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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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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로 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평원.

아타튀르크 댐이 만들어 낸 풍경.

이제는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한다. 터키의 숨겨진 속살을 관통하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말라티아에서는 마음이 통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샨르우르파에서는 깨달음을 준 옛 스승들을 만났다.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으로부터 갈대우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그 험난한 여정도 들었고, 선지자 욥을 만나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야곱과 라헬의 사랑이야기도 가슴에 담았다. 샨르우르파 공항,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아쉬운 눈길을 창밖에 고정시킨다. 여전히 황량한 벌판에는 나스카의 지상그림처럼 생긴 도형이 사방으로 뻗어있다. 그 한 가운에 있는 마을은 고립된 듯 외로워보인다. 저 안에 갇힌 저들은 무엇을 꿈꾸며 살까. 아니다. 그들은 저 광활함 속에서 한없이 자유롭거늘, 정작 갇혀 있는 사람은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잠시 뒤에는 사방팔방으로 물길이 뻗어나간 거대한 늪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서 보니 늪이지 사실은 엄청나게 큰 호수고 강이다. 댐에 막혀 길을 잃어버린 유프라테스강은 바다를 흉내 내고 있다. 정녕 인간이 자연을 이긴 것일까. 상념이 낳은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릴 무렵 이스탄불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스탄불 시내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분주하다. 이스탄불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역시 단 하루. 꼭 들르고 싶었던 돌마바흐체 궁전을 찾아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찾아다닌 이스탄불의 유적들이 유럽 쪽의 구시가지에 몰려있었다면 돌마바흐체 궁전은 갈라타 다리를 건너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올라가는 신시가지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외곽 뜰. 바다와 아시아 땅이 코앞에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제1문.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조그만 만()을 메운 매립지에 자리 잡고 있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다. , 바다였던 자리를 메우고 정원을 조성했다고 해서 가득 찬 정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지금의 궁전이 들어서 있었던 건 아니고 17세기 초 아흐메드 1세가 정자를 짓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돌마바흐체라 불렀다. 그때의 건축물들은 1814년 화재로 모두 불타고 말았다. 궁전 외곽, 바다와 맞닿아 있는 전망 좋은 곳에는 넓은 야외 카페가 있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건너편의 아시아 땅과 바다 위의 유람선들이 어울린 그림 같은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카페는 그 풍광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그곳에 비비고 앉아 점심을 먹을까하고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무 그늘이 드리운 잔디밭에서 준비해간 점심을 먹는다. 궁전 앞의 점심식사도 제법 괜찮다. 언제 또 이런 호사를 누려볼까. 돌마바흐체 궁전을 관람하려면 표를 예매하는 게 좋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현장에서 구입하려면 줄을 서야 한다. 나는 미리 준비한 덕에 길게 늘어선 줄 옆을 자랑스럽게 지나갈 수 있다. 그러게 누가 무작정 오래? 사람들이 말이야, 준비성이 있어야지. 쯧쯧! 입장료는 30리라. 환율을 700원 씩 계산해도 21,000. 궁전 구경 하다가 등뼈 휘어져서 가겠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와봐야 할 곳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문을 들어선다.

문 위의 조각들. 

안쪽 문.

 

궁전 본관까지 가기 위해서는 제법 걸어야 한다. 화려한 문도 두 곳이나 통과한다. 다른 오스만 건축양식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유럽풍인데 무척 호화롭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지었다고 하니 까딱 잘못하면 파리쯤에 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일 것 같다. 이 궁전을 착공한 건 1843년이다. 압둘메지드 황제의 지시로 짓기 시작했는데 13년만인 1856년에 완공했다. 이탈리아 건축가 가라베트 발안과 그의 아들 니코코스 발안이 설계했다. 이 궁전이 완공되기 전에는 술탄들이 톱카프 궁전에서 기거했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톱카프 궁전 역시 어느 곳 못지않게 크고 화려한 궁전이다. 그러니 살만한 궁전이 없거나 곳간에 돈이 남아돌아서 새로 지은 건 아니고,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회복해보겠다는 염원이 투영됐을 것이다. 왕권시대에는 동서를 불문하고 나라의 기운이 쇠했다 싶으면 궁전을 짓는 게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이 땅의 흥선대원군도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임진왜란 때 불 타 무너진 경복궁을 새로 짓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뭐하나. 그 역시 약발이 별로였던 것 같다. 새 궁을 지은 지 얼마 안 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이 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으니. 건물 따위로 국운을 돌려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쓸모없는 삽질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 셈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할 무렵은 너도 나도 만만하게 보는 바람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센 개방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여려 가지 모습.

