회로 크게 늘어서 출퇴근 시 12분, 그 외에는 20분 간격으로 배차된다. 서울 상봉역과 춘천역에서 상ㆍ하행선 첫 열차가 오전 5시 10분에 각각 출발해 오전 6시 13분에 춘천역과 상봉역에 도착한다. 마지막 열차는 오후 11시에 출발해 0시 19분 종점에 도착한다. 결국 춘천에서 수도권으로 출퇴근하는 게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요금도 종전 무궁화호의 5600원에서 절반도 안 되는 2500원으로 싸진다. 이렇게 바뀐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면 ‘춘천이 수도권의 품 안에 들어갔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춘천 역세권의 집값이 뛰고 있다고 한다. 그 정도 출퇴근 시간이라면 환경 좋고 집값 싼 춘천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느는 건 당연한 일.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편리해지면 모두 좋기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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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날이 오기 전에 경춘선 기차를 타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자꾸 등을 떠민다. 부랴부랴 표를 예매하고 토요일(18일) 청량리역으로 나갔다. 쇼핑센터와 연동된 매끈한 신청사. 청량리역도 추억 속의 그 역은 아니다. MT의 집합장소는 늘 역 앞의 시계탑이었다. 이제 그런 건 없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별 감흥도 없이 예약된 표를 받아들고 개찰구를 빠져나간다. ‘경춘선 매진’이라는 글자가 잠시 시선을 잡을 뿐이다. 계단을 다 내려 갈 때쯤에야 반가운 이라도 만난 듯 걸음이 빨라진다. 눈에 익은 열차가 서 있다. 경춘선 무궁화호. 추억을 찾아온 건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열차 안팎에는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친구끼리, 연인끼리, 가족끼리…. 초로의 남자들 대여섯 명도 서성인다. 그들이 청춘의 페이지를 넘겨보는 소리가 요란하다. 열차는 정확하게 10시20분에 출발한다. 1호차 43번 창측. 5600원을 내고 부여받은 권리다. 이제는 천금을 들고 와도 경춘선에서 이 권리를 살 수 없으리라. 감회가 스멀스멀 일더니 전신을 훑는다. 춘천에 사는 어느 소설가를 찾아가기 위해 이 열차를 탔던 날의 두근거림이 엊그제 일인 양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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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슬금슬금 출발하나 싶었는데 금방 성북역에 도착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춘선의 구간을 청량리에서 춘천까지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성북에서 춘천까지다. 청량리에서 성북까지는 수도권 1호선 전철 선로의 신세를 지고 있다. 1939년 7월 25일 경춘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경춘선이 개통될 때는 지금의 경동시장근처인 성동역이 시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시가지 확장에 따라 성동역∼성북역 구간은 철거됐다. 성북역에서 타는 승객이 꽤 많다 했더니, 빈자리를 모두 채우고 몇 사람은 서서 간다. 열차가 화랑대역을 지나면서 서서히 전원풍경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엊그제 내린 눈이 드문드문 남아있다. 저만치서 카트가 다가온다. 옛날엔 ‘홍익회’라는 대명사로 불렸던 간식 카트. 과자나 김밥, 삶은 달걀, 음료수는 물론 맥주까지 즐길 수 있었던 ‘기차여행의 꽃’. 오랜만의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이어서 그런지 객지에서 만난 친구처럼 반갑다. 그 반가움은 나뿐만이 아닌 듯, 간식을 사는 사람이 제법 많다. 그것도 하나의 추억 쌓기일 테다. 전철로 바뀌면 최소한 경춘선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재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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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벗어나면서 열차는 구불구불한 철로를 뱀처럼 미끄러져간다. 북한강 구비 따라 달리는 경춘선 기차여행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길을 선물처럼 받아들고 가는 여행이었다. 새로 만든 전철구간은 직선화에 치중하다보니 터널 구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당연히 운치는 줄어들 수밖에. 늘 그렇듯이, 빠르고 편리한 것들은 무언가 달라고 손을 내밀기 마련이다. 사실 지금 열차가 달리는 이 길도 원래의 경춘선은 아니다. 이미 상당 구간 새로 이설된 전철용 경춘선을 지나게 되기 때문이다. 원래의 철로로 달리는 곳은 성북~퇴계원, 상천~남춘천 등 시점과 종점 구간뿐이라니 반쪽짜리 경춘선여행인 셈이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젖어 있는데 대성리역이라는 안내가 나온다. 시계를 보니 11시6분이다. MT의 대명사 대성리. 어쩌면 MT가 만들어낸 동네일지도 모른다. 한때 서울에서 MT를 가자는 말이 나오면 장소는 당연히 대성리로 알았다. 그 당시 열차는 늘 청춘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통로건 어디건 주저앉아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 지금이야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그 때는 고성방가까지도 너그러운 미소로 용납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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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탓인지, MT시대가 어느덧 지나간 것인지 대성리에서 내리는 젊은이들은 거의 없다. 열차는 급하게 숨을 고른 뒤 다시 출발한다. 얼마 달리지 않아 도착한 곳은 청평역. 11시 16분이다. 청평호가 있는 이곳도 여름이면 젊음의 천국이 된다. 새로 지은 전철역들이 산뜻한 모습을 자랑하며 서 있다. 그동안 봐오던 허름한 기차 역사들이 촌부의 반백 머리라면, 새로 지은 전철역들은 깔끔하게 빗어 넘긴 신사의 머리 같다. 하지만 천생이 촌놈에게는 별 정이 가지 않으니 어쩌랴. 허리 굽은 옛날 역사들은 넉넉한 품으로 허허롭게 비어버린 가슴을 달래줬다. 하얀 눈 뒤집어쓰고 웅크린 작은 역사에 눈길을 빼앗겨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제 그들은 박제가 되어 세상의 한쪽에서 시나브로 늙어갈 것이다. 옹송그리고 서 있는 길가의 나목들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가평역에 도착한 건 11시30분. 제법 많은 승객들이 내린다. 사계절 내내 인기를 누리는 관광지, 남이섬으로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제 그곳을 갈 때도 전철을 타겠지. 빈자리가 제법 많이 생긴다. 열차는 이제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 땅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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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강촌역이다. 11시48분. 역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내린다. 가평 못지않다. 강촌역 역시 추억의 보물창고다. 자리에 앉은 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가슴 속에도 강물 한 줄기가 흐른다. 눈을 돌리니 강촌역의 명물인 낙서들이 기다리고 있다. 장난기와 하고 싶은 말이 적당히 버무려진 각종 언어들. 치졸한 그림과 무질서하게 나열된 단어들 속에 MT, 젊음, 연인, 통기타, 맥주, 낭만, 해방감… 한 시대가 모두 들어있다. 그 낙서들 사이를 열병하듯 지난 열차는 다시 앞으로 나간다. 이제 종점이 코앞이다. 정각 12시에 김유정역을 지나간다. 쓸쓸한 묘지 위로 잘 헹궈 널은 빨래 같은 햇살이 이불처럼 깔려있고 망루 위에 선 초병들의 어깨가 참나무처럼 단단해 보인다. 12시7분. 드디어 남춘천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예정보다 3분 연착이다. 추억을 따라나선 1시간 47분의 여행도 끝났다. 세월을 거꾸로 돌리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는 한 이 열차를 탈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성북역에서 다시 한 번 이별의 문구와 조우한다. ‘2010년12월21일부터 우리 역의 국철승차권 판매업무를 중지하오니…’ 시야가 흐린 탓일까? 바람도 없는데 벽에 붙은 플래카드가 펄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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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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