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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연재하던 ‘터키 그 속살로 들어가다’가 [이호준의 터키기행2]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블로그의 자료들은 출판을 위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단 전재,배포,복사를 금합니다. 개인 연락사항은 방명록에 남겨두시거나 sagang@seoul.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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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짚'에 해당되는 글 1

  1. 2008.11.03 [사라져가는 것들 83] 짚신8
2008. 11. 3. 11:01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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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돈 벌겠다고 할 일인가? 배우지 못하고 그나마 아는 게 이 짓이니….”
전남 순천에서 만난 짚신장이 김정각(76) 노인은 돌부처처럼 무심한 얼굴로 짚신 삼는 일을 이야기한다. 그 와중에도 노인의 손과 발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두 엄지발가락에 새끼줄을 걸어 팽팽하게 당기고 짚을 끼워 넣고…. 짚신 바닥을 삼을 땐 대개 신틀을 사용하는데 노인에게는 허리에서 두 발까지가 훌륭한 신틀이다.
“이런 일은 그저 잠깐 구경이나 하고, 젊은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야 돼. 공부도 많이 하고….”
“그래도 어르신 하시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데요. 이제 어디 이런 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나요?”
“허긴 그렇지. 우리네가 죽으면 누가 이런 걸 하겠나. 요즘 젊은이들이야 가르쳐줘도 못하는 것이니….”
노인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무르는가 싶더니 잘 간추린 짚을 한 가닥 빼어서 던져준다.
“이 걸로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걸 한번 꼬아봐”
짚신을 삼는 부속품인 신총을 균일하게 꼬아놓았는데 얼마나 정교한지 보통 숙달되지 않고는 흉내도 못 낼 것 같다. 아무리 애써 봐도 모양이 안 나온다. 노인이 오목한 볼로 헐헐 웃는다.
“대학은 나왔는가?”
“예”
“그럼 됐어. 대학 나온 사람은 그런 거 못해도 돼”
노인의 포원은 배움과 돈에 있는 게 분명하다. 하긴 언제 이 땅에 숨어있는 장인들이 제대로 대접받으며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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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하나 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여. 이 짚의 길이가 조금이라도 길거나 짧으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거여. 균형이 척하고 맞아떨어져야 된다는 거지.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이 있던가?”
노인의 말이 짚신을 신는 것에 대한 것인지, 세상살이를 일컫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사는 게 그렇지 않던가. 길거나 짧지 않게,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야말로 진정 풀기 어려운 숙제인 것을. 이 애기 저 얘기 끝에 비슷한 일을 하는 한 노인의 근황을 묻는다.
“그 양반 버~ㄹ써 가셨어”
언젠가 다가올 자신의 앞날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듯, 죽음을 알리는 노인의 목소리에 허무가 백태처럼 끼어있다. 그 허무가 제멋대로 번식하더니 시퍼렇게 멍든 가을 하늘이 허무로 가득 찬다. 그래, 그렇지. 한 때 꽃처럼 피어나던 것들은 서둘러 저물고, 눈 깜짝할 새 세상을 떠난다. 따라다니는 발걸음보다 사라지는 것들이 늘 한발 먼저다. 사람도 사물도 마찬가지다. 찾아가 소재를 물으면 고개를 내젓기 일쑤다. 평생 지푸라기와 함께 살아온 한 사람은 떠나고, 떠난 이의 소식을 듣는 나그네의 가슴은 허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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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은 볏짚으로 삼은 신발이다. 물론 그걸 신는 사람이 없으니 신발이라기보다는 장식물쯤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다. 짚신이 제 자리를 찾아 발에 신긴 것을 볼 수 있는 건, 사극이나 격식 차린 장례식 또는 농악놀이‧풍어제‧굿거리밖에 없다. 하지만 짚신만큼 이 땅의 백성들과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도 드물다. 기록에 의하면 짚신의 역사는 약 2천여 년 전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요즘이야 벼라 별 소재로 만든 신발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나마도 조금 신다 싫증나면 아낌없이 버리는 세상이라 짚신 따위가 소중해 보일 리 없지만, 과거에는 누가 뭐래도 신발의 제왕이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짚신을 신었다. 짚신의 장점은 재료가 되는 짚을 가까이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별다른 도구 가 없어도 쉽게 만들 수 있다는데 있다. 물론 높은 벼슬아치와 부자들은 비단이나 가죽으로 만든 태사신(남자)이나 당혜‧운혜(여자)를 신기도 했겠지만, 어느 시대나 볕뉘를 쪼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그치는 법이다. 