외채는 계속 늘어나고 국가의 재무 상태는 빈사 위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호화로운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 창고 바닥 긁는 소리가 요란했을 것 같다. 참고로 궁전을 지은 압둘메지드 황제는 이곳에서 단 6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이런 경우를 죽 쒀서 뭐 줬다고 하던가? 들어가는 길 내내 마음을 빼앗길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잘 가꿔진 정원에는 접시꽃이 활짝 웃는 얼굴로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특히 분수대가 있는 연못 앞에 서서 바라보는 궁전의 풍경은 환상적이다. 궁전 입구에서는 덧신처럼 생긴 비닐봉지를 하나씩 나눠준다. 신발에 씌우라는 뜻이다. 터키 사람들이 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입장하는 인원도 적절히 시간차를 두어서 복잡하지 않도록 조절한다. 문을 들어서면서 사진을 한 장 찍는데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역시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No Photo!!!" 여기도 촬영금지야? 대체 그 비싼 돈을 받아먹고 사진 한 장 못 찍게 하는 건 무슨 심보야. 톱카프 궁전에서도 불만을 토로했지만,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 한 유물이나 전시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게 내가 가진 상식이다.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이런 엄격한 규제는 들어가고 싶은 마음까지 통째로 뭉개 버린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사람이 그 수단을 빼앗겨 버리면 존재가치가 희미해진다. 다른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 다니긴 하지만 흥미는 이미 반감된 상태다. 관람은 1층 입구에서 시작하는데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올라가면 궁전의 본 모습이 펼쳐진다.

 

궁전에서 바라본 아시아 땅.

궁전 내부로 들어가면서 찍은 첫 번째 사진.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도둑 셔터로 찍었다.

고국에 뭔가 전해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뷰파인더를 보지 않는 상태에서 셔터를 몇 번 눌러보지만 사진이 제대로 나올 턱도 없고 굳이 도둑 사진까지 찍어야 되나 싶어 그만 둔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경비원들이 서서 네가 무슨 짓 하려는지 다 알고 있으니 쫓겨나기 싫으면 그냥 구경이나 해하는 눈초리로 쏘아보는 탓에 자꾸 움츠려든다. 사실 궁전은 바깥보다 내부가 더욱 화려하다. 곳곳의 천장마다 걸려있는 샹들리에는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할 정도로 크고 호화롭다. 이 궁전을 지을 때 내부 장식에만 총 14t의 금과 40t의 은이 사용됐다고 한다. 총면적은 15,00m²인데 궁전 내부에는 남성만 들어갈 수 있는 셀람륵과 황제 외에 남성의 출입을 금하는 여성의 영역 하렘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렘지역은 파란방이라고 부른다. 방은 총 285개고 홀이 43개인데 그밖에도 68개의 화장실과 11개의 목욕탕이 있다. 방이나 홀의 장식도 제각각 다르다. 바닥에 깔린 수직 양탄자의 넓이는 4,455m²나 되며 벽에는 600점이 넘는 명화가 붙어있다. 많은 때는 5,320명이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화려함의 극치다. 물론 내게는 숨바꼭질하기 딱 좋은 곳 이상은 아니다. 잘 따라 다녀야지 괜히 잘난 체 하고 혼자 돌아다니다 길을 잃으면 밤새 헤맬 것 같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한다. 이 궁전 내부를 전부 둘러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사실 내게는 그 방이 그 방 같고 그 홀이 그 홀 같아서 그저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보냈다는 샹들리에는 아니지만 기념으로 찍었다.

아타튀르크를 기려 09시05분에 멈춰진 궁전 내부의 시계.

황제 일가의 일상생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궁전 내에는 황제의 아이들을 가르치던 작은 학교도 있고 선생님들을 위한 교무실도 있다. 물론 황제가 썼다는 화장실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 있다. 별게 다 기념물이 되는 세상이다. 또 궁전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전시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유럽에서 보내왔다는 수많은 보석과 도자기, 그릇들이 눈부시다. 거북 껍질로 만든 수저도 있다. 거대한 곰 가죽은 러시아에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처럼 생긴 기둥은 진짜 대리석이 아니다. 밤나무에 석회를 바르고 대리석처럼 칠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다. 별 기술이 다 있구나. 정말 감쪽같다. 거대한 시계 옆을 지나다 걸음을 멈춘다. 시계바늘은 95분에서 잠들어 있다. 태엽을 주지 않았거나 건전지가 떨어져서가 아니다. 여기서는 참았던 도둑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저 시계를 보러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시계 자체야 별게 있을 턱이 없지만 아타튀르크라는 위대한 독재자가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궁전을 완공한 뒤 이곳에서 살았던 오스만 황제들은 모두 6명이었다. 1877년에는 오스만 제국 사상 처음 개원된 의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터키공화국이 출범하고 난 뒤에는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이스탄불 집무실로 쓰였다. 그는 1938111095분 집무 중에 이 궁전에서 사망했다. 건국의 아버지인 그를 기리기 위해 궁전의 모든 시계들은 95분에 멈춰져 있다. 터키 사람들이 아타튀르크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나라 전체가 존경할 사람을 가졌다는 건 무척 부러운 일이다. 드디어 그랜드 홀에 들어선다. 관람 코스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다.

 

저 문을 나가 걸어가면 바다에 닿는다.

 

홀에 들어서는 순간, 안내를 하던 훌리아가 멈춰서더니 눈을 감으란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 둘 셋을 세면 눈을 뜨고 천장을 보란다. 셋을 세는 순간, 우와!! 하는 감탄사가 터진다. 탁 트인 공간에 매달린 엄청나게 큰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이 거대한 샹들리에도 한몫했다. 36m 높이에 매달려있는 이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이다. 무게만도 4.5t이나 나가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750개의 등이 달렸는데 1912년까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수백 개의 촛불을 켰다고 한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이 방에는 재미있는 게 또 하나 있다. 원래 천장은 삼각형인데 그림으로 동그란 돔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일종의 착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삼각형의 흔적은 없다. 76개의 대리석 기둥역시 모두 나무다. 이곳에서는 대형 연회가 열렸다는데 2층에는 연주자들의 자리가 있다. 지금도 이 그랜드 홀은 결혼식장으로 대여된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돈이다. 1년에 2~3회 정도 아랍의 부호들이 거액을 주고 빌려 쓴다.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황금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호사를 누리게 하는 셈이다. 나는 사진 한 장 못 찍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연회를 열 수도 있구나. 괜한 심술로 혼자 중얼거려본다. 전투 장면 등을 그린 그림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바로 바다가 펼쳐진다. 눈이 시원해지니 섭섭함도 별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바다에 푹 빠져 있다. 나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는 메마른 가슴에 꿈 씨 하나쯤은 파종하고 가야할 것 같다.

 

posted by sagang

 

제4정원에서 바라본 풍경. 건너편이 아시아 땅이다.