또 그들 역시 먼 길을 갈 땐 짚신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속절없이 떠도는 나그네나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 이 장 저 장 떠도는 장사치들을 상징하는 게 짚신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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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백성들은 어지간하면 짚신을 삼을 줄 알았다. 머슴들은 겨울이면 사랑방에 모여앉아 새끼를 꼬거나 짚신을 삼았다. 그러나 농사를 짓지 않는 한양 도성에서는 짚신을 사서 신었다. 따라서 신발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이런 가게에 짚신을 공급하는 이들은 늙거나 병들어 농사일을 할 수 없는 사람, 또는 바늘 하나 꽂을 땅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값이 쌌기 때문에 짚신을 삼아 돈을 번다는 건 애당초 꿈꾸기 어려웠지만,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교적 손쉬운 게 짚신삼기였다. 조선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짚신 삼는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선조 3년(1570) 영남 지방에 기근이 들었는데, 토정 이지함이 돌아다니며 보니 빌어먹는 백성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을 지어 유민들을 수용하고 그들의 솜씨를 보아가며 이런 저런 수공업을 가르쳐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 주었다. 그나마도 재주가 못 미치는 사람에게는 볏짚을 가져다주고 짚신을 삼으라 하고, 그렇게 만든 물건을 내다 팔아 연명하도록 했다.’ 이처럼 짚신 삼기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생존의 방편이 되기도 했다. 짚신전은 보통 길목 주막거리에 있기 마련이었다. 나그네들은 주막에서 국밥 한 그릇과 막걸리 한잔으로 허기를 끄고 짚신전에서 신발을 바꿔 신고 먼 길을 떠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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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한 짝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새끼줄을 가늘고 길게 꼬는 것이 맨 첫 번째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네 개의 줄을 신틀에 걸어(신틀 대신 허리에 매고 두 엄지발가락에 걸기도 한다) 한 매듭씩 신을 삼고 이를 곱게 다듬어 뒤축을 앉힌다. 그 다음 총과 돌기총을 꿰고 앞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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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을 꼼꼼히 감아서 골을 메운 뒤 망치 같은 것으로 때려 모양을 잡는다. 매듭으로 크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다. 짚신은 보통 신바닥과 신날을 같은 재료로 만들지만, 다른 재료를 쓰기도 한다. 바닥에서 직접 신날을 뽑지 않고 다른 신날을 대서 만든 것을 ‘단총배기‘라고 부른다. 신이 다 만들어지면 10켤레씩 둥그렇게 묶는데 이를 한 죽이라 한다. 짚신의 숨겨진 미덕은 구별이나 차별을 하지 않는데 있다. 우선 크기의 차이만 있지 여자용 남자용을 구별하지 않는다. 총을 가늘게 해서 곱게 만드는 여자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이 구별이 없는 원칙은 노인과 젊은이, 양반과 상인의 짚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다만 아이들의 것은 신총에 물감을 들여 주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일부의 호사일 뿐이었다. 왼쪽과 오른쪽의 구별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발에 닿는 대로 꿰차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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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짚신은 적당히 신다 버려도 별로 아까울 게 없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짚신도 짝이 있다’ ‘헌신짝 버리듯 한다’는 말로 ‘하찮은’ 것의 대표로 만들었을까. 하지만 옛 사람들은 그런 짚신도 그냥 버리지는 않았다. 신다가 떨어져 못 쓰게 되면 거름으로 만들어 새 생명을 키우는데 썼다. 그런 사례를 적어놓은 기록도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 허균은 농사법에 관한 정보를 수록한 교양서 한정록(閑情錄)에서 “버리는 짚신을 외양간에 넣어 소의 똥오줌에 썩혔다가 마늘을 심는데 거름으로 넣으면 마늘이 굵게 자란다.”고 소개하고 있다. 신이 닳아서가 아니라 싫증이 나서 버리는 요즘, 그런 이야기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젠 누구도 짚신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짚신을 삼는 기술도 맥이 끊어질 처지에 있다. 경남 하동 신기리 등 몇몇 곳에서 아직도 짚신을 삼아서 팔지만, 그 역시 젊은이들의 손으로 면면히 이어질 일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 짚신을 삼는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짚신 역시 사진 속에서나 만나게 될 것이다.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누구의 발에도 짚신이 신겨져 있지 않지만,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오면서 쌓은 정은 아직도 이 민족의 핏속을 흐르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posted by sa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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