톱카프 궁전의 제4정원으로 가는 길은 문이 따로 없다. 보석박물관을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느닷없이 시야가 탁 트인다. 오른 쪽으로는 마르마라 해협이 검푸른 색깔로 누워있고 앞으로는 아시아 땅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왼쪽으로 조금 돌리면 보스포루스 해협의 들머리가 보이고 좀 더 왼쪽에는 유럽 땅인 신시가지와 골든혼이 있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바쁘게 또는 한가롭게 흘러 다닌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림 같은 풍경이다. 나는 유리 안에 갇힌 억만금짜리 보석보다 이런 풍경 앞에서 훨씬 행복하다. 이곳이야말로 톱카프 풍경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원은 술탄과 그의 가족들만 드나들 수 있었다. 몰래 감춰두고 자신들만 야금야금 즐긴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이었던 셈이다. 술탄들은 이곳에 아름다운 정자를 짓고 꽃밭을 가꿨다. 특히 아흐메트 3세 때는 튤립을 많이 심어서 튤립정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바람을 타기 시작한 튤립은 튤립시대’(1718~1730)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열풍을 불러왔다. 튤립에 흠뻑 빠진 아흐메트 3세는 이 꽃을 즐길 수 있는 잔치를 자주 열었다. 톱카프 궁전과 정원에서는 밤낮으로 연회가 벌여졌다. 이스탄불 시내도 튤립 천지였다. 새봄의 첫 대보름에는 튤립축제가 열렸다. 술탄과 귀족들은 비단을 드리운 배를 타고 바다 위를 오가며 튤립의 정취를 즐겼다. 얼마나 낭만적인 풍경이었을까. 게다가 전쟁도 없는 태평성대였다. 하지만 그림자 없는 빛이 어디 있던가.

 

 

제4정원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신나게 놀았으니 나라 곳간이 비어가는 건 당연한 이치. 도끼 자루 썩는 줄 몰랐던 나무꾼처럼, 아차! 싶어 곳간 바닥을 긁어보지만 쌀 한 톨 나올 리 있나. 애먼 백성 허리만 더욱 구부러질 뿐이었다. 원성이 높아지자 참견꾼 예니체리(앞에서 다 배운 것들이다)가 가만있을 리 있나. 1730년 드디어 반란이 일어난다. 꽃과 사랑에 빠졌던 튤립술탄야흐메트 3세는 그렇게 권좌에서 물러나고 튤립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고 보면 꽃이든 사람이든 적당히 사랑하고 볼 일이다. 튤립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냐고? 설마! 우리는 튤립파동(Tulip mania)이라는 또 하나의 단어를 기억해야한다. 이야기는 무대를 네덜란드로 옮기면서 터키의 튤립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탄불에 와 있던 네덜란드 대사가 튤립을 가져간 게 화근이었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사재기가 난무할 정도로 튤립의 인기가 치솟았다. 튤립은 단기간에 번식이 어렵기 때문에 늘 품귀였고 가격은 그만큼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꽃이 피지 않았는데도 미래 어느 시점에 정해진 가격에 사고판다고 계약하는 선물거래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꽃은 꽃일 뿐. 16372월을 정점으로 튤립 가격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팔겠다는 사람은 넘치는데 사겠다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른바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말 그대로 튤립 값은 X값이 됐고 파산자가 속출했다. 이 튤립파동은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경제대국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는 한 요인이 됐다고 한다. 꽃 하나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아시아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나는 지금 그런 역사적 파동을 잉태한 현장에 서 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튤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을 찍거나 난간에 기대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만 눈에 띌 뿐이다. 나 같으면 기념으로라도 튤립을 심겠다. 아픈 역사야말로 교훈의 어머니 아니던가. 바다 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카페가 보인다. 관광객들이 파라솔 아래서 식사와 음료를 즐기고 있다. 언뜻 봐도 나 같은 가난뱅이 여행자가 앉을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술탄이 즐기던 비밀의 정원에서 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즐기는 식사. 그것만으로도 폼 좀 나겠지. 물론 부자들 얘기다. 내려가서 구경이라도 할까 하다가 조금 구차할 것 같아서 포기한다. 대신 세월을 듬뿍 머금은 바다를 보면서 역사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시간을 오르내린다. 골든혼 쪽을 바라보다보니 느닷없이 역사의 한 자락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저쯤이 바로 배가 산으로 올라간 곳이겠구나. 배가 산으로 올라가다니, 느닷없이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 이왕 역사의 현장에 왔으니 그 얘기를 좀 풀어놓고 가자. 그 일이 일어난 건 1453422일이었다. 그 즈음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초조함에 쫓기고 있었다. 비잔티움을 함락하기 위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헝가리 출신의 대포 제조기술자 우르반이 만든 거대한 대포로 연일 두드려 봤지만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잠깐, 이 우르반이란 인물이 누구던가. 콘스탄티노플에 대포를 팔러갔다가 반응이 시원치 않자 메흐메드 2세를 찾아와 거래를 성사시킨 사람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무기상들의 손에 달린 것인가.

 

가운데로 뻗어나간 바다가 보스포루스 해렵. 왼쪽 하얀 배가 진행하는 방향이 골든혼.

우르반이 만든 이 대포는 파괴력이 엄청났다. 하지만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고 쏘고 나면 다시 장전하는데 오래 걸리기 때문에 하루에 7번밖에 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비잔티움의 군사들은 무너진 성벽을 보강했다. 시시포스 돌 굴리듯 결과 없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메흐메드 2세로서는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었다. 육지 쪽으로 돌아가자니 2, 3중 성벽이 걸리고 바닷길을 뚫자니 골든혼에 쳐놓은 쇠사슬이 문제였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게 바로 배를 끌고 산을 넘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 술탄의 생각이었는지 부하 중에 그런 용감무식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사람이 더 많기 마련이니까. 술탄의 군대는 어둠을 틈 타 기름이 칠해진 둥근 통나무를 바닥에 깐 다음, 72척의 배를 밀고 산을 넘었다. 병사들은 죽을 노릇이었겠지만 보기에는 장관이었을 것 같다. 지금은 흔적이 모두 지워졌지만, 대략적으로 복기해보면 갈라타탑 동편의 톱하네에서 골든혼의 카슴파샤까지 배를 옮긴 것이다. 아침에 일어난 비잔티움 병사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하룻밤 사이에 적의 배들이 코앞까지 들어오다니. 그렇다고 바로 콘스탄티노플이 바로 함락된 것은 아니다. 늙은 사자처럼 갈기가 부서지고 발톱은 빠졌어도, 비잔티움은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나 더 지난 528일 밤, 드디어 메흐메트 2세는 16만 대군에게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밤새 이어진 공방전 끝에 먼동이 틀 무렵이 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다를 보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노천카페.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그날 밤을 새워 1200년 제국의 수도를 지킨 병사는 7,000여명에 불과했다. 1453529일 화요일. 로마의 적통을 이은 동로마, 즉 비잔티움 제국은 이렇게 마지막 숨결을 놓았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마지막 황제의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11, 마침 동로마 제국을 일으킨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은 이름이었다. 말을 꺼낸 김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드 2세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고 가자. 그도 처음부터 잘 나가던 술탄은 아니었다. 아버지 무라드 2세가 갑작스레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바람에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술탄이 됐다. 하지만 열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느닷없이 왕을 다시 하겠다며 아들을 내쫓았다. 그런 사람을 일러 우리 조상들은 변덕이 죽 끓듯 한다고 했다. 눈물 속에 세월을 보내던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숨 쉴 틈도 없이 왕궁으로 말을 달려 왕관을 머리에 썼다. 아버지의 조기교육으로 권력의 비정한 생리를 일찌감치 터득한 그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도 빨리 깨달았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술탄을 꼽으라면 대부분 쉴레이만을 들지만 나는 메흐메드 2세를 앞세운다. 이 이슬람의 술탄에게 점수를 가장 후하게 주는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점도 있지만, 이교도인 기독교의 유산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와 예술이 밥 먹여주느냐는 수장이야말로 성군이 되기에는 애당초 글러먹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성소피아 성당의 유물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건 순전히 메흐메드 2세 덕분이란 사실에 늘 감동할 수밖에 없다.

 

톱카프 궁전의 건물.

메흐메드 2세의 이야기가 길어지니 슬슬 지루하겠지만, 딱 한 가지만 더하고 가자. 게다가 이건 드라큘라 얘기다. ? 느닷없이 웬 납량특집? 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역사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연결고리가 있는 법이다. 드라큘은 또는 악마라는 뜻을 가진 루마니아 말이다. 1431~1476 사이에 살았던 드라큘라의 원래 이름은 블라드 체페슈다. 그는 루마니아 옛 왕국 중 하나인 왈라키아 공국의 계승자였다. 그의 이름이 드라큘라로 알려진 건 아버지 블라드 2세가 유럽 용의 기사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라큘라는 (드라큘)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는 메흐메트 2세와 인연이 많다. 소년시절을 인질로 오스만 제국에서 보낸 그는 왕위에서 추방됐다가 복위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친다. 두 번째 권력을 장악한 뒤 오스만제국에 대한 공납을 거부하자 메흐메드 2세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온다. 드라큘라는 게릴라전으로 여러 번 대군을 물리친다. 그는 1462년 동생에 의해 또 한 번 추방당했다가 1476년에 복위하지만 곧 오스만 군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다. 결론적으로 드라큘라는 외세에 치열하게 맞선 민족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악마가 됐을까. 이유는 이렇다. 그는 잔인한 처형 방법 때문에 많은 원성을 들었다. 특히 나무를 깎아 만든 날카롭고 긴 꼬챙이로 산 사람의 몸통을 꿰뚫는 것을 가장 즐겼다. 식사를 하면서 포로가 꼬챙이에 꿰어진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루마니아 말로 체페슈는 가시 또는 꼬챙이라는 뜻이다.

 

톱카프 궁전의 건물.

결국 드라큘라라는 이름과 피를 즐기던 괴벽이 합쳐져 Bram Stoker의 소설 드라큘라’(1897)의 모델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은 역사 얘기가 너무 길었나? 돗자리 말 듯 상념을 둘둘 말아들고 궁전을 나온다. 관람객은 여전히 정원 곳곳을 그득 채우고 있다. 그들이 타고 온 유람선은 오늘 밤 이스탄불에서 머무나 보다. 나오는 길에 오랜만에 만난 훌리아에게 궁금하던 걸 묻는다.

오늘은 저렇게 차도르 입은 사람들이 많지? 전부 터키 사람들이예요?”

아뇨. 터키 사람들은 저렇게 안 입어요. 두바이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일 거예요.”

그렇구나. 저들 역시 유람선의 승객인 모양이다. 복잡한 톱카프 궁전에서 나오니 세상이 전부 한가해 보인다. 걸음을 재촉해 그랜드 바자르로 향한다. 꼭 가보고 싶었지만 아직 인연이 안 닿았던 곳이다. 톱카프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다. 어지간한 명소는 걸어 다닐만한 거리에 모여 있다는 점도 이스탄불 관광의 장점이다. 먼저 그랜드 바자르 입구에 있는 개인 환전소에서 돈을 바꾼다. 대도시는 유로화가 통용되지만 지방에는 터키 리라가 필요한 곳이 많다. 환전은 유로화나 달러 모두 가능한데, 한꺼번에 100달러 이상이 돼야 바꿔준다고 한다. 별 이상한 원칙이 다 있네. 환전해주는 돈의 배분도 자기들 입맛대로다. 예를 들면 50리라 두 장, 5리라 몇 장주는 대로 받아야한다. 한국에서 환전을 해가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리라화를 바꿀만한 곳이 거의 없다. 아무튼 실탄도 장전했으니 장 구경을 해보자.

 

그랜드 바자르 입구.

바자르 안에는 이런 골목이 65개나 있다.

 

 

바자르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식량을 의미하는 아바와 장소를 의미하는 자르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식량을 교환하던 곳이 바자르의 원조인 셈이다. 그랜드 바자르는 그랜드라는 단어답게 담과 문, 지붕을 완벽하게 갖춘 거대한 옥내(屋內)시장이다. 바자르 입구에서 고색창연한 문장(紋章)을 발견한다. 문장 안에 창이나 도끼도 있고 저울도 보이고복잡해 보이는 게 사연이 많을 것 같다. 그 밑에는 KAPALIÇARSI라고 쓰여 있고 또 옆으로 1461이라는 숫자가 있다. 맨 아래에서 드디어 GRAND BAZAAR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원래의 바자르 건물은 비잔티움 제국 때 세워졌는데 메흐메드 2세가 1461년에 확장했다고 한다. 1461이라는 숫자가 바로 그 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1701년과 1894, 1954년 등 네 차례나 큰 불이 났지만 시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3700m²의 면적에 65개의 골목과 4,000개의 점포가 들어선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했다. 얼마나 미로처럼 복잡한지 골목 하나 삐끗 잘못 들어서면 국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바자르 내에는 물건을 파는 가게뿐 아니라 식당과 카페 등 온갖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모두 27개의 문이 있는데 밤에 문을 잠그면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다. 바자르 입구에 들어서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진열된 상품도 가지각색이다. 그랜드 바자르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은 말할 것도 없고 카펫, 가죽제품, 수공예품, 각종 그릇, 동으로 만든 찻잔, 가죽의류, 모피류, 액자에 든 그림, 로쿰이라 부르는 터키 과자에구, 숨 차라. 차라리 없는 걸 찾는 게 낫지.

 

그랜드 바자르 안의 보석가게.

그랜드 바자르에서 파는 각종 그릇들.

가장 많은 건 역시 보석가게. 온갖 귀금속이 조명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크고 작은 금팔찌들을 수백 개 진열해놓은 가게 앞에서는, 보석에 별 관심이 없는 나까지 황홀해진다.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자랑거리가 카펫. 카펫의 발상지는 페르시아가 아닌 터키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유목민들이 이동식 천막을 칠 때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여성 동행자와 함께 보석가게 앞을 지나는데 주인이 한국말로 소리친다.

아주머니, 많이 싸요.”

아주머니? No! 아가씨!!”

내가 농담으로 받자 연신 아가씨? 아가씨?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이 아저씨, 결국 수정안을 내놓는다.

언니!! 많이 싸요.”

흐흐, 참말로. 웃어야겠지? 우리말이 튀어나오는 걸 거 보니 한국 사람도 많이 찾아오나 보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랜드 바자르야말로 외국인들에겐 필수 관광코스 중 하나다. 이곳은 흥정도 가능하다. 하긴 시장에서 흥정 빼놓으면 무슨 재미. 닳고 닳은 상인들에게 관광객쯤이야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겠지만, 어차피 깎을 걸 감안하고 부르는 값이니 밀당’(밀고 당긴다는 뜻을 모르는 분은 없지요?)의 재미를 즐겨볼만 하다. 시간과 노력에 따라 엄청 깎을 수도 있다는데, 나는 그 맛을 못 보고 말았다. 살 물건이 있어야지. 나 같은 여행자야말로 각 나라 시장의 입구마다 공적이라는 수배 전단이 붙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물건을 팔기보다는 카메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로쿰 가게 사장님(?)

한글로 쓰여진 '착한 가게'

이런 친구가 왜 안 나타나나 했다. 터키 전통과자인 로쿰 가게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는데 잘 생긴 청년 하나가 내 카메라에 시선을 들이민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물건 팔 생각을 분실한 지 오래다.

“Oh, canon! canon! My camera is Sony. Your camera is wonderful.”

처음에는 노래의 한 대목인 줄 알았다. 어찌나 운율이 잘 맞는지. 그래, 네 카메라 소니야. 그런데 내가 언제 물어봤어? 터키 청년들은 DSLR 카메라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다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아마 일종의 유행이 아닐까. 돈을 벌어 사고 싶은 품목 1호가 카메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크로드의 종착지란 상징성에서라도 그랜드 바자르는 꼭 들르고 싶던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나와 궁합이 척 들어맞는 곳은 아니다. 너무 규모가 크고 깔끔하다. 내가 좋아하는 시장은 말 그대로 난전이다. 시끌벅적 뒤죽박죽. 정이 강물처럼 흐르고 무질서 자체가 삶의 활력이 되는 곳. 터키에도 그런 시장이 많다. 서너 골목 탐색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온다. 바자르 밖의 좁은 골목이 더 재미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중에 반가운 글씨를 만난다. 나자르본주나 팔찌 같은 장신구 가게 진열대에 한글로 써놓은 착한 가게’. 장삿속이긴 하겠지만 기분이 좋다. 착한 가게 맞네요. 돈 많이 버세요. 오늘 저녁엔 이스탄불을 떠나 말라티아로 간다. 돌아오는 날 반가운 해후를 위해 마음 한 자락 놓고 가야겠지.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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